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김남권 시인의 시집 『흰 것들은 모두 슬픈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삶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슬픔의 기원을 집요하게 찾아가는 시집이다. 이 시집에서 슬픔은 살아 있는 것들이 피할 수 없이 지니고 태어나는 생명의 조건이며, 상처를 통해서만 확인되는 존재의 흔적이다. 시인은 나무와 벌레, 새와 강, 눈과 바다, 아버지와 어머니, 가난한 사람들과 버려진 사물들을 바라보며 이 세계의 모든 생명 안에 깃든 오래된 아픔을 읽어낸다.
시집의 제목에 등장하는 ‘흰 것’은 순수와 결백함의 상징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흰쌀밥, 흰 눈, 흰 여자, 흰빛, 흰 가루로 이어지는 이미지들은 때로 가난의 기억을 불러오고, 때로 상실과 죽음의 냄새를 풍긴다. 시인은 흰빛 속에 감추어진 슬픔의 유전자를 들여다본다. 깨끗해 보이는 것들,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 구원처럼 다가오는 것들 안에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계보가 숨어 있음을 그는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시집의 흰빛은 눈부신 동시에 서늘하고, 맑은 동시에 아프다.
김남권 시인의 시선은 무엇보다 살아있는 것들의 슬픔을 향해 있다. 「오래된 나무」에서 마지막 숨이 남아 있는 존재들의 붉은 생명감을 읽고, 「피고인P告人」에서 벼와 맹그로브와 인간을 하나의 생명 연대 속에 놓으며, 「미안하다」에서는 속이 빈 나무 안에서 살아가던 애벌레들을 보며 인간의 폭력성과 무지를 돌아본다. 이때 시인은 나무의 몸속, 벌레의 눈동자, 강의 흐름, 바다의 심장 속으로 직접 들어가 그들의 숨과 통증을 함께 겪는다. 그의 시에서 생명 있는 것들은 아름답기 때문에 소중하면서 또한 아프고 위태롭기 때문에 더 절실하게 지켜져야 할 존재이다.
이 시집에는 가난과 유랑의 기억도 깊이 새겨져 있다. 흰쌀밥 한 그릇을 앞에 두고 객지 생활의 허기를 떠올리는 장면, 돌아갈 집이 사라진 사람의 막막함, 터미널과 여인숙과 시장 골목을 떠도는 사람들의 그림자는 김남권 시의 현실 감각을 이룬다. 그는 삶을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반대로 너무 절망적으로 보지 않는다. 배고픔은 배고픔대로, 외로움은 외로움대로, 수치와 욕망과 분노는 그것대로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그 거친 현실의 언어 안에서 인간에 대한 연민을 끝내 놓지 않는다. 이것이 이 시집의 중요한 미덕이다. 슬픔을 말하면서도 감상에 머물지 않고, 상처를 드러내면서도 자기 연민에 갇히지 않는다.
특히 이 시집의 자아성찰은 날카롭고 정직하다. 시인은 세계의 죄를 말하기 전에 자신이 살아온 시간과 몸의 기억을 먼저 묻는다.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진 존재인가, 나는 어떤 원소로 남을 것인가, 나는 누구를 다치게 하며 살아왔는가, 내 안의 흰빛은 과연 결백한가. 이런 질문들은 시집 곳곳에서 반복된다. 또한, 김남권의 시는 고요한 서정에만 머물지 않는다. 현실을 향한 분노와 정치적 발언도 강하게 드러난다. 독재와 폭력, 거짓과 혐오, 생태 위기와 인간의 탐욕을 향해 시인은 거침없이 목소리를 높인다. 이런 그의 목소리 밑바닥에는 생명을 훼손하는 모든 힘에 대한 저항이 놓여 있다. 시인이 분노하는 이유는 그가 아직 인간과 세계의 구원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흰 것들은 모두 슬픈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상처 입은 생명들의 시집이다. 동시에 그 상처를 통해 다시 살아갈 힘을 묻는 시집이다. 김남권 시인은 흰빛의 슬픔을 통해 생명의 어두운 계보를 드러내고, 그 슬픔을 외면하지 않는 자리에서 새로운 가치와 구원의 가능성을 찾는다. 이 시집을 읽는 일은 결국 우리 안의 흰빛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다. 순수하다고 믿었던 것, 결백하다고 여겼던 것, 아름답다고 지나쳤던 것들 속에 어떤 슬픔이 숨어 있는지 묻는 일이다.
목차
1부
오래된 나무/ 모래내 사거리/ 피고인P告人/ 본다/ 첫눈이 오기 전에/ 바다로 돌아가야 한다 /
등대는 눈물이 절반이다/ 하늘의 눈을 감기다/ 터미널/ 9시에서 2시 사이/ 업둥이/ 1004 버스/장미 여인숙/ 건원릉 가는 길/ 소년이 온다/ 고사리 장마/ 흰 번제/ 응암역 4번 출구
2부
2024, 자화상/ 붉은 첼로/ 한강이 얼었다/ 바퀴벌레 연대기/ 설舌, 설說 끓는/ 첫눈이 온다/
8시 25분/ 설화雪花/ 빨간 등대/ 부라보,콘corn/ 흰/ 울거야/ 칼국수 먹는 날/ 미안하다/
물질의 이유/ 집엔 주인이 없다/ 도마/ 모나리자의 미소
3부
쪽파/ 코리나의 경고/ 북새/ 평생 택시나 해 먹어라/ 옹이/ 작전명 ‘멧돼지 사냥’/
바람의 절벽에 매달린 눈물처럼/ 쇠꽃/ 샛강도 운다/ 검은 시계/ 봄의 말씀春雪/
수로, 그대의 무지개를 따라가다/ 2군 감독, 포수, 아버지/ 나는 천사가 아니다/
흉터암巖/ 붉은 닻/ 흰 것들은 모두 슬픈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비건非gun
4부
지평선의 달은 지지 않는다/ 매미가 운다/ 제비를 줍다/ 심장의 노래/ 허황옥이 수로에게/
거미/ 새들이 잠드는 시간/ 꿈을 꾸던 소녀가, 소녀에게/ 책의 복수/ 중력을 거부한/
어느 수요일/ 공중에도 길이 있다/ 바람꽃은 저물지 않는다/ 마음이 남았다/ 변산바람꽃/
뒤를 본다는 것은/ 아버지와 짜장면/ 세상의 첫 아침을 여는 네 개의 별빛/
사월의 벚꽃 소녀에게/ 관능적인 손/ 벚꽃 엔딩
해설 _ 바람의 절벽에서 그리는 자화상
이송희(시인, 문학평론가)
출판사 리뷰
작가의 말
다시 벚꽃 피는 계절에 시를 본다.
요 며칠 집 근처 백간공원에 나가면서 올해 핀 벚꽃을 실컷 구경하고 공원 벤치에 누워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책을 읽었다.
산책 나온 중년의 여인들은 벚꽃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고 나는 그들 속에서 꽃비가 흩날리는 투명한 소녀들의 미소를 발견했다.
일주일 사이에 꽃잎은 모두 떨어졌고, 그 자리에 연둣빛 새순이 돋아나 신록의 눈부신 물결로 가슴을 설레이게 했다.
해마다 봄을 다시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축복인가, 마른 나뭇가지에서 돋아나는 별빛들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향기로운 기쁨인가.
사방에 눈을 들어 오늘은 나를 향한 자연의 화두 하나 들어야겠다.
2026년 5월 초순
치악산 자락에서 봄을 반추하며.
추천평
김남권 시인의 이번 시집은 ‘피고인P告人이 기록한 책’이라는 서늘한 각성에서 시작하여, ‘바람의 절벽에서 그리는 자화상’으로 귀결되는 존재의 여정을 담고 있다. 그 중심에는 ‘붉은 첼로의 비명’과 ‘뜨거운 물의 꽃’이라는 두 갈래 물줄기가 흐른다. 이는 권력의 거친 발자국이 지워버린 생명들을 대신해 내지르는 저항의 소리인 동시에, 절망의 끝에서 길어 올린 재생의 몸짓이다. 시인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파괴의 불꽃인 백린白燐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생명을 살리는 원소인 인(P)으로 존재할 것인가. 비록 현실은 부서진 햇살처럼 날카롭고 시리지만, 시인은 그 파편들을 모아 ‘윤슬’ 같은 안식처를 마련한다. 이 시집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시인이 온몸으로 밀고 나간 정직한 노동의 기록이자, 부서진 햇살 아래서 비로소 마주하는 가장 고요한 안식의 풍경이다.
- 이승희 (시인)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89385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