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로 받은 훈장
김 일 호(연기문학동인회장)
지난 5월 지방선거 열풍으로 전국이 온통 소란스러울 때 어이없게도 이미 30년 전에 50세의 젊은 나이에 저 세상으로 떠나신 아버지의 화랑무공훈장과 증서를 택배로 받았다. 택배라 함은 농산물이나 생활용품 정도를 편리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유통망인줄만 알고 있었는데 국가수호에 희생한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한 나라의 정부가 주는 훈장을 전달해 주는 방법으로도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었다.
그것도 지난 53년이란 세월동안 까맣게 묵혀두었다가 오늘에서야 유가족의 요구에 의해서 마지못해 주는 마당에 고인이나 유가족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를 헤아리지 않은 채 주문한 물건 하나쯤 부치듯 보내주는 처사가 괘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서글픔을 금할 수 없었다.
2년 전 6월, 오래 묵은 아버지의 사진첩을 살펴보다가 우연히 손바닥 두 배 크기에 구겨지고 때 묻은 제대 증서를 발견하게 되었고 인터넷을 이용하여 아버지의 병적과 포상 사실을 문의하였었다. 이미 그 당시에는 6.25전쟁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공을 세워 훈기번호만 받았을 뿐 훈장을 받지 못했던 유공자들에 대한 훈장 찾아주기 운동이 정부의 주도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아버지의 병적과 화랑무공훈장 수여 대상이라는 회신을 받고 장자로서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살아계신 어머니께 대한 국가유공자의 배우자 증서와 함께 30년 전에 외롭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 있다는 것 외에는 정부로부터의 수혜는 아무것도 없었다.
돌아보면 아버지께서 국가유공자라는 사실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동생들을 어렵게 대학까지 가르쳐 취업시키고 출가시킬 때 까지 정부로부터 조금이라도 혜택을 받았거나 어머니의 긴 병에도 재정적 부담을 덜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크다.
국가와 민족의 부름에 따라 전쟁터에 나가 몸 받쳐 싸우다가 공을 세운 수 많은 유공자들이 이미 고인이 되었거나 궁핍한 삶을 영위하는 유가족들이 존재하고 있음에 이 나라 정부는 지난 50여년 동안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기에 아쉬움에 앞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어렵사리 살아가고 있는 유가족들의 끈질긴 추적과 채근에 의해 찾은 훈장마저도 혼란스러웠던 지난 시대 정부의 직무유기였으며 업무폭주라는 변명을 앞세워 소중한 훈장을 택배로 보내온 사실은 유가족들이 지켜왔던 자랑스러운 국가관을 송두리째 매몰시키고 있다.
당초 약속대로 인근부대로 초청하여 전수하거나 그것도 현실적 어려움이 있다면 지방자치단체장의 손을 빌려서라도 정중하게 전수해야 옳다는 생각이다.
작금에 어려운 나라의 살림살이 극복이 최우선 과제일수는 있겠으나 언제나 정치적논리나 경제논리에 묻혀 사라져가는 국가관과 사회관의 가치는 어떻게 회복할 것이며 오늘처럼 믿기지 않는 국가의 기강과 사회질서 속에 누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국민의 몫을 다할 수 있을지 국가와 정부에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