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 만두국은 그릇당 500원에서 3천원 정도 사이에서 만들 수 있다. 당면 잔뜩 넣은 불량 만두속으로 엉성하게 만든 제품을 집어넣거나 만두를 저렴하게 구입해서 집어넣고 미원으로 간단하게 양념을 하는 만두국은, 배급제로 식사를 배급하는 풍경에서 나온다. '짬밥'이라고 군대 식사를 폄하하는 일이 일반적이나, 군대 식사는 91년에 이미 대학의 보급형 학생식당의 1인용 가격의 원가를 넘어섰다.
그때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군대식사는 사회에서 1인 식권으로 2500원짜리 식권 주고 사먹는 밥보다도, 재료 원가가 비싸게 들어간다고 보면 맞을 것으로 본다. (50대 이상의 분들은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군대 짬밥의 밥의 질에 감탄했던 사람들은 체험적으로 매우 많았다. 오죽하면 예비군 훈련에서 땀을 흘리자, 짬밥 먹고 싶다는 사람까지 있을 지경이었다.)대개의 밥장사는 곱장사다. 떡 만두국에서 한 그릇을 만들 때 3천원 이상의 단가가 들기가 사실상 어렵다. 그렇게 본다면, 6천원 이상의 가격을 써붙인 가게는 가게의 특화된 '서비스'값을 받는다고 봐야 적절하다.
떡 만두국에 4천원이 적힌 분식집에서 밥을 먹었다면, 도시에서 살아가는 평균적인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그림이 선명하게 떠오를 것이다. 냉정하게 이야기하자. 재료 값에서는 군대의 짬밥과 많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학교에서 가장 저렴한 학생식당 메뉴의 재료값 정도와도 비슷할 것이다. 대량공급으로 인한 이윤을 최소화해서 학생식당이 쌀 것이다. 그런데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서민들의 입맛에 맞추고자 노력하는 독특한 맛을 지닌 떡만두국을 사랑하지, 군대의 음식을 칭찬하지 않는다. 군대 취사반 수준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경비를 지출하고, 군대 짬밥과 다를 바 없는 재료비 가지고 서민들을 가지고 장사하는 음식장사와, 달력에서 날짜 지우기 차원으로 피동적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는 취사반을 생각한다.
여러분에게 묻는다. 어디서 먹을 때 먹는 맛이 가장 좋은가?
요리로 고객을 기쁘게 하는 만큼의 수익성취가 가능한 곳에서 먹는 밥이, 같은 재료를 썼다 해도 더 맛있게 느껴진다. 최고의 단골을 확보한 요리사도 취사병을 시키면 타율성으로 실력이 안 나올 것이고, 대량생산인 대학교의 학생식당에서는 섬세한 기술이 어려울 것이다. 생활 속 논리에서 성취지향적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가, 공산주의적 계획경제보다 더 나은 점은 분명히 확인된다. 요리사로서의 성취욕을 느낄 수 있는 입장과, 성취욕이 제한적으로 돌아가는 입장과, 성취욕이 전혀 없는 입장의 차이의 비교는, 생활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사회체제 문제일 것이다.
나는 오늘 혀는 맛있되, 마음은 맛 없는 떡만두국을 먹었다. 오늘의 혀를 맛있게 한 요리사의 능력을 전부 감점 시키고 만, 분식집 주인아주머니와의 대화는 386세대의 평균적인 잘못이 무엇인가를 드러내준다고 본다. (그 가게 아주머니는 70년대 중후반 학번인 듯 여겨졌지만)
2. 책과 현실은 별개인가? 독서 능력 급수 10급 짜리(?)가 절대 대다수이고 그들에게만 그러할 뿐이다.
불경기에 난방비 걱정으로 어디를 가나, 내복을 입고 버티기 딱 좋은 실내온도이다. 그 분식집도 예외는 없었다. 늦은 점심 겸 저녁으로 먹기 위해서 들어갔기에, 손님은 없었다. 석유난로를 아주 약하게 피운 듯. 바로 옆자리에 앉아도 온기를 느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편하게 느끼는 자리(=구석자리)로 가서 앉았다.
가게 주인 아주머니는 "평등이 뭘까. 꼬오옥 같아질 수 없나"(앞으로 대화 인용은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바이며,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라고 그랬다. 나는 대한민국 사회의 '평등'과 '대등'의 헷갈림에 대해서, 대단히 유감으로 생각해왔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멍개' 분식점과 '똘이' 분식점과 '영희' 분식점이 기회의 평등 속에서 같이 경쟁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하게 분식점의 평등이다. 가게 이윤이 같고 디자인도 같고 요리도 같고 그러한 "꼬오옥 같이"가 대등이다. 우파 중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의 평등성을 부정하고 좌파처럼 대등성과 헷갈리는 몰지각한 이들이 있다. 공산체제에서는 공산당에 봉사한 친화성 경력에 따라서, 기득권 세력과 아닌 세력으로의 날카로운 구분이 나뉘어진다. 神적 재능을 가진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평등성이 무너지고, 공산당을 둘러싸고 서로 공격하여 같이 못사는 대등욕망이 힘을 가진 사회이다. 공산사회는 공산당에 봉사한 특권계급을 미화하고자 당파성과 당성을 늘 최고의 가치로 가진다. 평등성을 부정하는 우파는, 대한민국 국민성의 평균적 보편적 사유를 부정하며 일본적 봉건성을 과잉되게 미화하거나, 토끼와 거북이 우화에서 '거북이'에 응원을 해본 경험이 적은 서민 사회에서의 경쟁과 질서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못한 이들일 것이다.
인터넷에서 '솔직담백'한 성격으로 지내오던 나의 고질병이, 그 순간에 쉬질 못해서 내 자신도 아쉬움이 든다.
"춥지 않느냐 난로 옆으로 다가오라"는 인사성 멘트(그 옆에 가보았자 안 따뜻한 것을 주인 아주머니도 알았을 듯 싶다)를 기다려, 나는 정중하게 틀린 지식을 바로 잡고자 노력하였다.
"아주머니. 平等과 對等을 헷갈리면 안됩니다. (만두국을 가리키며) 아주머니도 아시겠지만, 이 한 그릇이 결코 부자들의 그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한 그릇을 두고서도 노숙자 배급 급식을 먹는 이들은 아주머니 처럼 '꼬옥 같이'란 표현을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배급 급식을 먹는 노숙자를 그렇지 못한 노숙자가 '꼬옥 같이'라고 표현하게 되겠지요. 결국, 아주머니 주장은 공산당 사회처럼 공산당 아래의 빈곤의 평등 밖에 없는 사회를 부를 것입니다"
아주머니는 당황했다면서, 주로 올 수 있는 고객층을 염두에 두지 않아서 손님을 향해 한 발언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失言'을 했음을 인정했다. 물론, 사적 대화임을 알면서 개입적 차원의 발언을 한 입장을 나도 이야기했다. 그 과정에서 그 곳 주인 아주머니의 성격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386을 닮았다고 파악했다. 물론, 이것은 동시적으로 그 아주머니 눈에 386의 비틀린 시각에서 어떠한 이미지로 내가 비춰 졌음을 말한다.
대다수의 기성세대 우파들은 그 아주머니의 첫 대답에서 주도권을 잃어버린다.
"무서웠어요?"
한겨레신문등과 친북좌파들은 기성세대들이 좌파공산주의 코드에 대해서 교정 시도를 할 때, 어떻게 답변하라고 상세하게 교육을 시켰다. 주류 우파가 대학사회의 내용을 '文弱'이론으로 사고하지 못하도록 하게 할 때, 매우 일반적인 차원이다. 학생운동의 기억을 가지며 우파 운동을 하는 젊은 층도 이것을 잘 보지 못한다. 대다수의 친북좌파는 김청기 감독 만화의 늑대와 여우로 그려진 북한공산당을 증오하면서,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이끈 할아버지들을 '괴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대다수의 주류 우파 할아버지들은 반공교육 때 공산사회 좌익분자들을 구석으로 만드는 어법 속에 갇힌 현실을, 알면서도 오랫동안 인정하지 않았다. 과격한 어법으로 그러한 '언어의 감옥'을 뚫으려고 하나, 운동권들이 벽에 부닥친 것과 비슷하게 다른 방식으로 드러났다. 혼란한 사회가 올 것이란 지적에 정상적인 반응은 '부끄러움'의 고백일 것이다. 그러나, 그 아주머니는 정당한 지적을 색깔론으로 몰기 위한 미끼 던지기를 했다.
"그것은 신문이 주입하는 논리대로 쫓아가는 사고일 뿐입니다." 좌파들이 우파들이 조선일보의 수동적이고 반영적인 사고만 한다고 주장하나, 왜 우파들은 좌파들이 한겨레신문의 수동적 반영의 사고만 한다고 주장하지 못하나 싶어진다.
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분식집에서, 손님을 제외한 이들이 대화하는 내용은 사려 깊은 손님들은 대부분 다 이해를 한다. 호텔 식당을 즐겨 찾는 손님이 호텔경영자들이 하는 경영마인드를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게 아주머니는 남녀평등 이야기를 했다. 꼭 같은 평등이란 표현의 수신자쪽에서, 그러한 표현이 가능할만한 상황이 있었음을 말했나 보다.
"그러면 아주머니. 무조건 상대를 믿고 안아야 한다. 양보해야 한다. 그렇게 살아가서 사람에 상처 안 입을 가능성이 있을까요?"
호주제 폐지를 남녀평등의 쟁취라고 주장하는 차원으로, 북한 민법의 가족법에 닮아지도록 하는 악법이 국회에 제출되어 있는 상황이라고 안다. 그런데, 북한의 남녀평등은 공산당 권력의 가족을 향한 침투이다. 남녀평등을 전제하여 하는 내용이 공산당 권력의 가족 침투와 가족 해체라는 사실은, 그 아주머니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면 단번에 알 수 있다.
서민 가정에서 여성이 남성을 향해서 '꼭 같이'라고 내세우는 것은, 심층 심리학 측면에서 상처 입은 입장에서의 '원한심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 현실적 구현으로서 객관화되는 것보다, 객관적 가치를 알지 못하는 대중들의 지적 착오속에서, 친북좌파의 남녀평등은 비뚫어진 여성이 권위주의적 남성에 대한 원한 심리란 사실은 지속적으로 숨겨진다. 그러면, 무슨 수로 원한심리는 해결되나? 공산당 권력을 끄집어 내서 말 안듣는 남성을 혼내주는 방법 밖에 없다. 그러한 속에서, 가족 속에서 '남녀평등'(?)은 성공적으로 달성된다.
호주제 폐지등의 논란은 페미니즘 이론을 직접 실천해본 사람의 '실천속의 검증'의 답이 핵심이다. 가수 김창완은 라디오에서 "나는 여자란 족속을 믿지 않아요"란 주장을 했는데, 나는 10년 가까운 시행착오를 하고서야, 페미니즘의 독성을 보게 되었다. 정작, 운동가로서 자질이 있는 통큰 여자는 100명에 1명보다 더 적어서 의미없고(이런 이들은 남자나 여자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한다.),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 이론의 좌파적 정서에 열광하는 이들은 평균적 도덕성을 쌓을 의사가 없는 이들이 많다.
그 아주머니는 그러한 사람이 어디있는가 란 답을 했다. 페미니즘 이론에 맞도록 남녀평등을 실천하면서, '꼭 같은'이란 말에 힘을 악착같이 주는 원한심리에 지독하게 오랫동안 데어 본 사람의 주장을 의미없게 만들기 위해서는, 대학사회에서 유행한 페미니즘 사회과학서들에 속아서 오랫동안 실천속에서 허위성을 검증한 사람을 무의미하게 몰아야 될 것이다.
페미니즘 이론의 궁극적 귀결은 여자 정치가를 밀어주는 권력 만들기 차원이다. 돈 크라이 포 미 아르헨티나를 만든 여자 정치가의 빽인 그녀의 남편은 좋은 예이다. 또, 여자 정치가를 몇 명 배출하느냐의 문제가, 전체 여성들의 권익보다 언제나 앞선다. 진중권과 홍진표 위원이 운동권 중심이 주변부를 사기치는 것을 당연시해왔다는 주장을 했는데, 이는 페미니즘에도 연결된다. 페미니즘 이론을 한겨레신문이 다루는 수준에서 줏어넘기는 여자들의 99.99%는 페미니즘이론의 긍정성을 믿는 남자들을 바보로 본다. 20대 초중반의 순진한 이들을 제외한 대다수에서 동의되는 부분이다. 페미니즘 이론을 읽지 않고도 한국 페미니즘 운동가들의 속 뿌리를 본 사람들은, 페미니즘 운동에 앞장 서는 운동가급 남성들의 정상성을 심하게 의심한다. 한국 페미니즘 운동도 친북좌파들의 대다수 운동이 그러했듯이, 선량한 사람들을 이용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군요."
친북좌파들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라고 하며 정상적인 발언을 상대화하면서 방어하는 게 일상적이다. 여기에서 논쟁 차원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분식집 주인 아주머니가 철저하게 잘못 아는 지식을 교정하려 했다고 지적했다. 책에서 1+1이 2인것과 같이 분명하고 선명한 것을 그러하다라고 말한 차원이라고 지적했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사회적 효과를 면밀하게 고려하지 않고 쓴 신문 기사를 신뢰하는 대중 차원에 개입적으로 다가서는 것이 반드시 옳다고만 볼 수 없음을 알지만, 그렇다고 개입이 안될 이유도 없다고 환기시켰다. 쪼가리 지식으로 명료하게 연결되지 않은 사회상 자체에 대해서, 몇 수 위의 입장에서 지적하는 차원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승복하라"고 지적한 셈이다. 친북좌파들이 자기는 좌파의 상투성을 믿고, 그대들은 그렇게 본래대로 알라는 어법을 쓰는 것 차원의 변형을 보고 싶지 않았다.
"책과 현실은 별개 아니에요?"
현실속에 검증된 책은 현실과 별개가 아니라고 답을 했다. 그러나, 이것은 한겨레신문식으로 사고하는 아주머니에 가까운 답이되, 진짜 답은 아니다. 현실은 반드시 언어적으로 구성된다. 책도 현실을 언어적으로 구성한다. 독서급수에서 10급 미만짜리들은 책이 현실과 피드백 되지 않는다. 운동권 서적을 읽되 독서에 참맛을 알지 못했던 운동권들이 왜 골방학자 헤겔과 실천가 마르크스란 이분법을 열광했는가의 답은 분명하다. 미숙한 본질을 감추고 잘난 체하고 싶어서였기 때문이다. (우파 마저도 이러한 이분법을 즐기며 자살골을 즐기고 있는 요즘은 징그럽다.)
나는 식당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하되, 식당 아주머니에 理論을 주입한 한겨레신문식 사유와 싸웠을 뿐이다. 어느 정도 수준의 지식 쪼가리가 들어가면 탁 하고 터져 버릴 머리 보따리에, 우파의 강한 계몽조가 들어가기는 불가능하기 만큼 어렵다. 사실과 허구의 이분법으로 친북좌파에 어떠한 지식정보만 던져 주면 바로 제 정신들게 한다는 차원은, 사람 마음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이다. 치매 환자에 제 정신들게 하기 요법처럼, 다방면에서 전형적인 우파의 기억이 떠오르도록 문화 컨텐츠가 자리해야 한다. 국민들을 좌파에 물들도록 적극적으로 조장(?)한 文弱이론은 하루 빨리 퇴장되어야 한다. 공산당 이론은 대중들의 자발성 사유를 사실상 부정한다. 대한민국 사회는 표현의 자유가 중시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이다. 우리 사회의 근본 체제를 소리소문 없이 부정하는 움직임이 있다면, 학연이 어떻게 되든 간에 공개적인 차원에서 허위성을 드러내야 옳을 것이다. 건전지를 꽂으면 바로 작동되는 차원으로, 지식정보가 자리하지 않음을 아는 차원에서, 지속적 차원의 작업이 가능할만큼의 계획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3. 원두 커피와 클래식 라디오를 즐기는 식당 주인 아주머니와 386 좌파들의 공통점
나는 맥스웰 커피 매니아이다. 원두 커피는 마실 기회가 많았지만 입에 안 와닿는다. 원두 커피 사마시라고 선물을 한 바 있어도, 나는 여전히 맥스웰 커피를 마신다.
클래식 라디오도 그러하다. 2년 이상 지속적으로 클래식 라디오를 청취했다. 그런데, 일주일 마다 한번씩 나오는 음악이 번갈아 나온다는 사실을 알 뿐, 멜로디와 곡목과 작곡자가 도무지 외워지지 않는다. 음악을 즐기기 보다 너무 적막한 시간에 텔레비젼 켜놓는 심리로 들었던 것이다.
원두 커피와 클래식 라디오는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으로 이야기할 때, 문화적 계급의 하나의 상징일 수 있다. 내가 노력하려 해도 그 쪽에 낯설으며, 꽤나 익숙한 바탕에 있는 차원은, 무의식에서 의식하는 위치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원두커피를 권하면서 진지한 호의를 보이려는 차원에, 그 아주머니에게 "꼭같은 평등(?)"이 자기에게 멈춰진 것을 느꼈다.
386 좌파들의 모든 사고는 외부에서 주입되었고, 성찰적 사유는 앞서 있다는 차원으로 멈추어 있다. 식당 주인 아주머니가 한때 분명히 대학가에서 운동권 서적을 좋아했던 자존심 강한 인문학 전공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386 학생운동권의 주장 비슷하게 '쪼가리 지식'이며 그것 차원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 무죄인 상황이다. 외부에서 주입된 사고를 복면복창하는 상황에 대해서, 무작정 힘으로 뿌리를 뽑는 식의 접근은 절대로 안된다.
주입된 사고를 허깨비처럼 말하며, 설익은 사고 자체를 들으라고만 하면서, 단 한번도 진정하게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차원. 설익은 사고에 대한 자기의 감정이입의 현실성을 좋아하며, 단 한번도 만물의 주인이 하나님이라 믿지 않는 차원.
386세대들의 대다수는 스스로 성찰적 사유를 할 기회가 제도적으로 차단되었다. 중심 소수의 친북좌익 빼고는 '386뻥쟁이'로서 전부가 사기 당한 청춘이다. 386세대 중에서 운동권 선배들에 의사무능력 상황에서 강박에 의해서 이념을 선택하여 수십년 간 코끼어 살아온 사람들이, 자기 인생에서 엄청난 영역을 떼어낼 용기를 가질 사람은 많지 않다고 본다.
첫댓글 메리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