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펑! 펑!
아스라이 하늘을 뒤덮던 별님들이 오늘 만큼은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칼테온의 귀족들이 연회를 즐길 때 마다 쏘아 올려대는 폭죽 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전체가구가 채50가구도 되지 않는 블롬드 마을 사람들의 환호성을 지르게 만드는데에는 충분했다.
“아- 이렇게 올해의 예산이 날아가는 구나.”
귀족들이야 차고 넘치는게 돈이고, 사치를 위한 소비가 주를 이루지만, 블롬드 마을 사람들의 형편은 그렇게 녹녹치 않다. 오죽하면 하루 일해서 하루 먹고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외부에서는 블롬드를 ‘버림받은 땅’ 이라고 할 정도로 지리적 위치가 좋지 않다. 말이 좋아 좋지 않다지 거의 최악이라고 할 수 있다. 블롬드를 가운데에 두고 두개의 큰 협곡이 둘러 싸고 있는데, 워낙 길이 험하고 밤에는 협곡 안의 기온이 영하30도 까지 내려가서 모험가들이 야영을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무리다. 게다가 몬스터 까지 출몰 하는 경우도 빈번하게 있으니 외부에서의 출입은 손에 꼽힐 정도이다. 하나 더 보태자면 정말 눈물나도록 우습게도, 협곡 바로 옆에는 광활한 평야가 눈부시도록 이어져 있어서 반대편으로 가는 것 또한 굳이 이곳을 넘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클로에, 썩 즐거워 보이진 않는구나”
“험프리 영주님!”
안쓰러울 정도로 깡마른 몸에 비하여 하얗게 샌 머리는 풍성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하여, 마을의 꼬맹이 들은 험프리를 민들레영주님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축제를 왜 여는 것 같다고 생각하니?”
“그거야 풍요와 다산의 신인 로렌하이 여신님께 올 한해도 잘 부탁한다는 의미에서죠. 그래서 매년 망월(望月)이 로렌하이 여신님의 목상(木像)을 완전히 비출 때 축제를 열죠. 뭐, 지금은 재정상의 문제로 4년에 한 번으로 횟수가 줄었지만, 저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한 번 축제를 열고나면 일주일은 마른 나뭇잎 같이 푸석푸석함 렘보스빵과 수액만 먹어야 한다구요. 따뜻한 우유는 기대 할 수도 없구요”
“확실히, 바론의 렘보스 빵은 나같은 노인네의 이가 견디기 힘든 음식이긴 하지”
험프리가 검지로 자신의 이를 가르키면서 눈을 찡그리며 클로에의 말에 수긍했다.
“삼존이 영주님께도 그 무식하게 딱딱한 벽돌을 가져다 주었어요?”
“허허! 벽돌이라니, 바론이 들으면 굉장히 상심하겠어”
“레타 협곡에 뛰어들 거라고 난리를 치겠죠.”
험프리는 기분이 좋은 듯 잘 잘 터져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크게 내지르며 호탕하게 웃었다. 클로에도 덩달아 피식 피식 웃더니 어느새 어린아이처럼 깔깔깔 웃어 재꼈다. 화려하게 마을을 물들이며 터지는 폭죽 아래에 아주 어울리는 웃음 이였다.
“이 축제는 말이다.”
한참을 웃던 험프리가 눈 안 가득 마을을 품은채 나지막히 얘기했다.
“사랑을 위해 열리는 축제이기도 하지”
“사랑이요?”
“이 작은 마을이 오랫동안 유지 될 수 있었던건 바로 사랑때문이라네, 안 그렇나?”
“푸흡, 굉장히 낭만적이세요 영주님”
“낭만은 나같은 늙은이 보단 클로에 같이 찬란한 청춘들이 갖기에 더욱 어울리지. 하지만, 예외도 있다네”
험프리의 눈짓에 클로에는 시선을 돌렸다. 그 끝에 닿는 것은 다름 아닌 클로에의 유일한 보호자 이자 가족인 바론이였다. 바론은 주점의 휘튼에게 자신의 근육들, 아니 근육이 있던 자리의 팔 한쪽을 내 보이며 잔뜩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휘튼은 적극적으로 바론의 대쉬에 답해주지는 않았지만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 것을 보아, 마음이 없는 건 아닌 것 같다.
“허허! 아홉 살 연상의 레이디 라니. 취향 한번 확실하구만!”
“으아앗!”
“아직 열 여덟밖에 안됐지 않나? 마을을 위해 사랑을 찾아야지 클로에”
“영주님!”
“음식도! 음악도! 청춘도 있으니, 마음껏 춤추고 마음껏 사랑하게나”
험프리가 허리를 밀어 버리는 바람에 춤으로 열기가 가득한 곳에서 클로에는 어리둥절 서있게 되었다. 그러다 짝을지어 신나는 음악에 맞춰 발을 구르는 사람들 때문에 이리 저리 치일 뻔 하며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클로에의 손목을 잡더니 휙! 하고 강한 힘으로 당기였다.
“에녹?”
“뭘 멍청하게 서있는거야? 춤추고 있는 사람들 한테 방해잖아”
“멍청하긴 누가 멍청하다는 거야?”
“그거야, 나한테 안겨있는 레이디지. 춤출래?”
“그런건, 춤이 시작되기 전에 물어 보는거야 에녹”
클로에는 에녹을 따라 신나게 발을 구르며 춤을 췄다. 음악은 멈출줄을 몰랐고 웃음소리 또한끊일줄 몰랐다. 여기저기 포도주의 알싸한 향이 코끝을 감돌았고, 즐거운 땀냄새가 가득 배어있었지만, 누구 하나 맡질 못했다. 클로에는 정신없이 에녹과 춤을추는 와중에 멀리서 험프리의 모습이 보였다. 잠시 부끄러워졌지만, 험프리가 살짝 윙크해 보이고 먼저 등을 돌렸다. 클로에는 험프리에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걸어갔다. 숲으로.. 숲으로.. 작은 등불이 옹기종기 메달려 환한 빛을 뿜어내는 곳을 떠나 우거진 숲으로 그는 홀로 걸어갔다.
망월의 빛은 끝났다. 별님도 자리를 되찾았고, 음악도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단, 미쳐 치우지 못한 축제의 흔적들이 오늘 밤의 일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