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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토지사랑모임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장홍문
부의 재발견 ( 부자될 자유와 권리에 대해)
“경세제민”( 經世濟民 )
즉 세상질서를 세우고 백성을 잘 다스려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는 것을 의미하고,
옛 부터 백성들 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을
실현해 주는 것을 곧 경세제민이라 하고
오늘날 경제의 어원이 기도 하다.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먹을 것!
백성의 하늘은 곧 먹을것이라는 것이다.
하기야 먹을 것이야 말로 생명을 유지하는
원천이니 옛사람들은 먹을 것을 하늘처럼
여겼던 것이고 위정자들은 백성들을 배불리
잘먹이 것을 치세의 요체라고 여겼던 것이다
.
“함포고복” ( 含哺鼓腹 )
중국역사에서 나라의 태평성세를 나타내는
글귀이다. 배불리먹고 부른배를 두드린다는
것이다 얼마나 행복한 글귀인가! 부른배를
내밀며 뱃장구를 치며 태평성가를 부른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마음이 넉넉해 지니 말이다.
맹자는 양민론에서 정치란 백성들로 하여금
함포고복하도록 먹을 것을 보장해 주는 일,
즉 ,백성을 잘 먹여 키우는 일이라며 이것이야
말로 왕도정치의 근간이라고 갈파했다.
공전의 히트를 친 영화 [월컴 투 동막골]에서
인민군장교가 평화로운 동막골 촌장에게
묻는다.
“촌장동무! 어드렇게 훌륭한 영도력을
발휘하십니까?”
질문을 받은 동막골 촌장은 의외로
단순한 답을 내놓는다.
“흠~~ 마이 먹여주는 거지”
이렇듯 경세제민은 밥, 또는 먹을 것을 보장하는
하는 일이며 곧 정치의 요체인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역사는 정치를 통해 경세제민을 실현
하고자 숱한 고민들을 하였고 통치의 성패가
달린 문제로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 경세제민
을 위한 고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회는 누가, 얼마나 먹을 것을 차지할
것인가가 경쟁과 갈등의 이유가 되었고 이를
기초로 사회적 권력 및 정치권력이 형성되면서
정치는 먹을 것을 누구에게 얼마나 어떻게 분배
할 것인가 가 위정자의 주된 역할이 되었다.
그래서 먹을 것을 생산하고 저장하고 이동하는
것이 사회와 국가 경영의 과제가 된 것이다.
어리석은 위정자들에 의해 먹을 것에 대한
생산과 분배의 시스템의 오류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정상적 생산 분배 방식을 추구하는
사회적 저항의 힘이 형성되어 결국 정상의
시스템을 회복하기도 하였다
물론 그 문제 해결 방법은 사회적 모순의
정도에 따라 다른 모습을 하고 나타나지만
역사는 개혁, 혁명전쟁 등의 모습을 하고서
먹을 것에 대한 문제해결 방식을 제시해
온 것이다.
먹을 것!
이를 추구하는 모습이 인간의 실존이다.
이것 때문에 서로 경쟁하고 갈등하는 것은
사회적 실존이다.
이를 생산하고 배분하는 힘을 가지고
실현해 주는 것은 국가의 실존이다.
그래서 먹을 것에 대한 모순과 해결 과정이 곧
역사의 실존인 것이다.
굶주림!
인류가 먹을 것에 대한 집착을 하는
이유이다.
인류는 수차례의 빙하기를 거치고 수많은
자연재해를 당하는 과정에서 골수에 사무치듯
유전자에 기억되어 있는 트라우마가 있다.
굶주림의 고통이다.
“사람은 빵만으로 만 살수 없다”
“인간이 먹을 것만 탐닉한다면 다른 동물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배부른 돼지로 사느니 배고픈 소크라테스로
살겠다” 등의 주장은 굶주림을 경험하지 못한
배부른 자들의 위선전 주장일지 모른다.
오히려 눈물먹은 빵을 먹어보지 않았았던 자와
인생을 논하지 말라!라는 주장이 오히려 솔직
하다고 할 것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임에도 불구하고 굶주림은
인간의 최소한의 존엄과 가치 그리고 행복도
지켜주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굶주림의 고통과 굶주림의 불안은 먹을 것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났고 먹을 것에 대한 안정적 확보가
인간이 부(富)를 추구하는 사고와 행동방식으로
표현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귀결이라 할 것이다.
부(富) !
인간이 먹을것에 대한 안정적 희구의 결과이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통틀어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이다.
한자에서 나타난 부(富) 자의 따져 보자
宀 + 一 + 口 + 田 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宀 은 움막이 아닌 견고한 사람이 정주할 수
있는 주거 또는 먹을 것을 저장하는 곳간 등의
건조물이다. 一 口는 식구로서 먹을 것을
생산하는 노동력을 의미하며 田을 땅의 의미도
있지만 한자의 원문인 갑골문에서는 과일을
수둑이 쌓아 올린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즉 먹을
것을 그득히 가지고 있는 상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富는 집크기와 노동력의 크기 그리고
먹을 것을 생산하는 크기에 따라 부의 크기가
달라지고 그 부를 보유하는 크기에 따라 사회적
위치가 달라 졌던 것이다.
과거 통치권자를 표현할 때 폐하, 각하, 전하,
합하등은 그 잡의 크기를 표시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래서 과거 정치권력자들은 이런 부가 자신들에게
집중되길 원했고 개인에게 집중되는 것을 지극히
경계하였던 것이다. 정치권력자들이 보유하고
있는 부를 개인들에게 배분을 하게 될 때에는 신중 또
신중을 기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먹을 것에 대한 생산과 분배를 결정하는
정치권력은 자신들이 독점하였고 부의 생산에 참여
한 개인에 대해 부의 보유는 먹을 것에 대한 최소한
으로 정하고 이를 초과한 행위에 대해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비난대상으로 삼았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명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라는 서양의 옛 속담은
시사한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군자는 의(義)를 탐하고 소인배는 이(利)를
탐한다는 유교식의 주장이나 잘 먹고 잘살겠다는
욕망이 모든 번뇌와 고통의 근원이고 이를 버려야
비로소 절대행복에 들어설 수 있다는 불교의 주장
들도 부를 보는 서양의 일부 사람들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부자도 천국에 갈 수 있는가?
신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변하는 격변을
거치면서 부를 보는 인식의 변화가 나타났다.
캘뱅 같은 종교개혁가 들이 주장하는 구제예정설
에 의하면 사람은 신으로부터 구원받을지 여부는
미리 예정되었다고 하면서 신의 의지를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이 정당하게 쌓은 부에 있다고
갈파했다.
신의 뜻에 의한 근면, 검소, 절약의 생활방식으로
부를 형성하였다면 신의 은총 혹은 신의 보상
정도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신의 은총의 산물인 부를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면서 부자가
천국에 못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자가 천국
에 갈수 있는 것이라고 강변하였다.
정치권력으부터 통제를 받는 부의 형성이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통해 부를
형성할 수 있다는 부에 대한 새로운
페러다임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런 변화를 견디지 못하는 정치권력들도
있었다. 오히려 이런 주장을 이단으로 치부하며
이들을 악의 축으로 보고 토벌해야 한다며
종교재판을 열고 전쟁을 일으키는 나라도
있었으니 당시 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데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
짐작 할 만 하다.
이런 거대한 담론을 거치면서 당시 유럽인들에게
부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 종교적 구속으로부터
자유스러워 졌고 유럽인들의 부를 향한 활동이
지속적이 역동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후에 많은 사회학자들은 이런
의식의 변화를 프로테스탄티즘 즉 종교개혁을
위한 저항주의라 칭하면서 이러한 집단 의식의
변화가 후에 인류역사 상 전무후무한 부의
양적 질적 증가를 가져오게 한 계기가 되었다
주장을 서슴차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들은 상업 활동과 시장의 형성 그리고 도시건설과
신대륙 발견, 세계일주, 식만지건설과 미지의 세계의
탐험, 연구발명과 발견에 의한 부의 생산은 눈부실
정도이고 그들은 개인의 부를 기반으로 당당하게
주류적 세력으로 합류하였던 것이다.
산업사회 시민사회등장!
이런 유럽인들의 부를 위한 활동은 기존의
태생적 부를 보장받으며 안정적 부에 집착
하였던 국가 및 귀족들과 대립이 되면서 부의
동력의 구조변화를 요구하는 역사적인 시민혁명을
끌어내기도 하였다.
나아가 그들의 자유스런 경제 활동은 더 많은
재화의 생산과 유통을 요구하였고, 이런 요구는
기존의 수공업체계에서 기계를 제작하여 그 기계가
재화를 만들어 내는 획기적 생산구조의 변화가
산업전반에 거쳐 확대되었다. 또한 그 기계를
움직이는 동력 즉, 증기엔진에서 디젤이나 가솔린의
발명으로 노동자의 노동을 기계가 대신하게
되었고 급기야 전기의 발명으로 인한 인류사회
의 변화는 거대한 산업사회를 구성하면서
부의 획기적인 양적 질적 증가는 일찍이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신천지 였던 것이다.
특히 이런 산업사회에서 부를 가진 개인들 시만의
양적 증가는 기존의 정치권력의 관여로부터
당당하게 벗어날 수 있었고 이런 부를 향한 자유스런
사회 정치적 보장은 인간에게 많은 부를 위한 상상력
에 자극을 주었던 것이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변혁의 산업사회에서 개인과
사회적 부를 창출해내는 획기적 변화로 소비가
미덕이 될 만큼 풍요로운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부익부! 빈익빈!
하지만 유럽인들의 부를 향한 자유스런 집념의
발산은 무한 경쟁으로 인한 각자의 부의 양적
불평등을 가져왔고 개인의 부와 부의 경쟁은
경쟁에서 승리한 큰 부가 경쟁에서 패배한 작은
부를 몰취하는 과정에서 개인으로부터 부를
상실한 자가 발생하였다. 부익부 빈익빈의
시회적 문제점이 드려나며 사회적 적폐가 쌓여간
.것이다
부익부 빈익빈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가진자와 갖지못한자와 적대적 갈등을 낳았고
부익부 빈익빈의 불평등한 부의 분배구조의
모순은 가진자가 갖지못한자에게 당연히 분배
해야 할 부를 가로챘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지식인들
사이에 팽배하면서 사회불평들의 구조를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들을 공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분배구조의 모순적 현상이 부의 분배를
결정하는 세력의 지나친 도덕적 해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자신들과
공존의 대상이 아닌 척결해야 할 적대관계에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라고 불리어지는 이런
시대적 인식은 자신들이 원하는 부의 양적
부족의 원인이 부의 분배를 결정하는 세력들이
빼앗아간 결과라고 생각하고 그 빼앗긴 부를
탈환하기 위해 조직적이고 폭력적 투쟁을
수반해야 한다는 인식에 동조하는 세력들이
나날이 커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투쟁세력의 주체들은 부의 공정한 배분을
약속했다. 그 전제로 개인의 부 보다 사회적
국가적 부를 우선하며 개인적 부의 양보를 강하게
요구했다. 개인적 부의 양보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은
그들에게는 반동분자이고 인민의 적이었으며 타도
대상이었음은 당연하였다.
이런 투쟁세력의 주장은 국제적으로 공감을
얻으면서 투쟁세력 간 제적 연대를 구축하기도
하였으며 기존의 국제세력과 대립을 하면서 국제질서를 2
분한 큰 축으로 세력을 확대하였다.
미친 이데올로기 시대, 좌와 우의 끝없는 대치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으로 이어지는
이념적 주장은 개인적 부를 통해 사회적 국가적 부를
이룰 수 있다,라는 자본주의적 신념을 가진 세력과
치명적이고 극단적 갈등을 야기하면서 국제질서는
격랑에 휩싸여야 했다.
소위 이데올로기시대라고 불리어 지는 극한의
이념적 대립으로 사회정치적으로 좌파와 우파로
구분되고 이런 이념적 기반을 둔 국제사회는
동과 서로 나눠 진영을 구축하며 무한의 대치
를 하면서 부를 차지하기 위한 여러 차례 세계적
국지적 전쟁을 야기하여 인류 역사의 야만성이
적나라하게 노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인류의 야만성을 반성하는 세계지성
있었고 세계지성의 충고에 따라 극단의 이념적
세력들이 약화되면 일정한 반성적 양보와 조정
과정을 거치게 되었고 국제질서의 공존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수정적 이념제도가
나타났다.
즉, 자유주의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은 국가적
사회적 부가 개인적 부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반대
하면서도 개인적 부의 도덕적 해이를 경계하는
반성을 통해 개인적 부에 가벼운 도덕적 족쇄를
채우는 것에 기꺼이 합의 하였고 공익적 범주 내에서
개인의 부를 향한 활동을 최대한 보장하여 개인적
부와 사회적 국가적 부의 조화를 꾀하며 지향되는
방향의 수정을 꾀하였다.
한편 사회주의 이념에 따른 개인적 부를 위한
활동을 제한하였던 체제에서는 개인의 삶의 질이
악화되어 개인들의 부를 위한 욕구를 더 이상
억제할 수 없고, 국가 사회적 부를 위해 더
이상 양보하고 희생하는 인내력은 이미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부의 분배를
결정하는 세력에 대해 개인적 부를 요구했고
그 요구는 강렬하게 나타났다.
더 이상 시대는 개인적 부의 양보와 희생을
요구하기에는 시대착오라는 것을 인식하기에
이르렀고 개인들은 자신들의 부를 추구하기
위한 확실한 동기부여를 요구하며 부의 분배
구조의 해체를 들고 거리에 나서 구호를
외치고 심지어 부의 분배를 결정하는 세력
들의 교체를 강력하고 급진적이며 심지어
폭력적 방법으로 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종국에는 개인의 부를 억압하고 반동 시 했던
그 세력 대부분은 1세기 간의 막대한 검증비용을
세계역사에 지불하고 해체된 채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
오늘날 부는 국가나 사회전체가 독점적으로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 부에
채워졌던 도덕적 족쇄를 풀어줄 수는 없다. 과거 고삐
풀린 망아지와 같은 탐욕적 부가 선량하고 정직한 부에
치명적 상처를 입힐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개인과 사회, 국가의 부는 상호 보완적 역할을 통해
국가의 발전과 개인 각자의 삶에 질적 향상을
가져 온 것이다. 전통적으로 자신의 육체적
노동을 제공하여 부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시도는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지만 토지나
기계등 생산수단을 통한 재화의 생산과 그
재화의 생산자와 그 재화의 소비자를 연결해
주는 유통 과정에서 부가 생산되는 제 3의
활동에 참여하면서 부의 확대를 가져오는
변화가 왔고 그 생산자와 유통자의
부와 노동을 제공한자의 부와의 차이를 타협과
투쟁으로 적절히 조절하면서 대체적으로 안정적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결국 부가 국가사회로 귀속되고 개인에게 최소한에
머물려야 한다라는 세력들은 역사의 패배자가 되어
박물관에 갖히게 되었다.
반면 개인의 부가 국가사회의 부의 원천이며
개인에게 귀속되는 부를 생산하는 것에 통제를
하게될 때 는 최소한에 미쳐야 한다는 세력
이 역사의 승자로 남아 세계사적 보편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계속이어 집니다
2018년3월 31일
장홍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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