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이야기
눈 없는 겨울이 너무 무미건조하다. 눈 구경을 하고 싶어 일본 홋카이도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 2020년 초, 그렇게 여행을 다녀온 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 세월은 홋카이도의 추위보다 더욱 엄혹한 겨울이다.
(1/7 화) 삿뽀로는 눈이 오면 특정 지역은 쓸어내지 않고 오히려 보존해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시가지는 눈의 흔적을 찾기 힘들 정도로 깨끗한데 북해도청 앞이나 오도리 공원 에는 눈이 잘 보존되어있어 관광객들을 환호하게 해주고 있었다.
(1/8 수) 오타루는 삿뽀로와 상황이 달랐다. 도로나 보도가 전부 눈이다. 오타루에 어둠이 깔리는 오후 네 시경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여섯시 반에 출발하는 신 치토세 공항 행 열차를 타고 돌아왔다. 편의점에서 먹을 것을 사들고 와 호텔에서 먹는 맛이 별미였다.
(1/9 목) 홋카이도의 눈은 아름답다. 중국 스모그 권역 밖이어서 어릴 때 시골에서 보았던 눈처럼 깨끗하다. 가족끼리 먹는 호텔식은 축복이다. 맛도 좋지만 참으로 여유롭고 평화스럽다. 창밖에 내리는 눈이 참으로 푸근하고 행복하다. 식사를 마치고 노보리벳츠 행 열차를 타기위해 삿뽀로 역으로 나갔다. 삿뽀로 대합실에 활을 든 아이누 추장이 인상적이다. 캐나다 퀘백 광장의 총구 앞에 저항을 포기한 인디언 추장처럼 슬프게 보인다. 삿뽀로 역은 숙소인 그랜드호텔에서 10분정도 거리에 있다. 역으로 가는 길에 우리는 구 북해도청에 들려 구경을 했다. 빨간 벽돌로 지은 고풍찬연한 건물이 아름답다. 넓은 정원 중앙의 호수에는 물오리가 유유자적 한가롭다. 호숫가에 심어진 나무에는 까마귀들이 날아다니며 짖어댄다. 잔디밭에는 참새와 방울새 들이 열심히 나무를 오르내리며 눈(雪)을 쪼아 먹는다. 아내가 빵부스러기를 던져주자 갑자기 까마귀가 날아와 낚아채 먹고 자리를 뜨지 않고 아내를 쳐다본다.
노보리벳츠 행 열차가 들어왔다. 일본 전철은 일반석 외에 좌석 칸이 별도로 운영되고 있다. 모두들 줄을 서서 복작거리며 차를 타는데 우리는 자리가 예약되어 있어 여유로울 수 있었다. 줄서서 기다리는 일본인들을 보고 있노라니 묘한 우월감마저 들었다. 노보리벳츠 지옥곡에 오르니 여기저기 유황이 보글보글 끓는다. 쉴 새 없이 피어오르는 연기가 구름처럼 봉우리를 휘감아 장관을 이루었다. 지옥을 연상케 하지만 보이는 아름다움에 모두들 환호하고 있다. 전망대가 있는 드넓은 일대는 20cm이상의 눈이 쌓여있어 별천지를 이루고 있다. 노보리벳츠는 눈 덮인 비탈길을 올라와야 되기에 거의가 젊은 청춘들이다. 지옥곡 장관이 전개되는 눈밭에서 아내는 마냥 소녀처럼 즐겁다. 내려오는 길에 중국여자아이가 얼음판에 미끄러져 넘어졌다. 우는 아이를 모두들 같이 끌어안고 위로하며 토닥거리는 광경이 뭉클하다. 아름다운 하루였다.
(1/10 금) 아침 일곱시 기상. 여덟시에 식사하고 10시경에 호텔을 나섰다. 오늘은 아사히카와에 가는 날이다. 아사히카와는 홋카이도 북단에 있기 때문에 눈이 많은 지역이란다. 완전무장을 하고 눈 장화까지 준비하였다. 삿뽀로에서 특급열차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우리는 좌석이 예약되어있어 열차여행이 즐겁기만 했다. 아이가 한국에서, 호텔뿐만 아니라 오타루, 노보리벳츠, 아사히카와를 오가는 전철과 열차예약까지 다해놓았다. 세상이 참 편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아사히카와 가는 길은 홋카이도에서 지금까지 보았던 광경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사방천지가 눈이다.
목적지에 도달하여 남문으로 나갔더니 사방이 눈으로 덮여 제대로 된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한적한 눈길을 헤집고 헤매다보니 다행스럽게 잘 정돈된 들판이 나왔다. 눈 치우는 인부 두세 명이 열심히 눈을 치우고 있었다. 여기서는 눈 치우는 스케일이 틀린다. 눈 덩어리를 기구로 썰어 차에 실어 나른다. 길 따라 가다보니 빙점교라는 다리가 나왔고 그 다리를 건너니 눈 덮인 뚝방이 신천지처럼 전개되었다. 아내는 언덕에 주저앉아 눈썰매를 타며 좋아했다. 뚝방을 나와 미우라 아야꼬 문학관이 있는 숲을 향해 걸었다. 시내는 도로에 차가 다니는 것 외에 보행자들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도로는 잘 정리되어 있지만 차도 양쪽으로는 2m나 되는 높이의 눈이 성벽처럼 쌓여있다. 며칠 아니 몇 주에 걸쳐 내린 눈이 쌓여있는데 칼로 절단한 듯 떡시루처럼 단층이 져있다. 이 지방에 눈이 내릴 때는 눈도 못 뜨고 걷지도 못하도록 눈보라가 거세고 몇날며칠 계속 내린단다.
우리는 계속 걸었다. 눈을 구경하는 것이 그렇게 신나고 즐거울 수 없다. 어느 지점에 이르니 가문비나무가 울창한 숲이 전개되었다. 한명이 지나간 발자국 외에, 눈 덮인 숲은 온전한 원시림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얼마를 걸어가니 미우라 아야꼬 기념관이 나왔다. 우리는 기념관에 들렸다가 서둘러 나와 가던 쪽으로 계속 걸었다. 해지기 전에 서둘러 비에이 강을 다녀오기 위해서다. 눈 위에 산짐승 배설물 같은 것이 군데군데 보였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인적이 끊어진 곳인데 덜컥 겁이 났다. 이런 곳에서 무슨 짐승이 나온다면 우리는 객지에서 꼼짝없이 낭패를 당하는데 그 사정을 어떡하나? 이 숲은 미우라 아야꼬의 빙점에서 요꼬가 연인과 함께 데이트를 하던 그 숲이다. 가위 바위 보로 각종 풀이름 꽃 이름을 알아맞히고 뛰놀며 사랑을 꽃피우던 곳이다. 얼마를 가니 높은 언덕이 보였다. 눈 덮인 가파른 언덕은 올라가는 것조차 위험해 보여 그만 돌아가자고 했다. 그러나 아내는 어느새 그 언덕에 올라 썰매를 타며 환호했다. 북해도 추위를 걱정해 롱 패딩을 입고 와서는 눈 위 아무 곳에서나 누워버리거나 썰매를 타며 좋아한다.
언덕 넘어가면 빙점에서 유빙이 둥둥 떠 흐르는 비에이 강이다. 언덕은 뚝방 길로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요꼬가 ‘살인자의 딸’이라는 소리를 듣고 실의에 빠져 자신의 흐트러진 발자국 흔적을 돌아보며 한탄 하던 바로 그 언덕이다. 매사에 활달하고 원만했던 요꼬였지만 살인자의 딸이라는 소리에 모든 것이 얼어붙어 버렸다. 인간의 내면에는 사랑과 이해, 온유와 절제가 풍성할지라도 어느 순간 얼어붙는 빙점이 있다. 우리는 언덕을 내려가 비에이 강을 지켜보았다. 어린 루리코가 살해당했고 요꼬가 절망과 좌절에 빠져 음독자살을 기도했던 그 강변이다. 아내는 수북이 쌓인 눈 위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며 눈 위에 누우니 이렇게 포근할 수 없다며 즐거워했다.
(1/11 토) 인천 공항에 내려 의례껏 하는 대로 Baggage claim을 찾아 갔는데 이거 잘못 찾아왔나 싶어 어리둥절해졌다. 북적이던 수하물 창구가 외교 분쟁 탓으로 눈에 띄게 한산하다. 아우성과 북적거림은 인간사는 세상의 체온이요 맥박이다.
여기저기 우한폐렴에 대한 흉흉한 소식이 떠돌기 시작했다. 2019년 12월에 발생한 우한폐렴이 지구촌을 위협하고 있다는 보도가 심상치 않는 가운데 우리나라도 1월 20일, 첫 코로나 환자가 발생했다. 초기단계의 무지하고 안일한 대처로 인해 코로나는 보란 듯 무서운 기세로 덮쳐왔다. 그렇게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한 코로나의 겨울은 아직도 그 대장정을 멈추지 않고 있다.
2022.12. 5. 石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