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 2장 인형극 ① |
2장 인형극: 연출가와 꼭두각시와 구경꾼들
김금식의 앙심: ‘법에의 복수’
김이만 씨는 요절한 동생 기철 씨가 간직해왔던 재판 기록과 手記(수기)를 불태워 없애버림으로써 그 지긋지긋한 기억을 지워버리려 했다. 나는 거꾸로 이 기억을 되살려내려 한다. 관계자들의 증언과 기억의 파편들을 주워 모으고 기록의 조각들을 찾아내 끼워 맞춤으로써 그 사건을 복원할 것이다. 그리하여 김기철 씨를 요절낸 ‘범인들’을 가려낼 것이다.
십 년도 넘게 흐른 옛 사건을 새삼 들춰내어 누구를 나무라고 괴롭히려는 게 아니다. 이 사건 속에 파묻힌 개인체험을 우리 사회의 공동체험으로 승화시켜 거기서 어떤 교훈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그리하여 그런 불행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어둠 속에서 색이 바래진 옛 기억과 기록들을 다시 햇빛 아래 내어놓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피해자들의 아픔을 되살리자는 뜻이 아니라 그 고통을 나누어 갖자는 의도이며, 수사관이나 기자들의 잘못을 캐내려는 게 아니라 그 잘못을 오늘과 내일의 수사관들과 기자들 앞에 하나의 경고로 세워두자는 뜻이다. 이것은 ‘흘러간 사건을 되씹는 것이 오늘에 와서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무고한 전경렬 씨를 범인으로 지목했다가 혼이 났던 경찰과 기자들은 전 씨를 풀어준 1967년 11월 초순 이후엔 수사나 취재에 다 같이 시들해졌다. 경찰은 수사본부 요원들을 서부산경찰서 자체요원만으로 크게 줄였다. ‘우리나라 경찰은 한두 달 사이 초장에 범인을 못 잡으면 수사를 사실상 포기한다’고 믿는 사건기자들도 ‘근하 사건은 이걸로 끝이다’고 생각하며 사건에 쏟던 신경을 늦추기 시작했다. 해가 바뀌자 근하 군 살해사건은 ‘김신조 일당의 서울 침투사건’이나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같은 잇단 대사건에 가려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었다.
부산교도소 4舍(사) 10호실 감방―. 형사와 기자들이 손을 떼려고 하는 근하 사건에 뒤늦게 열을 올리고 있는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창살 밖에서 찾아오는 초봄의 溫氣(온기)를 느끼며 하나의 드라마를 구상하고 있었다.
김금식.
그때 서른세 살이었던 이 건장한 남자는 폭력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혐의로 징역 여덟 달의 확정판결을 받고 복역 중이었다. 그는 자신이 억울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술김에 치고받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기는 얻어맞은 쪽이다. 그런데도 경찰은 상대를 풀어주고 자기만 구속했다. ‘머리 좋고 공부도 많이 한’ 검사와 ‘현명한’ 판사도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않았다. 자기가 폭력 前科者(전과자)이기 때문에 이런 대우를 받는다고 그는 자기 나름대로 풀이했다.
“나는 철석같이 법을 믿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원망했다. 그래서 경찰, 검찰, 법원을 다 함께 농락하여 망신시킬 각본을 쓰기로 결심했다. 나를 믿어주지 않는 ‘법’에 복수하기로 한 것이다.”(<국제신보> 1969년 12월6일 김금식 씨의 수기)
그는 1968년 3월8일 교도소 안에서 파는 봉함엽서 한 장을 구했다.
<금일도 업무 수행에 얼마나 수고하십니까. 김근하 사건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현재 폭력죄로 부산교도소에 수감 중입니다. 4사 10호실에 있는 김금식이란 사람은….>
서부서 수사계장 앞으로 쓴 이 엽서에서 금식 씨는 “그 사람(김금식)은 근하 군을 살해한 뒤 수사망을 피하려고 일부러 폭행을 해 복역 중이다”고 자신을 고발했다. 물론 누가 쓴 편지인지 모르게 위장했다. 김금식 씨는 이 편지를 기소유예로 출감하는 閔(민) 모 씨에게 부탁하여 부치도록 했다. 정식으로 부치려면 교도소 교무과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
여자 대접받으며 수사 협조한 재소자
<엽서를 보낸 지 일주일쯤 지난 3월16일, 나는 한 사람의 방문객을 맞았다. 그는 ‘서부서 李 경위’라고 자기소개를 한 뒤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내가 띄운 엽서의 사본이었다. 나는 일부러 당황한 척했다. 그는 정중하게 ‘수사에 협조해달라’고 부탁한 뒤 돌아갔다. 사흘 뒤 그는 다시 찾아왔다. 그제야 나는 강요에 못이긴 척 주워댔다.
‘몇 달 전 서면 크라운 바에서 친구 한영식과 술을 마셨는데 이 자리에서 한영식은 스무 살가량 난 정기영을 소개해주었다. 한영식은 한 권의 책을 갖고 있었는데 그 속에 종이쪽지 한 장이 끼어 있었다. 내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각서라고만 말하고 <킬러>란 영화를 보았느냐고 되물었다. 보았다고 했더니 이것이 그 영화와 같은 청부살인에 대한 각서인데 그 사건은 대신동에서 일어난 것으로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이라고 말하더라….’
내 말을 듣고 그는 한영식의 주소를 물은 뒤 만족한 얼굴로 돌아갔다. 다음날, 낯선 형사 두 명이 찾아왔다. 李 경위와 함께 가르쳐준 주소에 가서 찾아보았으나 한영식이란 사람은 없더란 것이었다. 있을 턱이 없다. 한영식이란 내가 교도소를 드나들며 알게 된 업무상 과실치사죄의 운전사 이름이며, 내가 되는 대로 주워댄 것이니까. 나는 한을 만나려면 서면 대한다방의 오 마담한테 물어보라고 했다. 그들은 연 600명(그들의 말)의 형사들을 동원, 오 마담을 찾았으나 허탕을 칠 수밖에. 결국 경찰은 골탕만 먹고 손을 뗐다. 그 대신 손을 뻗어온 사람이 김태현 부장검사였다.>(<국제신보> 1969년 12월7일)
김태현 검사.
그때 마흔네 살이었던 그의 이름 앞엔 늘 ‘유괴사건 수사의 명검사’란 설명이 붙어 다녔다. 경남 삼천포가 고향인 金 검사는 1943년 일본 중앙대학교 법학부를 學兵(학병) 복무로 중퇴했다.
1952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 부산지검, 서울지검, 부산지검 진주지청에서 근무했다. 1956년 진주에서 일어났던 진주여고 교감 아들 조인걸 군(당시 일곱 살) 유괴살해사건을 해결했다(피고인들은 복역 중에 조작이라 주장, 재심 신청)하여 유명해지더니 1967년엔 진주 춘우 군 유괴살해사건 범인도 경찰을 제치고 단박에 잡아들여 민완 검사의 名聲(명성)을 더욱 굳혔다. 그는 외모에서부터 민완 수사 검사의 분위기를 풍겼다. 훤칠한 키, 정력적인 얼굴, 안경 너머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눈매, 빈틈없는 말솜씨….
그와 가까웠던 ㅅ 기자는 김태현 씨를 “검사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한번 밀고 나가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집념의 化身(화신) 같은 사람이었다”고 평했다. 또 다른 기자를 “그를 대하면 찬바람이 날 정도로 매섭게 느껴졌으나 기자들을 대하는 통이 크고 잔정이 많아 우리와는 퍽 관계가 좋았다”고 기억했다.
요컨대 그는 김금식 씨가 깔아놓은 함정에 빠지기에는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 같았다.
<1968년 4월 중순 어느 날 오후 나(김금식)는 김태현 검사에게 불려갔다. 안경 속의 눈빛은 매서웠으나 퍽 인정스레 대했다. 그는 진주 공사장 유괴살해사건(인걸 군 사건), 춘우 군 사건, 대청동 태웅 군 사건에 관한 얘기만 하고 근하 군 사건에 대해선 한 마디도 비치지 않은 채 저녁을 불러다 먹인 뒤 돌려보내 주었다. 이런 식으로 만난 것이 일곱 번.
8일째 만난 날엔 내 쪽에서 좀이 쑤셔 견딜 수 없었다. 먼저 근하 군 사건의 얘기를 꺼내고 서부서 형사들에게 한 것과 꼭 같은 거짓말을 했다. 4월24일 나는 김 검사와 구영근 씨 그리고 교도관 두 명과 함께 한영식을 찾아 나섰다. 오후 열 시 조금 지나 우리는 범일동 ‘큰 소리집’이란 요정에서 술을 마시게 됐다. 나는 囚衣(수의) 차림이었다. 웃옷은 김 검사의 촉탁 구영근 씨의 점퍼를 얻어 입었다. 술을 마시며 김 검사는 한영식의 행방을 파고 물었다. 나는 적당히 얼버무려 대답했다. 술자리는 오후 11시께 끝났다. 김 검사는 현금 2000원을 쥐어 주었다. 그 뒤로 나는 일요일을 빼고는 거의 매일같이 검찰에 소환돼갔다. 그때마다 시내를 나돌며 술을 얻어 마시고 한밤중에 감방으로 돌아오곤 했다. 교도관들이 ‘복역자가 그렇게 매일 술에 취해 와서야 되겠느냐?’고 충고를 할 정도였다.
그간에 나는 세 여인을 겪었다. 첫 번째는 5월 초순 구포에서였다. 그날도 한 씨를 찾는다고 구포까지 갔는데 밤이 깊자 나는 허술한 술집의 외딴 방으로 밀어 넣어졌다. 27세가량의 아가씨가 교태를 부리며 나를 맞았다. 이즘 나는 김 검사가 내가 말하는 대로 한 씨를 찾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그는 나를 범인으로 꼽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맹목적으로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다니는 것도 그렇거니와 분에 넘치는 대접들은 자백을 받기 위한 人心(인심) 전술로밖에는 달리 해석할 수가 없었다. 5월 초순 드디어 김 검사는 내게 자백을 요구해왔다. 처음 나는 매우 당황했으나 이왕 시작한 일, 마음을 차분히 하고 자백서를 썼다.
며칠 뒤 김 검사는 ‘한영식이란 너의 친구, 김기철이 아니냐’고 물었다. 기철이는 내가 15년 동안 친했던 친구로, 한영식을 찾아다니는 동안 기철이가 무엇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한 적이 있었다. 연극에는 공연자가 필요하다. 기철은 前科(전과) 한 번 없는 양 같은 친구다. 그런 결백한 친구가 共犯(공범)으로 몰리면 나중에 혐의를 벗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아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국제신보> 1969년 12월10일)
속속 걸려드는 희생양들
1968년 5월5일 김태현 검사는 김기철 씨를 절도 혐의로 구속했다. 하루 전에 멋도 모르고 부산지검에 끌려온 ‘순덕이’ 기철 씨는 “1964년 12월에 금식이와 함께 범천공원에서 아베크 남녀가 가지고 가는 라디오 한 대를 빼앗아간 적이 있지?”란 얼토당토않은 추궁을 받은 뒤 감방에 들어가야 했다.
<열이틀이 지난 5월17일 나(김기철)에게는 두꺼운 가죽띠로 된 수갑이 채워졌다. 세수도 할 수 없고 잠을 잘 때는 모로 누워야 했다. 나는 눈알이 뒤집힐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검찰청으로 불려갔다. 검사는 ‘좀 반성해봤느냐?’고 물었다. 나는 ‘무슨 죄를 반성하란 말입니까?’하고 대들었다. 검사는 허허 웃더니 ‘너 근하 군을 죽였지!’라고 날카롭게 말했다.
‘뭐 말입니까. 한 번 더 말씀해주세요?’
나는 귀를 의심했던 것이다.
‘너는 망을 보고 금식이가 살해했지?’
‘나는 모릅니다.’
‘금식이는 했다는데 너는 잡아떼느냐?’
‘그놈은 했는지 몰라도 나는 안 했습니다.’
‘모른다’고 되풀이하는 나의 뺨에는 주먹들이 날아왔다. 이런 고초 속에 날은 밝아 나는 다음날 오전 5시께 교도소에 돌아왔다. 감방 안에서도 나는 잘 수 없었다. 내가 자기만 하면 감방 친구들이 마구 발길질을 했다. 내가 자면 그들이 단체 기합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신문 사흘째인 5월19일 검찰에 나가니 책상 위에 불고기와 정종이 한상 차려져 있었다. 그때 금식이가 들어왔다. ‘어찌 된 일이냐?’고 나는 소리쳤다. 그는 ‘면목 없다, 술이나 한잔 해라’고 힘없이 뇌까렸다. 이어서 ‘이왕 일이 탄로 났으니 영감님 앞에서 용서를 비는 길뿐이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너와 내가 근하를 죽이지 않았느냐?’고 금식은 나에게 다그쳤다. 검사는 ‘자 어때 바로 찌르니 할 말이 없지? 묻는 말에 대답하라’고 했다. 나는 시종 모른다고 했다. 입씨름은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됐다. 나는 아픈 뺨을 움켜쥐고 분함에 이를 갈았다.>(<부산일보> 1969년 7월29일 김기철 씨의 獄中 수기)
기철 씨에 이어 엮이어 든 것은 정대범 씨(당시 21세)였다. 정 씨는 당시 육군 사병이었다. ㅅ상고를 중퇴한 이 예쁘장한 청년은 유도와 당수 및 합기도 유단자였다. 고향이 밀양군 상남면인 그는 어릴 때 부모가 이혼하자 외할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기철 씨와 대범 씨의 공통점은 둘 다 배경 없는 집안 출신이란 것이었다.
정 씨는 고교생 시절 구영근 씨를 사범으로 모시고 유도를 배웠다. 기철 씨가 친구 금식 씨에 의해 이 사건에 연루된 것과 꼭 같이 대범 씨는 具 사범에 의해 하나의 配役(배역)을 떠맡게 된다.
구영근 씨는 이 해괴한 드라마에서도 특이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김태현 검사의 그림자로 불릴 만큼 줄곧 金 검사를 가까이서 도와왔었다. 진주여고 교감 아들 살해사건 수사 때는 진주경찰서 사찰계 형사로, 춘우 군 유괴살해사건에서는 경남도경 소속 형사로 김태현 검사의 수사를 보좌했었다. 근하 사건에서도 김태현 검사는 具 씨를 검찰청 촉탁으로 임명하게 하여 손발처럼 쓰고 있었다. 그는 사법 경찰관은 아니었기 때문에 수사권은 행사할 입장에 있지 못했다. 그래도 그는 사실상 수사를 하고 있었다.
<구영근 씨가 나서서 ‘韓의 친구 정기영이란 정대범이 아니냐’고 따졌다. 나(김금식)는 그가 내민 사진을 보고 반신반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대범 씨를 공범으로 확신한 모양이다.>(<국제신보> 1969년 12월10일)
이렇게 하여 끌려 들어온 정대범 씨는 ‘범행 일체’를 자백, 김금식 씨와 쌍벽을 이루는 ‘사건 해결의 협조자’가 된다.
<5월19일 오후 8시께 나(김기철)는 또 검사 앞에 끌려나갔다. 검사는 제법 너그럽게 ‘기철이, 잘 생각해봤나?’라고 말을 걸었다.
‘뭘 생각하란 말입니까?’
‘너 정대범을 알지?’
‘뭘 하는 사람입니까?’
이때 검사는 대범이를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땅딸막한 사나이가 들어서면서 손을 번쩍 쳐들더니 ‘형! 오랜만입니다’고 외쳤다.
‘네가 누구지?’
‘이 꼰대가 모른 체한다.’
나는 어이없어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때 금식이가 들어오더니 대범이라는 청년과 반갑게 인사했다. 검사는 ‘대구에 가서 기철이 네가 이 볼 박스를 샀지?’라고 호통쳤다.
‘나는 대구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옆에 서 있던 대범이가 ‘이 새끼야 몽땅 시인하고 자도록 하자’고 소리치자 금식이도 ‘기철이 너 고집이 어지간하구나. 나도 잠이 와서 못 견디겠다. 빨리 그렇다고 해라’고 했다. 나는 몽롱한 정신 속에서 ‘모르겠다’, ‘너희 맘대로 뇌까려라’, ‘그런 일 없다’고만 수십 번 되풀이할 따름이었다. 정대범이란 꼬마 친구는 누구일까, 그는 이 사건에서 어떤 역을 맡고 있으며 왜 나를 끌어넣으려 할까, 이런 생각들이 나의 흐릿한 머릿속을 스쳐갔다.>(<부산일보> 1969년 7월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