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데없는 외침에 관우가 바라다보니 말을 달려오는 사람은 다름아닌 손건이었다. 관우도 말을 달려 마중을 갔다.
“여남에서 헤어진 뒤로 소식이 없었는데, 그동안 어찌 지냈소?”
“장군이 여남에서 떠난 뒤에 유벽과 공도가 다시 여남 땅을 빼앗았습니다. 유벽과 공도는 주공과 함께 조조를 치길 원해서 저는 다시 주공을 뵈러 하북으로 왔습니다.”
손건이 말을 끊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소?”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하북의 장수들은 서로 모함하고 시기하여 사분오열되어 있습니다. 전풍은 옥에 갇혀 있고 저수는 요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심배와 곽도는 서로 자기 방안이 옳다고 우기는데 원소는 단안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주공께 하북을 잠시 벗어나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공께서는 제 간언을 받아들이셔서 지금 여남에 가 계십니다. 저는 장군께서 이런 사실을 모르고 원소에게 갔다가 혹 해를 당할까 걱정해서 찾아가는 중이었습니다. 다행히 하늘의 도움이 있어서 이곳에서 늦지 않게 뵙게 되었습니다.”
관우는 크게 기뻐하고 손건을 두 부인에게 안내했다. 감부인이 현덕의 근황을 묻자 손건이 다시 한번 이야기를 했다.
“원소가 이미 주공을 두 번이나 죽이려고 했습니다만 무사히 몸을 피해 여남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 가시면 주공을 뵐 수 있습니다.”
두 부인은 현덕이 무사하다는 말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관우는 일각을 지체하지 않고 다시 강을 건넌 뒤에 급히 여남으로 떠났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한떼의 군사들이 추격해 오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관우는 수레를 보내고 길을 막은 채 군사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관운장! 거기 서라!”
크게 고함을 지르는 장수는 애꾸눈의 하후돈이었다. 관우는 두려워하지 않고 하후돈과 200여 기병을 기다렸다. 하후돈이 다가오자 관우가 소리쳤다.
“원양(하후돈)이 나를 쫓는 것은 대장군의 넓은 도량을 훼손하는 행위란 것을 모르시오?”
“운장은 감히 대장군의 장수들을 무단으로 죽이면서 이곳까지 왔다. 더욱이 진기는 내가 아끼는 장수인데도 죽였으니, 사람을 무시하는 게 정도를 넘어섰다. 내가 너를 잡아 주공께 바쳐 처분을 물을 것이다.”
하후돈이 창을 휘두르며 달려들려는 순간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하후 장군은 창을 거두시오!”
후방에서 말을 달려온 사자가 하후돈 앞에서 말을 세우더니 품안에서 문서를 꺼내 하후돈에게 바쳤다.
“대장군께서 관 공의 길을 막지 말라고 명령하신 문서입니다.”
하후돈이 문서를 읽어보고는 사자에게 물었다.
“주공께서는 관운장이 관문을 지나며 장수들을 죽인 사실을 아시느냐?”
“모르실 겁니다.”
“그렇다면 더 말할 것이 없다! 덤벼라, 운장!”
관우도 화를 내며 말했다.
“내가 널 두려워할 줄 아느냐!”
하후돈은 한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무술 실력은 더 늘어난 것 같았다. 관우도 정신을 가다듬고 하후돈과의 대결에 임했다. 불꽃튀는 접전이 십여 합에 이르렀을 때 또 싸움을 멈추라는 외침이 터져나왔다. 두 사람이 떨어지자 새로 나타난 사자가 하후돈에게 다시 문서를 전했다.
“이것은 관문을 지키는 장수들에게 관운장을 막지 말라고 전하신 문서구나. 그럼 주공께서는 관운장이 관문의 장수들을 죽인 사실을 아셨느냐?”
“그것은 모르실 겁니다.”
하후돈은 그 말에 다시 말을 돌려 관우에게 달려들었다. 관우도 피하지 않고 맞상대를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또 방해꾼이 나타났다. 이번에 나타난 사람은 단순한 심부름꾼이 아니었다. 장료가 직접 온 것이다.
“문원이 무슨 일이오?”
“주공께서 운장이 관문의 장수들을 죽인 것을 알고 저를 보내셨습니다. 운장을 그냥 보내주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공께서도 진기가 죽은 것은 모를 것이오. 진기는 채양의 조카로 내게 특별히 돌봐달라 부탁한 사이였소. 나는 이 일을 그냥 넘어갈 수 없소.”
“주공이 한없는 도량을 발휘하셨으니 그 뜻을 지켜주십시오. 채양 장군은 주공의 뜻을 거슬렀다가 남양으로 내려갔으니 이를 이해할 것입니다.”
장료가 조조의 뜻이라 강하게 밀어붙이자 하후돈도 더 이상 장료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결국 물러나고 말았다. 장료가 관우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째서 여기에 계십니까?”
“형님이 원소를 이미 떠났다고 하더군. 이제부터 천하를 주유하며 형님을 찾을 생각이야.”
“유황숙의 소식을 모른다면 차라리 저와 함께 돌아가시지요?”
“그럴 수는 없겠네. 대장군께는 이번 일들은 내 본의가 아니었다고 전해주기나 하게.”
장료와 아쉬운 작별을 한 관우는 다시 수레를 호위하며 여남을 향해 남하를 계속했다. 때가 장마철로 접어들어 종일 비가 오는 가운데 황야를 가야 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행히 며칠 되지 않아 장원을 만나 숙박을 청했다. 주인이 일행의 내력을 알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장원의 주인 곽상(郭常)입니다. 선대로부터 대대로 이곳에 살고 있는 토박이지요. 장군의 높은 이름을 늘 우러르다가 오늘 뵙게 되니 참으로 기쁘기 한량 없습니다.”
곽상은 양을 잡아 관우 일행에게 대접을 하고 두 부인은 후당으로 모셔가 편히 쉬게 배려를 했다. 모닥불을 따로 피워 비에 젖은 행장을 말리게 하고 관우에게는 따로 주안상을 올렸다. 말들까지도 주인이 알뜰히 보살펴주어 관우가 크게 감탄을 했다.
저녁이 되자 서너 명의 젊은이가 장원으로 들어왔다. 곽상이 그중 어려보이는 젊은이를 초당으로 불렀다.
“관 장군님이시다. 인사를 올려라.”
곽상은 그 젊은이가 자기 아들이라고 말했다. 사냥을 나갔다가 이제야 돌아온 것이라고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아들이 인사를 하고 물러난 뒤에 관우는 왜 안색이 좋지 않느냐고 물었다.
“늦게 본 자식이라 귀엽게 키웠더니, 농사는 짓지 않고 사냥을 다니며 무뢰배들과 어울리는 것만 좋아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사냥을 좋아하더라도 무예만 착실히 닦는다면 이 난세에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냥을 다닌다고 무예를 익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허랑방탕한 생활을 할 뿐이지요. 부끄럽습니다.”
관우는 다시 곽상을 위로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한밤중에 갑자기 후원에서 적토마의 울음소리가 나는 바람에 관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건과 함께 무슨 일인지 보러갔더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가만 보니, 적토마를 돌보는 종자가 곽상의 하인들과 다투고 있었다. 관우가 싸움을 말리고 자초지종을 들었다.
“저 자가 적토마를 훔치려들다가 뒷발에 채였습니다.”
종자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곽상의 망나니 아들이 가슴을 쥐고 땅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큰 소리가 나는 바람에 하인들이 몰려 왔습니다. 저 자가 쓰러진 것을 보더니 다짜고짜 제게 매질을 하려 들어서 다투던 중이었습니다.”
관우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들면서 호통을 쳤다.
“감히 네 놈이 내 말을 노려!”
그때 곽상이 달려와 관우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제게는 하나뿐인 자식이니 제발 제 얼굴을 보아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곽상이 울면서 사정을 하자 관우도 들었던 칼을 내려놓았다.
“자식을 가지고 아버지를 판단하지 말라는 옛말이 그르지 않군요. 곽 어르신을 보아 용서하겠습니다.”
다음날 날이 밝자 곽상 부부가 다시 관우의 처소 앞으로 와서 용서를 빌었다.
“아들을 데려오십시오. 제가 따끔하게 훈계를 해서 자세를 바로잡아 놓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벌써 지 못된 친구들과 장원을 나가버렸습니다.”
관우는 어쩔 수 없어서 아침을 먹고 장원을 나섰다. 30여 리쯤 갔을 때 말을 탄 두 사람이 백여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길을 막았다. 가만 보니 말탄 두 명 뒤로 곽상의 아들이 보였다. 말탄 자중 누런 수건을 머리에 두른 자가 말했다.
“천공장군 장각의 부장 배원소(裴元紹)다. 말을 내놓고 가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관우는 어이가 없어서 껄껄 웃었다.
“장각이 죽은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황건적 놀음이냐? 너는 장각 밑에서 관운장의 이름도 듣지 못했느냐?”
“관운장이 얼굴이 붉고 수염이 길다는 말은 들었다. 너는 누구냐?”
그 말에 관우는 수염 주머니를 풀어서 긴 수염을 늘어뜨렸다. 그러자 배원소는 얼른 말에서 내려 관우 앞에 엎드렸다.
“저는 장각이 죽은 뒤로 이곳에서 산적 노릇을 하면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이 놈이 와서 천리마가 있으니 빼앗자고 해서 부하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관 장군의 말인줄 알았다면 절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말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때서야 돌아가는 사태를 짐작한 곽상의 아들도 관우 앞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했다. 관우는 곽상을 생각하여 그 아들을 내쫓기만 했다. 머리를 싸매고 곽상의 아들이 달아나자 관우는 배원소에게 물었다.
“너는 내 얼굴은 모르면서 내 이름은 어디서 들었느냐?”
“여기서 이십여 리를 가면 와우산(臥牛山)이 있습니다. 그곳에 주창(周倉)이라는 호걸이 있습니다. 관서 출신인데 천근을 거뜬히 들어올리는 장사입니다. 얼굴이 검붉고 메기같은 수염을 기른데다가 기골이 장대합니다. 본래 지공장군 장보 밑의 부장이었습니다. 장보가 죽은 뒤에 와우산에서 산적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 주창한테서 장군의 명성을 자주 듣고 꼭 한번 뵙기를 바랬습니다.”
관우가 그 말에 웃으며 말했다.
“녹림은 호걸이 있을 곳이 아니다. 이제 사도(邪道)를 버리고 정도(正道)로 돌아오라.”
“그러겠습니다.”
배원소가 거듭 절을 하는데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배원소가 바라보더니 말했다.
“주창이 오고 있습니다.”
과연 얼굴이 질그릇처럼 검붉은 사내가 말을 타고 달려왔다. 주창은 관우를 보자 깜짝 놀라며 말했다.
“관 장군이 아니십니까?”
“그렇다.”
주창은 말에서 펄쩍 뛰어내려 인사를 올렸다.
“주창이 인사 올립니다.”
“나는 그대를 본 적이 없는데, 그대는 나를 어찌 아는가?”
“저는 영천에서 장군의 신위를 목격한 바 있습니다. 그때 벌써 따르고 싶었으나 황건의 무리에 속해 있어서 감히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천운이 닿아 장군을 뵈었으니 꼭 모시도록 해 주십시오. 졸병으로라도 삼아만 주시면 채찍을 들고 말을 몰아 장군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주창의 말에 진심이 담긴 것을 알 수 있었다.
“네가 나를 따른다면 부하들은 어떻게 할 것이냐?”
“장군께서 거둬만 주신다면 저를 따라 올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부하들이 외쳤다.
“장군을 따르겠습니다.”
관우는 두 부인에게 가서 어찌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감부인이 말했다.
“전일 요화가 따르고자 했지만 아주버님이 거절했습니다. 이들도 황건적의 잔당이라는 점은 똑같은데 왜 받아들이려 하십니까? 하지만 아주버님이 꼭 받아들이시겠다면 뜻대로 하십시오.”
관우는 그 말에 주창에게 당분간 이곳에서 기달려달라고 말했다.
“내가 형님을 모시게 되면 사람을 보내 너희를 부르겠다.”
“부하들이 따르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저 혼자만이라도 장군을 모시겠습니다. 부하들은 모두 배원소가 거느리고 있으면 됩니다.”
주창만 쫓아오겠다고 하자 부인들도 거절하지 않았다. 주창은 배원소에게 뒷일을 당부하고 관우를 따라갔다.
일행은 며칠 후에 한 산성 곁을 지나게 되었다. 관우가 근처 주민에게 성 이름을 물었다.
“여기는 고성(古城)이라고 하는 지방입니다. 몇달 전에 장익덕이라는 장군이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나타나 현관(縣官)을 몰아내고 이곳을 점령했습니다. 몇 달간 군마를 사들이고 군량을 비축하고 사람들을 훈련시키더니 이제는 4, 5천 쯤 되는 병력을 거느리고 있답니다.”
“내 아우가 여기에 있었구나!”
관우는 즉시 손건을 불러 장비를 찾아가게 했다. 자신은 두 부인을 호위하며 장비가 영접 나오기를 기다렸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장비가 나는듯이 말을 달려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관우도 기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장비를 향해 말을 달렸다.
“이놈! 내 창을 받아라!”
장비가 그렇게 외치며 장팔사모를 내질렀다. 관우는 깜짝 놀라 몸을 피했다.
“무슨 짓이냐! 도원에서 맺은 결의를 잊어버린 게냐!”
“잔말 마라! 네 놈을 죽이지 못하면 나는 사내가 아니다!”
관우는 어안이 벙벙해서 장비를 바라보았다. 대체 장비가 왜 이렇게 사납게 구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