칡꽃 차 한잔 속에
이 수 영
해발 1,219미터의 우람한 일월산이 아직도 흰머리를 드러내고 마을 앞산처럼 가까이 보이는 곳, 그 일자봉과 월자봉에서 흘러내린 산줄기와 줄기 사이에 계곡마다 땅을 일구고 옹기종기 마을을 만들어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깊은 산골이지만 봄은 벌써 가까이 와 있었다. 양지바른 언덕에는 아지랑이와 함께 진달래가 피고 마을 울타리에는 드문드문 샛노란 개나리가 나른한 봄볕을 즐기고 있었다.
논둑 밭둑 그리고 개울을 끼고 있는 언덕에서는 아이들이 소꼴을 뜯거나 달래, 냉이, 씀바퀴, 쑥 등의 봄나물을 캐서 바구니에 담고 있었고, 나이든 아낙네들은 좀 더 먼 산에서 이제 막 물이 오르기 시작한 각종 취나물은 물론, 두릅, 다래 순 들을 따느라 바쁘기만 했다. 겉보기에는 정말 평화스럽고, 아름답고 정겨운 풍경이었다.
내가 칡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63년 3월 31일 약관의 나이에 초등학교 새내기 교사로 발령을 받은 그때였다. Y군에서도 오지인 6학급의 M 초등학교, 당시는 국민학교라 불리던 학교에 부임하자, 초임에 6학년 담임을 배정받았다. 정신없이 며칠이 지난 어느 일요일, 아마 4월 중순의 어느 날이었을 게다. 마실을 나갔다. 동네라야 학교 주변의 가장 큰 마을이 50호 정도였고, 한참씩 떨어진 골짜기마다 손바닥 같은 땅뙈기에 의지해 10여 호씩 살아가는 그런 오지였다.
이제 막 돋아나는 수양버들의 가지를 꺾어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기도 하고, 낯선 마을 고샅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거닐던 내 눈에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거름 같은 이상한 무더기가 집집마다 삽짝 앞에 쌓여 있는 게 아닌가.
“저게 뭘까? 이상하다.”
이튿날 나는 선배 선생님께 그게 뭐냐고 물었다. 빙그레 웃고 있었지만 참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는 조용히 말했다.
“칡뿌리예요!”
그러고 보니 그동안 이상했던 몇 가지 의문이 풀렸다. 한참 설치고 다녀야 할 아이들의 움직임이 매우 힘이 없고 조심스럽다는 것, 학기 초인데도 몇몇 아이들은 결석을 자주 한다는 것. “아하! 그렇구나! 이들은 이제 한창 ‘보릿고개’를 넘기고 있구나. 내가 그걸 몰랐구나.” 머리가 찡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랬다. 그 거름 같은 무더기는 구황식물인 칡뿌리의 즙을 짜내고 그 즙으로 전분을 만들어 대용식인 갈분을 만들면서 생긴 찌꺼기를 모아 놓은 것이었다. 보리가 익어 풋바심이라도 하려면 아직도 두 달도 더 남았는데…….
그때 시골 아이들은 편도 10리, 왕복 20리가 넘는 길을 검정 고무신을 신고 타박타박 등하교를 해야 하는 아이들이 많았고 그들에게 그건 엄청난 고행이었다. 그래서 중간학교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고 그렇게 춘궁기가 지나고서야 버즘으로 얼룩졌던 보릿고개의 흔적들이 얼굴에서 조금씩 사라지곤 했다.
칡과 나의 만남은 그런 슬픈 만남이었다. 물론 어린 시절 내 고향에서는 나뭇꾼들이 산에 가서 솔깔비나 나뭇단을 묶어오던 칡넝쿨의 기억은 있지만 그건 그냥 새끼줄이나 다름없는 묶는 용도로 기억되어 있었다.
지금이야 칡과 관련된 모든 것, 이를테면 갈근(뿌리), 갈만(덩굴), 갈화(꽃), 갈옆(잎), 갈곡(씨앗)등 칡의 모든 부분이 각기 다른 용도와 효능으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특별하고도 유용한 식물이기도 하지만 그때만 해도 칡은 겨우 허기를 면하게 해주는 구황식물로만 인식되어 있었다.
칡과의 두 번째 만남은 산을 좋아하고 사시사철 등산을 하면서였다. 칡넝쿨, 그것은 장관이긴 하지만 무서운 기세였다. 그것이 무성해지는 한여름 계곡은 오직 칡넝쿨만이 살아 있는 듯했다. 원래 거기에 자라고 있던 수많은 관목과 키큰 소나무들도 몇 해 동안 칡넝쿨에 뒤덮이고 나면 모두 죽어 나갔다. 지나치는 등산객들이 모두 한 마디씩 보탰다.
“저거 이러다 온 산을 칡이 점령하는 건 아닐까?”
더러는 칡넝쿨이 전봇대를 감고 올라가 정전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이야기가 신문기사가 되기도 하는 걸 보면 전혀 터무니없는 말도 아닌 것 같았다.
칡과의 세 번째 만남은 한여름에서 가을까지의 등산길에서 화려하게 피어나는 칡꽃을 보면서였다. 계곡에서 산기슭에서, 여름부터 가을까지 보라색으로 피어나는 그 꽃을 보고 있노라면, 이 볼품없는 식물에서 어찌 이런 우아한 자태의 꽃을 피워내는지 감탄을 금치 못했고, 꽃송이를 통째로 입에 넣으면 달콤한 맛과 향기가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처음에는 향도 맛도 효능도 몰라 그냥 지나쳤지만, 그 매력을 알고 난 이후로는 매년 여름 그 꽃 따서 정성껏 말리고 때때로 칡꽃 차를 끓여 마신다. 찻잔의 끝에서 신록의 여름이 보이고, 계곡과 능선이 보이고, 동행들과의 아련한 추억이 어린다. 그리고 그 향과 맛에 흠뻑 젖어든다.
칡과의 만남 이후 나는 ’보릿고개‘ 하면 ’칡’을 연상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것은 그만큼 큰 충격으로 내 가슴에 새겨져 있던 상처이기도 했다. 그때 그 칡뿌리로 연명을 해야 했던 세대, 우리 교실에 있었던 아이들이 지금은 70대 초반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들처럼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해야 했을 것이다. 자신들은 못 먹어 키도 제대로 자라지 못했지만, 너무 힘든 일 때문에 걸음걸이도 여덟 팔(八)자로 어지러워졌지만, 가슴만은 보람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노후는 진정 그들이 흘린 땀만큼 제대로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을지 궁금하다.
초임지 초가 마을의 삽짝 앞에 거름 무더기처럼 쌓여 있었던 칡의 잔해에 놀랐던 가슴에서 지금은 칡꽃 차의 향기를 즐기는 나를 보면서 세상은 참 많이도 변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그 칡꽃 차 한 잔의 향기 속에 그때 그 아이들의 얼굴이 투영되면서 그들 모두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 세월을 보냈으리라고 믿어본다. 그리고 그들의 노후가 평안하기를 기원한다.
2023, 2. 2.
첫댓글 칡꽃 차를 앞에두고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속으로 여행길을 채촉하는 한 노인의 모습을 상상합니다. 일월산 산간 마을 어린이들 모습, 무성한 칡넝쿨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칡곷의 향과 맛에 매혹되기까지 기나긴 시간여행이 짧은 글 속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더불어 긴 여행 잘 했습니다. 칡꽃 차 맛이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고.
잃어버린 70년의 세월이 추억 어린 한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입니다. 어렵고도 힘든 시절 지나고 보니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되는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도 도시에서 자란 사람이라 시골, 산골 풍경은 낯선게 많습니다.
등산길입구에서 칡즙은 마셔봤지만 칡꽃차는 아직입니다.
그리고 칡더미는 한번도 못 봤습니다. 수필을 읽으면 제가 경험하지 못한 일들을
그림처럼 볼 수 있어 참 좋습니다.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