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서울 성북구 정릉동. 사적 제208호. 조선시대. 조선 태조 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능.
출생-사망 | ? ~ 1396.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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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곡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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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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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강(康)씨이고 본관은 곡산(谷山, 또는 信川)이다. 황해도 곡산부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의 딸로, 이성계의 둘째 부인이 되었다. 곡산(또는 신천) 강씨 가문은 고려시대 때 세력있는 권문세족이었다. 이성계는 1361년 홍건적 토벌하였고, 1362년 원나라가 침입하자 동북면 병마사로 출병하여 이들을 대파하였다. 1370년 원나라 동녕부를 원정하여 공을 세우고 남해 일대 왜구를 수차례 토벌하면서 고려 수도 개성에 진출하였다. 많은 공을 세웠으나 지방 토호라는 출신에 한계를 느끼고 개성의 권문세족 배경이 필요했던 이성계는 강씨 문중의 세력 신장에 도움이 될 인물로 점찍은 강윤성에 의해 강씨와 정략적인 혼인을 한 것이었다.
이성계가 왕으로 즉위하자 현비(顯妃)에 책봉되어 왕후가 되었다. 이성계와의 사이에 방번(芳蕃)·방석(芳碩)의 두 왕자와 경순공주(慶順公主)를 낳았다. 신덕왕후는 자신의 집안 배경을 바탕으로 대담한 지략을 구상하였다. 이성계를 위험에서 구했으며 조선 개국의 지대한 공헌을 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다. 자신의 아들인 방석이 왕세자로 책봉되도록 애썼으며 이와 관련해서 방원과 갈등이 깊었다. 정도전과 합세하여 둘째아들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하였으나 1396년 8월 13일 방원이 일으킨 소란이 화근이 되어 화병으로 사망하였다. 1398년 왕위를 노리는 이방원이 일으킨 '제 1차 왕자의 난'으로 강씨 소생의 두 아들 방번, 방석(왕세자)과 사위, 반대파 정도전, 남은 등이 살해되었다.
처음에는 도성 안 황화방(皇華坊) 북원(현 영국대사관 )에 묻혔으나 태조 이성계 사망 후 이듬해인 1409년 2월 강씨의 묘를 도성 밖 양주(楊州) 사을한록(沙乙閑麓)으로 이장하였다. 이성계는 강씨 사망 후 실의에 빠져서 직접 능(정릉) 옆에 작은 암자를 짓고 행차를 조석으로 바쳤으며 1397년 1년여의 공사끝에 170여 간의 흥천사를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방원이 왕위에 오르자(조선 태종) 신덕왕후를 후궁의 지위로 격하시키고 묘를 이장하였다. 1669년(현종 10)에 왕비로 복위되고 순원현경(順元顯敬)의 휘호(徽號)를 추상(追上)받았다.
오늘은 서울에 있는 정릉을 찾아 보기 위하여 찾아 보았다ㅡ
정릉 역에서 내려서 2번 출구로 니와서 정릉을 들려 보았다 이분도 죽은 후에도 릉을 세번 씩이나 옮겼다고
하니 참 살아 있을때 그 영화는 다 어디 가고 이렇게 하였을까 안타갑기 한이 없네요
릉은 높은 곳에 있고 출입을 할수 없어서 팔작 T형 제단 집을 보는 것으로 마무리 하고 산을 올라 가면은
릉뒷쪽에서 볼수 있을까 하고 열심히 올라 갔는데 수목이 너무 우거져서 보이는 곳이 없어서 나와서
기왕 왔든 길에 흥천사도 들려 보는데 이곳도 그냥 먼 발치에서 쳐다보는 것으로 정릉은 마무리 하고선
이제 국민대학 까지 걸어 올라 가서 서울 둘레길 북한산 둘레길 지점에서 둘레길은 버리고 대흥사 쪽으로
올라서 보현봉을 쳐다보면서 일선사를 잠시 들려서 대서문 을 올라서 대서문은 지금 보수 중이라서
볼게 없다 대동문 으로 가다 보니 정릉 칼바위 길로 하산을 할까 생각 하다 보니 여기 까지 왔는데
백운대는 올라 봐야 겠지 대동문 지나고 이제 백운대를 향해 올라 간다 백운대 망경대 인수봉 이렇게
3개 봉우리를 볼수가 있는 백운대 올라서 하산은 도선사로 내려온다 그리고 도선사 입구 까지 걸어서
내려 와서 우이역 (서울 경전철) 을 타보았다 지하로 다닌다 두칸을 달고 다닌다 성신여대 에서 4호선
갈아 타고 충무로역에서 3호선 이렇게 하여 귀가 오늘 은 제법 많은 거리를 걸았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