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喬桐)은 경기도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원래 고구려의 고목근현으로서 해중(海中)의 섬이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교동현으로 개명하여 고려시대에도 계속하여 교동현이라 하였고, 그후 군으로 내려오다가 1914년 군을 폐하고 강화로 합했다.
교동인씨(喬桐印氏)는 중국 계통으로 [좌씨전(左氏傳)]과 [계고집성(稽古集成)]에 의하면
중국 정(鄭)나라 목(穆)의 증손 7명 중에 자장(子張)의 아들 단(段)이란 사람이 조부의 이름인
자인(子印)의 인(印) 자를 따서 성을 인씨(印氏)로 삼았다고 한다.
단(段)의 후손인 인서(印瑞)가 진나라 풍익의 대부로서 297년 신라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한 것이 우리나라 인씨(印氏)의 시조가 되었다. 그후 33세손 [빈]이 고려 인종때
한림학사로 교수 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교동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문헌에 나타난 인씨의 본관은 23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고려 충렬왕때
제국대장공주(고려 충령왕 비)를 배종하고 들어와 검교정승을 지낸
원나라 사람 후(候)를 시조로 하는 [연안인씨(延安印氏)]와 [교동인시(喬桐印氏)]를
제외한 나머지는 세거지명에 불과한 것으로 전한다
가문을 빛낸 인물을 살펴보면 빈의 아들 완(完)이 형부상서를 거쳐 문하시중 평장사에
올랐으며 손자 규(珪)가 판이부상서를, 증손 현원(玄元)이 응양위 대장군을 거쳐 호부상서를
그리고 현손 정(貞)은 평장사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빈의 9세손 당은 공민왕때 첨의평리를 거쳐 서북면 병마사로서 참지정사에 올랐으며
석성부원군에 봉해졌다. 또한 그의 아들 안(安)이 전리 판서를, 해(海)가 이부시랑을 지냈고,
손자 원보(原寶)가 서북면 체찰사, 중보(重寶)가 상장군을 각각 역임하였다.
이외에도 대장군을 지낸 저(著)와 절충장군 철관(鐵寬), 선략장군으로 임진왜란때
정난원종이등공신에 오른 발(潑), 도총부 부총관 이헌(以憲),
그리고 참판을 역임한 명조(明朝),근영(瑾永),석신(錫信),상혁(相赫) 등이 가문을 빛내었다.
189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교동인씨(喬桐印氏)는 남한에 총 4,139가구,
17,55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