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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우포늪. 아침 안개가 걷히는 시각, 장대나무 쪽배는 늪 가의 더 없이 아름다운 곡선을 따라 또 다른 가을의 그림을 그린다. 하동칠씨(경남 창녕군청 기획감사실·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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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선은 물길 따라 그대로 지어져 있었다. 흐르는 대로 지어졌고, 지어진 대로 이어져 있었다. 온갖 풀들은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풀들은 조금 말라 보였고. 지난 여름보다는 수더분하다. 그래서 우포늪은 수더분한 곡선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 게 오늘 따라 더 아름다워 보였다. 풀이 우거지면 서로 엉키고 설켜 곡선은 온데간데 없다. 마침 아침 안개도 거둬지고 비로소 곡선 따라 점점 선명히 다가오는 우포늪의 가을본색. 어부와 장대나무 쪽배가 그 본색을 열심히도 그려낸다. 그 덕분에 가을은 벌써 이만큼 와 버렸는지도 모를 일.
늪은 곳곳에 물이 많이 말랐다. 그래서 질펀한 펄의 부드러움이 우선 눈에 찬다. 여기에 늪이 주는 냄새, 뭐랄까, 가을바람과 함께 불어오는 '안도의 비릿함'이라 할까. 아니면 어젯밤 물방개나 게아재비를 뒤쪽으로 밀어제치며 가창오리떼가 이른 야간비행을 연습 삼아 감행했거나. 그런 흔적이 곳곳에서 뚝뚝 묻어나면서 늪은 점점 더 맛 좋은 냄새들로 북적인다.
그 유명한 가시연꽃은 아름다운 꽃이 진지 오래지만, 자태는 여전히 우포늪의 왕처럼 자신 있다. 가시가 피워낸 아름다움이 여운으로 자신 있게 그 잎들에 묻어 있다. 자전거 바퀴에 버금가는 가시연잎들은 이미 계절의 기미에는 어쩔 수 없이 쇠잔의 색을 드리우고는 있지만 수면을 차지한 위세는 역시 가시연꽃이다. 시인 이하석은 '늪을 헤매는 거대한 수레'라는 생태환경기행 글에서 가시연꽃을 '우포늪의 수면에 비친 그늘'에 비유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 늪의 많은 부분이 가시연잎으로 덮이는데, 그 큰 잎은 무수한 살이 박힌 바퀴처럼 당당하다. 너무나 당당해, 그 바퀴를 굴리면 흡사 공장처럼 이 늪의 모든 것이 일사불란하게 가동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덧붙인다. "그리고 나는 우포 가는 길에는 항상 르네 샤르의 시를 생각한다. '…시인은 고독하다. 늪을 헤매는/ 거대한 수레로 시인은 산다./…' 르네 샤르의 '시인'부분"
그렇다. 우포늪 전체가 수레바퀴 같은 가시연잎의 굴림을 기다리듯 질서가 정연하다. 줄이나 부들, 괴롭고 귀찮은 개구리밥이나 생이가래, 붕어마름이나 황소뿔 같은 말밤, 심지어 요즘 골치를 썩이는 우리 어종의 킬러 누타리아까지도 무엇인가를 기다릴 게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시인의 눈. 시인의 눈은 어긋나는 법이 없다. 어긋난다면 시인이 아니거나.
자연의 예찬과 문명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 글을 많이 쓴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모든 사람은 시인이 되고 싶어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철학자가 되고 과학자가 된다. 이것이 시인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시인의 눈은 우포늪에서 어긋나지 않고 있었다.
두어해 전. 영남대 최재목 교수(철학)는 사물을 총합하는 생명의 힘으로 늪을 파고 든 끝에 '글쓰기와 상상력의 유비쿼터스 네트워크 늪', 줄여서 '늪'이라해도 좋을 책을 냈다. 온갖 만물을 받아들여 맑고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 내는 늪, 죽으면서 살아 있고, 끊임없이 질서를 만들어 내는 동시에 끊임없이 혼돈으로 향하고 있는 늪에 대한 현재까지의 사색의 결과물이라고나 할까.
끊임없이 시작도 추구해온 최 교수는 책머리에 "나는 최근 몇 년간 '늪'에 대해 이런저런 많은 생각을 해 왔다. 늪에 착안하여 새로운 글쓰기나 발상법, 인문학 내지 철학의 방법론까지 구상할 만큼 늪에 빠져 있었다. 지금 '늪'은 나의 발상법을 회춘시키는 하나의 원천이 되고 있다"고 할 정도로 늪에 거는 희망의 광기는 매섭고 야물지다. 물론 직장인 대학캠퍼스 안과 밖으로 적지 않은 늪 내지는 그에 가까운 물웅덩이와 가까이 지내는 동안 어느새 발상이 막히거나 머리가 혼란스러울 때도 늪을 찾으면 멍하게 앉아만 있어도 푸근해진다고 고백한다. 늪에 빠지는 그의 진짜 이유는 뭘까.
바로 사물을 총합하는 생명의 힘 때문이다. 늪은 살면서 죽어가고, 만들어 내면서 죽여 버리는 이중성. 이를 최 교수는 우주가 가진 동심, 천진난만함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풀 한포기가 대지 위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고, 그 꽃잎이 다시 떨어져 진토가 되어 가는 것, 거기엔 아무런 보탬이나 줄어듦도 없다. 모두 평범한 사실이며, 신비로운 일이 아니며 늪은 그렇다"고 소리친다.
다시 우포늪. 1억4천만년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는다. 늪의 나이는 왜 이리도 많을까. 그 세월 우포를 곁에 두고 우리들은 무엇을 했을까. 한 때는 쓰레기매립장으로 사용하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우포는 생물의 다양성, 서식처의 다양성 등으로 자신을 매김하면서 1998년 3월에야 겨우 람사르협약에 등록, 보호를 받게 됐다. 오는 28일부터 내달 4일까지 환경올림픽으로 불리는 제10차 람사르협약당사국 총회도 열린다. 총회를 앞두고 지금 우포늪은 단장에 분주하다. 국내 최대 천연늪지를 단장한다는 게 말이 될성부른 일인가. 가뜩이나 제 이름인 '소벌'을 놔두고 '우포'라고 우기는 게 싫다는 인근 마을사람들의 주장이 언제쯤 먹혀들지. 우포는 인근의 작은 나무벌(목포), 모래펄(사지포), 쪽지벌도 아우르고 있다.
한참을 늪가로 어슬렁거리다 혹 무엇이나 발견될까 눈여겨 펄을 살피니 새들이 미동도 않고 앉은 듯 서 있고, 선 듯 앉아 있다. 왜 저럴까. 알고 보니 쉬고 있다는 것이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는 인근의 논밭에서 곡식을 쪼아 먹고 더러는 펄 속의 식물이나 열매도 먹는다는 것. 아직 새들의 천국이 될 만큼의 숫자는 아니다. 곧 겨울이 닥치면 올해는 또 어떤 희귀철새가 우포의 진가를 빛나게 할까. 융단이 깔린 듯 보드라운 펄을 바라보며 그 새들이 비상할 하늘에는 서서히 노을이 맺힌다. 늪 가로 아름다운 곡선이 만들어지고. 우포는 지금 어엿한 자연의 곡선과 열애중이다.
협찬 : 대구예술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