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15
10월16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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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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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UtfNxlQoM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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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형제들이여, 용기를 냅시다. 이 정도의 여행을 힘겨운 고난으로 여기지 맙시다!>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성인의 순교 장면은 정말이지 감동적이고 드라마틱합니다. 평소 순교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불타오르던 성인이었기에 언제든지 순교할 마음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다른 교우들에게도 자상하게 순교 교육을 시키며 그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마지막인 듯 거룩하게 살았습니다.
마침내 올 것이 왔습니다. 한밤중에 포졸들이 들이닥친 것입니다. 결박을 당하면서도, 심한 구타 가운데서도 성인께서는 태연한 모습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잘 오셨습니다. 이 먼 곳까지 오시느라 얼마나 수고들이 많으셨습니까? 저희는 오래 전부터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선 조금 쉬십시오. 곧 식사를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았으니, 요기를 하고 가시지요. 그동안 저희는 떠날 준비를 하겠습니다.”
성인께서는 마을 사람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한 다음, 신자들을 독려했습니다.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다 함께 기쁜 얼굴로 질서정연하게 순교의 길을 떠납시다.”
해 뜰 무렵 성인은 포졸들을 깨워 정성껏 준비한 아침식사를 대접했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은 포졸들에게는 잘 다려진 새 옷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최경환 성인과 40여명이나 되는 마을 사람들은 마치 잔치 집에 가는 듯이, 단체 소풍이라도 가는 듯이 그렇게 순교의 길을 떠났습니다.
관헌으로 끌려가는 동안 사람들은 무든 구경거리라도 난 듯이 신작로로 몰려 나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이비 교도들’ ‘천주학쟁이’라고 욕하며 돌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징그러운 동물이라도 바라보듯이 우리 순교자들을 바라봤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일 앞장서 걷던 최경환 성인께서는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신자들을 격려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용기를 냅시다. 이 정도의 여행을 힘겨운 고난으로 여기지 맙시다. 주님의 천사가 황금으로 만든 자를 가지고 우리의 모든 발걸음을 재고 계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을 서서 십자가를 지시고 갈바리아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생각합시다.”
마침내 최경환 성인께서는 태형 340대, 곤장 110대, 치도곤 50대를 맞고 옥중 순교합니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휘광이의 칼날에 순교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습니다. 다음은 그가 남긴 마지막 말입니다.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지이다.”
끔찍한 박해의 칼날 앞에서도 단 한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고 의연한 순교자들의 모습은 초세기 교회부터 명맥을 유지하며 내려오는 하나의 전통입니다.
위대한 순교자들께서 참혹한 죽음 앞에서도 그리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언제 어디서든, 이승과 하직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는 강한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성령의 현존과 동행에 대한 확신은 자신의 모든 것, 현재와 미래, 자신의 생사조차 자비하신 하느님의 손길에 편안히 내어맡길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제공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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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pIRHEC6mJ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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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광견병이 성령까지 모독하는 죄를 짓게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성령을 주러 오신 분이십니다. 성령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성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려는 선물입니다. 성령을 모독한다는 말은 하느님 사랑의 선물을 악하게 여긴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악령을 쫓아내실 때 그들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쫓아낸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선물을 받을 때 선물 안에 담긴 사랑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악하게 되었다면 그 사람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혹은 이런 것도 예가 될 것입니다. 첫 순교자 스테파노 부제가 하늘이 열려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계신 것이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은총으로 보는 환시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귀를 막고 스테파노를 끌어내어 돌로 쳐 죽였습니다.
이런 두 예를 볼 때 성령을 모독하는 자들은 정말 용서받지 못할 것 같기는 합니다. 인간이 걸릴 수 있는 병 중에도 치사율이 100%인 유일한 병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공수병’입니다. 개에게 물려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물을 두려워하게 되어 결국 탈수로 죽게 된다고 합니다.
물이 무슨 죄가 있을까요? 그러나 자기에게 피해를 준다고 여깁니다. 이것을 ‘피해의식’이라 합니다. 물론 물 안에 독이 들어있을 수도 있고 꿀이 들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물 자체를 두려워하여 마시지 않으면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이들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이 유다인들에게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또 스테파노 성인이 하늘에서 하느님의 옥좌를 본다고 해서 그들에게 무슨 피해를 주는 것일까요? 그러나 그들은 절대적인 피해를 보는 것처럼 예수님을 증오합니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피해의식’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면 죽는 것처럼 귀를 막고 그 말을 하는 사람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벼랑 끝, 상담》이란 책에 나온 피해의식 환자의 한 사례를 간단히 소개해 드립니다. 한 자매님이 나옵니다. 이 자매는 자신의 아들은 지독히 미워하고 딸만 사랑합니다. 그 이유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하고 그런 딸을 어머니가 과잉보호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 자매님은 남성에 대한 불신과 그와 반대로 여성에 대한 믿음이 극도로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자매의 아들은 어머니가 자기를 미워한다고 여깁니다.
문제는 이 피해의식을 해결하지 못하면 그 대상이 모든 남성에게 확대되고 심지어는 아들에게까지 확대된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학대하는 이유를 찾아야 했는데, 결국 찾아낸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 아이는 내 아들이 아니에요.”
이 말을 들은 남편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내가 외도를?’
그러나 자매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렇게 자신이 학대해야 하는 이유를 찾고 싶었던 것입니다. DNA 검사를 받고 나서야 아들임을 인정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인 아들도 내가 가진 피해의식이 사랑의 선물로 보이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자매님은 물건을 살 때도 식은땀을 흘리기도 합니다. 어렸을 때 사촌 동생과 고모로부터 반지를 훔쳐 갔다는 억울한 누명을 쓴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제 돈 주고 사고 나올 때도 혹시 훔친 것 아니냐는 모함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런 피해의식은 누가 무엇을 주어도 좋은 의도로 줄 수 없다고 믿게 만듭니다. 돈 주고 사도 불안한데 거저 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엔 이렇게 ‘사랑 자체에 대한 불신’이 생기고 자신에게 오는 모든 사랑을 거부하게 됩니다. 이것이 결국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도 믿지 못하게 만드는데, 결국 그렇게 성령까지도 무시하는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자신에게 피해가 온다고 여기는 ‘피해의식’을 잘 관리하지 못하면 결국엔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이 됩니다. 부모님은 인정하지 않아도 부모가 주는 음식까지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욕해도 성령은 모독하면 안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피해의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어렸을 때 받았던 상처에서 옵니다. 어렸을 때 당연히 받아야 하는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면 그것이 피해의식으로 자리 잡습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의 ‘격리 원숭이’ 실험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어미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격리하여 키운 원숭이는 세상의 모든 존재가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무서운 존재라 여기며 무리에 섞이지 못하게 됩니다. 자해를 하기도 하며 억지로 새끼를 낳게 하여 새끼가 자신에게 오더라도 그는 새끼까지도 자신에게 피해를 준다고 여겨 새끼를 밀쳐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사랑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을 받지 못해 사람까지 믿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피해의식이 있는 사람이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거부하며 그분이 주시는 모든 사랑까지도, 심지어 성령까지도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사랑으로 입은 상처는 사랑으로밖에 치유되지 않습니다. 사랑에 대한 불신은 사랑을 다시 받음으로써 믿음으로 바뀝니다. 주위에서 부모보다 큰 사랑을 보여주는 이가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먼저 자신이 피해의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부족한 사랑을 채우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무엇보다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으며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랑에 가끔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린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 주님의 크신 사랑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남이 안 해 주면 나라도 해야 합니다. 사랑에 대한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모든 것이 은총으로 보입니다.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렸을 때 심어지고 자라나는 피해의식을 없애고 사랑을 믿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지식과 믿음을 증가시키십시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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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2,8-12 : 어떻게 항변할까 걱정하지 말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순수한 신앙의 힘에 대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8-9절) 영원한 생명은 구원을 주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복음이란 것은 어떤 부분은 흔들리고 어떤 부분은 굳건한 것은 아니다. 만일, 복음이 없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순교자들은 아무 은총도 입지 못한다. 반대로 복음이 깨어질 수 없는 것이라면 순교자들이 복음과 반대되는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순수한 신앙의 힘은 위대하다. 자신의 믿음과 희망과 덕과 영광을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둔 사람은 누구도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8절)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을 증거하면 받는 보상이 바로 이 말씀이다.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알까?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행하고 그분의 명령을 따르고, 입술로만이 아니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함으로써 아는 것이며, 그것이 증언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죄라고 가르치셨다. 당신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겠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인간이 저지르는 어떠한 죄들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며, 이는 그분의 자비와 크신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을 거스르는, 그래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무엇인가?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즉 사랑의 관계를 말한다. 이 사랑은 인간의 모든 것을 받아주시고 품어주시는 사랑이며, 그래서 항상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주시는 사랑인데 그것을 믿지 않아 하느님 앞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 모독죄이다.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12절) 성령께서는 순교자들에게 그 위험한 순간에도 당신을 증언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그리스도를 위한 순교자로서 그분을 증언할 수 없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그러니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야 누가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겠는가?
우리는 주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이끌어주실 것을 믿고 이 사회에 신앙을 전파하고 생활로써 증거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청하며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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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8월 22일입니다. 서품 30주년을 지내면서 신부님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싶었습니다. 옆에 있는 퀸즈성당 5시 미사를 같이 하기로 했습니다. 고맙게도 신부님들이 10분이나 함께 하셨습니다. 예전에 평화신문을 운영하셨던 신부님도 한국에서 오셨는데 함께 하셔서 기뻤습니다. 사제서품 54주년이 되신 신부님께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으로 덕담을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육적으로는 점점 늙어 가지만 영적으로는 건강해 져야 한다.”라고 해 주셨습니다. 1년 넘게 미사를 도와주고 있는 부르클린 한인성당에서 축가를 준비해주셨고, 손님들을 위해서 음식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뉴저지에 사시는 자매님은 축하 케이크를 가져오셨습니다. 엠이 부부들은 음료수를 가져오셨습니다. 퀸즈성당 교우들께서는 뒷마무리를 깔끔하게 해 주셨습니다. 태풍 아이다의 영향으로 비가 내렸지만 많은 분들이 함께 하셨고, 부족한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고등학교 때의 일입니다. 학교에 산악반이 있어서 가입했습니다. 토요일 오후 늦게 북한산으로 1박2일 산행을 갔습니다. 배낭에는 산에서 먹을 부식과 텐트, 암벽 등반을 위한 장비가 있었습니다. 밤길에 갑자기 비가 내렸습니다. 길을 잃어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옷도 비에 젖고,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마침 저 앞에 불빛이 보였고, 집이 있었습니다. 하루 신세를 질 수 있는지 말씀드렸더니, 주인께서는 기꺼이 방을 내 주셨습니다. 산을 좋아해서 산에 집을 짓고 사신다고 하였습니다. 40년이 훌쩍 지났지만 따뜻한 방의 기운이 지금도 느껴집니다. 비가 그친 다음날 아침에 가지고 있던 부식을 감사의 표시로 나눠드리고,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신문사를 운영하면서도 뜻밖의 도움을 받곤 합니다. 한국에서도 도움을 주신 분도 있고, 애독자 중에서도 도움을 주신 분도 있습니다. 작년에는 정부에서 3개월 치 직원들의 급여를 지원하였고, 올해에도 지원이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았기에 자식에 대한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셨고,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늙은 나이에 귀하게 얻은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제물로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에게 민족들의 아버지가 된다는 희망은 없었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은 믿음이라는 뿌리에서 피어나는 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을 잘 아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을 칭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이면 종의 병이 치유될 것이라는 백인대상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놀라운 능력과 업적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구원의 역사는 때로 부족하고, 나약한 사람들의 신앙이야기입니다. 모세는 사람을 죽였던 적이 있습니다. 다윗은 부하를 죽도록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었고, 사탄아 물러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토마사도는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봐야만 부활을 믿겠다고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였습니다. 이렇게 허물이 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들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에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완벽함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능력과 업적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부족함에도 감사하는 이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결함이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잘못을 했지만 뉘우치는 이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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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나를 안다고 증언하라>
우리는 신앙이란 자신의 마음 속에 간직하면서 혼자서 지켜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이란 그저 묻어두는 것이 아니라 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것임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그래서 당신께 대한 신앙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라고 요구 하신다.
이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 목숨의 위험까지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당시의 상황으로는 굉장히 큰 용기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데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굳세게 신앙을 증거할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의 증거에는 학식, 성별, 년령, 재산의 많고 적음이 문제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신앙의 증거는 예수님과 일치하는 깊은 믿음과 사랑의 체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오늘 날에도 예수님 당시의 상황과 비슷하게 예수님을 증언 하기가 점점 어렵게 되어 가고 있다. 사회 학문의 급속한 발전과 기계 기술의 발전, 무신론의 횡횡으로 말미암아 신앙인은 한낱 웃음 거리가 되기 십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공공연연한 신앙 고백의 어려움이 날로 증가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더욱 더 용맹히 신앙을 증거할 것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순교 선열의 용감한 순교 정신을 본받아 용감히 신앙을 이 사회에 전파하고 생활로서 증거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도록 하느님께 간청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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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우리의 의식과 생각, 판단과 행동은 단순한 정신적인 작용이 아니라, 영(靈)의 활동이라는 것입니다.
영은 하느님의 숨결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영이 부어져 있으며, 신앙인은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영을 느끼고, 그 영의 인도에 따라 삽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믿는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하느님을 알게 하시고,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우리가 간직한 희망과 우리가 받게 될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알게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배운 것도 없고, 교리 지식도 충분하지 않다고 하느님을 알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지혜의 샘이시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우리의 양심 안에 심어져 있는 하느님 영의 목소리를 듣는 능력이고, 곳간에서 좋은 것을 꺼내듯, 내 안에서 참되고 선하며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는 식별의 은사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거슬러 말하는 자에게는 용서를 베푸시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하십니다. 왜일까요? 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부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무시하며, 내 멋대로 살아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바쳐지신 그리스도의 속죄로 우리의 죄는 씻어집니다.
하지만 내 안에서 하느님의 영의 움직임을 무시하고, 성령의 능력을 믿지 않거나,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희망 없는 절망으로 몰아내는 이들은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죄는 내가 지은 죄가 아니라, 남이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서는 것을 방해하는 죄, 사람들에게 성령의 기쁨과 희망을 잃게 하는 죄임을 잊지 말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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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오셉 신부님]
'인과응보' 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 또는 전생의 선악의 인연에 따라서 뒷날 길흉화복의 갚음을 받게 됨을 이르는 말로, 원인이 있으면 그에 따른 결과가 있다는 의미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언행으로 인해 닥쳐올 어려움을 생각하시고 미리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루카 11,44)하고 수 차례에 걸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야단치시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악행을 드러내시며 그 권위를 실추시켰습니다.
예수님의 책망에 율법교사들은 “선생님, 그런 말씀은 저희에게도 모욕이 됩니다.”(루카 11,45)하고 투덜거렸고 그 정도가 심해지자 이제는 예수님에 대해서 앙심을 품게 됩니다.
“예수께서 그 집을 나오셨을 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앙심을 품고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 예수의 대답에서 트집을 잡으려고 노리고 있었다.”(루카 11,53)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트집과 보복을 예견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준비시키기 시작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을 증언해야 함을 제자들에게 강조하시지요.
“잘 들어라.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루카12,8-9)
목숨의 위험까지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당시의 상황으로 하느님을 증언하는 것은 참으로 큰 용기와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를 잘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어떠한 어려움 중에서도 용기를 내서ㅈ증언해야 함을 가르치고 계신 것이지요.
복음을 증언하다가 목숨을 바치게 될 것을 예수님께서는 곳곳에서 예견하십니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요한15,13-15)
박해를 통해서 죽을 수도 있음을 말씀하시지요. “나의 친구들아, 잘 들어라.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은 더 어떻게 하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인가를 알려 주겠다. 그분은 육신을 죽인 뒤에 지옥에 떨어뜨릴 권한까지 가지신 하느님이다. 그렇다. 이분이야말로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이다.”(루카12,4-5)
그리고 죽은 후에 누릴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시련을 견디어 낼 것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11,25)
한편 시편에서는 생명은 육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될 것임을 노래합니다.
“당신 앞에서는 천 년도 하루와 같아 지나간 어제 같고 깨어 있는 밤과 같사오니 당신께서 휩쓸어 가시면 인생은 한바탕 꿈이요, 아침에 돋아나는 풀잎이옵니다. 아침에는 싱싱하게 피었다가도 저녁이면 시들어 마르는 풀잎이옵니다.”(시편90,4-6)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시련 중에서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주시는 하느님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단돈 두 푼에 팔리지 않느냐? 그런데 그런 참새 한 마리까지도 하느님께서는 잊지 않고 계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 두셨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그 흔한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느냐.”(루카12,6-7)
하느님께서 우리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이끄시며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고 계시니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 것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교육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믿음으로 무장되어 있었지만 권력자들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출신과 배운 것 없는 언변으로 인간적으로 나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육신으로 오는 박해야 몸으로 때울 수 있겠지만 법당이나 회당에서 진리를 증언하는 일은ㅈ어려운 일이었지요. 이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리나 권력자들 앞에 끌려 갈 때에 무슨 말로 어떻게 항변할까 걱정하지 말라. 성령께서 너희가 해야 할 말을 바로 그 자리에서 일러 주실 것이다.”(루카12,11-12)
새로운 힘, 성령을 약속하시지요. 예수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박해를 받고 목숨을 바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박해는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어려움이며 박해를 받으면서까지 행해야 하는 중요한 일은 하느님을 전하는 것, 즉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마태10,61)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증언하고 하느님 중심으로 살 때 박해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시며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을 굳게 믿고 따르며 살아갈 것을 가르치십니다. 용감하게 믿고 끝까지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그들을 ‘벗’이라고 부르시지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루카12,8)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결국 그 길을 갔고 영원한 생명에 들 수 있었습니다. 깊은 믿음과 투신의 체험에서 나오는 신앙의 증언이야말로 믿는 자들의 기쁨이며 특권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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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말씀은 아주 짧지만 아주 강력한 당부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때를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깊은 애정과 사랑으로 가르치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면 하느님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증언하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 받지 못할 것이다.”(루가 12,10)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용서받지 못할 자’가 있다 하시니 말입니다. 혹 하느님의 자비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이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우리는 이 문장의 뜻을 잘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셔도 인간 편에서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용서받지 못함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완고함으로 용서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인간이 성령의 활동을 무시하고 모욕한 바람에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란, 우선적으로 성령의 활동을 의지적으로 거스르고 배척하고 비난하거나, 단죄하거나 방해하거나 핍박하거나, 혹은 성령의 활동을 사칭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 등을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성령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고집을 피우는 완고함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고집과 완고함은 참으로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울의 완고함을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이는 고집이 성령을 거스르고 배척하고 무시하는 신성모독에 해당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용서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가로막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고난과 박해 속에서 도와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너희가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항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루카 12,11)
이는 진리의 성령께서 증언해 주시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러니 반대하는 무리들이 박해를 한다 하더라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성령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당신을 증언할 모든 것을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영을 따라 살게 하소서. 더 이상 어둠에 머물기를 고집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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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2,10)
주님!
당신께서는 용서하시건만 제 스스로 제외시키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빛으로의 초대하건만 제 스스로 어둠에 머물기를 고집하지 않게 하소서.
새 생명으로 태어나기를 거부하면서 당신의 영을 모독하지 않게 하소서.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을 수락하게 하소서!
당신의 자비와 용서에 승복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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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루카12,12)
<깨어 있자!>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과 한 단락을 이루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루카12,8)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얼마나 자신 있게 그리고 기쁘게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고 있는가? 성당 밖인 삶의 자리, 곧 믿지 않는 이웃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면서 내가 하느님을 믿는 신자이며, 성당에 다니는 사람임을 얼마나 잘 드러내고 있는가? 혹시 부끄러워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십자성호도 잘 긋지 못하는 신자는 아닌지? 나는 얼마나 내가 믿고 따라가고 있는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가?
이는 매우 중요한 물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루카 12,9)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그리고 구체적인 이슈 앞에서 예수님처럼 생각하지 않고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신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깨어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깨어 있는 자에게 성령께서 임하시고, 그 성령께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굳게 믿고 희망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지금 깨어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 바로 '성령'입니다.
오늘도 굳게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합시다! 그래서 성령을 받고, 이 성령께 나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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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된 증언>
루가 12,8-12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참된 증언>
당신 있는
그만큼
나 있어야 하듯
나 있는
그만큼
당신 있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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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자신에 대한 불만이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돈도 없고, 능력도 없고, 외모도 시원찮은 자신의 단점만을 바라보며 그는 불평불만만 가득했습니다. 자신의 이런 부정적인 모습에 걱정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자신에 대한 걱정에 힘든 시간이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피정 갔다가 지도 신부님께서 하루 동안 자신의 장점을 적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각자에게 얼마나 많은 긍정적인 모습이 있는지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피정에 참여하는 하루 동안 자신의 장점을 적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녁 시간에 자신이 적은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의 장점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장점에 집중하다 보니 다른 이들의 장점도 보였습니다.
즉, 부정적으로 바라보기보다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하느님께 받은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걱정할 것이 생각보다 적다는 것도 깨닫습니다.
우리의 어떤 모습을 주님께서 원하실까요? 불평불만 하면서 걱정에 휩싸여 있는 모습을 원하실까요? 자신이 받은 것에 감사하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원하실까요?
인간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가 힘들고 아파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조그마한 상처와 아픔에도 쉽게 절망하는 우리의 나약함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힘이 되시는 말씀을 하시지요.
“걱정하지 마라.”
심지어는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면서 ‘말하는 것’조차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걱정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행복한 우리가 되기를 바라는 주님이십니다.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께서는 우리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면서 하느님 아버지를 믿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은 걱정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곧바로 일어나 자신의 꿈을 향해 힘차게 달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걱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지만, 주님께서 계시기에 걱정 없이 참 행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걱정을 가져가십니다. 우리의 몫은 걱정보다 감사와 기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행복의 길이 그렇게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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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집중하며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아침에 전철역에 나와서 저녁까지 전철만 타며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1호선도 탔다가 2호선, 3호선, 4호선…. 가릴 것 없이 느낌대로 전철을 타며 하루를 보냅니다. 이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일까요? 일하지 않는 무직의 실업자일까요?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은 만화가로 사람들의 일상에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전철을 타며 사람들을 자세히 보는 것입니다. 의자에 앉아 조는 사람, 스마트폰에만 집중하는 사람,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 창밖을 보며 신기해하는 어린아이의 모습 등등…. 모든 것이 그의 만화 소재였습니다.
그래서 전철을 타면서 돌아다니는 하루 여행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시간 낭비를 하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 안에 집중하지 않기에, 그 안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무 생각 없이 전철만 타고 있다면 시간 낭비처럼 생각되지만, 만화소재를 찾기 위함이라면 중요한 일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삶에 집중하며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가장 소중한 시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누가?
바로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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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반영억_라파엘_신부님
2021.10.16.연중 제28주간 토요일(루카12,8-12)
<하늘은 지상에서 열립니다>
가끔 낯선 곳을 가면 다른 사람이 먼저 나를 알아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라는 것을 먼저 소개하며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색한 분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적극적으로 자기를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편안해합니다. 그리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당당히 자기를 알리고 그 이름에 걸맞은 품위를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신자로서 신자임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간다면 나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손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루카 12,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면 예수님께서도 그를 안다고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잇속을 차리려고 누구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다고 하는 것은 손해가 오더라도 그를 안다는 마음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른다고 한마디만 하면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도 목숨을 걸었습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드리지 않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무안을 당할 수도 있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그러나그때야말로 믿음을 드러낼 때입니다.
간혹 식당에서 보면 십자성호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볼까 조심스럽게 가슴에 열 십자를 긋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표현은 확실히 해야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고 성호경을 하면서 십자가를 긋는 것은 신앙의 고백입니다. 따라서 십자성호를 할 때 믿음을 담아 바르게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늘나라가 결정된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이미 이 세상에서의 삶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순간을 놓치지 않길 바랍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27) 하늘은 이미 지상에서 열립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지상에서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한다면 바로 그 순간이 성령을 모독하는 때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 뜻하는 바를 삶으로 거부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품위를 지금 여기서부터 지키며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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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유비무환有備無患-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이스라엘의 하느님, 당신은 용서하시는 분이시옵니다.”(시편130,3-4)
오늘 미사중 입당송 후렴이 우리 영혼에 위로와 평화를 줍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제 졸저 책명이자 29년전 1992.1.15.왜관 수도원 성전에서 종신서원 미사때 제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아니 살아갈수록 절실해지는 평생 화두같은 물음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하루하루의 깨달음을 마음에 새기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몇가지 깨달음의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1.요셉수도원 초창기부터 지금까지(1986-2021), 35년간 사진을 모아 원장수사가 방대한 5권의 사진첩을 만들었습니다. 새삼 감회가 새로웠고 초발심의 자세를 회복하는 호기도 됐습니다. 사실 초창기는 앞을 내다 볼 수 없으니 잘살고 못살고를 떠나 하루하루가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여섯 단어로 요약되는 삶이었습니다. ‘혼돈’, ‘무질서’, ‘젊음’, ‘순수’, ‘열정’, ‘역동성’이었고 정말 살아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영적 젊음과 순수와 열정을 새로이 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2.엊그제의 깨달음도 잊지 못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나 제관, 착한 사마리아인은 누구나의 가능성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순간적 판단과 결행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초주검이 된 이를 놔두고 슬며시 외면하고 떠난 사제와 제관을 마냥 비난할 수만을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후 집무실에서 일하다 잠시 숙소에 들렸더니 복도에서 천정 열린 문 아래에 사다리를 놓고 원장수사가 혼자 여름철에 썼던 선풍기들을 올려 놓고 있는데, 수고한다는 말만 던지고 떠나려던 차, 이게 아니다 싶어 가까이 갔습니다. 혼자 들어 올려 사다리에 올라가 넣는 작업이 참 위태해 보였습니다. 남은 큰 선풍기 3개는 번쩍 들어 전달해 올리니 간편하게 짧은 시간에 끝냈고, 참 잘했다 싶었고 순간 아찔했습니다.
귀찮다는 생각에 그냥 놔두고 지나쳤다면 그대로 초주검이 된 이를 놔두고 외면하고 떠난 사제나 제관의 처지가 될뻔했습니다. 이렇다면 이건 사람이 되는 기본적 자질에 무조건 실격임을 뜻하며 내내 마음 찜찜했을 것입니다.
3.‘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분도 성인의 말씀도 하루하루 절실히 깨어 본질적 투명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답이 되는 유비무환의 자세이겠습니다. 늘 생각하는 바, 일일일생, 일년사계에 견주어 내 현재 삶의 지점을 확인해 보는 것입니다. 평생을 하루로, 일년사계로 압축할 때 어느 지점에 와 있겠느냐의 확인입니다. 여기에다 내 임종어를, 또 장례미사까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제 경우 장례미사시 입당성가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아무것도 너를’ 기도곡과 퇴장성가는 아씨시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찬가’를, 또 강론은 제 좌우명 기도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를 부탁할 생각입니다.
4.어제 금요강론시 귀한 깨우침을 준 내용입니다. 토마스 머튼 이후 최고라는 베네딕도 영성의 세계적 대가인 80대 초반의 오스트랄리아 출신의 트라피스트 수도사제 마이클 케이지의 인터뷰시 한 대목입니다.
“그렇다! 언제나 성공은 부패하기 마련이다(Always success corrupts). 너도 알겠지만, 공동체 안에서의 삶이 그것에 대한 최고의 치유제이다.”
참 깊은 은혜로운 통찰입니다.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 삶이 성공에 자만하지 않고 깨어 겸손히 부패하지 않고 참 자기를 살도록 견제 역할을 해 준다는 것입니다. 예언자가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함이 그를 겸손으로 이끄는 긍정적 역할을 함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일련의 깨달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함에 대한 답이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도 우리에게 귀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첫째,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생각과 말과 행위로 용기있게 주님을 증언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자각입니다. 그래야 주님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겠기 때문에 이런 증언의 삶도 참 좋은 유비무환의 삶이 될 것입니다.
둘째, 성령에 따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령을 모독하는 무지의 죄는 절대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나에게 자명한 진리가 진리의 성령, 사랑의 성령이신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성령께, 주님께, 이웃에 활짝 열린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자각입니다.
스스로 문을 닫아 걸고 차단함은 스스로 자초하는 심판이자 바로 성령께 대한 모독이고 이런 경우는 하느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그러나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이런 성령 모독의 죄를 짓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도록 늘 깨어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고 성령께 귀기울이며 성령의 인도따라 살아가도록 하는 것 역시 참 좋은 유비무환의 삶이 되겠습니다.
셋째, 장차 있을 어떤 곤경이나 역경에서든 무엇을 행할까, 무엇을 말할까 미리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언젠가의 그날 그때에 앞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성령에 따른 겸손한 삶 자체가 참 좋은 유비무환의 대책이 되겠습니다. 오늘 사는 대로 내일도 그대로 살겠기 때문입니다.
이 모두를 떠받쳐 주는 것이 주님께 대한 희망과 신뢰의 믿음입니다. 희망과 신뢰의 믿음은 함께 갑니다. 희망이 있기에 항구한 신뢰의 믿음이 가능합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항구한 한결같은 믿음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로마서에서 바오로가 말하는 아브라함이 참 좋은 모범입니다. 믿음을 통하여 실현되는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도록 간청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주님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희망이자 믿음입니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백절불굴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음은 한결같이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과 신뢰를 둘 때 가능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대한 궁극의 답입니다. 바로 여기서 나오는 분별의 지혜, 증언의 용기, 성령의 인도에 따른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는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유비무환의 삶을 살도록 당신께 대한 참 좋은 희망과 믿음의 은총을 선물하십니다.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 뿐이리라.”(시편34,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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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희망을 이야기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루카 12,8)
예수님은 우리의 증언을 목말라하십니다. 그분에게 우리가 하찮은 존재라면 우리가 그분을 안다고 하건 말건 상관없으실 텐데, 우리가 그분께 꽤 중요한가 봅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2,10)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을 잘 알고, 그 아는 바를 타인에게도 전하길 바라시지만, 행여 그렇지 않더라도, 심지어 당신을 거슬러 말할지라도 용서하십니다. 실제로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해치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께 용서 기도를 바치셨지요.
그런데 성령을 모독하는 자에 대해서는 단호하십니다. 이는 앞으로 제자들이 활동할 교회의 시대, 성령의 시대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 같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루카 12,11-12)
이 말씀에서 제자들의 앞날에 고발과 체포와 신문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예수님을 책으로 배우지 않은 제자들은 자기들이 함께 먹고 마시고 지내면서 삶을 나눈 예수님, 즉 그들이 아는 예수님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이 마주하게 될 이들은 종교지도층이나 정치 권력자들이 대부분일 겁니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제자들이니, 가뜩이나 긴장된 순간에 무얼 준비한다고 해서 제대로 될 리 없지요. 오히려 그 때는 철저히 성령께 내어맡겨야 하는 순간이 될 겁니다.
"진리의 영이 나를 증언하시고 너희도 나를 증언하리라."(복음 환호송)
성령과 제자들이 함께 예수님의 증언자가 됩니다. 아직 겁쟁이에 부족하고 미숙한 제자들이 성령의 파트너가 되는 겁니다. 제자들이 성령의 도구로서 자기 힘을 빼고 성령께 온전히 의탁할 때 성령께서 내용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제 존재의 허약함에서 눈을 들어 희망을 가져도 좋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믿음과 희망의 모범인 아브라함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로마 4,16)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 믿었습니다."(로마 4,18)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정확한 당위성과 절차를 거쳐 이루어졌다면 믿음은 별 소용이 없었을 겁니다. 당연하고 자연스런 과정에서 도출되는 결과를 놓고 믿음을 거론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희망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과가 훤히 예측되는 상황에서 인과론에 의거해 기다리는 걸 희망이라 하지 않지요. 아브라함의 예처럼 희망할 수 없는 처지에서 바라는 게 희망입니다.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후손의 조상이 되리라는 하느님 말씀을, 내외 모두 생명력이 거의 끊겨갈 나이까지 아들 없이 기다린 믿음이 희망을 잉태한 것이지요.
호락호락하지 않은 삶의 여정은 한때 우리 가슴을 뛰게 했던 꿈이 뭐였는지조차 잊혀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그분의 목소리라고 믿고 걸어왔지만 꿈과 희망이 보이지 않아 무너질 때도 있지요. 바로 그 순간이 성령과의 파트너십을 떠올려야 할 때일지도 모릅니다.
더 이상 사람에게 기대하거나 희망할 수 없는 순간, 그야말로 희망에 부고를 접한 그 순간에 우리 존재에 희망을 불어넣으실 수 있는 존재는 성령이시니까요. 성령께서 힘이 다 빠진 우리 안에서, 침묵하는 이성과 지식을 대신해서, 우리가 알고 사랑하고 물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실 겁니다.
신뢰가 깨어진 순간에 더 믿고, 희망이 스러진 순간에 더 희망하며 성령과 함께 각자에게 허락된 순례 여정을 계속하시길 기원합시다. 약속은 반드시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성령과 더불어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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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pHLV-q_Se8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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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루카 12, 12)
성령께서는
새로운
삶을 향해
활짝 열려
있으시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희망에는
언제나
가장 좋으신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위하여 간격을
없애주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희노애락에
함께하시는
성령이시다.
성령께서는
우리
삶의 자리에
깊숙히
들어오셔서
자비를 나누시는
가장 좋으신
인격체이시다.
인격체는
인격적인
방식으로
드러난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소통과
사랑으로
드러난다.
참된 관계는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참된 소통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시고
일깨우시고
인도하신다.
하느님 사랑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변화시키신다.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신다.
구체적인
열매를
맺게하시는
분이시다.
단절된 삶을
하느님께로
이어주시는
분이시다.
성령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한
우리들이다.
생명의
나아갈 방향을
알고 계시는
성령이시다.
성령께
우리의 삶을
내맡긴다.
새로운 사람
온전한 사람이
되게하신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소통으로
밝히시는
성령이시다.
성령께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를
알려주신다.
성령의 뜨거운
말씀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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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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