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그리우면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다방에 간 적이 있다.
뜬금없이 보고프면 음악다방을 서성거리던 때도 있다.
나에게 다방이란 조금은 낯선 단어로만 기억되는 것이지만 조숙한 나에게 다방은 또한 기억 속에 있는 다방이기도 했다. 나는 아직까지 커피 한 잔 배달을 시켜서 마셔본 적이 없다. 그러나 다방이 주는 풍경은 나름대로 많은 향수를 자아내게 한다.
고등학교 3학년의 정읍 시골 소도시는 정읍 장날만 되면 다방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나는 다방은 모두 여자들이 운영하는 줄 알았다. '연지 다방' '정자 다방' '난 다방' 그래서 다방앞오토바이에는 여자들이 커피를 배달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만 해도 커피숍이란 것은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음악다방이 좀 괜찮은 장소로 쳐주는 것이 전부였다. 우리들은 미팅을 갈라치면 줄곧 분식 집이나 빵집을 이용했다. 그 때 잘 가던 분식집 호떡은 한 개에 50원 할 때였다. 빵집은 시내 복판에 있던 '태극당'을 이용했다. 그렇다 해서 매일 빵집을 이용할 팔자는 안되었다. 왜냐하면 돈도 돈이려니와 같이 갈 여자친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다방에서 제법 그럴싸한 만남을 가진 것은 내 나이 스무 살 때 아마 제주도에서 생활 할 때였다. 그 당시 나의 직업은 국민서관 영업부에서 근무할 때였다. 쉬운 말로 하면 책장사였다.
어느 날 뜬금없이 내가 사는 숙소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저기 혹시 시간 되시면 나오실 수 없나요?"
그 당시 내가 머물던 곳은 여인숙이었다. 제주 남성로터리근처 여인숙이었는데 그 여성이 어떻게 내 숙소를 알아냈는지 아직도 미궁이다. 왜냐면 그때 내가 묻지 않았으니까.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제주 시내로 나오시면 다사랑이라고....."
시간을 맞춰 딴에는 멋도 내고 머리도 드라이를 해서 넘기고 나갔다. 어둠이 자작자작 밀려오는 제주의 푸른 밤이 묵빛으로 새 옷을 갈아입고 바람은 따사로운 네온사인을 휘 돌아 탑동 전깃줄 제비한테 날아갔는지 전깃줄에서 졸던 제비들이 기우뚱 넘어지는 시늉을 하곤 했다.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사랑 어두운 조명 속을 나는 훔쳐봤다.
아마 그 날은 비가 왔을 것이다. 한참동안 나의 시선이 다사랑안을 휘 돌다가 마침내 시선이 꽂히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그곳에 그녀가 앉아있었다. 창문 밖으로 하염없이 퍼부어 내리는 비의 리듬에 맞춰 베토벤의 교향곡이 울려 퍼지고 물레방아의 물 파도는 작은 파문을 일으키며 조그만 못 위로 넘나들고 있었다.
그녀는 커다란 꽃다발을 한 아름 가지고 왔다.
"이거 제가 늦었습니다. 안녕하셨습니까?"
"앉으세요."
시종일관 고개를 숙인 그녀는 미소조차 없이 파리한 얼굴이었다.
"저기 이거 받으세요!"
그녀는 가지고 온 꽃다발을 내 밀었다.
"아니 이런걸 왜? 꽃이 참 화사하군요. 이거 이런 거 받아본 적이 없어서 무척 쑥스럽습니다."
"생일 축하해요!"
"예? 제 생일이라고요?"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제주도에 전근을 와서 첫 업무를 개시하던 날이었다.
첫 집을 방문해서 벨을 눌렀다.
"딩동 딩동 딩동"
몇 번의 초인종 소리에도 묵묵 부답인 그 집을 포기하고 막 나오려는 찰나 현관문이 지긋이 열렸다.
"누, 누구세요?"
떨리는 음성의 작은 목소리가 방안을 뛰쳐나왔다.
"예, 아 계셨군요. 국민서관에서 나왔습니다. 여긴 학생들이나 아이들 없나요?"
"아. 예 그러시군요. 여긴 애들 없는걸요. 여기 분이 아니신 듯 한데....."
"맞습니다. 서울에서 파견근무 나왔습니다. 혹시 나이가? 저랑 비슷한 듯 해서요."
"스무 살입니다. 피아노 학원 다니고 있어요."
아마 그때 내가 명함을 주었는지 어땠는지 기억이 없다. 내가 생일을 가르켜준것도 기억이 없는데 그녀는 나에 대해 제법 많은 것을 알고있었던 것이다.
제주를 떠나기 전 그녀를 딱 한 번 더 보았다.
그 날은 탑동 등댓불이 일렁이는 야외에서였다.
"밤바다가 시원합니다. 우리 저기 등대까지만 걸을까요?"
"네, 앞에 가세요!"
그녀는 한사코 나에게 앞서 가라는 표현을 했다.
"아니 왜 같이 가면 되는데 앞에 가라고 하십니까?"
하면서 나는 뒤돌아보았다.
나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서너 걸음 뒤에서 걸어오는 그녀는 다리를 절룩거리고있었다. 바로 그녀는 소아마비 장애우 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방에 먼저 와서 기다렸구나. 그래서 내가 왔을 때 일어서지 않고 그냥 앉아서 나에게 인사를 했었구나, 그래서 내가 항상 앞에 가길 바랬구나!'
가슴이 아팠다.
"미리 말씀을 하시지 그랬습니까?"
"죄송해요."
고개를 푹 떨구는 그녀를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마냥 앞으로 앞으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제주 일정을 마치고 육지로 떠나 던 날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저 이제 떠납니다."
"저.. 공항에 못 나가겠습니다."
"이유는 요?"
"더 이상 묻지 말아주세요. 그럼 안녕히"
하늘을 나는 비행기는 제주 시내를 한 바퀴 도는 듯 싶었지만 제주땅 어디에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군대 전역할 무렵 어렴풋이 들려오던 바람이 전하던 말
"저 결혼 했어요. 아이도 있는걸요. 애들 피아노 가르치러 다녀요."
그것이 전부였다.
13년 전 아내와 다시 제주를 찾았다.
서귀포 정방 폭포로 겨울 바람이 모여들고 폭포는 무지개를 만들며 쏟아졌다.
아내와 밀월 여행을 온 것이었다. 남들은 신혼여행을 온 것으로 착각하겠지만 우리는 아무도 몰래 비행기를 타고 단 둘이 제주도에 온 것이었다.
서귀포에서 2박을 할 때였다. 우리들은 마땅히 갈곳을 몰라 근처 다방에 갔다.
참 오랜만에 가보는 다방이었다. 그곳은 신기하게도 음악다방 디제이도 있었다.
아내는 학창시절 음악 다방에 다니던 일들을 나에게 얘기해주었다. 디제이가 마이크로 말했다.
"저기 신혼부부로 보이시는 분 앉아 계십니다. 신청곡 틀어드릴테니 노래 신청하시죠"
"저기 저희요?"
"예, 두 분 너무 잘 어울리십니다. 이곳 제주를 방문해 주셔서 정말 감사 드리고 행복한 여행이 되시길 바랍니다."
무슨 노래를 신청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그 날 그 다방은 정말 환상이었다.
3년 전 친구들 9명과 다시 성남 백악관 나이트 클럽에서 조촐한 송년 모임을 마친 후 우리는 옛날 생각이나 하자면서 다방에 갔다.
다방 한 가운데는 여전히 수족관이 있었고, 철 지난 등나무 의자는 한 구석에 놓여있었고, 연탄 난로는 기다란 연통을 늘어뜨리며 길게 뻗어있었다. 모두들 기분들이 센치해지는지 말들이 없이 흘러나오는 옛 노래에 심취해 있었다.
2년 전 우리들 10여명은 대학로 모 문학 다방에 모였다.
시인 윤강로 선생님을 모시고 시에 대한 강의도 들으며 우리들은 한 친구가 가지고 온 기타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아름다운 선율과 다방 가득 쌓아놓은 시집들이 훈훈함을 풍겨주었다. 그 때 기억에 남는 시가 윤 강로 시인 님의 시'피피새는 수평으로 난다'라는 구절이었다.
최근에 다방을 접한 것은 모 산악 모임에서였다. 10여명의 산악 회원들이 자리를 접수하고 따스한 커피를 시켰다. 밖에는 모진 비바람이 사정없이 불었다.
"우와 이거 얼마 만에 와 보는 다방입니까?"
"글쎄 저도 처음인 것 같은데요"
"앞으론 이런 곳에서 자주 모입시다. 맨날 감자탕집만 가지 말고요."
"하하하, 호호호"
주름진 얼굴의 나이 지긋한 마담의 부지런한 발걸음이 이어지고 종업원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음악은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궂은 비 내리던 날, 그야말로 옛날 식 다방에 앉아 토라진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리 들어보렴, 첫 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 갈까?'
모두들 음악에 취한 듯 말들이 없으셨다.
"무슨 노래 좋아하십니까 대장님?"
"추가열의 나같은건 없는 건가요. 좋아해요"
산행 대장님은 눈가 잔주름으로 보아 중후한 모습이신데 생각은 나보다 젊으셨다.
"이 산악회에 대해 어찌 생각하세요?"
대장님이 물어보셨다.
"저는 여러 산악회를 많이 간답니다."
내가 말했다.
"왜요?"
"산이 좋아서 가는 거라서 그렇죠. 사람이 좋으면 사람 따라서 산행을 하지만 산이 좋으면 산을 따라서 산행을 하게 됩니다."
"그럼 이곳 산악회를 얼마나 생각 하세요?"
"생각의 틈이 10센티미터라면 3센티미터만 이곳 산악회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7센티미터 정도는 이 산악회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른 산악회를 찾아 헤매는 시간이 없어질 테니 제가 글 쓰는데 좀더 많은 시간을 낼 수 있지 싶습니다. 대신 좋은 산을 많이 주최해야합니다 대장님!"
"하하하 그렇게 부담 주시려면 그냥 3센티미터만 생각해 주세요. 이것 참 하하하"
산행을 자주 나오지 않는다는 대장님의 서운했던 감정이 싹 풀리신 듯 우리는 오래도록 회원 님들과 사심 없는 애기를 나누었다. 어느새 산행으로 노곤해진 내 피로도 싹 풀리는 것만 같았다. 저마다 손을 흔들며 이별을 했지만 어느 산에서 또 만나든 아름다운 산행은 계속될 것이다.
다방에 얽힌 사연들이야 더 많을 것이지만 여기서 접기로 한다. 어느 날 라디오 여성시대 진행자이신 송승환씨께서 정말 옛날 식 다방을 많이 만들어 보급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음악 다방 디제이가 있고, 추억이 있고, 추억을 새길 낙서장이 있고, 추억을 담을 행복한 웃음이 있는 대화의 장, 그런 여유가 우리 주위 곳곳에 많이 생겨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