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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정맥 제 4 구간 (답운치~애미랑재)
1. 산행일자 : 2009년 12월 27(일)
2. 산행구간 : 답운치 ~ 애미랑재 - 경북 봉화, 울진
3. 출발일시 및 장소
[1] 출발일시 : 2009년 12월 27일(일) 06 : 30분
[2] 출발장소 : 명산랜드
4. 준 비 물 :
[1] 전 체 - 차량(노승애, 윤희원, 장현옥), 안전장구, 구급약, 사진기
[2] 개 인 - 비상식, 등산화, 배낭, 예비옷(보온)과 양말, 윈드쟈켓 및 우의, 모자, 장갑, 후레쉬, 식수(2L 이상), 세면도구, 신분증 등 기타 개인용품
5. 날 씨 : 맑음
6. 참가인원
○ 김교수, 노승애, 박봉하, 박상호, 안상경, 윤희원, 이용준, 장현옥, 홍영표(9명)
7. 산행 구간 개요 :
경북 울진군과 봉화군, 영양군을 관통하면서 활처럼 휘어지며 남하하는 답운치에서 애미랑재까지의 이번 구간은, 도상13.0km에 소요시간 6시간이면 충분한 비교적 짧은코스이다.
초반부의 계속되는 오름길 외에는 정맥길 치고는 전반적으로 수월한 편이다. 이번 구간의 최고봉인 통고산(通古山1066.5m)은 경북 울진군 서면에 위치하고 있다.
정상에 서면 강원도와 경북의 산줄기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 중에서도 남서쪽의 군사시설물이 들어찬 영양의 일월산(1218m)주변이 압권이다.
답운치의 해발고도가 618.9m이고, 오늘 구간에서 가장 높은 통고산이 1067m이니, 표고 차가 400m 이상이지만, 이 표고차가 도상거리 약 6.1Km 정도의 비교적 긴 구간에 걸쳐 희석되어, 통고산까지 완만한 오르막이 이어진다. 애미랑재의 해발고도는 약 560m이다. 따라서 통고산에서 애미랑재 까지는 줄곧 내리막의 연속이다. 결국 이번 코스는 산 넘어 산, 그 넘어 또 산식의 애를 먹이는 대간이나 정맥의 마루금과는 달리, 마치 큰 산 하나를 올랐다 내려오는 일반 산행처럼 단순한 것이 그 특징이다.
통고산 서쪽으로는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회룡천이 흐른다. 동쪽의 불영계곡으로 흐르는 광천과 전쟁에 패한 왕이 피신했다는 왕피천은 동해로 흘러든다.
8. 산행지 정보 및 일정 계획
[1] 총 산행 거리 및 소요시간
〇 총 산행 약 12.1km, 4시간 40분 정도 소요(도상13.0km에 소요시간 6시간)
[2] 구간 거리 및 주요 산 높이
답운치--6.1km--통고산--2.4km--937.7봉--3.6km--애미랑재(917지방도)
[3] 산행 일정
(1) 산행지 이동 길
기상(05:30) ∼ 아침식사(06:00/06:30) ∼ 36번국도 ∼ 답운치(07:00)
(2) 산행 코스
답운치(07:10) → 헬기장(07:50/08:00) → 889봉(08:40) → 휴양림 임도(08:50) → 휴양림 삼거리(09:15) → 통고산(09:30/09:40) → 왕피리 임도(10:10) → 937.7봉(10:20) → 헬기장(10:40/10:50) → 애미랑재(11:50)
(3) 산행 후
애미랑재(12:10) ∼ 917번, 36번도로 ∼ 소천(12:30/점심/13:20) ∼ 풍기TG ∼ 중앙, 영동고속도로 ∼ 수원(18:00)
■ 탈출로 및 편의사항 : 명산랜드 모텔(054-673-9988, 054-672-8700)
석포개인택시(054-673-2674, 011-375-5833)
9. 산 행 기
[1] 산행 전
정맥 산행 때마다 매번 반복되는 일로 전날 과음으로 다음 날은 어김없이 괴로움을 겪는다. 아침 05 : 30분 기상인데 눈이 떨어지지를 않는다. 06 : 00나 되어서야 겨우 일어났다. 대장은 벌써 돌아 올 때를 염려하여 『애미랑재』에 차를 두고 왔다고 한다. 부지런하기도 하지만 대원을 인솔하는 책임 때문에 남다른 고생을 한다.
고양이 세수를 하고 최소한 필요한 물품만 배낭에 담고 짐을 챙겨 식당으로 내려와 보니 모두 식사 중이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소머리 국밥으로 아침상을 받았는데 입안이 깔깔하여 밥을 넘길 수가 없다. 억지로 몇 수저를 뜨는 것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차에 올랐다.
[2] 산행 들머리 답운치
눈을 크게 뜨고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경관을 살핀다 하면서도 결국 눈까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던 모양이다.
오늘 산행 들머리 고개가 높아 구름을 밟는다하여 붙여진 이름의 해발 619m의 『답운치(踏雲峙)』에 도착을 했다. 우선 출발 전 단체 사진 촬영을 한다. 출발하면 산행 끝 지점에서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3] 산악대장도 착각할 때가 있다.
사진 촬영을 하고 표지기를 따라 산행 길로 접어들었다. 장갑을 두 켤레나 끼었는데도 손끝이 알알하다. 손난로를 챙기지 못한 벌을 톡톡히 받는 것 같다.
5분여를 급경사를 오르니 폐헬기장이 나타난다. 헬기장을 뒤로하고 산죽과 잡목을 헤치며 묘 1기를 지나 무명봉을 넘었다. 덧옷을 갈아입는 사이 대원들이 멀리 사라지고 후미에서 걸음을 빨리하여 부지런히 걸었다.
답운치를 출발한 지 약 40여분, 안부에 도착을 했는데 앞서가는 대원들이 되돌아 내려온다. 갈림 길 표지기 때문에 혼란이 일어난 것이다. 안부에서 직진을 하여 능선 길로 진행을 해야 하는데 몇 개의 표지기와 한배산악회 표지기가 진행 방향 우측으로도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여자대원 3분은 이미 표지기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고 한다. 잠시 표지기를 따라 희미한 길로 내려 가다보니 길이 없다. 대원들이 右往左往, 說往說來를 하고 있는데 진행방향 앞쪽에서 박사장이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가던 길을 멈추고 산비탈 잡목을 헤치며 다시 능선으로 올라보니 뚜렷하게 길이 나있고 표지기도 눈에 띈다. 앞서가던 대장이 착각을 하고 표지기를 잘못 달아놓은 모양이다. 김교수, 노부장, 장부장은 계속 내림 길로 진행을 하는지 불러도 대답이 없다. 멀리 진행을 한 모양이다.
시야가 툭 터진 봉에 올랐다. 앞서 갔던 대장도 후미가 따라 오지 않아 되돌아 올라온다.
골짜기로 내려간 팀에게 연락을 취하며 휴식. 약 30여분이 후 김교수, 노부장, 장부장이 도착을 했다. 정맥산행에서「계곡이나 골짜기로 내려가는 법이 없다.」는 규칙을 잠시 잊고 쉬운 내림 길을 택한 것이 발품을 더하게 만든 것이다.
노부장, 무릎에 이상이 왔는지 더 이상 산행을 할 수 없다며 김교수와 함께 답운치로 하산을 하고 『통고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4] 걱정 없이 자란 金剛松의 자태
사면 갈림길, 분기봉을 지난다. 완만한 능선 길, 금강송이 군락을 이룬 곳이다. 낙엽송보다 더 곧게 자란 아름드리 소나무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의 보호를 받으며 걱정 없이 자라는 소나무다. 어제도 눈이 시리도록 보고 오늘 또 보는데도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힘들다, 어렵다는 산 오름도 오늘따라 발걸음이 시원한 것은 늘씬하게 곧게 뻗은 美人松, 솔香의 氣를 가슴 가득 받은 때문이리라.
붉은 몸통의 소나무가
하늘 향하여
쭉쭉 뻗은 모양 아름도 하다
쭉 뻗은 잎 사이로 퍼지는
햇살
부채 살 모양으로 쏟아 내려
금강송의 아름다움
더욱 더 돋보여
보는 사람 마음을 흔들고
눈서리 마다 않고
사시에 푸르럼은 너의 절개
너의 지조 세상사람 귀감이요
옛부터 소나무가 크고 곧으면
수천 년을 받치는
대궐의 기둥 되어 영원히 함께한다.
<출처> 박태강의 「금강송 보존림에서」
o 울진 지역을 오가며 본 아름다운 우리나무 금강송.
o 일본에 학명은 빼앗겼지만 몇 백년을 살아 우리 산하를 지키는 나무.
o 늘씬한 키에 붉은 수피가 아름다와 미인송이라 불리기도 하는 나무.
o 적송, 홍송, 강송 등 이름도 많은 울진 소나무.
o 춘양목으로도 불려 울진 사람들을 속상하게 하는 나무.
o 특허청에 상표를 등록하여 ‘울진금강송’이란 고유브랜드로 다시 태어난 소나무.
<이옥진의 시작 노트> 중에서
[5] 통고산 오르는 길
금강송의 자태를 카메라에 담고 두 팔고 껴안으며 쉬엄 쉬엄 걸어 완만한 능선을 이룬 봉에 오르니 웅장한 산봉이 눈에 들어온다. 저 산이 『통고산』인가?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내림 길로 접어들어 안부에 내려섰다. 심미골(좌측)과 남회동(우측)으로 이어지는 안부다. 안부를 지나 5, 6분을 더 진행을 하니 임도가 나온다.
임도를 가로질러 앞서 보았던 높은 산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비교적 완만한 오름이지만 그래도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고 숨소리가 거치러진다.
임도를 지나 걷기를 약 25, 6분. 「통고산 등산로」표지판과 좌측 통고산휴양림에서 올라오는 일반등산로 눈에 띈다. 『통고산』정상이 그리 멀지 않는 것 같다. 오늘 산행의 마지막 고비라 생각하고 다리에 힘을 불끈 주고 약 10여분을 쉼 없이 오르니 넓은 헬기장이 나타난다. 『통고산』정상에 도착을 했다.
[6] 통고산(通高山, 1067m)
[6-①] 통고산 정상
『통고산』정상에는 많은 표지기와 삼각점( 소천428-2004재설)과 이정표(통고산1067m / ←하산 : 3.5km, 1시간 30분), 그리고 통고산의 유래를 적어놓은 정상석이 있고 산불감시탑도 설치가 되어 있다.
우선 정상석 근처에 배낭을 내리고 물 한 모금을 마시며 가쁜 숨을 진정 시킨 후 정상석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고 정상석 후면의 지명 유래문을 읽어 보았다.
[6-②] 통고산 유래비문
이 산은 서면 쌍전리에 위치한 해발 1,067m의 백두대간 낙동정맥으로 산세는 유심웅장(幽深雄將)하다. 전설에 의하면 부족국가시대 실직국(悉直國)의 왕이 다른 부족에게 쫓기어 이 산을 넘으면서 통곡하였다 하여 통곡산(通哭山?---> 痛哭山)으로 부르다가 그후 통고산(通古山)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산의 동쪽에는 진덕왕 5년 의상대사가 부근의 산세가 인도의 천축산(天竺山)과 비슷하다 하여 이름지어 불리워지고 있는 천축산이 있고 산기슭에는 그 당시 창건한 불영사가 있으며 하류에는 불영계곡이 있다. 이 표주석은 관광 울진, 환경 울진의 무궁한 번영을 기원하는 7만 군민의 정성어린 뜻을 담아 육군본부 항공대 헬기 지원으로 이곳에 세우다. / 1998년 11월 23일 / 울진군수
[6-③] 통고산((通高山, 1067m) 자연 환경과 지명 유래
『통고산(通高山, 1067m)』은 경상북도 울진군 서면 쌍전리·광해리·왕피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전설에 의하면 고대국가 형성기 실직국(悉直國)의 안일왕이 다른 부족에게 쫓기어 이 산을 넘을 때 하도 재가 높아 통곡하였다 하여 통곡산(通谷山 / 通哭山)으로 부르다가 그 뒤 통고산(通古山)으로 불렀다고 유래비문에 적혀있다.
‘울진구역의 낙동정맥의 주맥으로 동쪽으로는 불영사계곡과 왕피천의 주요 수맥이 되며 서쪽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상류천에 해당된다. 한국토종 소나무 자생군락지로 유명한 불영사계곡을 잉태하고 있는 곳이며 주위에 왕궁목재로 이용되던 황장목 보호구역이었던 곳도 있으며 울창한 산림을 이용개발한 통고산 자연휴양림이 있는 곳이다. 각종 나무마다 팻말이 붙어있는 등 가족단위로 나들이 하기엔 안성맞춤이고 산장들은 통나무로 지어져 있고 이름도 '머루랑', '다래랑' 등 자연그대로의 분위기를 살린 곳이며 삼림욕장 개장과 동시 임산 도로의 개설로 접근이 쉬워진 산이기도 하다. 왕피천은 수량도 풍부하고 1급수로써 어종이 다양하며 특히 은어가 유명. 또한 왕피천 하류에는 경북내수면연구소가 소재하며 여기서 방류된 연어, 치어들이 저멀리 태평양 알라스카를 돌아 모천인 이곳으로 돌아오는 연어회귀 하천으로 유명하다.’고 「울진군 문화관광」과에서 소개를 해 놓고 있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옛날 통고산 중턱에 사찰(寺刹 : 通古山寺)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수도(修道)를 하던 도승(道僧)이 산세(山勢)로 보아 훌륭한 인재(人材)가 날 소지가 있어 이를 막기 위하여 무쇠로 만든 말(馬)을 돌위에 세워 두고 산혈(山穴)에는 무쇠로 된 말뚝을 박아놓았다 한다. 근년에 무쇠말뚝을 본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확인되지 않았으며 지금은 잡목속에 절터(寺址)만 남아있고 한다.
<참고> 실직국 (悉直國)
삼국시대 초기 지금의 강원도 삼척(三陟) 지방에 있었던 소국(小國). 실직곡국(悉直谷國)이라고도 한다. 102년(파사이사금 23)에 경상북도 안강(安康)지역에 있었던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영역분쟁이 일어나 경주 사로국(斯盧國)의 왕에게 해결을 부탁하였으나 난처하게 여겨 김해 금관국(金官國) 수로왕에게 청함에 분쟁지를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음즙벌국이 사로국과 대립하다 항복하자 이에 실직국도 항복했다. 105년 다시 사로국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어 주민들이 사로국 남쪽으로 옮겨졌다. 실직국의 위치를 삼척으로 보지 않고 경주 북쪽의 안강 근처로 보는 견해도 있다.
<출처> 야후백과
통고산 정상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며 기념 촬영과 주변 경관을 살피고 산불감시시설물 뒤로 이어진 완만한 산길을 따라 『애미랑재』로 향했다.
[7] 왕피리 갈림 길
[7-①] 등산로 이정표
통고산 정상을 뒤로한지 약 10여 분, 등산로 이정표(←하산 : 3.3km, 1시간 20분 / 왕피리→)를 세워 놓은 갈림 길에 도착을 했다. 여기서 좌측은 자연휴양림으로 내려서는 下山路가 되고 마루금은 우측 왕피리 방향이다.
[7-②] 왕피리(왕피동)
「왕피리(왕피동)」는 본래 울진군 서면의 지역으로서, 옛날에 실직국의 안일왕이 예국의 침략을 받아 피난을 왔다 하여 왕피동이라 하였는데, 1916년 3월 1일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왕피리라고 한다.
[7-③] 왕피천
「왕피리」마을 앞으로 흐르는 『왕피천(王避川, 30.6㎞)』은 영양군 일월산 동쪽 기슭의 수비리에서 발원하여 백암산과 금장산 사면의 1차수 하천들을 합류하여 심천리에 이르러 심천수와 합류한다. 그리고, 서면 왕피리에서 통고천을 합류하여 한천이 되고 다시 근남면 구산리에서 매화천에 합류된다. 노음리 장평평야의 저수지가 되고 성류굴 관광객의 선유장이 되어 행곡리에서 광천을 합류하여 수산리와 망양정을 지나 동해로 훌러든다.
왕피천이라 부르게 된 것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로 935년경에 신라 경순왕의 왕자인 마의태자가 모후 송씨와 함께 이곳으로 피신 왔다가 모후가 이곳에서 별세하고 왕자는 금강산으로 갔다는 설이 있다. 둘째로 1361년 원나라 말기에 홍건적이 결빙기를 이용하여 남침하여 고려 31대 공민왕이 이곳으로 피신했다는 설이 있다.
왕피천은 울진군 지역에 발달해 있는 하천 중 가장 넓은 유역 면적을 가진 하천으로 본류인 왕피천과 지류인 광천·매화천·장수포천 그리고 신암천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유량이 풍부하여 연중 건천이 되지 않고 흐르는 하천은 울진군에서 왕피천이 유일하다. 왕피천 하구를 중심으로 수산리 일대와 노음리 일대에 남~북 방향의 길이는 2,500m, 동~서 방향의 너비는 1,000~2,000m에 이르는 평야지대에 충적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왕피천은 지방 2급 하천으로 그 길이가 66㎞에 이르며, 북쪽으로는 천축산과 통고산에, 남쪽으로는 울련산과 금장산에, 동쪽으로는 대령산과 남수산에 둘러싸여 있는 천혜의 자연보고이다. 왕피천은 지질·지형 분야에서 유역쟁탈의 지형사를 간직한 수비분지, 산간내륙의 감입곡류와 연장 3㎞에 달하는 절단곡류, 왕피리의 구상풍화 지형, 하류의 석회동굴 등 있는 그대로의 거대한 자연학습장이다.
유로 연장은 30.6㎞이며, 유역 면적은 465.35㎢로 가장 넓고 하천 차수도 울진군에서 가장 높은 6차수를 나타내고 있다.
왕피천의 본류는 영양군 수비면 금장산(848.7m) 부근에서 발원하여 西流하다가 수비면 신원리에서 北東流하면서 주변 小支流들을 합하여 수비면 수하동 수비초등학교 수하분교 부근에서 본 군역으로 들어오고 있다. 수하분교에서 서면 왕피리 한천까지는 北流하다가 한천 부근에서 다시 北東流하고 있다. 대략 이 구간보다 상류를 장수포천이라 부르고 있다.
왕피천 유역은 영양군 수비면, 울진군 서면과 근남면 왕피천 유역에 지정된 생태·경관의 보전지역이다. 왕피천은 풍부한 담수어종으로 인하여 중·상류에 수산보전지역이 설정되어 있고, 하류지역은 울진·근남 도시계획지역으로 설정되어 있다.
울진군 상수보호구역은 울진읍 · 평해읍 · 온정면, 영양군 수비면의 4곳이 지정되어 있다. 왕피천 유역이 최초로 지정되던 2005년 당시에는 핵심구역 45.35㎢만을 지정하였으나, 그 이후 2006년에 완충구역 55.64㎢와 전이구역 1.85㎢를 포함한 총 57.49㎢를 추가로 지정하였다.
또한, 왕피천의 수계는 울진군 근남면을 따라 분류하는 하천으로 지류로는 매화천·광천·장수포천·신암천 등이 있으며, 각 지류의 발원지는 울진군과 영양군에 있는 일월산 (1,219m) · 장군산(1,135m) · 통고산(1,067m) · 천축산(653m) 등에서 발원한다. 왕피천의 하구는 약 1,000m 규모의 모래 해안이 망양정해수욕장으로 이용되고 있고, 하구에는 석호가 형성되어 있다.
<출처>『울진군지』(울진군지편찬위원회, 2001)
[8] 937. 7봉
1,067m 통고산 정상에서 千軍萬馬를 호령하니 이 후의 산들이 俯伏하여 마냥 걸어도 지치지 않을 편안한 능선 길이다. 왕피리 등산로 이정표를 뒤로한지 약 2분, 능선이 분기되는 지점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완만한 봉우리를 넘고 다시 12, 3분을 내려오니 임도가 나온다. 왕피리(좌측)에서 남회동(우측)으로 이어지는 임도다.
임도를 지나 무명봉에 올라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약 3분여를 진행하니 삼각점(소천 429)이 눈에 띈다. 937. 7봉으로 영양군을 접하게 되는 분기봉이다.
[9] 애미링재 가는 길
우측 능선을 따라 진행, 산죽 밭 사면을 지나 안부에 내려섰다가 긴 오르막을 숨을 몰아쉬며 오르니 폐 헬기장이 나온다.
폐 헬기장을 뒤로하고 좌측 내림 길로 들어섰다. 수분만 오르내리면 될 봉을 연이어 넘어 분기봉에 도착,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내림 길로 접어들 안부에 내려선 후 능선 왼쪽으로 접어들어 내려가니 사진으로 보았던 엄청난 절개지를 이룬 『애미랑재』 도로가 내려다보인다. 도로 건너편 절개지는 토사를 방지하기 위해 운동장 스텐드 형태의 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이정도의 절개지면 터널을 뚫어 산의 형태를 그대로 보존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개발이란 미명 산줄기를 잘라낸 모습이 너무 흉물스럽고 안타깝다.
절개지 정점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가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다리의 균형이 흩어 질 정도로 어질어질하다. 조심 조심을 하며 『애미랑재』에 내려섰다.
[10] 애미랑재
[10-①] 애미랑재의 지명유래
경북 봉화군 소천면 남회룡리에 위치한 『애미량재(광비령)』를 일명 「광비령(廣比嶺)」이라고도 한다. "재가 높아 애를 먹으며 넘는 고개"라는 뜻이 라고 한다. 광비령은 남회룡으로 들어가는 동내 이름(광미:廣比)에서 따온 지명이 아닌가 싶다.
"예전에는 그저 우마차나 사람이 넘나들었다는 평범한 잘룩이였던 애미랑재는 넓게 깍이고 패인 비통한 고개라 「廣悲嶺」으로 改名함이좋겠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 광비(廣比 :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 100여년전만 하여도 싸리나무로 광주리를 만들어 아낙들이 전국을 돌아 다니며 팔았다고 하여 광비라고 부른다.
『애미랑재』의 지명 유래에 대한 다른 說도 있는데 울진지역에서는 실직국(悉直國)의 「안일왕」을 「에밀왕」으로 부르는데 울진 지역의 70대∼80대 노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어릴 적에 울음보를 터뜨리면 어른들이 “예 나온다 그쳐라” “예 쳐온다 그쳐라” 하고 달랬다고 한다. 즉 예국이, 강릉의 예국이 쳐들어 오니까 울음을 그치라는 말에서 「애밀랑재」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10-②] 애미랑재 주변의 자연환경
애미랑재의 왼쪽(동쪽)은 물고기의 천국이라 할 만큼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된 신암천 - 수하계곡이 흘러 왕피천으로 흘러가고, 오른쪽(서쪽)은 회룡천의 지계곡이 되어 답운치 아래에서 이름을 바꾼 후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애미랑재 양쪽은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생태계보존이 잘된 지역이다.
[10-③] 『애미랑재』와 동일지명인 『광비령(廣比嶺)』
또 『애미랑재』와 동일지명인 『광비령(廣比嶺)』에 대해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의 울진편에는 광비령의 주변 및 환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해 놓았다.
『애미랑재』는 울진과 강원도와 서울로 연결되는 곳의 첫 번째 관문의 고개로 죽변면과 북면의 경계에 돌재가 있고, 이후 갈치령 · 고직고개 · 수거령 · 고적령이 있다. 죽변 흥부장터에서 봉화군 소천면 춘양장으로 가는 길로서 하당리에서 소광리 광천으로 진도산(908m)과 세덕산(740m) 자락을 양편으로 넘는 130리 고개 길이 있다.
구『울진군지』에는 광비령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십이령(十二嶺)이라고 구전되어 온다. 바지게꾼 전설로 흥부장에서 일을 보는 바지게꾼이 바지게라는 지게에다 바다에서 생산되는 소금 · 미역 · 생선고기 등 해산물을 싣고 흥부장에서 출발한다.
출발한 후 십이령 즉, 「쇠치재-세고개재-바릿재-세재-너삼밭재-젖은텃재-작은넓재(한나무재)-큰넓재-꼬채비재-멧재-배나들재-노릇재」등 12고개를 넘어 소천 · 춘양내성장을 보기 위해 200여 리를 2~3일 걸려 걷게 된다. 날이 저물면 길 옆 외딴 주막집에서 숙박을 하면서 술과 도박 등 오락도 하고 주막집 주인이 없으면 빈집에 쉬어가며 솥단지 밥을 지어먹고 다녔다고 한다.
<출처> 한국의 아름다운 산
[10-④] 울진십이령
우리가 3, 4구간을 산행하며 지났던 『한나무재』를 비롯하여 오늘 산행의 종착지인 『애미랑재(광비령)』는 옛날 선질꾼(바지게꾼)들이 바다에서 생산되는 소금 · 미역 · 생선고기 등 해산물을 지고 죽변 흥부장에서 봉화군 소천면 춘양장을 넘나들던 삶의 애환이 담긴「울진십이령」중의 한 고개가 된다.
「울진십이령」?
동해안 울진 쪽에서 유일한 내륙통로였던 십이령! 골원님도, 과거보러 가던 선비도, 일반서민들도 모두 하나같이 넘었던 곳, 그 가운데도 울진장, 죽변장, 흥부장과 봉화 춘양장, 내성장을 오가던 단골주인공은 보부상들이었다.
「미역, 소금, 어물지고 춘양장 언제가노/ 대마, 담배 콩을 지고 울진장을 언제가노/ 반 평생을 넘던 고개 이 고개를 넘는구나/ 서울 가는 선비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오고가는 원님들도 이 고개를 자고 넘네/ 고불꼬불 열두 고개 조물주도 야속하다/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 가노」라고 십이령을 넘으며 선질꾼과 보부상들이 구슬프게 불렀던 口傳 民謠다.
울진에서는 이들을 선질꾼,바지게꾼, 등금쟁이라고도 했다. 지게를 받쳐놓고 쉬거나, 질서 있게 길을 간다하여 선질꾼(선길꾼),바지게를 지고 다닌다하여 바지게꾼, 등금쟁이는 등에 지고 다니며 물건을 판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은 울진, 죽변, 부구장에서 주로 미역, 어물, 소금 따위를 내륙으로, 내륙(봉화, 내성장 등)에서는 콩, 팥, 감자, 잡곡, 대추, 옷감(무명, 포)담배들을 울진등지에 운반, 물물교환하기 위해 울진과 봉화 사이, 고달픈 발품을 팔며 삶을 이어가기 위해 넘나들던 열두 고개를『십이령』이라고 한다.
십이령은 크게 세 갈래로 나눠지는데 울진에서 출발하던 길은 「울진→구만→외고개→천고개→바릿재→샛재→느삼밭재→저진치재→새넓재(적은넓재,한나무재)→큰넓재→꼬치비재→멧재→배나들재→노룻재→소천(내성)」으로 이어는 길이고 죽변쪽에서는「죽변→돌재→나그네재→바릿재→(이하 위와 같음)→소천(내성)」이르는 길이며 흥부(부구)에서 출발하는 길은 「흥부→쇠치재→세고개재→바릿재→(이하 위와 같음)→소천(내성, 봉화땅)」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나 현재 울진 십이령고개를 넘어 봉화 내성장과 춘양장, 그리고 멀리 안동장까지 봇짐과 등짐을 이고 지며 부보상들이 내왕했던 그 옛길은 現代化의 美名으로 뭉텅뭉텅 잘려 나가고 풀과 잡목에 묻혀 길로서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라고 한다. 오늘 우리가 본 애미랑재의 모습이 그 대표적이 예가 아닐까 싶다. 비록 현대 생활의 편의성과는 거리가 멀지 모르겠지만 등짐을 지고 고개를 넘나들던 십이령길이 복원되어 각박하게 생활하는 현대인들의 마음의 짐을 풀어주고 열어주는 길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11] 산행 마무리
애미랑재에 내려 서는 것으로 낙동정맥 3, 4구간(석개재 ~ 애미랑재)을 무리 없이 마쳤다. 다른 산꾼들은 두 번으로 끝낸 산행을 3회에 걸쳐 산행을 했다. 시간과 자금을 과잉 투자한 아쉬움은 있어도 여유 있는 산행을 했고 낙동정맥을 빠짐없이 이어 가겠다는 의지를 다짐한 산행이라 생각하면 그런대의 소덕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번 산행을 하면서 금강송의 자태를 눈이 시리도록 눈에 담을 수 있는 복도 누렸고 통고산에 올라 실직국 왕의 통곡하는 모습도 연상을 해 보았으며 한나무재, 애미랑재를 넘고 내려서서 울진 십이령을 넘던 선질꾼들의 삶의 애환도 가슴에 담아보았다.
문지골의 비경을 비켜가는 아쉬움도 있었는데 언젠가 이런 아쉬움과 모자람을 채워보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2010. 1. 6
<참고자료 1> 광회1리(廣回一里) : 울진군 서면
1. 마을의 자연환경
동쪽에는 광회2리, 쌍전2리가 있고, 서쪽은 낙동강으로 흐르는 내(川)가 마을 앞을 지나며 그 건너편은 봉화군 소천면(小川面)이다. 그리고 남쪽은 광회2리와 접하였고, 북쪽은 전곡리(前谷里)와 접하여 있다.
2. 마을의 역사
1500년경에 구씨(具氏)가 개척(開拓)하여 광비(廣比)라 하였는데 이 곳이 울진(蔚珍), 봉화(奉化) 간의 12령(嶺) 중에서 가장 넓은 영(嶺)의 밑이라 하여 광비(廣比)라 하였다 한다.
1) 거리광비〔外廣比〕
서면 소재지(所在地)로부터 서쪽에 있으며 낙동강 상류의 국도(國道) 변(邊)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거리광비(外廣比)라 부른다.
2) 안광비〔內廣比〕
광비(廣比)의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안광비(內廣比)라 부른다.
3) 달래바위골(月川谷)
제8편 제1장 제2절 울진의 설화 참조
4) 득거리골(들방아골)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울진의 어느 선비가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는 길에 이 마을에 이르자 산돌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걱 들걱 하였다 하여 득거리골이라 하였다.
3. 성씨별가구 분포
총 44가구 중 온양방씨(溫陽方氏) 3, 진주강씨(晋州姜氏) 3, 기타 38가구다.
4. 마을의 특징
1) 광비원(廣比院)
중앙관청(中央官廳)과 울진 간의 동서통로(東西通路)였던 광비(廣比)에 고려시대(高麗時代)부터 관원(官員)의 국영(國營) 광비원(廣比院)이 있었다.
2) 성황당(城隍堂)
내광비(內廣比), 외광비(外廣比)에 성황당(城隍堂)이 있어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으로 모시고 매년 제사를 올려 동민의 행운(幸運)을 기원하고 있다.
<참고자료 2> 남회룡 : 봉화군 소천면 남회룡리
일월산맥이 동네 남쪽으로 돌아 앉아 있으므로 마치 용이 남쪽으로 돌아 않아 있는 것 같아서 남회룡이라고 한다.
<참고자료 3> 광비 :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100여년전만 하여도 싸리나무로 광주리를 만들어 아낙들이 전국을 돌아 다니며 팔았다고 하여 광비라고 부른다.
<참고자료 4> 울진군 서면 광회2리(廣回二里) : 남회룡
1. 마을의 자연환경
이 마을은 동서(東西)로 길게 형성된 지역으로 동쪽은 통고산(通古山) 너머에 쌍전1리와 왕피1리가 있고, 울진군과 영양군, 봉화군의 3개군(郡)이 접(接)해 있는 곳이며, 동서(東西) 분수령(分水嶺)인 답운재(踏雲峠) 운봉(雲峯)이 배경산(背景山)으로 뻗어있다. 그리고 서쪽은 광회1리, 남쪽은 낙동강(낙동강) 상류인 옥방천(玉房川)을 사이에 두고 봉화군과 길게 경계(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은 진조산(眞鳥山)일대(一帶)로 광해1리와 접(接)해 있다.
2. 마을의 역사
1) 거응동[巨應洞 일명 : 옥방(玉房)]
1560년경에 우씨(禹氏)라는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開拓)하였다 한다. 그런데 옛날에 지관(地官)이 이 곳을 지나다가 말하기를 지형(地形)이 금부(金釜)와 같이 생겼으므로 앞으로 크게 번창(繁昌)할 것이라 하여 지명(地名)을 거응동(巨應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이 마을은 냇물을 사이에 두고 봉화군 소천면(小川面) 분천5리(汾川五里)와 한 지역을 이루고 있다. 광복(光復) 전에는 일본인(日本人)이 중석광(重石鑛)을 개발하였으나 본격적인 채광(採鑛)은 광복(光復) 이후였는데 미군정(美軍政) 시대에는 미군(美軍) 1개대대(一個大隊)가 이 마을에 주둔(駐屯)하였고, 미군정(美軍政)에서 직접 관여하여 미군(美軍)이 2차세계대전에서 소모한 중석(重石)을 충당(充當)하기 위하여 미본국(美本國)으로 수출(輸出)된다고 주민들은 믿고 있었다. 미군정(美軍政) 이후에는 민영광업(民營鑛業)으로 되어 월(月) 5~6톤의 광물이 생산되었으며 국내에서 세 번째의 민영광업(民營鑛業)이 되었다. 그리하여 차츰 광산(鑛山)이 활기를 띄면서 이 곳 주민의 90%이상이 광부(鑛夫)였고 서면 소재지보다 더 많은 인구(人口)로 거응동(玉房) 광산촌(鑛山村)을 이루었다. 이때에 옥방중학교(玉房中學校)가 설립되었으며, 초등학교(初等學校)로는 광동초등학교(廣東初等學校)가 있었는데 동구(洞口)의 산정(山頂)에 학교가 있어 확장(擴張)이 어려웠으므로 1971년에 새로운 부지에 옥방초등학교(玉房初等學校)를 세우고 광동학교(廣東學校)와 병합하였다. 한때에는 재학생(在學生)이 400명이나 되었으나 광산(鑛山)의 쇠퇴와 함께 학생수가 줄어들고 1992년에는 삼근초등학교(三斤初等學校) 분교(分校)로 격하(格下)되어 현재는 13명의 재학생(在學生)이 있을 뿐 곧 폐교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곳 광산촌(鑛山村)의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곡간농촌 마을로 변모되어 가고 있다.
2) 옥방터(玉房터)
옛날에 지관(地官)이 이 곳을 둘러보고 보물(寶物)이 많이 매장(埋藏) 되어있는 지대(地帶)라 하여 옥방(玉房)이라 불렀다 하며, 일정(日政) 때에 일인(日人)이 지명(地名)을 듣고 찾아와 중석광(重石鑛)이 개발(開發)되었다 한다. 옥방터에는 광산갱도(鑛山坑道)의 입구가 있고, 제련장(製鍊場)이 있는 곳이다. 폐광(廢鑛)이 된 지금은 제련장과 사무실 건물은 허물어져 있고 농가 2세대가 있을 뿐이다.
3) 남회룡(南回龍)
태백산맥(太白山脈)의 일맥(一脈)이 동남(東南)으로 회룡(回龍)하여 이루어진 곳이라 하여 냇물(낙동강상류)을 사이에 두고 내(川) 건너에는 봉화군 남회룡(南回龍)이고, 내(川) 북쪽은 울진군 남회룡(南回龍)이라 한다.
4) 홍이동(紅衣洞)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10년에 홍건적(紅巾賊)의 남침(南侵)으로 이 곳까지 패주(敗走)할 당시 홍이(紅衣:軍服)가 벗겨진 곳이라 하여 홍이동(紅衣洞)이라 부른다고 전하고 있다.
5) 댓골(竹谷)
예로부터 대나무가 많이 있다 하여 댓골이라 부른다.
3. 성씨별가구 분포
총 77가구 중 김 해김씨(金海金氏) 9, 이씨(李氏) 6, 박씨(朴氏) 4, 전씨(田氏) 4, 기타 54가구다.
4. 마을의 특징
1) 성황당(城隍堂)
거응동(巨應洞)과 남회룡(南回龍)에 성황당이 있어 매년 제사를 올리고 있다.
2) 구정이골(九鼎谷)
솥 아홉 개를 걸어놓고 밥을 짓는 산세(山勢)라 하여 구정이골(九鼎谷)이라 부른다.
3) 금산터 금상이터(金象谷)
답운재(踏雲峠)에서 남쪽 1㎞ 거리에 있는 이 곳에 금은(金銀)이 많이 날 것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4) 답운재〔踏雲峙〕
해발(海拔) 600m인 이 고개(嶺)는 36번국도(國道)가 동서(東西)로 태백산맥(太白山脈)을 넘는 분수령(分水嶺)이다. 동해(東海)로 흘러드는 냇물은 불영사계곡(佛影寺溪谷)의 물이 상류(上流)가 되고, 서쪽으로 흐르는 냇물은 이 곳이 낙동강(洛東江) 상류(上流)가 된다. 이 고개에는 늘 안개가 끼어서 구름을 밟고 넘는 고개라 하여 답운재(踏雲峠)라 부른다.
5) 순직경찰관 위령비(殉職警察官 慰靈碑)
한국전쟁 중 수복(收復) 당시에 이 곳에서 북괴군(北傀軍) 패잔병(敗殘兵)과 교전(交戰) 하다가 경찰관 6명이 그들에게 생포(生捕)되어 순직(殉職)하였다. 이들의 넔을 위로하기 위하여 경우회(회장 林成律)의 노력으로 1988년 6월 25일에 답운재〔踏雲峙〕에 위령비를 세우고 제막(除幕)하였다.
<참고자료 5> 울진 왕피천 (王避川)
경북 영양군 수비면(首比面)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흘러드는 길이 60.95km, 유역면적 513.71㎢의 하천이다.
왕피천(王避川: 왕이 피신해 살던 마을 앞을 흐르는 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은 울진군 서면과 근남면을 거쳐 동해로 흘러드는 하천으로 국내 최대 규모의 자연생태계 지역으로 동강보다 훨씬 큰 규모다.
왕피천은 남한의 마지막 남은 오지이자 자연유산으로 꼽힌다. 그가 품고 있는 생태적 가치와 자연자원적 중요성도 매우 크다. 왕피천의 하류는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으로 연어와 은어가 집단으로 회귀하고 수달과 산양을 비롯한 주요 멸종위기 동물들이 가장 안정적으로 뛰노는 남한 제일의 야생낙원이다.
왕피천은 영양에서 시작하여 첩첩산중 긴 물길을 형성하며 울진을 통해 동해바다로 흘러가는 인간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 오지중의 오지이다.
왕피천을 접근하는 방법으로는 1, 울진 성류굴쪽에서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 2. 울진 서면(삼근리)에서 진입하여 왕피리에서 내려가는 방법. 3, 영양쪽 장수포천에서 접근하는 방법이 있으나 아직까지 어디로 접근하던지 완벽한 길이 없다. 따라서 바위를 타거나 산을 오르거나 물에 빠지고 건너면서 트래킹을 해야 한다.
※ 경북 울진·영양군 왕피천 유역 일대(3000만평 국내 최대규모)가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된다. 내년까지 고시
환경부는 12일 “멸종위기 동식물이 대거 서식하고 있는 울진군 왕피천 유역 및 통고산·천축산·대령산 자락을 포함하는 102.84㎢(3000여만평)를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키로 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지정된 지역은 서울 여의도 면적(90여만평)의 35배,2002년 지정된 동강 생태계보전지역의 1.6배에 이르는 국내 최대 규모다.
개발행위가 가장 엄격히 제한되는 핵심구역은 45.35㎢ 지정됐으며, 완충구역 55.64㎢, 전이구역 1.85㎢ 등이다. 이 가운데 핵심구역에 대해선 오는 14일 지정고시하고 나머지 구역은 내년에 고시할 계획이다.
왕피천 유역은 녹지자연도 8등급 이상 지역이 전체의 95%가 넘을 정도로 식생 및 자연경관이 우수하고 수달·산양·매·삵·담비 등 다수의 멸종위기종과 희귀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되면 유독물 투기, 인화물질 소지, 지정장소 이외 취사·야영, 야생동식물 서식지 훼손 등 행위가 금지되고 건축물 신·증축을 비롯, 토지형질변경·토석채취·야생동식물 포획 등도 제한된다.
<왕피천 가는길>
울진읍에서 7번국도를 타고 남쪽, 즉 성류굴가는길로 내려가면 성류굴지나서 500m쯤(이곳이 노음리)에 서쪽방향으로 나가는 포장도로가 있다. 입구에 구산리라는 표지판이 보이고 "왕피천관광농원"이란 표지판도 있다.
이 표지판을 따라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1Km 가면 왼쪽에 "왕피천관광농원 5km"라고 쓴 표지판이 있다. 이 표지판을 따라 계속 가면된다. 여기서부터는 콘크리트 좁은길과 비포장길이 나타나고 계속가면 구고동이란 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구고동마을을 지나 좁은 산길을 1km 쯤 가면 상천이란 마을이 나오는데, 다 빈집이다. 길이 끝나는 지점까지 가면 새로지은 별장같은게 보이고 그쯤에 차를 세우면 된다. 이제 걸어서 500m 쯤 가면 왕피천 계곡에 도착하게 된다.
<출처> 한국의 산천
http://www.koreasan.com/sanheng/sanheng_view.php?category=5&id=theme_board&num=372
<참고자료 6> 울진 십이령을 넘나든 선질꾼의 삶
[1] 정의
19세기 전반 서울에서 봉화에 이르는 길이 간선도로로 승격되어 7대로가 형성되면서 울진군 북면에서 봉화를 연결하는 교통로인 십이령 길이 동서를 연결하는 대표 도로가 되었다. 울진의 흥부장·읍내장·봉화의 내성장 등 장시가 열리면서 이들 장시가 십이령 길을 통해 연결되었다. 십이령을 넘나들며 울진과 봉화 지역의 장시를 장악하였던 보부상이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퇴조하자 그 역할을 대신한 대표적인 행상단이 선질꾼이다.
선질꾼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점점 없어졌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혼란과 무장 공비 출현으로 인한 산간 지역 주민들의 소개, 그리고 교통망 정비로 도로가 많이 개설되고 버스가 다님에 따라 바지게에 물건을 지고 다니며 장사하는 것이 더 이상 시대에 걸맞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국도 36호선 개설과 확충으로 십이령이 더 이상 울진과 봉화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로 기능할 수 없게 된 것도 요인이다.
[2] 울진 지역의 옛 교통로
조선 후기에 울진에서 외부로 향하는 길은 북쪽·서쪽·남쪽·동쪽의 네 방향의 길이 있었으나, 동쪽 방향은 바다를 향하기에 육지를 연결하는 길은 실제로는 세 방향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있는 울진의 도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관문으로부터 동쪽으로 현내진(縣內津)까지 5리이고 대해(大海)에 이른다. 관문 서쪽으로 두천원까지 30리이고, 두천원으로부터 소조원까지 40리이다. 소조원으로부터 안동부 경계에 있는 광비원까지 30리이다. 광비원으로부터 길은 경상도에서 충청도에 이른다. 관문으로부터 남쪽으로 수산역까지 7리이고, 수산역으로부터 덕신역까지 30리이다. 덕신역으로부터 평해군 경계 남쪽으로 망양정까지 10리이다. 망양정으로부터 평해군까지 40리 길이고, 경상도로 향한다. 관문으로부터 북쪽은 흥부역에 이르는데 40리이다. 흥부역으로부터 삼척부 갈령까지 10리이고, 갈령 북쪽으로부터 삼척부 100리 길을 넘어 함경도를 향한다.”
위의 기록을 보면 울진에서 외부로 향하는 길은 백두산에서 시작하는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삼척의 매봉산에서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의 오른쪽으로 형성된 남북 방향의 도로와 북면 흥부에서 출발하여 십이령을 넘어 봉화·영주로 향하는 동서 방향의 도로가 주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서 방향의 도로는 낙동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아구지맥을 두 번 넘고, 낙동정맥 상에 있는 백병산 옆을 돌아서 봉화로 향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형성된 도로를 중심으로 역과 원이 조선 전기부터 만들어져 운영되었으며, 각종 지리지에 기록된 역의 연결망은 삼척의 옥원역(沃原驛) - 흥부역(興富驛) - 덕신역(德神驛) - 수산역(守山驛) - 평해의 달효역(達孝驛)인데, 모두 남북 방향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에 비해 각종 지리지에 기록된 울진의 원의 연결망은 가을원(加乙院) - 두천원(斗川院) - 소조원(召造院) - 광비원(廣庇院) - 봉화의 장불원(長佛院) 인데, 모두 동서 방향으로 연결되어 있고 십이령을 지나는 도로에 연해 있다.
십이령 상에 있는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현지 조사에서도 암행어사들이 십이령을 지나며 묶었던 장소가 두천원·소조원·광비원이며, 과거를 보거나 관리들이 한양으로 오가는 길도 이곳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울진 지역의 동서 교통로의 주축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동서 교통로의 주축, 십이령 길
울진에서 동서 방향을 연결하는 주도로인 십이령 길은 출발 지점이 울진·죽변·흥부에서 각각 시작된다. 출발 지점에 따라 노정에 약간의 차이를 보이나 결국 북면 두천리를 지나 바릿재와 샛재를 거쳐 봉화로 향하는 길은 같다. 각각의 출발 지점에 따른 노정은 다음과 같다.
(1) 울진에서 출발 : 울진 - 구만리 - 외고개 - 천고개 - 바릿재 - 샛재 - 너삼밭재 - 저진터재 - 새넓재[적은넓재][한나무재] - 큰넓재 - 고채비재 - 맷재 - 배나들재 - 노룻재 - 소천
(2) 죽변에서 출발 : 울진 죽변 - 돌재 - 나그네재 - 바릿재 - 샛재 - 너삼밭재 - 저진터재 - 새넓재[적은넓재][한나무재] - 큰넓재 - 고채비재 - 맷재 - 배나들재 - 노룻재 - 소천(죽변에서도 선질꾼들은 주로 쇠치재를 넘는 십이령 길을 택해 왕래하였다고 한다.)
(3) 흥부에서 출발 : 울진 흥부 - 쇠치재 - 세고개재 - 바릿재 - 샛재 - 너삼밭재 - 저진터재 - 새넓재[적은넓재][한나무재] - 큰넓재 - 고채비재 - 맷재 - 배나들재 - 노룻재 - 소천
십이령 상의 주요 지점인 바릿재에서 샛재까지는 30리이고, 말래[두천리]에서 자면 느삼밭에서 점심을 먹는다고 하였다. 이 길은 당시 대로(大路)여서 혼자 다닌 사람들도 있었는데, 혼자 다니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4] 울진·봉화 지역의 장시와 특산물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봉화의 특산물로 토의(土宜)는 벼·기장·조·보리·왕골이고, 토공(土貢)은 꿀·밀[黃蠟]·여우 가죽·노루 가죽·산달피(山獺皮)·돼지털·자리[席]·칠·잣이며, 약재(藥材)는 웅담(熊膽)·인삼·백복령, 토산(土産)은 신감초(辛甘草)·송이버섯·은구어이다.
울진에서 토의는 오곡과 뽕나무·삼·감·밤·배·닥나무이고, 토공은 꿀·밀[黃蠟]·철(鐵)·호도·석이·오배자(五倍子)·조피나무열매[川椒]·미역·칠·사슴포·여우 가죽·삵괭이 가죽·노루 가죽·범 가죽·돼지털·대구·문어·숭어·전복·홍합이며, 약재는 복령·승검초 뿌리[當歸]·바디나물 뿌리[前胡]·대왕풀[白芨]·오미자·인삼이겨, 토산은 가는 대와 왕대이며, 염분(鹽盆)이 61곳이고, 자기소(磁器所)가 1곳이다.
이와 같은 특색을 가진 지역 특산물과 곡물·어류를 조선 후기 지방 장시의 발달과 교통로의 확보로 울진과 봉화에서는 십이령 길을 통하여 물자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교류는 5일장 형태로 운영되던 장시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장시와 관련하여 이 지역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전 민요가 전한다.
“미역 소금 어물 지고 춘양장은 언제가노/ 대마 담배 콩을 지고 울진장을 언제가노/ 반 평생을 넘던 고개 이 고개를 넘는구나/ 서울가는 선비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오고 가는 원님들도 이 고개를 자고 넘네/ 꼬불꼬불 열 두 고개 조물주도 야속하다/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 (후렴)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 가노”
이 노래를 보면 흥부장이나 울진장에서 미역·소금·어물을 지고 십이령을 넘었으며, 춘양장을 비롯한 영 너머에서는 대마·담배·콩 등을 지고 흥부장이나 울진장으로 왔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장시가 개설되면서 거래되었던 주요 품목이 지역 특산물보다는 곡물·면포·마포가 중심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울진군 북면 해안 지방에서 생산된 미역과 어물을 십이령을 거쳐 경상도 내륙 지방으로 거래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5] 십이령을 넘나든 선질꾼
십이령을 넘나들며 울진과 봉화 지역의 장시를 장악하였던 보부상이 일제강점기에 들면서 퇴조하여 그 역할을 대신한 대표적인 행상단이 선질꾼이다. 이들을 부르는 이름은 매우 다양한데, 일반적으로 선질꾼·등금쟁이·바지게꾼이라 부른다. 이들을 부르는 명칭은 원래 선질꾼이었으나, 어느 시기에 바지게를 지고 다닌다고 하여 바지게꾼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서면 소광리나 북면 주인1리 등에서 사용하는 바지게꾼이라는 명칭은 후대 명칭이고, 선질꾼이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인식되고 있다. 바지게꾼이라 부르는 배경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행상꾼들이 바지게를 지고 다닌다고 하여 바지게꾼이라고 부른다는 것이고, 둘째는 원래는 선질꾼인데 바지게놀이를 만들면서 바지게꾼이라는 이름이 더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선질꾼의 또 다른 이름이 등금쟁이이다. 울진군 서면에서는 선질꾼이 지나가면 마을 아이들이 ‘등금쟁이 간다’, ‘날아라 등금쟁이 날아라’, ‘날아간다 날아간다 등금쟁이 날아간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들을 등금쟁이라고 부르는 이유로는 세 가지가 전해진다. 첫째는 등에 지고 다니며 물건을 판다고 하여 등금쟁이라 하였다는 것, 둘째는 등짐을 지고 다닌다고 하여 등금쟁이라 하였다는 것, 셋째는 등금쟁이들은 가지가 없는 쪽지게를 지고 다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하게 불리는 선질꾼은 강원도에서도 발견된다. 강원도 인제와 양양 등지에서 발견되는 선질꾼은 보부상의 부상과 마찬가지로 등짐장수이다. 보부상은 전국 단위의 조직체이고, 선질꾼은 지역 단위의 소집단으로 구분하는 견해도 있다.
지게꾼은 쪼그리고 앉아서 지게 짐을 지고, 쉴 때도 앉아서 쉬는 것이 보통이다. 선질꾼은 서서 지게 짐을 지고(負), 대개 서서 쉬기 때문에 선질꾼(立負軍) 또는 선질(立負)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선질꾼의 지게와 작대기는 일반 지게보다 길고 작대기 끝에 송곳 같은 쇠붙이를 박아 놓았다. 지게 받치기도 수월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적으로부터 보호용 무기로도 쓸 수 있었다. 강원도 선질꾼의 경우 인제-고성·양양, 정선-삼척·강릉, 대화-강릉 간의 선질꾼들이 유명하다.
[6] 선질꾼의 조직과 장사 규칙
(1) 선질꾼의 조직
선질꾼들은 일행끼리 패를 지어 다녔는데, 많게는 40·50 ~ 1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때 형편이 비슷하고 마음 맞는 사람끼리 한 패가 되었으며, 10~15명 정도가 한 패가 되어 다니기도 하였다. 특히 중간에 도적 등을 만날 것을 두려워하여 대부분 혼자는 안 다녔다고 한다. 이렇게 떼를 지어 다녀 산적도 못 건드렸는데, 이들에게 위해를 가하면 떼를 지어 대응을 하였다고 한다.
선질꾼들은 동고동락하며 서로 친하고 매우 다정하게 지냈으나, 불미스러운 행동(불순한 남녀 관계, 주막집 주모에게 치근대는 등의 행위)에는 여러 명이 해당자를 멍석말이하여 징치하고, 다음날 아침에는 같이 장사하러 떠났다고 한다. 선질꾼 중에서 힘쓰고 말 잘하는 우두머리가 있었는데, 우두머리 중심으로 나름의 규율을 갖추었다. 선질꾼들은 우두머리를 잘 모셨는데, 주막에서는 목침을 갖다 주고 제일 윗자리에 모셨다고 한다. 그러나 우두머리가 없는 선질꾼 무리도 있었다.
(2) 선질꾼의 장사법과 규칙
선질꾼들은 장사 계획을 미리 작성하여 장사하였다. 이동 경로·숙박지·들릴 장을 미리 협의하여 결정하고, 장날에 맞춰 각종 물건을 구입한 후 모여서 이동하였다. 매 장날마다 다닌 것은 아니고 형편에 맞게 장날을 정해 다녔다. 이들의 판매 방법은 소매와 도매를 겸하였으나, 보통 물건을 다른 지역으로부터 가져와서 상인들에게 도매로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선진꾼들의 장사를 ‘안팎 내외장사’라고도 한다. 흥부장에서 놀·박바가지·해산물을 구입하여 내륙에서 무명·모시·삼베를 구입하는 형태로 상호 이동하며 물건을 판매하여 각각의 이윤을 획득하기에 안팎 내외장사라 한 것이었다. 선질꾼들은 날씨와 가격에 민감하게 반응하였고, 구매한 물건의 양이 많으면 태게를 고용하여 물건을 운반하였다.
[7] 십이령을 넘나들며 선질꾼들이 들린 주요 시장
울진 흥부와 주변 지역에서 생산된 물건으로 미역·각종 어물·소금·고지 바가지 등이 있었으며, 경상북도 내륙 지방에서 생산된 물건은 주로 쌀·보리·대추·담배·옷감 등이다. 이와 같은 물목 거래를 중심으로 선질꾼들이 주로 들린 시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봉화 춘양장
봉화 지역에는 소천장·현동장·봉화장·춘양장[내성장]이 있었다. 선질꾼들은 내륙에서 춘양장이 가장 컸다고 인식하였으며, 영주까지 진출하지는 않았다. 춘양장에서 구입한 물목은 콩·쌀·각종 잡곡·메밀·팥 등이었으며, 이것을 부구시장에서 판매하였고, 부구에서는 어물·미역·김·파래·소금 등을 구입하여 춘양장에서 판매하였다.
흥부-두천-샛재-춘양장의 연결은 3일이 걸렸으며, 소규모 상단은 춘양장까지 안 가고 현동장으로 가서 물건을 팔고 필요한 것을 구매하였다고 한다. 당시 춘양장은 내광비·외광비에서 60리로 거리가 멀어 대부분 가지 않았다고도 한다. 서면 내광비·외광비에서는 현동장으로 제수를 구입하거나 생필품을 구입하러 다녔다고 하는데, 30리 정도 거리였다고 한다. 또한 부유한 법정에서는 주로 물물교환으로 물건을 판매·구입하였는데, 법정장에서는 콩·팥·쌀·깨 등을 구매할 수 있었다고 한다.
(2) 울진장
두천리에서 울진 사이는 하루 거리였다. 말래에서 자고 새벽 6시 경에 출발하면 울진에 10~11시 사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두천리에 있는 주막에서는 울진장에 가서 장을 보아 왔다. 흥부장이 비록 울진장보다 컸지만 멀고 비싸서 울진장으로 장을 보러 다녔다고 한다. 울진군 서면에서는 곡식을 지고 울진장을 보러 왔다.
(3) 울진 흥부장
부구에서 원자력발전소로 넘어가는 다리 아래가 흥부장이 섰던 곳이다. 울진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장이어서 마을이 꽉 찰 정도였고, 장에서 별신도 하였다고 한다. 호산 사람들도 흥부장을 보러 오기도 하였는데, 호산 상인들이 흥부장을 다니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흥부장은 우시장·어물전 등이 유명하였다.
흥부장은 원자력발전소로 가는 다리 아래에 있었으나 해방 후에는 면사무소 앞으로 이전하였고, 1980~1890년 사이에 현재 장터로 이전하였다. 흥부장이 면사무소 앞으로 이전한 후에는 4일 동안 ‘시장별신’을 하였다. 흥부장에는 각종 해산물이 풍부하게 거래되었으나, 내륙에서 생산되는 잡곡이나 곡물류가 많은 것은 아니었다. 내륙에서 어물을 팔고 내륙 지역에서 생산된 곡물류를 많이 가져오지 않아서였다. 흉년이 들면 콩과 팥이 잘 팔렸다. 흥부장은 해방 이후 죽변항이 개설되고,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쇠퇴하였다.
[8] 선질꾼과 지게
지게에는 일반 지게, 바지게[가지가 짧게 있는 것, 가지 없는 것], 오르대 지게, 쪽지게(바지게)가 있다. 오르대 지게는 바지게와 비슷하나 지게 위와 지게 뼈대도 짧고, 가지가 있는 지게이다. 즉, 지게의 위와 아래가 짧은 지게인데, 주로 나무·콩·곡식 등을 운반하는 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특히 벌채한 나무를 지고 다니는 데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겨울에 돈벌이가 없으면, 벌채한 나무를 각목 등으로 만들어 놓으면 이를 져다가 장터나 목상이 원하는 곳으로 이동시키는 데 많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산에서 제재한 나무를 나르는 일꾼을 오르대꾼이라 하는데, 이들은 밥을 싸가지고 나무를 지고 다녔으며, 목상(木商)이 흥부 등에서 오르대꾼이 지고 오는 나무의 양을 재어 임금을 지불하였다고 한다. 보통 40~50세를 지고 다녔다고 한다.
쪽지게는 지게 틀의 하나이다. 원래 바지게의 명칭이 쪽지게라고 하는 제보자도 있다. 바지게는 짐을 얹는 가지가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구분되는데, 가지가 있어도 일반 지게와는 달리 가지 길이가 짧다. 대부분의 바지게는 가지가 없이 편평하여 여기에 짐을 노끈으로 묶은 후 지고 다녔다고 한다. 다닐 때는 바지게 아래에 작은 솥단지와 소금·짚신을 매달고 다녔다고 한다.
바지게는 산에서 긴 작대기 2개와 몇 개의 가지를 구하여 끈으로 엮어서 쉽게 만들었는데, 짐을 안 질 때는 부담 없이 버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바를 달아서 당긴다고 바지게라고도 하며, 일반 지게와는 달리 바지게의 등판에는 나무판자를 대어 만든다. 이와 같이 만든 바지게는 장사용으로만 사용하였다. 일반 지게에 비해 바지게는 전체 길이가 길었다. 여기에 미역이나 어물을 가져갈 때는 짚으로 싸서 묶는다. 참고로 태게를 지는 사람은 일반 지게를 사용하여 짐을 나른다.
[9] 선질꾼과 주막
십이령상에 있는 주요 주막은 샘수골·시치재·말내·쟁패·샛재·저진터 등에 있었다. 이들 주막은 운영 형태에 따라 술만 파는 주막과 술을 팔면서 봉놋방을 갖춘 주막으로 구분할 수 있다. 주막집에서 자는 방을 봉놋방이라 하였으며, 방 내부에는 몽치미[몽침]라 부르는 목침(木枕)만 있고 이부자리는 없었다. 겨울에는 군불을 많이 지펴 주어 전혀 춥지 않았다고 한다.
주막에서 돈을 차고 자면 도둑을 맞을 수 있기 때문에 돈을 주막집 주인에게 맡기는 사람도 있었다. 주막의 안주인이나 술을 파는 주모를 갈보라고 하였는데, 갈보는 요즘의 마담으로 보면 된다. 여기서 얼굴이 통통하면 호박 갈보라 하였다고 한다. 선질꾼들과 마을 주민들은 친하지 않았으나, 자고 가는 주막집 주인들과는 친하였다.
주요 주막은 시치재 입구 주막, 부구3리 주막, 샘수골 주막, 주인1리 성황당 앞 주막, 상당 주막, 두천 주막(말래 주막), 바릿재 주막, 장평 주막[쟁패 주막], 샛재 주막, 소광리 주막, 평전 주막, 큰넓재 주막, 적은넓재 주막, 외광비 주막과 내광비 주막 등이 있었다.
[10] 선질꾼의 신앙, 샛재 성황사의 운영
지나는 길목에 있는 마을 제당에 들려서 절하고 가는 선질꾼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서낭당 앞에서 절하고 쉬어가고 솥단지를 걸어 밥을 해 먹고 가기도 하였다. 특히 상당 서낭당·하당 서낭당·말래 서낭당·샛재 서낭당에는 들려서 반드시 절을 하고 갔다.
울진 북면 흥부역과 봉화를 연결하는 십이령 중 샛재에는 이들 지역을 오가며 장사를 한 행상단이 모신 성황사가 있다. 고갯마루 바로 아래에 중수(重修)를 하여 반듯하게 유지되고 있는데, 지붕은 기와를 얹은 맞배지붕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제당이다. 정면 입구에는 ‘조령성황사(鳥嶺城隍祠)’라 쓴 편액을 걸었으며, 성황사 내부의 제단 정면에는 ‘조령성황신위(鳥嶺城隍神位)’라 쓴 위패를 모셔 두었다.
샛재 성황사는 대관령 서낭을 받아온 것이라 전해지는데, 이 이야기는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이 연결되는 고갯마루 성황당을 통해 일정한 세력권의 범위를 알려주고 있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는 삼척시 천은사·영은사·신흥사와 동해시 삼화사 등의 창건 설화에 범일국사가 등장하는 것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이 지역 불교 문화가 강릉의 사굴산파와 일정한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또한 동해시 동호동에서 모시는 천지신이 할머니 신이고, 이를 태백산 천제단에서 모시는 천신과 연결하려 한 것은 이 지역이 태백산 천제단 문화권임을 표현한 사례이다.
샛재 성황사는 당 내부에 여자 화상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처음에는 부상(負商)들이,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선질꾼들이 주도하여 제물을 준비하여 제를 지냈으며, 선질꾼들이 사라진 이후에는 빛내마을에서 제당을 관리하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샛재 성황사 내부에는 이들 보부상을 비롯한 행상단이 제당을 중수하고 제사를 지낸 것과 관련한 현판이 다수 걸려 있다.
현재 ‘조령성황사(鳥嶺城隍祠)’라 쓰여진 현판이 제당 전면에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정식 명칭은 ‘조령성황사(鳥嶺城隍祠)’로 볼 수 있다. 성황사 내에 걸려 있는 중수기나 성금방명록 등을 종합해 보면 ‘조령성황당’ 또는 ‘조령성황재사(鳥嶺城隍齋舍)’로도 불렸음을 알 수 있다. 1967년 문화재관리국에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그 명칭이 ‘조치성황당’으로도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제당의 명칭을 통하여 당시 보부상이나 이후 선질꾼들의 신앙 처소로서의 기능, 그리고 세상을 뜬 보부상과 선질꾼들을 위한 재사(齋舍) 기능을 함께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원홍주등육군상무우사 회원들은 매년 한식날에 홍도원에서 치루어지는 제의에 참여하여 세상을 뜬 보부상들을 기리는데, 이와 같은 사례는 여러 지역에서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 사례들은 별도의 재사나 개인 묘소를 찾아 선대 보부상을 기리는데 비해, 십이령을 왕래한 보부상을 비롯한 행상들을 위한 제사를 성황사에서 지냈다는 것은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사례이다.
제당은 기와를 얻은 맞배지붕이고, 홑처마에 정면 1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제당 입구 정면 위에 ‘조령성황사’라 쓰여진 편액을 걸었고, 제당 내부에는 정면과 좌우에 제단이 있다. 제당 내 정면에는 ‘조령성황신위’라고 묵서한 나무 위패가 있다. 제당 명칭과 위패로 보아 성황신을 모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두대간의 고갯마루에 있는 제당 명칭이 ‘○○산령각’이고, 모시는 신위 또한 산신 계통이 많다는 점과 비교하였을 때 나름의 특징으로 볼 수도 있다. 행상단이 이곳을 지날 당시 제당 아래에 주막이 있었고, 소규모의 마을과 전답이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마을 수호신의 역할과 함께 행상단을 위한 신앙의 처소로서의 기능을 함께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내부 벽에는 각종 중수기가 걸려 있다.
당의 위치는 샛재 고갯마루에 위치하는데, 보부상들이 다니면서 위하였던 봉화의 고치령·태백의 건의령·임계의 삽당령 등 대부분의 제당들이 고갯마루에 위치하고 있다. 1967년 조사 자료에 의하면 제단 위에 마구할매의 화상이 있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없다. 샛재 성황사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당신도가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1868년에 만들어진 「조령성황사 중수기」에 따르면 화공 황순기가 제당을 중수하면서 당신도(堂神圖)를 그려 봉안하였고, 광서이십년갑오(光緖二十年甲午)(1894) 중수기에 따르면 화공 이치윤이 성황당 당신도를 다시 그려 봉안하였다고 하였다. 1962년에 조령 성황사 영정을 다시 봉안하였는데, 이를 그린 화사는 이택룡이다. 1967년 조사 자료에 기록된 마구할매의 화상은 이 영정을 이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목은 제당 동쪽에 높이 20m의 들미나무가 있으며, 제당 둘레에는 파손된 기와와 돌로 나지막한 돌담을 쌓았다. 제당에서 찬물내기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아래에 보부상이나 선질꾼들이 지나며 돌을 던져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돌무지가 남아 있다. 인근 안일왕 산성과 관련하여 아밀왕이 성을 쌓기 위해 돌을 나르던 곳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와 함께 제당 주변에 1842년에 세운 ‘이광전영세불망비(李光筌永世不忘碑)’가 세워져 있다. 샛재 성황사와 함께 이광전영세불망비는 샛재가 주요 교통로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제사는 1년 중 봄과 가을에 지냈으며, 연장자를 제관으로 선정하였으며, 제비(祭費)는 위답(位畓)에서 부담하였다고 한다. 준비한 제수는 술·메·백설기·소고기·과실이었으며, 고사를 지낸 후 별신굿을 하였다고 한다. 두천리 주민들에 의하면 샛재 서낭당에서 3년에 1번 정도 10월경에 좋은 날을 받아 굿을 하였는데, 소요되는 경비는 위답을 경작하는 사람에게 소작료를 받아서 모으고, 찬조도 받아서 하였는데, 하루 굿을 하였고, 무당 3~4명이 와서 진행하였다고 한다. 굿을 하면 인근에 있는 빛내·장평·홈교·소광2리·찬물내기·소광1리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굿을 보러 왔으며, 선질꾼들은 여유 시간이 있으면 보고 갔고 일부는 시주를 하였다고 한다.
선질꾼들이 더 이상 십이령을 다니지 않으면서 샛재 성황사는 인근 마을인 소광1리와 소광2리, 소광3리가 함께 운영하였고, 이때 장평과 찬물내기에 거주하는 주민들도 참여하였다. 30여 년 전에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워 소광3리 빛내마을에 넘겨주었다. 원래 빛내마을 서낭당이 있었으나, 샛재 서낭당을 큰서낭으로 모셨는데, 지금은 빛내 서낭당은 없고 샛재 성황사 운영도 마을에서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
샛재 서낭당은 대관령 서낭을 받아온 것이라 전해지는데, 선질꾼들이 이 서낭당 앞을 지나다니던 시절에는 고기 한 마리를 수지로 주며 마을 사람들에게 제사를 지낼 때 올려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인1리, 주인2리 등 선질꾼이 지나는 길목에 있는 마을에는 선질꾼들이 지나며 마을 서낭고사를 지낼 때 장사가 잘 되고, 건강을 기원하는 소지를 올려 달라고 부탁하면서 제비를 조금 내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새색시가 시집을 가면서 샛재 성황사 앞을 지나며 빨간 천을 당에 달아주고 오는데, 이는 새색시를 따르는 귀신이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로 행한 것이라 한다.
<출처> 디지털울진문화대전
http://uljin.grandculture.net/gc2/common/sub.jsp?menu_idx=1&node_id=1792&pact=view_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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