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명을 사랑하라
동산스님
약장제거무비초 (若將除去無非草)
호취간래총시화 (好取看來總是花)
베어 버리자니 풀 아닌 것이 없고
어여삐 보니 꽃 아닌 것이 없구나.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의 왕사를 지낸
무학대사가 어느 날 왕을 만났습니다.
당시 이성계는 아들 방원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함흥지방에 가서 칩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워낙 화가 나서 한양에서 차사가 오면
모조리 죽여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한 번 간 뒤 소식이 없으면 ‘함흥차사’하는데
이 말은 그래서 생겼다고 합니다.
그런 이성계에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무학대사가 위로차 들렀습니다.
이런저런 지난 이야기를 하던
이성계가 마음이 풀렸는지
무학대사와 농담을 시작했습니다.
“내가 보기에 대사의 얼굴이 꼭 돼지처럼 생겼습니다.”
“그렇습니까?
제가 보기에 태상왕의 용안은 부처님처럼 생겼습니다.”
“아니 대사. 우리 서로 농담을 하자고 해서
내가 좀 심한 말을 했는데,
대사는 어찌 나를 보고 부처님 같다고 하시오?”
이에 무학대사가 한 마디 했습니다.
“예. 돼지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돼지로 보이지만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부처님으로 보이는 법이지요.”
두 사람의 농담은 여기서 끝났지만
무학대사의 이 말 속에는
우리가 다른 생명을
왜 존중하고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들어있습니다.
무학대사가 말했듯이 부처의 눈으로 보면
일체 중생은 부처님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비록 지금은 중생이지만 미래에는 반드시
부처님이 되실 분들입니다.
그래서 《법화경》상불경보살품에는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이 일체중생을
존경하고 예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상불경이라는 이름은
항상 남을 가볍게 보지 않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상불경보살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을 존경하고 예배합니다.
당신은 미래에 반드시 무상정등각을 이루어
부처님이 되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남을 가볍게 보지 말아야 하거늘 하물며
남의 목숨을 빼앗는 살생을 한다면 그 죄업은 한량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무엇보다도 생명의 존중을 강조하고
모든 계율의 제1조도 불살생(不殺生)으로 정해 놓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살생을 하지 말라는 것에는
두 가지 깊은 뜻이 들어있습니다.
첫째는 무엇보다도
모든 생명을 부처님의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죽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모든 목숨은 다 똑같은 값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릇 생명 있는 모든 존재는
자기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아까워할 줄 압니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허술하게 태어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마땅히 그 존재가 있어야 할 가치가 있기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비심을 베풀고
어떤 생명이나 죽이거나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렇게 살생을 금할 뿐만 아니라
불교에서는 적극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방생을 권장합니다.
방생이란 살아 있는 새나 짐승이나 그 밖의 동물들을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풀어 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오랜 세월 동안 지은 업보나
평소의 살행이나 여러 가지 악업을
참회하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옛날 인도에서는 아육왕이
모든 백성들에게
짐승을 함부로 죽이지 않도록 칙령을 내렸습니다
중국 양나라 무제는
많은 절과 탑을 조성하고 불경을 찍어냈으며,
스님들은 득도시키고 불법을 홍포시켰습니다.
그리고 수륙대재를 열어 방생법회를 크게 행하였습니다
몸소 육식을 금하고 나라 안에서
살생을 못하도록 명을 내렸습니다.
이후 방생법회는 크게 행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신라의 진흥왕도 불법을 실천함에
남다른 호법왕으로 면모를 보여 주었는데,
육식을 금하고 실제로 절에 들어가 출가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방생을 하는 것은 ‘생명의 존귀함을 깨우치고
공덕을 쌓아 일체중생에
자비를 베푸는 것’에 그 진정한 목적이 있습니다.
생명 존중사상은 불교의 가장 깊은 정신이며,
일체중생을 제도하려는
부처님의 서원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정월 보름이나 삼월 삼짓날에 방생법회를 합니다.
그러나 참다운 방생은
그저 법회에 동참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모든 중생의 고통을
제거하려는 노력을 곁들여야 참다운 방생이 됩니다.
잘 알다시피 우리는 단독적인 존재가 아니라
서로서로 의존해야만 하는 상호 의존적 관계이며,
인간은 자연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자연에 의존하고
자연의 일부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공업화로 접어들고
산업사회로 발전하면서
자연을 파괴하고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일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전문가들은 그 정도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하게
고려해야만 할 단계라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새 한 마리, 물고기 한 마리도 살려 주는 마음으로
자연을 아끼고 더 나아가
모든 우주의 생명을 존중하려는
불교의 방생정신은 참으로 소중하다고 할 것입니다.
방생의 정신은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살려내는 자비의 정신이며,
함께 살아가는 공동선의 정신이며,
고난과 두려움을 없애 주는 무외시(無畏施)의 정신입니다.
이런 정신을 실천해야 참다운 공덕을 지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어려움과 고통에서 허덕이는 이웃을 위로해 주고,
죽음 앞에서 무서워하는 생명을 살려 줄 때
우리의 공덕이 쌓여 복된 삶이 전개될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사미가 스승을 모시고
조그만 암자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스승은 이 사미의 목숨이 다 된 것을 알고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사미가 산길을 내려오다가 마침 장마 중에
나뭇더미가 냇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그것을 건져냈습니다.
그 나뭇더미에는 수많은 개미들이 들어있었습니다.
이 많은 개미의 목숨을 살려 준 공덕으로
사미는 생명이 연장되어 집에 갔다가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스승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스승은 그 인연을 관하고 그를 부지런히 공부시켜
훌륭한 도인으로 키웠다고 합니다.
이처럼 생명을 살려 주는 공덕이야말로 한량없는 힘이 있습니다.
인인구족천진불(人人具足天眞佛)
처처개현방광명(處處開顯放光明)
사람마다 구족하고 있는 참부처는
곳곳에 모습을 나타내 광명을 놓네.
인연법은 허망하지 않아 반드시 지은 업을 갚게 마련입니다.
내가 남의 생명을 해치면 언젠가는
나의 목숨이 위태롭게 된다는 것이 인연법의 철칙입니다.
이러한 인연법을 생각할 때 어찌 기어 다니는 미물인들
함부로 죽일 것이며
길가의 풀 한 포기인들 맘대로 뽑을 수 있겠습니까?
무릇 살고자 하는 생명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참다운 방생의 뜻이므로
우리는 가장 가까운 데서부터
방생을 실천하도록 해야겠습니다
바로 나 자신부터 이웃과 사회 속에서 자비를 실천하고
아무리 작은 미물이라도
결코 그 생명의 가치를 가볍게 보지 않을 때,
바야흐로 불법에 의해 극락정토가 실현되리라 봅니다.
자신의 생명이 귀하듯 남의 생명도 귀한 줄을 알아서
방생의 참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현대에 와서
생명에 대한 경시풍조가 만연되어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도둑질만 해도 무량겁으로 지옥고를 면할 수 없는데
도둑질을 하면서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살생은 미래의 부처님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어찌 두렵고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불자들은 주변에서
이런 어리석은 자를 깨우쳐
선행을 쌓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 선행이란 곧 방생입니다.
하루에 한 가지만이라도
생명을 살리는 방생의 선행을 실천하도록 힘써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공덕을 쌓아나간다면
그 공덕으로 ‘화중생련종불괴(火中生蓮終不壞)’
즉 불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게 되어
마침내 무너지지 않는 공덕이 될 것입니다.
산하내대지(山河乃大地)
전로법왕신(全露法王身)
산이며 강이며 이 세상 모두가
부처님의 알몸을 드러낸 것이로다.
다시 한 번 일러두노니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다 부처님의 다른 모습입니다.
그러니 함부로 죽이지 말고
서로 살리는 상생의 살림살이를 하시기 바랍니다.
모셔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