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적인 중생관의 정의는 제가 글을 올려놓았고 또한 여러글에 설명했습니다.
이렇게 되어야만 설득적인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왜그렇습니까
교회에 모인 청중들중 회심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이런 표현을 쓸 때 좁은 의미의 중생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좁은 의미의 중생한 사람은 아직 회심한(믿고 회개하여)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회심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청중들중에는 회심한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회심은 하지 못했는데 좁은의미의 중생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하나님의 전적인 행위로서)
마지막으로 중생의 씨앗도 없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설교자는 복음을 전합니다. 말씀의 설득적인 도구를 사용해서 말입니다.
그러면 좁은의미의중생(초기중생)한 사람이 반응합니다. 그 사람은 이제 영적인 귀를 가졌기 때문에
복음안에서 부르심을 듣게되며, 효과적으로 이를 마음에 받아들이게 됩니다.
저항하고 싶은 열망이 순종하고 싶은 열망으로 변화되고,(정말 불가항력적인 은혜입니다.)
죄인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설득력에 감화됩니다.
죄를 각성하게 되고 확신하게 됩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새생명의 원소가 심기워지지 않았기 때문)
그래서 말씀중에 바로 회개와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아니면 죄의 각성과 확신상태가
길어지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1주일, 1개월 1년 그 이상으로 (존번연같이)
그러면서 언젠가는 믿음과 회개의 반응을 보일것입니다. 그래서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죄의각성과 확신만으로는 이사람은 아직 회심하고 새롭게 거듭난 사람은 아닙니다.
이사람이 죄의 각성만 하다가 다시 예전의 죄된생활로 돌아 가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럴경우는 예정된사람이 아닐 것이고, 아니면 각성하고 돌이켜 회심으로 나아가 새롭게 출생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예정된 사람일 것입니다.)
이 회심의 과정이 어떤사람은 급진적으로 올수 있고 어떤사람은 점진적으로 올수 있습니다.
여기서 설교자는 초기중생에서부터 회심시까지 설득적이며 권면하는 설교를 할수있습니다.
왜냐햐면 이 사람이 초기중생을 해서 믿고 회개해야만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고
그이후이 영적인 복들을 누릴수 있기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설교자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초기중생은 했지만 아직도 회심하지 못했다면 이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사람이 의식적이고 자유롭게 자신의 반응으로 하나님께 나와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지않은 이상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고 원수이기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안에서의 연합과 그리스도와의 실재적인 연합과의 차이입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아직 믿고 회개하지 않은 죄인은 창세전에 택하신 백성이고,
초기중생을 했다고 하더라도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고 원수입니다.
이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사람이 회개하고 믿음을 가질때만 이사람은 하나님께서 의롭다하시고 그이후의
모든 영적인 축복들(칭의,성화,양자됨, 인치심)을 소유할 수 있게 되고 이때부터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믿고 회개하기전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소유할수 없다고 말입니다.
이런전과정을 통해서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 이런회심의 전과정을 넓은 의미의 중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혹은 마스터스가 말한 연속적중생관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게 되면 이사람은 설득적이고 권면적이 될수 밖에 없습니다.
초기중생부터 시작해서 완전히 새롭게 출생할 때까지를 회심의 전과정으로 보기 때문에
회심할때 까지 (믿고 회개할 때까지) 권면하고 설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완전한 출생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이렇게 설득하고 권면할까요
회개와 믿음은 우리가 할수 없는 것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도 하시기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회개와 믿음이라는 방편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해서 우리가 죄를 확신하고 하나님께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의식적으로 나아가
믿고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수동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을 정의하기를 지, 정, 의가 다하여 믿는 것이라고 정의 합니다.
(결국은 우리에게 공로가 없는것은 우리를 중생시키시는 분은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역으로 인한 우리 본성의 새로와짐인 좁은의미의 중생때문입니다.
이 중생은 우리가 죽는 날까지 영화롭게 될때까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의 순서가 유기적인 관계속에서 상호성임 볼수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영화될때 까지 그 영향을 계속미칠 것입니다.
칭의도 마찬가지임니다. 성화도.....
이모든 과정중에 중생이 시발점이므로 이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사역이므로
우리의 구원을 공로나 자랑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감사와 감탄을 할 뿐이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설득합니다. 마치 우리가 할 수 있을 것 같이 로이드 존스가 말한 것 같이……..
그래야 그이후의 축복을 누리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수동적으로, 중생을 거의 완전한 쇄신으로 보고 언젠가는 열매로 회개와 믿음을 가지겠지 하는 사람은
(이게 순간적인 중생관을 말합니다.)
회개와 믿음을 무슨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열매와 결과로 보기때문에 결코 능동적으로 설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이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강제로 끌려가듯이 수동적이 된다는 것은 성경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직 믿고 회개 할때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모든것위에 하나님이 사람을 다루시는 다양성을 인정해야하고 무슨 단계니 꼭그 틀에 맞춰서
모든 것이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하면 큰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양하게 회심을 시키시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주시하고 열린마음으로 살펴보야합니다.
그것이 참된회심인지,- 회심의 단계가 아니라 폴핼름이 말했듯이 필연적인 구성요소가 포함되었는지를 살펴야합니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강추합니다! (시간이 넉넉할 때, 나중에 다시 꼼꼼히 읽어 보아야겠군요.^^)
연속적 중생관 정리하신 글 가운데에 호목사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겠습니다. 저도 무척 기쁩니다. 이렇게 명쾌하게 이해하셔서 정리하셔서 글을 올리셨으니....어느 분이신지 무척 궁금하게 여겨지는군요. 저야 가까이어서 수없이 질문을 하면서 해결했습니다만...토탈님은...혹시 호목사님이 다른 이름으로 글을 올리시는 것은 아니신지....??
특별히 회심과 설득적 설교의 관계.....쉽지 않은 통찰입니다. 한국교회에 정말로 필요한 설교이고, 상담이며, 목회적 관점이라고 여겨집니다.
토탈님이 누구신지요? 호기심이 갑니다. 아울러 초기중생(수태, 좁은 의미의 중생)을 거듭남으로 불러서는 안되는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토탈님이 언급하신 후크마나 벌콥도 좁은 의미의 중생을 거듭남이라고 불렀거든요..나머지는 다 동의합니다. 요일5:1절을 함께 검토해보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주일 지나고 뵙겠습니다. 복된 주일 되시기를....
윗글에선 "초기 중생을 경험해도 아직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 하나님의 원수라고 표현해 놓았네요. 물론, 회심 전이어서 그렇게 표현했겠지만..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구도자"라는 표현이 훨씬 낫겠습니다. 아니면, (어감이 좀 이상해도) 초기 중생자라든가..("초기 중생자"와 "중생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중생 두 번 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어서 좀 그런가?) 용어 사용 참 어렵네요.^^;; 하여튼, 윗글이 연속적 중생관에 대해서는 잘 정리된 글인것 같습니다. 글 쓰신 분의 고뇌한 흔적들이 돋보이는 듯 합니다.^^
한우리님께서 사용하시는 '넓다' '좁다'는 말의 정의와 토탈님이 사용하시는 그 말들의 뉘앙스가 조금씩 다른 것 같군요. 그 뉘앙스의 차이를 잘 이해해야 할 듯 싶습니다. 한우리님께서는 '좁다'는 의미를 '더욱 참되다'는 의미로, 토탈님은 '좁다'는 말을 같이 쓰면서도 '더욱 참된 중생 이전의 무엇'으로 규정하면서 쓰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1요5:1의 '난 것'을 설명할 때에도 그것이 '좁은 중생(거듭남)'인가 아니면 '넓은 중생(거듭남)'인가, 논의할 때, 이 '넓다', '좁다'라는 말의 개념규정이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거듭남'은 한글이고, 꼭같은 그 한글을 한자어로 바꾼 것이 '중생'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단어에는 특
별한 의미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 위의 글 무슨 말인지 덧글 쓰다..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