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에서 정악에 안기다
남 중
결혼식 피로연장. 김 선배는 나를 보자마자, 다짜고짜로 시 쓰기에 헛다리만 지나치
게 짚어대는 사람이라 끌끌댜며, ‘정읍에 내려오라. 정악(正樂)을 모셔봐야 진짜를 깨
닫게 된다.’고 채근하더군요. 군말없이 ‘예, 감사합니다.’며 따를 수밖에 없었답니다.
이의를 제기하기에는 말투가 무쇠처럼 억셌기 때문이지요. 억지로 떠맡은 ‘교장질’을
반짝 마치고 퇴임한 국어 선생 김 선배. 봉급 받으면 평생 풍류방 지키기에 쓸어 넣
은 ‘미치광이’. 그러나 젊은 시절보다 몇 배 더 강해진 그 눈빛에 꺼둘려 정읍 월영리
에 도착하니 동짓달 밤하늘에 별이 초롱초롱하더군요.
김 선배 말대로 시를 흉내만 냈던 나. 최근에 수필을 쓰며 시 창작에서 부족한 점을
성찰하며 보완하려 하고 있지만 여전히 부족하기만 하지요. 정읍으로 갔던 이유는 아
직 율(律)이 잡히지 않아 부족한 생동(生動)을 찾으려는 마음이 강했기 때문이랍니다.
정악(正樂)은 ‘바른 음악’이니, 정악에서 시 창작에 대한 정답을 얻게 되지 않을까?
정악이 무엇이길래 김 선배는 자기 일생을 다 바쳤을까? 정악은 문학만이 아니라 인
생을 넘어 오묘한 우주 진리까지 품고 있지는 않을까?
해미읍성에서 배달된 들국화주를 한 잔 들이킨 김 선배. ‘사투리가 담긴 술이구만.
정악(正樂)도 이를테면 사투리 음악이야. 그나마 남 선생 시가 마음에 들어. 왜냐고?
사투리에 내재된 정신을 시로 표현해내더만.’. 시음한다며 벌써 큰 잔으로 여러 차례
들이킨 나는 술이 확 깨었습니다. 복선이 있으리라 짐작했기 때문입니다. ‘시조가 정
악임은 알고 있겠지? 경체시조는 서울 말투를 반영하지. 영체시조는 영남 사투리를,
그러니 완체시조는 호남 사투리를 반영함이 당연하지 않나? 말투와 개성을 반영해야
바른 음악이 되는 법이야. 글도 개성이 중요하지 않을까?’ 이말을 듣고는 다시 술맛
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해미읍성에 가득히 피었던 서산 해미읍 들국화 향기가 선배가
던지는 정읍 사투리를 타고 방에 흘러넘치더군요.
이튿날 대전에서 온 한밭정악회원들과 동지 팥죽을 나누며 풍류는 시작되었습니다.
‘풍류는 시작과 끝이 따로 없으니, 오늘 모임은 영원한 인연과 함께 이미 진행 중인
셈이요. 다들 밥부터 자시고 천천히 연주합시다.’라 선배가 선언했지요. 충청도 사투
리와 전라도 사투리가 뒤섞이며 서로에게 반가운 ‘밥 반찬’이 되더군요. 정읍 사투리
와 대전 사투리가 품은 차이. 정읍 사투리는 말끝을 치켜올리며 빠르게 끝났고, 대전
사투리는 말끝이 낮으며 느렸지요. 정읍 사람들은 빠르면서도 정성스럽게 접대하였고,
대전 손님들은 신중하면서도 두텁게 처신했습니다. 사물을 대하며 차이와 공통점을
동시에 보게 되지는 않지요. 공통점을 먼저 보며 그것에 집착할 경우에는 개성을 놓
치게 되고, 차이점만 보며 그것에 집착하게 되는 경우에는 보편성을 놓치게 되는가
봅니다. 글을 쓰다보면 필자와 독자 차이를 살리며 공통적인 정신을 묶어내느냐가 난
제이지요. 이 난제를 극복하지 못한 얼치기 글쟁이는 정악인들이 이 차이와 공통성을
어떻게 함께 획득하나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장구채를 서로 사양하며 연주는 시작되었습니다. 한밭정악회 가야금 연주자인 박 선
생이 정읍줄풍류 사람인 김 선배에게 ‘정읍에 왔으니, 대전 향제 음악에 정읍 장단을
모셔보겠습니다. 큰 차이에서 조화를 끌어내는 가르침이 기대됩니다.’라며 정중하게
양보하더군요. 강하고 민첩하게 짚는 선배 장단. 한밭정악회가 연주하는 가야금과 거
문고 소리가 두터우면서도 정중하게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김 선배 안주인은 양금을
울렸는데, 정읍줄풍류회 소리와 대전 한밭정악회 소리를 중화하는 듯했습니다. 초보자
귀에는 별빛처럼 반짝거리더군요. 두웅 두우웅 다앙, 뚝. 음악이 끊겼습니다. 소리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했습니다. 한밭정악회는 자신들 호흡을 헤아려 끌어달라며 공
손하게 주문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서로 음악을 잘 이루는 듯했습니다. 정읍줄풍류회
원들과 대전 한밭정악회원들이 상대방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끝내 선율 하나를 이루
어내더군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문학 독자는 물론 작가가 쓰는 언어에 모든 감각을
집중하겠지만, 작가도 독자에게 귀를 기울이며 작품을 이루어야 함을.
글 쓸 때 또 다른 고민, 주제와 제재가 서로 다르고, 단락과 단락이 서로 차이가 있
는데, 이것들을 어떻게 조화시키며 질서를 잡느냐였습니다. 지나치게 구분하면 작품이
죽고, 하나로 뒤섞으면 혼란스럽기 때문입니다. 이런 난삽함으로 독자들은 힘들게 되
고, 지은이 자신도 내면적인 고통을 겪게 되지요. 혼란스러운 언어행위는 개인 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갈등을 불러와 세상을 힘들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음악에도 고뇌가 있나 봅니다. 연주가 끝나고 한밭정악회 박 선생이 정읍줄풍류회원
들에게 다음 연주 때는 이런저런 악기 소리가 질서 없이 뒤섞이지 않게, 이를테면 거
문고는 거문고끼리, 대금은 대금끼리 모여 앉게 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줄풍류회원들
도 즉시 공감하더군요. 공명 효과에 대한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공명 효과는 집중과
협조에서 극대화됩니다. 거문고 연주자가 함께 모인다면 거문고 소리가 더 생기를 얻
게 되겠지요. 우리 삶도 마찬 가지 아닐까요? 연주가들 악보를 눈여겨 보니, 여백마
다 ‘낙이불류(樂而不流), 애이불비(哀而不悲)’라는 구절. 이것은 「논어(論語)」에서 유래
한 말로 올바른 마음가짐을 강조하는 내용이지요. 정악은 결국 마음을 바르게 하려는
음악입니다. 올바름은 자기 개성을 충분히 발휘하되, 그만큼 타자도 존중하며, 질서를
창조함에 생명력이 있겠지요. 정성과 공경을 체득하려는 선비 음악이 정악입니다. 문
학 정신도 또한 수행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서울로 출발하며 내장산을 바라보니 서래봉이 제 자리를 당당하게 지키며 팔을 벌려
하늘을 받으며 둥덩실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마치 풍류방에서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궁중 학춤 같았습니다. 지금 김 선배네 풍류방에는 고요 하나가
가부좌를 틀고 제 마음을 들여다 보고 있겠네요.
(2,924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