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KTX를 타고 서울에 다녀왔다. 환상 속에서나 그려보던 동화 같은 기차의 모양새며, 아무런 잡음도 안 들리고 도서관처럼 조용한 기차 안. 하~내가 정말 기차 탄 게 맞어? 하고 밖을 내다본다…
언뜻언뜻 스쳐 지나가는 산천경계도 금강산 못지않은 천하절경이다.
이런 멋진 기차를 타고 달리노라니 북한에서 기차여행을 떠났던 생각이 난다.
마지막 단풍잎도 다 떨어지고 이제는 제법 찬바람이 불어오는 어느 늦가을…
오랜만에 세상구경하고 싶어서 엄마한데 졸라서 여행을 떠나기로 승낙을 받았다.
목적지는 백두산 밑에 있는 오빠네 집…오빠와 헤어진 지도 너무 오래된 지라 보고 싶기도 하고 일만 한다는 게 너무도 따분하고 답답해서 내린 결심이다.
드디어 떠나는 날 아침…울 엄마 새벽 2시부터 일어나서 떠날 차비를 해주신다.
우선 밥이다. 북에서는 여행을 한번 떠나자면 밥을 무쇠가마에다가 하나 가득해가지고 끼마다 먹을 수 있게 봉지봉지 담아서 한 배낭은 짊어져야 한다.
안 그러면 굶어서 살아 돌아올 수가 없다. 반찬은 김치에다가 전어고기 구운 거, 무 오가리 말리운 것을 간장에 메운 것. 이렇게 한 배낭 넣고. 다음은 바다 가에서 산골로 가는데 그냥 갈수가 있나. 말린 고기 한 배낭, 절인 고기 한 가방, 이렇게 챙겨주신다.
다음은 입을 옷을 찾아야 한다. 현재 북한상황은 여행을 떠나면 새 옷을 입으면 안 된다. 다 낡고 든든한 옷을 입어야 한다. 제일 두껍고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고 길을 떠났다.
기차역까지 나오자면 4시간은 걸어야 한다. 그걸 짊어지고 4시간을 걸을라니 목에서 단내가 확확 올라온다. 읍내까지 나오는 동안에 차한대 안 지나간다. 차한대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이다. 이렇게 힘들게 기차역까지 나왔지만 금방 기차에 오를 수가 없다.
일반행, 급행, 준급행으로 다니는 열차들이 하루에 서너번 정도 통과했지만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부터 그 기차가 일주일에 한번이나 지나갈까 말까한다.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 나는 그래도 둘째오빠의 집이 읍내에 있어서 거기에 들어가서 기다리면 그만이지만 친척이 없으면 꼼짝 못하고 역사에서 몇일 밤을 새야 한다.
거기다가 도적은 와 또 그리 많은지 밤에 잠시 눈을 붙였다가는 등 뒤에 짊어지고 자는 배낭도 순식간에 없어진다.
드디어 5일 만에 기차가 들어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차표사기도 보통이 아니다. 역구내에 아는 사람이 없으면 돈을 기본 차표 값보다 몇 백 배를 비싸게 주어야만이 살수가 있다…어쨌든 온단다….뭐가…기차가….
배낭을 짊어지고 역구내로 나갔다. 몇일 동안 발이 묶여 있던 장사군들, 친척집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물밀듯이 홈을 빠져나온다.
역구내에 나와서도 두 시간은 더 기다려서야 열차가 도착했다.
“붕~~”하는 기차소리가 그렇게도 반가울 수가 없다.
이제부터는 전투준비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 신발끈을 단단히 졸라매고 배낭끈을 바싹 조여서 지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서있었다. 심장이 다 쿵당쿵당 뛴다.
기차가 들어서자 마치도 조국이 해방된 날 징병에 끌려갔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기차에 하얗게 매달려 서로 먼저 타겠다고 하던 그때를 연상케 한다.
나는 그래도 짐이 적어서 괜찮다. 보통 한사람이 50키로 이상은 기본이고 100키로 200키로씩 가지고 다닌다. 그것도 대다수 여자들이….나는 그때 정말 조선여성들이 이악스럽고 힘이 보통 아니로구나. 하는걸 느꼈다.
가족을 먹여 살리자고 장사의 길에 나선 여성들의 눈에는 비장한 각오가 흘러나오다 못해 불빛이 튕겨 나오는거 같다.
이 많은 짐들을 5분 동안에 기차에 다 실어야 한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역전에서 짐을 나르는 사람을 산다고 했다. 돈 얼마씩 주고 좀 실어달라 하면 그 사람들이 번개같이 짐을 기차에 싣는다. 북한 기차는 오르고 내리는 문이 따로 없다. 창문이란 창문유리는 모두다 까부셔버려서 창문이 출입문이다.
힘이 센 남자들은 기차방통 위로 올라간다. 위에는 고압선인데…. 아랑곳하지 않는다.
1990년대 북한 열차. 이때는 일반적인 풍경이었지만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방통위에 타고 가다가 고압선에 붙어서 죽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다. 그걸 알면서도 할 수 없는 노릇인가보다.
이렇게 죽기 살기로 나도 올라타긴 탔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배낭을 들춰 지려고 하니 왜서인지 거뿐했다.
뒤돌아보니 칼로 배낭 뒤를 쭈~욱 내리그었다. 역전에서 사는 일명 “꽃제비”들이 그런 짓을 한다고 했다.
배낭을 지고 오르느라고 정신없는 사람들의 배낭을 한 사람은 뒤에서 쭉 째고 다른 한 사람은 자루를 받치고 서 있다가 받는다고 했다.
이렇게 떠나면서부터 짐을 털리고 나니 맥이 다 쭉 빠졌다. 후회가 시작된다. “뜨끈뜨끈한 방에서 엄마가 해준 밥을 먹으면서 편안히 있을 걸 왜 떠났노…”하고………
올라와서도 편안치 않다. 시루안의 콩나물같이 빼곡히 서있으니 숨이 가쁘고 내 한 다리는 어디에 끼웠는지 내 다리를 좀 놓아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끔쩍들 안 한다.
나만 불편한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공중에 떠있는 상태다. 사람위에 사람이 서고 힘이 약한 늙은이나 여자들은 밑에 깔려서 소리도 못 지른다.
더 불쌍한 것은 애기엄마다. 이제야 6달 정도 되었을까?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어대고 애기엄마가 애기를 좀 살려달라고 애원을 해도 손가락하나도 끔쩍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도와주랴…
오히려 사람들한데 욕먹는다…“아줌마 정신 있소? 이 판국에 무슨 애기를 데리고 기차를 타냐 말이요…”하면서 ….하긴 움직일 수 있는 건 입밖에 없으니 욕이라도 하는가 보다…
이런 상태에서 소변이라도 내려오는 날에 거의 죽음이다. 그래도 그 속을 헤치고 화장실로 가긴 가야 하는데 …한발 두발 앞으로 가노라면 모든 사람들이 욕을 해댄다.“자그만치 먹을 것이지….얼마나 많이 처먹고 화장실을 드나드는 가?” 생리적 현상인걸 날보고 어쩌라고……
남자들은 병이나 비닐봉지를 가지고 다니다가 사람들이 보겠으면 보고 그걸 펴들고 자랑스럽게 그 속에다가 싸대지만 여자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거기에 맞는 병도 없고 그렇다고 세숫대야를 들고 다닐 수고 없고….
화장실 가면 또 가관이다. 앉아서 싸게 되어 있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발을 들여놓을 데가 없다.
싯누렇고 시퍼렇고 한 똥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하지만 어찌하랴…..그래도 들어가서 볼일을 봐야지….겨우 비비고 들어가서 앉아서 싸다가 밑을 내려다보니 아찔했다.
기차레루가 다 보이고 그 밑으로 떨어질 거 같은 느낌이 들어서 볼 일 다 못보고 중간에 일어났다.
화장실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신발에 똥이 안 묻을리가 없다…량 가위로 싯누렇게 묻히고 그 발로 사람들의 어깨며 옷깃을 스치면서 제자리로 돌아오느라면 신발이 빨아놓은 것처럼 말끔해진다.
이렇게라도 빨리 달렸으면 오죽이 좋으랴….전압이 약해서 기차라는 게 사람이 뛰어가는 속도보다 못하다. 그 속도에 또 정전이 되면 한 역전에서 이틀이건 3일이건 세월없이 서 있는다.
그러다가는 또 견인기를 떼가지고 어디론가 간다. 여객열차보다 더 바쁘고 중요한 짐차를 끌러간단다. 이렇게 기차대가리는 없고 꼬리만 남는 경우는 거의 몇 일은 또 기다려야 한다.
싸온 밥도 다 먹어가고 춥고….사람들이 하나, 둘 땅에 내려가 한다는 노릇이 우편물방통에서 우편물을 꺼내서 그걸 다 태우면서 추위를 달랜다….
그 우편물속에 사랑하는 가족한테, 연인한테 보내는 편지들이 들어 있을 건데 아랑곳하지 않는다. 왜 안 그렇겠는가? 기차 안이라는 게 창문이 없어서 그 찬바람 비바람 다 들어온다.
사람들이 궁여지책으로 비닐박막으로 창문을 가려보지만 솔솔 들어오는 바람은 어떻게 다 막으랴………..
기차가 겨우겨우 또 떠난다. 나도 이제는 자리를 잡았다. 그것도 4일 만에…..그 기간은 계속 서서 부대꼈다.
밤이 되었다. 수수떡같이 시뻘건 불이 희미하게 비친다.
내 옆자리에는 중년남자가 앉았다. 오랜만에 자리에 앉아 피곤해서 잠깐 눈을 붙였다. 잠결에 누가 내 허벅지를 더듬는 느낌이 든다…“꿈이겠지..”하고 또 눈을 감았다. 비몽사몽한속에 이제는 점 더 과격하게 더듬는다. 눈을 번쩍 떴다. 내 원참…이거라구야…큰일났다…
북한에는 이런 일이 있어도 어디다 신고할 데도 없고 또 그 자리서 소리질러봤자 생명의 위험밖에 따라오지 않는다. 제일 좋은 방법은 그냥 그 자리를 조용히 피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자리를 어떻게 잡은 자리인데….고민이 많아졌다…자리를 지켜야 하나…나 아직 처녀인데 순결을 지켜야 하나…..엄청 고민하다가 단호히 일어나서 다시 서서 갔다.
힘들다….또 후회가 밀려온다…“와 떠났노…”
무슨 놈의 기차가 좀 언덕이다 싶으면 조금 올라가다간 올라간 길이보다 더 뒤로 밀리고 다시 힘을 모아서는 또 올라가다가는 뒤로 밀리고 이렇게 그네 타는 것처럼 오르락 내리락을 또 몇시간……
레루 받침대는 나무로 한 게 다 삭아서 기차가 기우뚱기우뚱 언제 옆으로 폭싹 넘어질지 모르겠고….다리를 지나갈 때에는 흔들흔들하는 게 금방 물속으로 들어가는 거 같고……와…참말로 장군님기차가 좋다…그네 타는 거처럼 짜릿한 맛도 나고 금방 기차전복이 일어날 거 같은 무서움도 느끼고…..ㅎ
이렇게 떠난 기차여행이 서울에서 부산가는 거리만한 것을 12일이 걸려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한국같으면 12일이면 세계일주도 했을 시간인데…..오빠집에 도착해서는 너무나 힘들고 서러워서 한참을 서서 울었다.
이렇게 교통이 불편해서야 어이 살아가누…..
하기에 울아버지가 늘 말씀하시기를 딸시집 보내는 건 무조건 걸어서 한나절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시집을 보내겠다고 입버릇처럼 외우셨다….우리집 둘째언니가 좀 멀리 시집을 갔는데 시집간 지 10년 동안 한번도 본가집에 와보지 못했다.
그렇게라도 기차는 또 한참 나은 거란다.
장사하는 여자들이 도로에 서서 화물차를 하나 잡아서 짐을 싣고 가려고 돈을 한 웅큼 쥔 손을 흔들면서 하루 종일 도로에 서서 목이 쉬도록 가는 목적지를 외쳐댄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그 도로위에 비닐박막을 깔고 덥고 잔다…북한에서 길 떠나면 비닐박막을 가지고 떠나는 건 필수다…안 그러면 얼어 죽을 수 있으니까.
북한에서는 운전사가 인기직업이다……차도 없고 교통수단이 불편하지 운전사만 되면 돈도 모을 수가 있고 아가씨들은 운전사한 데 시집을 못 가서 안달이다.
한국에 오니 너도나도 운전 못하는 사람이 없고 나 또한 사회에 나오자 처음으로 딴 자격증이 1종 보통운전면허다……아직 돈이 안 돼서 차는 못 샀지만 차를 사서 운전하게 되면 어깨가 으쓱해질 거 같다……차를 모는 모습 고향사람들한테 보여주고 싶다……
기차여행에서 있은 가지가지 일들 적은거 보다 못 적은 게 더 많다……
할 일이 없는데도 옆에서 자꾸 쳐다보는 거 같다……간첩사건이 터지더니 나한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느라고 자꾸 보는가?ㅎㅎ 내 선입견이겠지….. 그럼 오늘은 이만…..
(펌글 : 필자-봉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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