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영화산업의 재건을 이끈 닛카쓰 사장 호리 큐사쿠
https://youtu.be/qzrgWOLT_Nc?si=J4zWW9vkcODN-rF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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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물에 대한 평가
호리 큐사쿠(1900~1974)는 일본 영화산업의 발전을 이끈 대표적인 기업 경영자이다. 전후 일본의 대표적인 영화사인 닛카쓰(日活)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도쿄부에서 호리 히사시치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여덟 살 때 부친을 여의는 불행을 겪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모친 후사가 홀로 그를 양육하였으며 집안에는 별다른 재산이 없어 생활은 넉넉하지 못하였다. 모친은 작은 잡화상을 운영하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는 가운데서도 아들의 교육만큼은 포기하지 않았고 이러한 희생과 노력 속에서 호리 큐사쿠는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오쿠라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도호쿠 지방의 작은 탄광에서 회계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증권회사와 호텔업계에서 근무하며 경영 실무를 익혔고, 산노회관 전무이사를 거쳐 도쿄가스 전무이사이자 당대의 재계 거물인 마쓰카타 오토히코의 비서로 활동하면서 재계 인사들과 폭넓은 교유를 맺었다. 1934년 미국 출장 중이던 마쓰카타 오토히코의 권유로 닛카쓰 경영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이듬해 닛카쓰에 입사하였다. 닛카쓰에 입사한 당시 회사는 심각한 경영난에 빠져 있었다. 부채가 누적되어 자금 사정이 악화되었고, 촬영소는 빗물이 새어 촬영장 바닥에 천을 깔고 촬영할 정도로 시설이 낙후되어 있었다. 그는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과감한 결단을 내려 기존의 무성영화 중심 제작 방식을 버리고 최신 유성영화 체제로 전환하였다. 또한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다마가와에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최신식 촬영소와 현상소를 건설함으로써 닛카쓰의 경쟁력을 회복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는 영화사업에만 머물지 않고 부동산 개발에도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였다. 1947년 히비야공원 인근의 부지를 매입한 뒤, 미군이 사용하던 부지를 반환받기 위해 미(美)군정(軍政)과 일본 정부를 끈질기게 설득하였다. 수많은 행정 절차와 규제를 극복한 끝에 부지를 확보하였고, 그 자리에 닛카쓰 국제회관을 건설하여 호텔과 사무실을 갖춘 국제적인 복합시설로 발전시켰다. 이는 전후 일본의 대표적인 민간 부동산 개발 사업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으며, 닛카쓰의 안정적인 수익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영화 제작의 세부 업무에는 직접 간섭하지 않고 전문 인력에게 맡겼으며 자신은 회사의 경영과 사업 운영에 전념하였다. 또한 전무이사 에모리 기요키로와 협력하여 이시하라 유지로, 고바야시 아키라, 요시나가 사유리 등 많은 인기 배우를 배출하며 닛카쓰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2 명조(命造) 분석(分析)
이 명조는 임수(壬水) 일간이 미월(未月)에 출생하였는데 미토(未土) 지장간에서 투간한 자가 없으므로 정관격(正官格)을 이룬다. 명리학적으로 보면 정관은 년간의 편인(偏印)을 생조하고, 편인은 다시 일간을 생하는 관인상생(官印相生)의 구조를 이룬다. 또한 일간의 왕한 수기(水氣)는 묘목(卯木) 상관(傷官)으로 설기되고 상관은 다시 재성(財星)을 생한다. 이어 오미합(午未合)으로 재성이 관성에 귀속되므로 오행이 구족(具足)하여 생생불이(生生不已)의 형상을 이룬다. 이처럼 오행의 상생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구조는 그가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부(富)와 명(名)을 함께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오미합(午未合)은 이 팔자의 핵심으로 재성이 정관으로 변하는 화재위관(化財爲官)의 형상이며 곧 재생관(財生官)을 의미한다. 이는 사업을 통해 이룬 재물이 다시 사회적 지위와 명예로 이어지는 구조이다. 더욱이 그 재성은 상관이 먼저 생한 것이므로 상관생재(傷官生財)와 재생관(財生官)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뛰어난 사업 감각과 경영 능력을 발휘하여 조직을 크게 성장시키는 명조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닛카쓰 영화사에 입사한 이후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어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기업으로 발전시켰는데, 이는 상관생재 후 재생관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현실에서 그대로 발현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런데 지지에서는 오미합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자오충(子午沖)이 발생하여 자수(子水)의 근기가 약해졌으나 북방 수운(水運)에 이르러 임수의 뿌리가 견고해지면서 지지의 기반이 안정되었다. 이러한 운의 흐름 속에서 그는 기업 경영 능력을 크게 인정받았는데 45세에 닛카쓰 사장, 50대에는 닛카쓰 부동산 사장에 취임하는 등 경영자로서 최고의 업적을 이루었다. 이는 북방 수운에서 임하면서 일간 임수가 근기를 얻어 명조의 역량이 본격적으로 발휘된 결과이다. 또한 년간에 투출한 경금(庚金) 편인을 상신으로 삼는 팔자이므로 초년기에 탄광 회계사로 근무하며 자격과 기술을 활용한 것은 명리적으로 매우 바람직한 선택이었다. 이는 곧 편인을 활용한 관인상생(官印相生)의 길을 걸은 것으로 나타난 것이니 이 팔자가 가진 편인의 기운을 사회적 성취로 치환하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3 호리 큐사쿠(堀久作) 주요 연혁
1900년(庚子) 7월 8일 : 1세에 도쿄부에서 출생하였다.
1908년(戊申) : 8세에 부친 호리 히사시치를 여의고 모친 후사의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1921년(辛酉) : 21세에 오쿠라고등상업학교(현 도쿄경제대학)를 졸업하였다.
1921년(辛酉) : 졸업 후 도호쿠 지방의 탄광에서 회계사로 근무하였다.
이후 : 산노회관 전무이사를 역임하였으며, 도쿄가스 전무이사였던 마쓰카타 오토히코의 비서로 활동하였다.
1934년(甲戌) 7월 : 34세에 미국 출장 중이던 마쓰카타 오토히코의 권유를 받아 닛카쓰 경영에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1935년(乙亥) : 35세에 닛카쓰에 입사하여 본격적으로 경영에 참여하였다.
1945년(乙酉) : 45세에 닛카쓰 사장에 취임하여 전후 회사의 재건을 이끌었다.
1949년(己丑) : 49세에 닛카쓰를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시켜 경영 기반을 강화하였다.
1953년(癸巳) : 53세에 에노시마수족관 사장에 취임하였다.
1955년(乙未) : 55세에 닛카쓰부동산 사장에 취임하였다.
1957년(丁酉) : 57세에 일본교육방송 이사에 취임하였다.
1960년(庚子) : 60세에 아마기컨트리클럽과 고쿠라닛카쓰회관 사장에 취임하였다.
1964년(甲辰) : 64세에 영화 구로베의 태양의 제작 및 배급 문제를 둘러싸고 닛카쓰의 경영 방침을 조정하여 영화 제작에 협력하였다.
1971년(辛亥) 6월 : 71세에 약 26년간 재임한 닛카쓰 사장직에서 물러나 상담역에 취임하였다.
1974년(甲寅) 11월 14일 : 74세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