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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성탄절을 하루 앞에 두고 아기 예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가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넘치기를 우리를 위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이스라엘 안에는 여러 도시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예루살렘이 있었고 여리고, 가버나움, 가이사라 빌립보, 베다니, 엠마오, 벳세다, 그밖에도 중요한 도시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은 중요한 도시 축들 가운데 들지 못하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가 예언자는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5: 2),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라고 베들레렘이 작은 마을임을 먼저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큰 성읍이 아닌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시게 했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이라는 이름의 뜻은 "떡집"입니다. 수원에서 십리쯤 떨어진 곳에 병점(餠店)이란 곳이 있습니다.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병점리인데 병점을 한글로 풀면 떡집이 됩니다. 예전에 수원에 볼일이 있어서 오는 사람들이 여기까지 와서는 "아, 다 왔구나! 이제 좀 쉬어가야겠다" 하면서 떡을 사 먹었기 때문에 이곳 이름이 병점이 되었다고 합니다. 베들레헴도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10Km 못 미친 곳인데 같은 이유로 떡집이 되지 않았나 혼자서 짐작해 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십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을 위한 떡집인 베들레헴에서 생명의 떡인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은 아주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인 생활과 육신의 떡을 위한 이 세상에서의 삶이 우리의 믿음 안에서 하나로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떡집인 베들레헴에서 나신 생명의 떡인 예수님을 믿으면서 사는 것은 육신을 위한 떡을 취하면서 동시에 영적인 양식을 취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한다는 진리가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에서부터 벌써 시작이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가장 큰 이유가 됩니다.
베들레헴은 역사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난 곳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베들레헴 길에 장사지냈습니다(창35: 19).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어서 다윗과 관련된 많은 일들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사무엘에 의해 왕으로 선정되어 기름부음을 받습니다(삼상16: 13).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는데 베들레헴은 불레셋 사람들이 점령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마시고 싶어했습니다. 다윗이 충성스러운 세 용사가 블레셋 진영을 돌파해서 그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왔습니다. 다윗은 "이것은 세 용사의 피로다"하면서 그 물을 마시지 않았습니다(삼하23: 13∼17).
이밖에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베들레헴은 작은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구약 성경 여러 곳에 이름이 자주 나옵니다.
이렇게 유서 깊은 곳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베들레헴에 태어나셨다, 이 것이 예수님이 다른 곳에 태어나지 않고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는 것은 또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메시아는 으레 예루살렘이나 잘 알려지고 화려한 곳에서 태어나리라고 믿었습니다. 동방박사들도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해 찾아오는데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고 메시아이니까 당연히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실 줄로 알고 예루살렘에 가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 때문에 헤롯 왕과 유대인들이 듣고 소동을 일으키고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들이 다 죽은 참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의 예측을 깨뜨리고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지금도 낮은 곳, 천한 사람들, 보잘 것 없는 곳, 알려지지 않는 사람들에게 오십니다.
오늘의 본문이 들어 있는 룻기는 예수님이 탄생하기 1,400년 전쯤인 사사시대에 베들레헴에서 있었던 일, 룻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베들레헴에 돌아와서 보아스와 결혼하기까지의 일을우리에게 잘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왜 다른 곳이 아니고 베들레헴에 탄생하셨는가, 오늘 예수님은 어떤 곳에 오시는가를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은 예수님은 인간들의 고달픈 삶의 현장 한 가운데 오셨고 지금도 오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룻기 1장을 봅니다. 1절에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사사 시대는 평안한 시대가 아닙니다. 이방 부족들이 자주 쳐들어와서 괴롭혔습니다. 사사들이 일어나 그들을 물리쳐서 짧은 평화를 누리는가 싶으면 또 다른 이방부족이 쳐들어와서 압제를 했습니다. 전쟁과 압박이 이어지던 때였습니다.
그 위에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떡집인데 떡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엘리멜렉이 가족을 이끌고 베들레헴을 떠납니다. 교회에 생명의 떡인 말씀이 떨어지면 안 됩니다.
이 짧은 한 절에서 우리는 굶주림의 비명을 들을 수 있고 고통의 탄식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이스라엘 사람이 고향을 떠나 이방인들이 사는 모압 지역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목회에서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가 아파트 평수 줄여서 이사한 집 심방 가는 것과 부촌으로 알려진 동네에 살다가 그렇지 못한 동네로 이사간 집 심방 가는 것입니다. 그런 집 심방 가면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고 우울하고, 무슨 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고 그렇지요. 그런 집에 심방 갈 때는 기도를 많이 하고 떠나게 됩니다.
엘리멜렉 일가가 모압으로 이주한 것은 그 것보다 더 좋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모압은 전통적으로 사이가 나빴습니다. 이런 모압 지방에 가서 산다는 것은 위험과 천대를 각오한 일이었습니다. 정말 죽지 못해 가는 길이었습니다. 마치 살기 위해 탈북의 길에 오르는 북한동포들과 같은 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베들레헴의 형편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더 쓰라린 일이 그로부터 십 년 뒤에 벌어집니다.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지방에 가서 잘 살았으면 좋겠는데 반대로 되었습니다.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이 죽습니다. 홀로 된 시어머니와 역시 홀로 된 두 며느리만 남았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며느리 하나는 모압 땅에 남고 둘째 며느리 룻을 데리고 돌아옵니다. 아마도 거지 행색을 하고 돌아왔을 것입니다.
룻기 1장 21절을 보면 나오미는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모압 땅으로 떠날 때는 흉년을 만났지만 그래도 이민 보따리가 제법 두둑했었는데 이제 그야말로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실패한 귀향, 실의의 귀향, 수치스러운 귀향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나오미가 돌아왔다!"고 하자 나오미는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불러 달라"고 합니다. 나오미는 희락이라는 뜻이고 마라는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내게는 즐거움이 없다. 내게는 고통만 남았다' 이런 비통한 마음, 자기 학대의 마음, 자포자기의 마음이 이 말에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평안이 없고, 굶주림에 시달리고, 남편과 아들을 잃고 돌아오고, 고통스럽고 고달프고 수치스러움이 뒤엉킨 땅 베들레헴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삶의 고달픔이 있습니다. 정치와 사회의 혼돈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지난 주일 후반부에 저희 교회에 슬픔을 당한 가정 셋이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는 슬픔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나오미와 같은 탄식이 있습니까?
다른 곳에 오시지 않고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예수님은 오늘 바로 그 가운데 오심을 아시기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은 예수님은 자비의 땅에 오셨고 지금도 오신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어느 성경 주석가는 다윗의 세 용사가 다윗을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베들레헴 성밖 우물 물을 길어온 일을 두고 베들레헴은 충성의 동리이고, 선지자 미가가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할 것을 예언한 일을 두고 베들레헴은 약속의 동리이고, 이렇게 베들레헴에 여러 가지 이름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헌신의 동리, 계시의 동리, 이런 이름들입니다.
룻기 2장의 기록에 근거를 두고 우리는 베들레헴에 자비의 동리라는 이름을 하나 더 붙일 수가 있습니다.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보아스가 왜 밭에 나왔겠습니까? 감독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감독하러 나온 사람은 잔소리부터 하게 마련입니다. "아니 이 것밖에 베지 못했소?" "지금까지 뭐 했소?" "저기는 왜 저렇게 많이 남겨 두었소?" "이렇게 처삼촌 묘소 벌초하듯 할거요?" "이거 너무 농땡이 부리는 것 아니오?" "이렇게 하면 품삯을 깎을 수밖에 없소!"
그런데 보아스는 축복부터 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축복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축복 받기를 원하는 대상에게만 축복을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축복을 하면 그 축복이 반드시 이뤄진다고 믿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는 축복의 말 가운데서도 가장 큰 축복의 말입니다.
보아스는 일꾼들이 진심으로 축복 받기 원하는 마음으로 이 말을 했을 것입니다.
일꾼들은 무엇이라고 화답합니까?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요즘 말로 하면 노사화합의 극치입니다.
보아스는 유력한 자입니다. 보아스라는 이름의 뜻은 "부호"입니다. 돈 많은 유력한 사람에 대해서는 반감을 갖기 쉽습니다. 보아스가 평소에 일꾼들에게 잘 해 주었기 때문에 일꾼들도 이렇게 화답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 노동현장에서 노사대립의 격렬한 구호 대신에 이런 아름다운 축복과 화답의 장면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더 아름다운 일이 그 다음에 벌어집니다.
보아스가 보니까 웬 젊은 여인 하나가 자기의 밭에서 이삭을 줍고 있습니다. 누구냐고 물어보니까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라고 합니다.
이방인을 멸시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통적인 사고 방식대로 하면 보아스는 "이방인이 재수 없게 왜 내 밭에 들어와 있는 거야?"했어야합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룻에게 다른 밭으로 가지 말고 여기서 이삭을 줍고 목이 마르면 여기서 물을 마시라고 합니다. 룻에게도 축복을 베풉니다. 2장 12절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우리 나라 기업주들이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외국인 근로자 인권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아스는 한 걸음 더 나가서 룻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일꾼들에게 곡식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룻이 많은 이삭을 줍게 해 주었습니다.
베들레헴을 자비의 동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 이해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남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바랍니다. 그 자리에 예수님이 오십니다.
자비를 베풀 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비와 사랑을 베푼 사람에게 예수님이 오셨다는 설교 예화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어느 예수 잘 믿는 집사님이 걸인 한 사람을 정성껏 대접했는데 그 날 밤 꿈에
예수님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아무개 집사야, 오늘 낮에 네가 나를 잘 먹여주고 입혀주고 따뜻하게 대해 주어서 참 고맙다"
"아니 예수님, 나는 예수님을 만난 일이 없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 먹을 것을 대접하고 옷을 드린 일이 없습니다."
"아무개야, 네가 오늘 낮에 초라한 걸인 하나를 정성껏 대접하지 않았느냐? 그 걸인이 바로 나였느니라"
성탄절은 이런 예화들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는 날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구체적으로 그리고 크게 표현된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 대한 사랑과 자비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보내는데 어느 곳이 적합할까 살피다가 보아스에 의해 이 아름다운 자비가 행해진 땅 베들레헴이 적합하다고 여겨져서 예수님을 베들레헴에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성탄절에 누가 나에게 무슨 선물을 할까 기대를 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와 함께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베풀까 하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마음에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셋째,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은 질서를 존중하는 곳에 예수님이 오셨고 오신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룻기 3장에서 보아스는 룻에게 호감을 품었고 룻과 보아스는 가까운 사이가 됩니다.
4장에서 보아스는 룻과 결혼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무리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풍습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죽으면 가까운 친척이 죽은 사람의 기업을 이어받고 죽은 사람의 아내와도 결혼할 우선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그 것을 양보해야 그 다음 사람이 그런 권리를 이어받을 수 있었습니다.
보아스도 룻의 사아버지인 엘리멜렉의 친척이 되는데 더 가까운 친척이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그 사람을 부르고 장로 열 명을 청해 증인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엘리멜렉의 기업을 이어받을 우선권이 있는데 이어 받겠느냐? 당신이 이어받지 않으면 내가 이어받겠다"고 묻습니다. 그 가까운 친척은 포기하겠다고 합니다. 엘리멜렉의 유족들을 보살펴야 하는 것이 부담으로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권리를 양보할 때는 신을 벗어 주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 절차도 다 밟았습니다.
룻기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 가운데 하나가 당시 이스라엘의 이런 풍습을 자세하게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이 절차를 다 밟아서 룻과 결혼을 했습니다.
질서를 존중했고 지킬 것을 다 지켰습니다. 일이 원만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 가문에서 성군 다윗이 출생했고 예수님이 탄생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질서입니다. 하나님은 이 질서를 지키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랑이신 하나님은 사람들을 심판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두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 대신 벌을 받게 하셨고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했습니다. 질서와 사랑이 조화를 이뤘습니다.
한 두 번 사용한 일이 있는 예화입니다. 수지 옆에 있는 성남은 3,40년 전에 도시 빈민들을이주시켜 시작된 도시입니다. 처음 이름은 광주 대단지(廣州大團地)였습니다. 처음에는 형편이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젊은 목사님 한 분이 제대로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청소년들을 위해 이 곳에 공민학교를 세웠는데 무허가 건물로 세웠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판사가 20만 원인가 그 당시로서는 굉장히 부담이 되는 벌금형을 언도했습니다. 언도를 한 다음에 "목사님 잠깐 제 방에 들리십시오"하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들렸더니 판사가 기다리다가 책상 서랍을 열고 봉투를 하나 꺼내주면서 "목사님, 법질서를 어겼으니 법에 따라 처벌을 받으셔야합니다. 그러나 좋은 일 하시느라고 그랬으니 이것 가지고 벌금 내십시오", 봉투를 열어보니까 벌금보다 더 많은 돈이 들어 있더라고 합니다.
판사는 이런 방법으로 법도 지키고 사랑도 표현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배운 것 같습니다.
저희 교회에 이제 사법연수원을 졸업하고 법관의 길에 들어서려는 자매가 한 분 있습니다.
또 고시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에 입학하게 된 청년도 생겼지요. 다 기쁜 일입니다.
지난 3월에 서울 동대문 옆에 있는 중앙성결교회에서 학생들을 위한 집회가 있었습니다.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된 분들의 모임인 연목회(延牧會)와 고려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된 분들의 모임인 고목회(高牧會)가 신입생들을 환영하는 예배였는데 이 자매가 간증 순서를 맡았습니다. 좋은 간증으로 학생들에게 감명과 도전을 주었습니다.
이 예화의 주인공인 목사님도 그 집회에 참석하고 저도 참석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마침 그 목사님의 차에 편승해서 오게 되었습니다. 차 속에서 그 자매에게 이 분이 내가 설교할 때 말한 그 예화의 주인공이라고 말하고 자매님도 그런 법관이 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세상은 질서가 많이 깨졌습니다. 정치현장, 노사현장, 도로, 무질서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어느 공기업의 노조원들이 명동 성당에서 며칠 농성을 했는데 농성을 끝낸 자리에 쓰레기가 산을 이룬 사진이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고 있습니다. 보아스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질서를 바로 잡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베들레헴은 여행객들로 혼잡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여관은 빈방을 찾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오늘 저녁 교회학교 성탄발표회에서 중고등부가 "빈 방 있습니까?"라는 연극을 하는데 이 연극은 성탄절이 되면 모든 교회에서 공연하는 아주 대표적인 성탄연극입니다.
마구간에는 그래도 고요함이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손에 비파를 들고서 "평상의 왕이 오시니 다 평안하여라" 찬송할 때 소란하던 세상이 고요해졌습니다. 예수님은 그 때 거기에서 태어났습니다.
교회는 세상에 평안과 질서의 모범을 보여주는 곳이 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을 조용하게, 질서 있게 만드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기 전에 1장의 몇 군데를 더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이 있었습니다. 13절, 여호와께서 나를 치셨다, 20절, 하나님이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다, 21절, 하나님이 나를 징벌하셨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감정 가운데 제일 무서운 절망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절망을 안고 돌아온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남이 모르는 절망감이 있습니까? 자포자기의 마음이 있습니까?
그런 분에게 예수님은 찾아오십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은 고달픈 삶의 현장 가운데, 자비를 베푸는 현장에, 질서가 있는 곳에 찾아 오셨고 오고 계십니다.
그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저에게, 이 교회에, 갈등과 분쟁과 탄식소리 높은 현장에, 특별히 베들레헴과 정황이 비슷한 북한 땅에 찾아오는 성탄절이 되어야겠습니다.
출처:목양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