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한 차르>
- 표드르 1세의 두상 -
1584년 이반 4세가 죽자 그의 아들 표드르가 차르가 되었다. 문제는 그가 굉장히 무능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신앙심이 깊기는 했지만 그게 유일한 장점이었다. 그는 정치라는 것에 관심도 없었고, 기도와 종치기에만 열중했다.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보낸 대사는 그가 키가 작고 얼굴은 퉁퉁하고, 걸음은 항상 비틀대며, 항상 빙그레 웃고만 있다면서 그를 우둔하다고 평가했다.
그나마 그가 직접 한 일이라면 굉장히 오만했던 영국 대사를 추방해버린 사건 정도였다. 애시당초 영국과의 독점 교역에 큰 관심이 없었기에 이런 일을 저질렀는데, 기겁한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시 대사를 보내고 동맹을 제안했지만(1) 표드르 1세는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외에는 정치적인 영향력이라는 걸 행사할 생각도 하지 않았고. 이런 판국이라 처남인 보리스 고두노프가 무능한 차르를 대신해서 사실상 국정을 전담했다.
- "님. 님이 나 대신해서 하세요." -
보리스 고두노프는 일단 슈이스키 가문 등 유력 귀족가문 다수를 숙청하고, 전권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표드르의 동생이자 거의 유일한 후계자 드미트리도 우글리치로 쫓겨났다.
그런데 드미트리가 1591년 갑자기 칼에 목이 찔린 시체로 발견되었다. 어머니 마리아 나가야는 서기관인 비타콥스키가 아들을 죽였다며 날뛰었고, 비타곱스키와 그의 일가족들은 군중들에게 살해되었다.(2) 문제는 이후 바실리 슈이스키가 포함된 조사단이 조사한 결과, 드미트리는 간질 발작으로 죽었다고 공표되었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강제로 수녀원에 들어갔고, 나가야 가문 사람들은 이곳저곳으로 분산되어 추방되었다. 한편 1592년에 표드르 1세는 어찌저찌 딸을 하나 보았지만 그 딸은 2년 후에 사망해버렸고, 가까운 친척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후계 구도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이다.
<업적?>
그나마 표드르 1세 치하에 좋은 일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단 러시아는 자신들의 모스크바총대주교가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크, 예루살렘 등 전통적인 대교구들과 똑같은 위상을 가지기를 원했는데 1589년에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안티오크의 총대주교들이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자신들과 똑같은 위상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었다.
또한 1590년, 스웨덴과의 휴전이 만료되자 보리스 고두노프는 스웨덴과의 전쟁을 결정했는데, 러시아 군대는 나르바를 포위하고, 레발, 헬싱키까지 진격했다. 스웨덴 측도 반격을 가했지만 전쟁은 전반적으로 러시아에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결국 1595년 스웨덴은 발트해로 향하는 출구라 할 수 있는 잉그리아를 러시아에 다시 돌려주어야 했다.
- "러시아. 니들이 잘못했네." -
단 모든 군사적 행동이 유리하게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1593년 다게스탄 원정은 다게스탄측의 반격으로 러시아군이 몰살당하는 대참패로 끝났다. 러시아는 얼른 다게스탄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파비 왕조의 샤 아바스 1세에게 중재를 요청했고, 아바스 1세는 다게스탄에서 러시아 군대가 물러나야 한다고 요구했다. 결국 러시아의 다게스탄 침공은 대실패로 끝났다.
<보리스 고두노프>
1598년 1월, 표드르 1세는 후사 없이 죽었다. 그러자 후계 문제가 부각되었다. 하필 표드르의 가까운 친척들은 모두 병으로 죽었거나, 이반 4세가 죽여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아있던 드미트리는 칼을 가지고 놀다가 간질 발작이 일어나는 바람에 스스로 칼에 목을 베어 죽어버렸었다.
- "난 수녀가 될거에요. 정치에는 관심이 없답니다." -
사실 류리크 가문의 방계 후손들은 엄청나게 많았으니 프랑스처럼 20촌이 넘는 친척(3)이 후계자가 되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었다. 문제는 후손들이 너무나도 많고 계보도 복잡하게 얽혀있어서, 누가 계승에서 우선 순위인지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일단 사람들은 표드르 1세의 아내인 황후 이리나에게 나라를 통치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리나는 오빠인 보리스 고두노프와 같이 수도원에 들어가버렸다.
이렇게 되자 총대주교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가 급히 구성되어버렸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임시정부였으므로 이들은 다음 차르를 물색해야 했다. 이들은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있던 보리스 고두노프를 다음 차르로 선정하고 그에게 얼른 환속해서 차르가 될 것을 요청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사양하다가 젬스키 소보르가 투표로 자신을 뽑는다면 차르가 되겠다며 젬스키 소보르 소집을 요구했다. 바로 관리들과 모스크바 시민들을 중심으로 한 젬스키 소보르가 소집되었고, 젬스키 소보르는 보리스 고두노프를 차르로 선출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일단 이것도 거절했다가 겨우겨우 투표 결과를 받아들였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공식기록 상의 이야기고, 비공식 기록에 따르면 보리스 고두노프는 의원들이나 귀족들을 매수하고, 협박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이런 기록들의 출처 다수가 슈이스키 가문 등 고두노프의 정적들의 기록에서 나온 것이라 이 기록들의 정확성도 의심받고 있다.
- "이거야 원. 뽑아놓고도 말이 많구만!" -
사실 이런 식으로 차르가 되기는 했지만 보리스 고두노프의 지위는 사실 불안정했다. 고두노프 가문 자체가 류리크가문의 방계 가문이 아닌, 러시아화된 타타르족 조상에게서 비롯된 가문이었고, 보리스 고두노프 자신이 드미트리를 살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거디가 그를 투표로 차르로 선출한 젬스키 소보르도 모스크바 시민 중심으로 구성된 것이라 대표성도 조금 떨어졌다. 그는 자신의 권좌가 불안하다는 것을 알고 자선사업을 벌이며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1601년~1603년, 러시아에 엄청난 대기근이 닥쳐왔다. 러시아 정부는 나름대로 조치를 취해보았지만 역부족이었고 수도 모스크바에서만 10만명이 넘게 굶어죽었다. 자연스럽게 민심은 흉흉해졌고, 사방에서 도적들이 날뛰었으며, 정부의 통제력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1603년에는 재차 시도한 다게스탄 원정이 원정군 몰살이란 결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이 와중에 보야르들까지 불온한 기미를 보였다. 결국 1601년 보리스 고두노프는 보야르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 상당수 귀족들을 숙청했는데 이 과정에서 표트르 니키티치 로마노프는 강제로 수도사가 되었고, 나름 유력한 가문의 일원이었던 로마노프 가문 사람 다수가 유배되었다.
- "내가 진짜 드미트리다. 빼앗긴 옥좌를 되찾으러 왔다!" -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기미는 가시지 않았다. 특히 드미트리가 죽지 않고 어디엔가 살아있다는 뜬소문이 나돌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자신이 드미트리라는 남자가 나타난 것이었다.
(1) 얄궃게도 이반 4세 시절에는 러시아가 영국에 동맹을 제안했었는데 엘리자베스 여왕이 단숨에 거부해버린 적도 있었다.
(2) 비타곱스키는 맞아죽었다.
(3) 앙리 4세가 이런 식으로 왕이 되었다.
첫댓글 이제 폴란드의 간섭이 시작되겠군요.
역사에서 폴란드가 러시아를 지배한 유일한 시기이죠.
그리고 이자를 톡톡히 치루는 러시아
고두노프는 계몽을 위해 모스크바에 대학을 세우려고 했는데 이것도 반대파로 인해 무산되었다는군요. 이 시기 러시아가 맞은 풍파는 가혹했던거 같아요...
ps. 젬스크 소보르라는 단어가 굳이 한국말로 번역(?)하면 "전국 회의"쯤 되는 것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