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하느님 뜻과의 조화 (16)
하느님 기준에 맞게 살자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 그분의 원형태 닮도록 노력 마음속에 심어진 인격 회복해 행복의 삶 살아야
우리 모두는 두툼한 두루마리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풀면 술술 풀려나오는 그런 두루마리 말이다. 그 두루마리는 바로 나의 역사 두루마리다.
나의 유년 시절, 청소년 시절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바로 나다. 다른 사람이 보려고 해도 내가 그 역사 두루마리를 펴 보이지 않으면 볼 수 없다. 이 두루마리에는 그동안 내가 어떻게 이웃을 대하고, 또 어떻게 세상을 살아왔는지에 대해 세세히 적혀 있다.
또 그 두루마리에는 웃음도 있고, 눈물도 있다. 보기 흉한 상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칼을 휘두른 살벌함도 있다. 우리가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우선 이 두루마리를 잘 파악해야 한다. 지나온 삶의 흔적들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이 두루마리에는 긍정적인 면, 행복한 면도 있겠지만, 부족한 점, 부정적인 것도 적지 않다. 사실 완벽하게 깨끗한 두루마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두루마리가 완벽한 분은 예수님뿐이다. 따라서 두루마리가 부끄럽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가 없다.
인간적 판단과 척도로 나의 역사 두루마리를 바라볼 필요가 없다. 역사 두루마리를 보는 돋보기는 ‘신비’여야 한다. 하느님은 태초부터 나를 섭리하셨다. 이것이 선형성이다. 그 선형성이 요구하는 바를 구현하는 것, 즉 공명의 삶(하느님 뜻과 조화되는 삶)이 우리의 목표가 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신비가 나의 역사의 척도가 되어야 하고 기준이 돼야 한다. 거꾸로 말하자면 나의 역사는 하느님으로부터 판단 받아야 한다.
역사 두루마리에 대한 평가를 내가 하지 말고 하느님의 척도와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세상의 정치와 경제, 문화 현상도 모두 하느님 앞에서 판단 받아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인간 삶 전체가 하느님의 기준, 하느님의 척도에 맞게 형성되어야 한다. 내 기준, 우리 회사, 우리 나라, 우리 민족이 기준이 되어선 안 된다.
우리는 보통 나 자신의 정당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놓는다.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린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자위한다.
하지만 이런 사람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남을 비방하고 깎아내리는 행위가 얼핏 보면 자신을 살리는 일 같지만 정작 시간이 흐른 뒤에 보면 그것은 자신을 죄와 자책감의 구렁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하느님이 기준이 돼야 한다. 여기서 하느님은 내가 만들어낸 가짜 하느님, 나만 돕고 다른 사람은 벌주는 세속적으로 인간화된 하느님, 나를 정당화하기 위한 우상의 하느님이 아니라, 형성하는 신적 신비로서의 하느님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척도, 하느님의 기준이 사라질 때, 우리 사회는 절망의 구렁으로 빠져들게 된다. 인격이 회복돼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신 아름답고 영롱한 그 인격이 회복돼야 한다. 이것이 첫 번째다.
이념도, 정의도, 평화도, 인권도 이 하나에서 출발한다. 이기적인 사람이 인권을 말한다면 그 인권은 이기적인 것이 된다.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창조 때부터 심어주신 인격의 회복 없이는 이념과 정의도 무의미하다.
정확히 알아야 한다. 인간 형태는 형성하는 신적 신비의 ‘원형태’가 아니다. 모상일 뿐이다. 완벽하지 않다. 형성하는 신적 신비의 원형태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성령과 완벽하게 일치돼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돼 있지 않다.
우리는 원형태가 아니라 그분의 모상이다. 모조품이다. 다만 원형태를 닮아 갈 수는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내가 기준이 되거나, 내가 말하는 진리가 완전한 진리라고 하는 것은 오만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원형태와 합치될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모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원형태를 닮아 갈 수 있느냐 없느냐, 그러한 노력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귀한 존재인가 아닌가가 갈라진다. 직업이 무엇이든 상관 없다. 모두가 하느님의 일이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다.
요즘 안타까운 모습을 많이 본다. 세상의 기준은 다른 곳에 있는 듯 보인다. 많은 이들이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에 기준을 둔다. 아무리 잘난 척 해도 인간의 일은 조금 시 간이 지나면 바닥이 드러난다. 자신이 하느님인양 처신하면 안 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하느님의 척도, 하느님의 기준을 세워야 한다. 그것이 첫 단추다. 이 첫 단추가 나를 진정한 행복의 삶으로 이끌 수 있다.
혹시 지금 마음이 아픈가. 사는 것이 힘든가. 이웃을 탓하고 있는가. 이웃에게 본의 아니게 고통을 준 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가. 하느님을 느끼지 못하겠는가. 세상이 온통 싸움판으로 보이는가.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겠는가. 세상이 허무하게 느껴지는가.
해답이 있다. 첫 단추를 다시 채울 것을 권고한다.
(53) 하느님 뜻과의 조화 (17)
오만 끊어 버리기
자신이 창조주인양 착각하며 살아가는 인간들 하느님 뜻 깨닫고 매일 꾸준히 묵상·기도해야
영성적 삶을 살아가고 싶은가? 하느님의 뜻과 조화되는 삶을 살고 싶은가?
만약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한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오만 끊어 버리기’가 그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이 창조주인양 살아간다. 우리는 말씀 그 자체가 아니다. 말씀에 응답해야 할 존재일 뿐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빛이 생겨라 하자 빛이 생겼다. 그리고 그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오인하는 경향이 있다. 오만하다. 마치 창조주인양 우리의 말만 하고 있다.
창조주는 그냥 말만 하면 된다. 빛이 생겨라 하면 빛이 생긴다. 말씀 자체가 완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 없다. 하느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어떤 말을 해도, 마음 내키는 대로 말씀하셔도 그 하나하나가 완전하고 지고하다.
하지만 우리는 책임 있는 말을 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하느님 뜻을 깨닫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서 하느님 말씀의 뜻을 분별해야 한다. 그 분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내 말을 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말을 한다.
그러면 나 자신의 역사 두루마리에 하느님의 말씀이 기록된다. 하느님은 어쩌면 먼 훗날 우리에게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나가서 내 말을 하라고 했는데, 너는 네 말만 실컷 하다가 왔느냐.”
하느님의 말씀을 살고, 그 말씀을 전한 완벽한 모델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맞는 말씀만 했다. 그런데 우리는 막말을 한다. 내 말을 한다. 이래선 곤란하다. 나는 원형이 아니라 모상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이러한 원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구약 이래로 아브라함과 모세, 예언자 등을 통해 끊임 없이 알려주셨건만 아직도 우리는 모르고 있다. 계속해서 인간 잘난 멋으로 살고 있다.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를 당신과의 조화로운 삶(공명의 삶)으로 초대하신다. 당신의 말을 전하라 하고, 당신의 말씀대로 살 것을 요청하신다. 모세의 십계명, 예언자들의 예언 등이 모두 하나로 정리된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합치하고, 이웃에게는 연민을 가지고 세상과 융화하고, 세계에 스스로의 역량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원리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심어 놓으신 것이다.
이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 수천년간 인류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영감을 주셨던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알아듣지 못하자, 결국에는 독생자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합치, 연민, 융화 속에서 참된 역량을 발휘하는 방법을 가르칠 지경에 이르렀다.
가르치고 또 가르쳤는데도 아직도 인간은 그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스승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다. 학생이 학생처럼 굴지 않고 선생님처럼 행동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그 학생은 하나도 배울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인간이 창조주라고 착각해선 곤란하다. 인간은 창조자의 뜻을 따라 응답만 하면 된다. 문제는 창조자의 뜻을 파악하는가, 그렇지 못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창조자의 뜻을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 내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이 들린다. ‘나’가 아닌, ‘하느님’으로의 중심 이동이 필요하다.
조선시대에는 여성이 꼼짝 못하고 살았다. 남성들이 권력과 기득권을 지켰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고통 받아야 했다. 이는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해서다. 가정의 중심은 남편이 아니다. 아내도, 자녀도 아니다. 진정한 가정의 중심은 형성하는 신적 신비 그 자체다.
어쩌면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를 믿지 않고 오만하게 인간의 힘으로만 살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많은 이들이 질병을 얻을까 노심초사하지만, 사실 그 모든 질병을 주시는 것도, 그리고 다시 거둬 가시는 것도 하느님이다.
태양이 하루만 동쪽에서 떠오르지 않아도, 바이러스가 조금만 변형되어도 우리는 한순간에 죽는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은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생각을 해야 한다. 태양이 동쪽에 떠오르는 것, 오늘 아침 눈을 뜰 수 있는 것 모두가 엄청난 은총이다.
건강을 위해 식단표를 짜고 다이어트 운동을 계획하는 그 정성의 조금이라도 덜어서, 겸손의 덕을 쌓는 노력에 보태는 것은 어떨까.
다이어트 운동 효과가 하루아침에 나타나지 않듯이, 영성적 삶을 위한 노력도 하루아침에 나타나지 않는다. 꾸준함이 필요하다.
매일 꾸준히 영적인 삶을 위해 겸손히 청하고 노력하면, 멀지 않는 시기에 오만의 지방 덩어리가 사라진 아름다운 영화(靈化)된 몸, 영화된 정신, 영화된 마음을 구현해낼 수 있을 것이다.
(54) 하느님 뜻과의 조화 (18)
본질적으로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인간 하느님 뜻에 합치될 때 진정한 초월 완성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삼위일체 하느님은 빛이시다. 그런데 이 빛은 홀로 고고히 빛나는, 우리와 동떨어져서 빛나는 그런 빛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다. 하느님에게서 빛이 난다면 우리들에게서도 빛이 있다. 다만 숨겨져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온전한 형태가 된다면 우리에게서도 빛이 날 수 있다. 눈도 빛나고, 입도 빛나고, 손도 빛날 수 있다. 빛은 어디든 들어간다. 심지어는 어둠 속에도 들어간다.
오히려 빛은 어둠 속에서 가장 의미 있게 다가온다. 빛은 신앙인들에게도 찾아오지만, 사형수에게도 찾아간다. 비신자들에게서도 우리는 빛의 찬란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빛의 삶’은 ‘초월적인 삶’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초월적인 삶을 살도록 창조됐다. 테니스 선수가 ‘조금 더’ 테니스를 잘 치려고 하고, 수영 선수와 육상 선수가 ‘조금 더’ 기록을 단축시키려 하는 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더 나은 삶, 더 나은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초월의 성향을 뿌리로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인간은 이렇게 초월적 성향을 가지고 있기에, 그 초월을 성취해 낼 때 가장 완전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초월을 성취해 낼 수 있을까.
우선 하느님과 합치된 삶을 살아야 한다. 초월의 가장 완벽한 형태가 하느님이기에 하느님과 합치될 때, 진정한 초월을 완성할 수 있다. 하느님과 합치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이 아닌 내 뜻대로만 산다면 그것은 초월의 삶이 아니다. 본능에 따르는 삶이다.
하느님의 힘을 받아야 초월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동물의 삶과 다를 바 없다. 개구리도, 강아지도 본능에 따르는 삶을 산다. 개구리와 강아지는 성경책을 읽을 수 없다. 성인ㆍ성녀전을 읽는 강아지를 봤는가. 묵주기도를 하는 돼지를 봤는가. 초월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
대부분 인간 사회의 문제는 본능적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느님과의 합치의 삶이 완전히 구현되면, 이웃에 대한 연민, 상황에 대한 융화, 세상에 대한 역량의 발휘가 일어난다. 이것이 초월이다.
하지만 인간은 완전하지 않기에 때로는 초월을 외면할 수 있고, 혹은 초월을 완전히 잊고 살 수 있다.
초월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초월은 우리가 알아듣기 힘든 것, 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많은 영성가들이 성인ㆍ성녀들의 신비적 초월을 이야기하고, 철학자들이 비인격적 초월에 대해 설명하다 보니 초월은 마냥 이해하고 성취하기 어려운 것으로만 이해돼 왔다.
초월은 특별한 사람들만 생각하고, 특별한 사람들만 성취해 내는 것으로 오해 받았다.
틀렸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초월이고, 신비다. 초월은 평범함 속에 있다. 그래서 평범한 우리가 초월을 성취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눈의 초월, 손의 초월, 입의 초월, 수영하는 것의 초월, 등산하는 것의 초월, 성서에 대한 깊은 이해, 묵주기도에 대한, 성체 조배에 대한 깊은 초월…. 모두가 초월이고, 초월을 성취해야 한다.
하느님과 합치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것이 초월이고, 이웃에 대해 연민을 더 가지게 되면 될수록 그것이 초월이고, 상황에 대해 융화하는 것이 심화 될수록 초월이다. 세상에 살아가면서 내 멋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참된 역량을 발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초월이다.
음식을 만들 때나 설거지 할 때 가족의 건강을 생각하며 정성스럽게 한다면 그것이 초월이고, 환경을 위해 쓰레기 하나 정성스럽게 버리는 것도 초월이다. 자부심이나 자만심이 아닌 진심 어린 동정심으로 넘어진 이웃의 손을 잡아주는 것도 초월이다.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 집에 와서 설거지를 할 수 있는가. 하느님은 우리를 통해 설거지를 하신다. 우리를 통해 초월을 드러내신다. 개구리와 돼지에게서는 초월이 나오지 않는다. 본능만 나온다.
하느님은 당신의 초월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을 인간을 통해 하신다. 그 초월을 드러내는 주인공은 나다. 내 안에서도 눈과 귀와 코와 입과 손과 발이 초월을 드러낸다. 이것들은 바로 초월의 기관들이다. 그래서 나는 초월을 위한 발전소다. ‘나’는 그냥 대충 ‘나’가 아니다.
하느님은 초월적 힘을 드러내라고 인간의 눈을 주셨다. 나의 눈은 강아지와 돼지의 눈이 아니다. 그 초월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 초월의 입으로 말해야 하고, 초월의 손으로 악수하고 토닥거려야 한다.
나는 신의 눈, 신의 손, 신의 입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이 주셨다. 나는 이렇게 ‘이미’ 초월덩어리다.
그렇다면 나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초월의 삶을 살아야 할까.
(55) 하느님 뜻과의 조화 (19)
삼위일체 신비인 ‘중심’을 잡자 ‘초월 덩어리’인 인간, 하느님 뜻과 조화돼 살아야 유혹받지 않는 신념인 확고함, 공명 위해 중요해
초월, 영성….
많은 신자들이 이런 단어들을 어렵게 생각한다. 나와는 다른 세상의 말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틀렸다. 하느님은 나를 애초에 ‘초월 덩어리’로 창조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초월의 눈과 초월의 손, 초월의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온다. 당신의 능력이 온전히 인간 곳곳에 배어 있다.
그 좋은 초월의 손과 눈, 입, 몸을 가지고 하느님 뜻과 조화된 삶(공명의 삶)을 살아가면 된다. 하느님 뜻과 조화되는 공명의 삶이란 우리가 애초에 가지고 있는 초월의 도구를 가지고 하느님과 합치하고, 이웃을 연민하고, 세상과 융화하고, 좋은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하느님 뜻과 조화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이런 삶은 초월의 도구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초월의 눈으로 보지 않고, 초월의 귀로 듣지 않고, 초월의 손으로 어루만지지 않는다. 이는 기계가 고장 난 것이다. 고장 나면 고쳐야 한다.
이때 수리를 위해 사용하는 부품이 합치, 연민, 융화, 역량이다. 이 새 부품으로 갈아 끼워야 기계는 중심이 잘 갖춰져서 부드럽게 돌아간다.
순정 부품을 다시 장착할 때 초월의 몸에서 영적인 힘이 뿜어져 나온다. 사방에서 나를 흔들려고 해도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은 중심이 잘 잡혀 있지 않아서 그렇다. 배가 흔들릴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됐습니다’고 간청했다.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마태 8, 24~26)
예수님의 호령 한 번에 바람과 호수가 잠잠해진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겁먹을 필요가 없다. 풍랑이 일어도 중심을 바로 잡을 수 있다. 이리 비틀, 저리 비틀거리다 물에 빠지지나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지금 중심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참으로 많다. 언제 물에 빠질지 모를 정도로 위태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일류 대학, 일류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중심을 잘 잡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중심은 다른 곳에 있다.
중심만 잘 잡으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영성 생활이다. 그 영성 생활 안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느끼지 못하던 행복을 만끽할 수 있다. 이러한 영성 생활은 특별한 고생과 극기, 희생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희생은 별도로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요구하시는 것이지 공명의 영성 생활 자체와는 그리 큰 상관관계가 없다.
어떤 이들은 영성 생활을 한다는 것은 삶을 통제하고, 규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영성 생활을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 시대에 어떻게 살았는가. 율법은 통제였다. 하느님 말씀을 그들은 통제와 규제로 알아들었다. 613가지의 법으로 스스로와 이웃의 삶을 옭아맸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 두 가지 계명으로 이를 요약한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것이다.
독재가 통제이고, ‘아름다운 울림, 공명’(하느님 뜻과의 조화)은 자유다. 하느님의 다른 이름이 자유다.
나는 ‘하느님’이라고 쓰고 ‘참 자유’라고 읽는다. 통제는 규칙성을 만들어 낼 수는 있겠지만, 조화를 창출하지는 못한다. 공명은 조화다. 이를 위해 중요한 성향이 하나 있다. ‘부드러움의 성향’이 그것이다.
아무리 하느님과 합치되었다고 해도, 아무리 이웃과의 연민, 세상과의 융화, 역량을 실천한다고 해도 인상을 찌푸리고 다닌다면 어떻겠는가.
딱딱해져서는 안 된다. 영성 생활을 성취한 사람은 부드럽다. 그러면서도 ‘확고함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확고함은 완고함과는 다르다. 완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모두 자신의 생각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이 종교지도자가 된다면 종교 내에서는 물론 종교 간 분열과 반목이 심해진다. 확고함은 유혹받지 않는 신념이다. 공명을 위한 확고함이 중요하다.
공명에는 나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이미 하느님의 존재 안으로 빨려 들어간 상태다. 그러면 자연스레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부드러움’을 드러내 보이게 된다.
동물들은 오직 정해진 길만 가지만, 인간만이 동쪽으로 갈 수도 있고 서쪽으로 갈수도 있다. 럭비공처럼 돌아다닌다. 이러한 개방성 때문에 하느님 창조 사업에의 동참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동쪽으로 가든, 서쪽으로 가든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바로 중심이다. 어디를 가더라도 반드시 중심에 들렀다가 가야 한다.
십자가를 그려놓고 그 중심을 생각해보면 중심이 무엇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중심이 바로 삼위일체 신비다. 형성하는 신적 신비이다.
(56) 하느님 뜻과의 조화 (20)
합치·융화의 삶 살면 우리 모습 환해진다 하느님 뜻과의 조화 ‘공명’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 부드러움과 확고함, 노력에 의한 습득 아닌 ‘선물’
“사랑하라!”
예수님의 절대적 명령이다. 이 말씀은 반드시 영성적 삶 안에서 구현돼야 한다.
하지만…. 너무 이 말을 많이 들어서일까. 세상에 넘쳐나는 말이 사랑이어서일까. 사랑에 대한 배신을 많이 당해서일까. 사랑의 의미가 너무 포괄적이어서일까. 솔직히 사랑이라는 말 하나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기에는 추진력이 왠지 약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랑처럼 변화무쌍한 것도 없다. 사랑은 어떤 때는 성실로, 어떤 때는 겸손으로, 또는 희생, 용기, 절제 등으로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사랑은 무조건 남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조언도 사랑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래서 나는 너무 많이 사용돼 의미가 조금은 퇴색되어 보이는 ‘사랑’이라는 단어보다 ‘공명’(하느님 뜻과의 조화)을 더 선호한다. 공명이 곧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고, 사랑의 완성은 공명으로부터 출발한다.
공명을 구현하면 이웃과의 조화는 저절로 따라온다. 공명은 나만 잘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이웃, 상황, 세상과 함께 조화를 이루는 것이고, 그 조화가 나를 통해 구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명을 위한 골자는 하느님과의 ‘합치’(congeniality), 주어진 삶 상황 안에서의 ‘융화’(compatibility), 한계를 가진 인간으로서 타인에 대한 ‘연민’(compassion), 그리고 이를 통한 인간 ‘역량’(competence)의 발휘다.
이 네 가지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 뜻과의 조화로운 삶, 즉 공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 공명의 삶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또 ‘부드러움’과 ‘확고함’의 성향이 중요하다.
하느님께서는 부드러운 분이실까, 아니면 부드럽지 않은 분이실까. 가장 완벽한 부드러움은 하느님 안에서 구현된다. 때로는 모진 모습을 보일 때도 있지만 그 모질게 보이는 부분도 모두 완벽한 부드러움의 한 부분이다. 완고한 인간을 부드러운 인간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모짊이기 때문이다.
영성적인 사람은 부드럽다. 만약 어떤 수사님과 수녀님이 부드럽지 않다면 그분은 수련이 부족하신 분이다. 부드러움의 수련이 필요하다.
하느님을 거쳐서 부드러움으로 나 자신이 충만해져야 한다. 만약 내가 부드러운 상태에 있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의 힘을 받으면 더 완벽한 부드러움을 구현할 수 있다.
부드러움의 수련이 일정 부분 성취하게 되면, 우리는 하느님 뜻을 이루는 데 있어서 좀 더 확고해질 수 있다. 하느님의 힘으로 하기에 더욱 확고해진다.
여기서 확고함은 완고함과는 다른 것이다.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완고함이라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은 확고함이다. 흔들림 없이 하느님 뜻과의 조화를 위해 굳센 걸음을 걸어갈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다. 이 모든 부드러움과 확고함 등은 모두 우리의 노력으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부여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노고의 결과가 아니라 초월적 사랑의 결과다.
꽃꽂이를 잘하는 것도, 수영을 잘하는 것도, 레지오 마리애 단장 역할을 잘하는 것도, 본당 주임신부 역할을 잘하는 것도, 보좌신부 역할을 훌륭히 해내는 것도 모두 선물이다.
나를 드러내려 하고, 내가 행복해야 하고, 내가 이름을 드날려야 한다고 느낀다면 진정한 행복의 선물을 받을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나 자신이 잘되려고 하기 때문에 거저 주어지는 선물을 받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의사가 확고함과 부드러움의 성량을 가지고 인술을 펼친다고 했을 때, 또 어떤 공무원이 서민들의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할 때, 어떤 사제가 자신에게 주어지는 명예와 존경, 만족감을 뒤로하고 오직 신앙인들의 행복을 위해 투신하는 것은 모두 선물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사실은 초월적 사랑을 줄 수 있는 하느님 사랑의 결과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 자체도 선물이고 하느님 사랑의 결과다. 내가 잘나고 잘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했습니다”라는 말은 모순이다.
반대로 지금 이 글을 읽는 것 자체도 선물이다. 읽을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주신 분이 하느님이시다. 결국, 모든 것이 하느님 것이다.
이런 맥락을 모두 알게 되면 세상이 환하게 보인다. 공명의 실천은 빛으로 드러난다. 공명은 우리를 눈부신 빛으로 만든다. 합치 융화 연민 역량 확고함 부드러움의 삶을 살면 우리의 모습이 환해진다.
그런데도 주위에는 우울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그들의 삶은 환하지 않다. 우중충하고 우울하고, 암울해 보인다. 하루하루 긴장 속에서, 혹은 왠지 모를 허전함 속에서 살아간다. 왜 그럴까. 그들은 왜 그렇게 살아갈까. 그 이유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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