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뜨락에서] 나의 어머니
어머니는 늘 울었다
쌀이 떨어졌다고 울고
자식들이 말을 안 듣는다고 울었다
그때는 어머니의 흐느낌이 청승스럽게 들렸는데
이제 생각하니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눈물이 많아진 후부터
어머니를 닮은 나는 우는 것까지 닮은 것 같다
내가 시를 만난 후 처음으로 쓴 시중의 하나다.
004년에 나온 첫 시집의 첫 번째 시다.
눈물은 어머니의 표현수단이었다.
기뻐서 울고,
속상해서 울고,
슬퍼서 흐느끼고,
할머니에게 이유 없이 야단맞고 돌아서 울었다.
그녀가 많이 운 것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해서일 것이다.
어머니는 1908년생인 것 같다.
아버지보다 세 살 많았다.
내가 4형제 중 막내인데
이민 후 85세로 먼저 돌아가셨고
3년 후 아버지도 85세로 뒤를 따랐다.
엄마는 무학이었으나 양반 집 규수였다.
키가 크고 얼굴이 달덩이처럼 넓고 고왔다.
내가 어머니를 제일 많이 닮았던 것 같다.
얼굴도 모르는 어느 양반집,
말을 약간 더듬는 총각에게
가마 타고 시집을 가,
성미가 고약한 시어머니에게 학대를 받았다.
이럴 때마다
어머니는 지식 키워 하소연하겠다고 했는데
어느 아들 하나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
“할머니한테 구박받은 후
우물에 빠져 죽을라꼬 치마에 돌을 쌌다.
이때 너희들 얼굴이 떠올라 돌을 풀고 돌아섰다.”
이 하소연은 아직도 나를 울린다.
아버지는 늘 시대와 반대방향으로 갔다.
해방 후 격동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세 형은 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중퇴였고,
어머니는 한때길거리에서 행상을 했다.
형제 중 대학을 나온 사람은 막내인 나밖에 없다.
물려받은 것은 지독한 가난, 형들의 술주정,
나는 방학 때도 시골집에 내려가지 않았다.
미국에 온 후 첫 10여 년은
자리 잡느라 도움을 주지 못하고,
그 후 2~3년 어머니와 같이 지내다
귀국해 돌아가셨다.
돌이켜보면 어머니는 여식은
교육받을 필요가 없다는
잘못된 시대의 희생자였고,
양반끼리 혼인해야 한다는
인습 때문에 무능한 남편을 맞았다.
이제 나도 70대, 두 형이 돌아가셨고,
나는 건강을 돌보는 데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그런데 부모님에게 특히 감사할 일이 있다.
나쁜 병 유전자를 물려주지 않고,
검은 머리를 유지하게 한 것이다.
이 밖에 나에게 깊고,
좋은 음성을 준 것은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시대와 환경이 변하고
딸들이 자식 키우는 것을 본다.
맨해튼 좁은 아파트에 살던 둘째 딸이
아들을 낳자마자맨하셋으로 집을 사 이사했다.
딸은 집 계약할 때와 클로징할 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옆에 앉혔다.
“너를 위해 큰 집으로 옮긴다.
이 집에서 대학 갈 때까지 살 것이니,
당연히 클로징에 참석해야지.”
딸과 사위는 주말마다
세 살 아이를 데리고 뮤지엄을 다닌다.
이것이 요즘 세대의 교육이다.
어머니와 여자는 다르다.
옛날 원시 부족사회 때도 여자는 보호받았다.
출산을 통한 종족보존을 위해서였다.
어머니에게는 ‘신성한 의미’가 있다.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의 진통을 경험하고,
젖을 먹여 키우고, 가정교육을 시킨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
나는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미화하지 않는다.
부모를 있었던 그대로 생각하면서
내 아버지보다 나은
아버지, 할아버지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출처 : [삶의 뜨락에서] 최복림 시인
Photo by KRC 흙사랑물사랑(2021 M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