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가볍게 하기
햇살을 밟으며 마당을 어슬렁거린다. 모든 것이 쓰러져 눕는 겨울초입에도 차밭은 푸르다. 청초한 차 꽃 역시 겨울 깊도록 피고 진다. 쭈그리고 앉아 동글동글한 차 씨를 줍기도 하고 차 꽃향기를 맡기도 한다. 붉은 꽈리가 그대로 달린 채 말라간다. 해마다 그 자리에 저절로 나서 자라다 저절로 고사하는 다년생이다. 솔잎 채송화 밭이었던 사랑채 축담은 벌통이 차지했다. 벌통 앞에 옹송그리는 일벌도 추운가보다.
농부가 잔디 깎기를 챙겨 떠난다. 시댁 정원과 잔디밭을 다듬을 모양이다. 시댁에 가면 치워야 할 것들이 지천에 쌓여 있다. 집 안팎을 풀 한 포기 없이 가꾸시던 시어머님이 치매환자로 자리보전한 지 오래 되었다. 정원 가꾸기는 시아버님 몫이었는데 시아버님 역시 손 뗐다. 텃밭은 풀이 우거지고, 온갖 꽃나무가 자라던 정원은 볼품없어졌고 마당의 잔디밭에는 잡풀이 더 많다. 농부가 들며나며 대청소도 하고, 쓰레기도 치우고, 정원 손질도 하지만 역부족이다. 두 집 살림 살기가 어디 쉬운가. 세월 이기는 장사 없다고 하던가. 나 역시 기저질환자가 되어버렸다.
올해는 김장을 대폭 줄이기로 했다. 무청 김치 한 항아리에 배추 서른 포기정도면 족하지 않을까. 여름 내내 텃밭에서 거두어 말린 건고추도 충분하다. 젓갈도 넉넉하게 담가 놨다. 김장에 들어갈 꺼리는 시간을 두고 준비하면 되지만 자꾸 힘에 부친다. ‘내가 해 주께. 당신은 지시만 하소.’ 농부의 통 큰 배려가 있지만 편치 않다. 한 때 나는 손 큰 여자였다. 뭐든지 푸짐해야 직성이 풀렸다. 음식도 먹고 남아야 하고, 남에게 선심을 쓰도 넉넉하게 썼다. 시어머님은 퍼주기 잘하는 며느리를 못 마땅해 하셨다. 손 큰 여자는 살림 못 산다고.
나는 시집와서야 철이 들었다. 명절 음식 하는 것에서부터 손두부, 도토리와 메밀 묵 쑤는 법, 메주 쑤어 간장된장 담그는 법까지 손끝, 일손 매운 시어머니로부터 배웠다. 일 년 내내 남의 손을 빌려야 하는 농부의 아내로 자리매김하기가 어찌나 벅차던지. 이농을 꿈꾸기도 했었지만 한 번도 실행하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자연에 동화되어버린 것인지, 내가 나고 자란 고향과 닮은 곳이라 그런지, 목청껏 고함질러도 흉이 되지 않는 곳이라 그런지, 복잡하고 매끈한 도시보다 편해서 그런지, 수더분하고 넉넉한 품새가 나를 닮아서 그런지.
예로부터 농촌에서는 일꾼을 잘 먹여야 한다는 것이 정설로 자리 잡고 있다. 하루 두 번의 새참과 점심은 별미에 푸져야 했다. 이삼십년 전만 해도 마늘 농사든, 양파농사든, 벼농사든, 비닐하우스 특수재배든, 단감, 밤농사 같은 과수원이든 놉을 쓰지 않으면 농사짓기가 어려웠다. 지금은 농기계 보급이 많이 되어 수월해졌지만 여전히 수확 철이면 일손이 없어 쩔쩔맨다. 인건비가 고공행진 하는 이유다. 놉을 도시에서 공수해 오거나 외국인을 쓰거나 그들의 요구도 만만찮다. 농산물 팔아 차 떼고 포 떼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는 말이 왜 나오겠는가.
우리 집도 올부터 농사를 대폭 줄였다. 고사리 밭도 산초 밭도 남에게 임대를 내줬다. 단감농사도 올해만 짓고 말기로 했다. 몸이 힘드니 중노동인 농사를 줄일 수밖에 없다. 그만큼 경제가 휘청거릴지 모르나 농부도 퇴직을 해야 할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덕분에 일꾼 쓸 일이 없어진 것이다. 시댁의 두 노인은 아직 건재하나 고춧가루 든 김치를 별로 즐기지 않는다. 형제자매들이 모여 갖은 음식 만들어 먹으며 북적거리기도 어려워졌다. 자식들이 모두 노인이 되어버린 탓이다. 시댁김치 냉장고에 넣을 한 통은 예비로 담가다 놓는 것이고 우리 부부와 애들 먹는 것이 전부다. 많을 필요 없다.
농부는 늘 ‘음식을 조금만 해라.’ 잔소리를 한다. 음식을 제 때 만들어 제 때 싹 비우기를 권장하지만 손 큰 여자에겐 참 어려운 과제다. 식탁 차리는 것도 그렇다. 넉넉하게 차려놔야 먹을 게 있어 보인다. 적게, 조금만 하자. 제 때 먹고 치우자. 마음속으로 노래를 해도 손이 알아서 푸짐하게 처리한다. 명절 음식도 항상 푸지다. 버리는 한이 있어도 먹고 남아야 직성이 풀린다. 여태 일꾼 대접을 하며 살아온 촌부라서 그럴게다.
올 겨울에는 그 마음을 고쳐보련다. 어떤 음식이든 간단한 것 선호하기, 제 때 조금만 해서 제 때 먹어치우기. 냉장고와 냉동실을 채우지 않기. 안 먹고 안 쓰는 것은 과감하게 버리기를 꾸준히 노력해볼 생각이다. 이것도 반면교사로 있는 두 노인 옆이라서 그럴까. 두 노인 이승 하직하면 치워야 할 짐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를 반성한다. 삶을 가볍게 하기, 내가 사는 동안 조금씩이라도 깨끗하게 정리해두자. 그래야 우리가 떠난 자리가 조금은 가볍지 않을까.
약력
박래여
농민신문 신춘문예 중편소설 당선
제 8회 여수해양 문학상 소설부문 대상 수상
현대시문학 시 등단
수필집 <푸름살이>
경남작가상 수상
2021. <11, 12월호 그린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