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에 도착하여 숙소를 찾아가는 갓길에는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이
차들로 꽉 차있어 무슨일인가 싶어 주변을 살피니 TV에서 보던 소싸움 경기장이 보였고 근처에
용암온천 호텔이 있었다.
청도에서 밀양을 거쳐 삼랑진 "효" 추모공원에
오는 도중 혹시나 볼 수 있을까 했던 "가오리 鳶이 나르고 있는 마을 풍경"은 보지 못했지만
추모공원 수목장에서 한 그루의 나무 아래 차례를 지내는 가족들을 보고서 설날이구나하고 느꼈다. 그런데 차례를 지내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니 슬퍼다기 보다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 것이었다.
나도 죽으면 수목장으로 마누라와 합장하도록
딸들과 의논해 봐야겠다.
그해 여름은 굉장히 무더운 날씨라 단칸방에 둘이 있기에 숨이 막혀 출산 예정일이 다 되어가는
영혜를 혼자 두고 친구 모임이 있는 진하 해수욕장에 갔다.
ㅇㅇ이 어찌 알고 영혜가 출산했다고 알려주어
달려갔더니 해주를 앉고 젖을 먹이고 있었다.
영혜가 미역국을 먹어야 하는 것도 알지 못하는 나에게 장모가
" 산모가 젖이 너무 많이 나오니 흘러나오면 모아 두어라 "라고 한다.
그날이 1977년 7월 17일 제헌절이었다.
그렇게 나는 영혜의 첫 출산의 고통도 함께 해
주지 못한 양심이라곤 없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팽이 였다.
내가 영남화력에 근무할 때 해주를 업고 비 오면 질퍽한 울산 병영 마을 길을 오고가느라 고생하던 마누라와 포데기에 싸여 고개를 뒤로 떨구고 졸고 있는 해주를 보고 반듯한 길이 나 있는 동네에서 사글세 하나 구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래도 해주는 집 앞에 사과 박스 위에 온 갖 모양의 형틀을 놓고 장사하는 뽑기 아줌마와 친하게 지내며 잘도 놀았다.
어느날 마누라가 " 오늘 해주가 옥상에서 떨어졌어요"라고 한다. 자세히 보니 별 탈 없어 보여
" 애들이 놀다 보면 그렇지"라고 했지만 위험에
노출된 환경을 어찌할 수 없어 안타까웠다.
그 후 원자력 사택에 입주하여 생활이 다소 안정되었을 때 해운데 극동 호텔 수영장에 갔는데
호텔 전속 사진사가
" 애야! 너 모델 좀 되어다오"라고 하니
재빨리 몸 매무새를 가다듬어 주는 마누라를 보고 이제 가장의 역할을 조금 한 것 같아 마음이 조금은 뿌듯했다.
해주는 핵광 유치원 때 연극 주인공도 하고,
초등학교 때에는 글짓기 대회에서 최우수상도
타고, 본부 체육대회 때 달리기 경주 때 응원한
기억이 생생한데 중학교는 학교 이름도 모르 겠으니 무관심 했는지, 회사 일이 바빴는지 특별한
기억이 없다.
고등학교 졸업식 때 처음으로 학교에 가보니 머리카락은 노란색이고 ,
함께 있는 친구들을 보니 공부에 전념한 것 같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만난 나와 같이 근무하는 54회 선배가
" 야 너 딸 참 이쁘게 키웠구나 "라고 해서
그러거니 했다.
대학 때 성적이 학점을 못 메꾸어 한 학기 등록금을 더 내어야 할 때에도
그럴 수도 있게거니 하며 쪼들려도 등록해 주었다.
냉엄하게 생각해 보니 내가 출산 때같이 있어주지 못한 애틋한 감정에 치우쳐 , 마누라가 걱정스러운 이야기를 해도 "그냥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놓아 두어라 " 라고 무시했다. 게다가 내가 여러곳으로 옮겨 다니다 보니 해주에게 엄한 훈육으로 다스릴 수도 없었다.
진주는 출산 예정일을 앞두고 해주때 처럼 분만시 같이 있어주지 못할까 걱정되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다. 출산 예정일이 지나자 의사가 유도분만을 권해 출산일이 정해지면 나도 함께 할 수 있겠다 싶어 동의했고 분만 후 바로 면회가 되어 입원실에 들어가니 진주를 안고 웃었다. 그날이 1981년 10월 24일 국제연합일(國際聯合日, United Nations Day)이다.
진주는 출산 후 머리 혹이 사그라지지 않았는데 의사는 아무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 했으나 마누라가 "대학병원에 입원 시키자"라고 하여
부산대학병원에 입원시키고 "이상 없다"라고
하여 집으로 데리고 왔다.
내가 제천에 근무할 때 조금이라도 나은 환경에서 공부시키기 위해서
마누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이 계신
서울로 이사를 했다.
진주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잦은 전학으로 친구와 자주 다투어 걱정은 했으나 마누라의 심성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라 막연하게 잘 견뎌내리라 생각했다.
나도 국민학교를 세 군데나 옮겨 다녀 매우 힘든 기억이 뇌리에 남아있는데 해주는 초등학교를
세 군데 , 진주는 네 군데를 다녀 걱정을 많이
했으나 해주는 변화된 환경에 잘 적응했고
진주는 부산에서 서울로 전학할 때 '촌놈'이라고, 서울에서 부산으로 전학 올 때'서울내기'라고 놀림받을 때 오히려 공부를 일등하므로 친구들의
부러움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때 진주는 H.O.T 열렬 팬이되어 공연 때 구경가겠다고 하니 마누라도 할 수 없이 공연장에 함께 가서 지켜봐야 했다.
내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보니 두 딸들에게
올바른 人性을 기르는데 절대 필요한 아비로서 해야 할 가정교육을 소홀하게 한 것이 대단히 안타깝다.
나는 쥐꼬리만한 봉급을 갖다주고 집안일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고집 센 딸 둘을 혼자서 키운다고 고생한 마누라에게 너무 미안하고 평탄하지 못한 환경에서 비뚤어지지 않고 잘 자라준 딸 둘에게도 고맙긴하다.
이처럼 딸 둘이 자기 뜻대로 하며 자라왔기에
결혼도 자기 뜻대로 하겠다고 하니
나도 마누라도 큰 실수 없이 자라온 딸 들이라
그것이 나쁠 것도 없다 싶어 딸 둘의 의사에 맡겼다.
두 딸의 결혼이 둘 다 자신의 가치를 자신이
정당한 평가를 내리지 못하고 한 결혼이라
생각되는 것은 딸 가진 아비의 마음이라 하겠지만 두 사위에 대한 솔직힌 감정을 드러내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마음에 들지 않는 마음도 事必歸正이다.
두 딸을 키우면서 나 자신이 아비로서 딸들에게 모범적인 행동을 보여 주었더라면 딸 둘이 스스로 자신을 정당하게 평가하여 지금보다는 더 나은
사람과 혼인하지 않았겠느냐라고 자책하는 것도 사실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아비가 못난 질하는 것을 보고자란 열등감이 딸 둘의 마음 한편에 도사리고
있어 자신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것이다.
살면서 느끼는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는 아마도 자식을 가르치는 일이라 여겨진다
부모 자식은 서로 가깝고 친해야 하는데 이게 바로 부자유친(父子有親)이다.
그런데 자식이 내 뜻과 달리 가고, 문제를 일으키면 삶의 재미가 없어 서로 가깝다고 여겨 자식을 가르치겠다고 한 말이 오히려 자식에게 상처를 주고 그로 인해 서로 멀어진다면 가르침은 그르침이 되고 만다
그렇기에 두 딸을 훈육할 엄두도 못내었지만
잘자랐으면 하는 마음은 여유 있는 부모보다 더욱 애절했다.
하지만 마누라가 가고 없는 지금 두 딸,두 사위의 도움으로 별 할 일 없이 잘 지낸다.
"人間萬事, 塞翁之馬 " 라고 마음을 달래니
그것도 탓만 할 일은 아니다.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에 영웅 호걸이 몇몇이며 절대 가인
이 그 뉘기며 雲霞春風은 未百年, 少年行樂이 片時春
아니 놀고 무엇 하리." Remember that this, too, shall pa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