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때문에 죽을 필요는 없잖아?”
한라산에 한라산은 없었다. 용서치 않겠다는 듯 맹렬한 기세로 내리는 폭설이 나무, 바위, 길 사소한 것 하나도 남기지 않고 꼼꼼히 지우고 있었다. 겨우 지붕을 드러낸 윗세오름대피소-. 동행한 서귀포 산꾼들은 지금 돈내코로 갈 수 없다고 말렸다. 몇 분 후 우리는 돈내코 길목인 한라산 남벽으로 향하고 있었다.
- ▲ 윗세오름에서 남벽분기점으로 가는 길. 혹독한 눈보라와 2m에 이르는 폭설이 앞길을 가로막는다. 결국 돈내코로 내려가려던 계획을 수정, 어리목으로 하산했다.
06시, 강상철(46), 이태봉(41)씨와 서귀포에서 만났다. 오늘 산행을 함께 할 든든한 아군이다. 서귀포 토박이자 거산회원들로 한라산 산행이라면 이골이 난 이들이다. 산악회 사무실에서 4륜구동 지프차로 갈아탔다.
영실 입구에서 도로가 끝나는 영실휴게소까지 5km는 스노체인을 감은 지프차만 통행을 허가하고 있다. 굽이굽이 이어진 빙판길을 지프차에 의지해 오른다. 중간 기점인 국립공원 영실사무소에서 직원들이 제지한다. 여기서부터는 지프차도 올라갈 수 없는 상황이란다. 정 안 되면 조심해서 차를 돌려 내려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통과해 콘크리트가 희미하게 보이는 눈길을 뚫고 영실휴게소에 닿았다.
- ▲ 적설량이 많아 설피를 신고 간다. 발이 빠지지 않아 좋지만 오르막에서 곤욕스럽다.
눈으로 뒤덮인 세상, 설국으로 입국한다. 길은 눈 아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길을 알려주는 건 붉은 깃발을 꽂은 대나무 막대다. 어떤 곳은 겨우 깃발만 밖에 나와 있다. 오를수록 절로 감탄이 난다. 검은 나무줄기에 흰 눈이 앉은 풍경은 장인의 손길이 깃든 섬세한 조각 전시장이다. 작품을 감상하기에 쾌적한 환경은 아니다. 싸늘한 공기와 푹푹 빠지는 발길은 익숙해지는 데 제법 시간이 걸린다. 눈 덮인 숲은 보석으로 가득 찬 냉동실을 걷는 기분이다.
눈은 소리마저 지운 듯 고요하다. 점점 일행의 거친 숨소리와 “뽀드드득” 하는 러셀 소리가 커진다. 아름답던 설경도 눈에 익자 기쁨을 주진 못한다. 앞서 가는 이는 뒷사람이 딛기 좋게 적당한 보폭과 걸음으로 길을 낸다. 뒷사람은 발자국을 따라 밟으며 눈을 다진다. 눈밭에 길이 나는 과정이다.
- ▲ 눈보라로 시야가 나빠 GPS와 안내판으로 위치를 가늠한다.
눈발이 날린다. 바람은 스노샤워처럼 땅을 훑기도 하고 매섭게 얼굴을 때리기도 한다. 혹독한 눈의 파라다이스, 걸을 맛이 난다. 겨울산은 겨울산다워야 한다. 눈 없는 겨울산은 걷기에 편할진 모르나 인수봉 없는 북한산 짝이다. 덕택에 경치는 제로에 가깝다. 영실기암이나 병풍바위 같은 영실 코스의 하이라이트는 눈보라 어딘가에 묻혀 있다.
교대로 러셀한다. 아무리 조심스레 디뎌도 간혹 발이 크레바스처럼 푹 들어가 허리까지 잠기곤 한다. 무릎으로 눈을 다지며 천천히 빠져나와 다시 걷는다. 한 번씩 그렇게 빠질 때마다 호흡이 리듬을 벗어난다. 오를수록 나무가 줄어들더니 트인 오름길이다. 바람이 화난 듯 거친 소리를 내며 드러난 피부를 공략한다. 땀이 나서 덥다고 서서 벗기도 어렵고, 춥다고 옷을 더 꺼내 입기도 마땅찮다. 강한 눈보라 속에서 걸음을 멈춰 뭔가를 하는 것도 쉽지 않다. 멈추면 걷느라 몰랐던 추위가 잔인하게 덮쳐온다.
- ▲ 온통 하얗게 변한 영실에서 윗세오름으로 이어진 등산로.
윗세오름은 크고 작은 봉우리 세 개가 연달아 이어져 있는데, 제일 위쪽에 있는 큰 오름이 붉은오름, 가운데가 누운오름, 아래쪽이 족은오름이다. 예로부터 윗세오름 또는 웃세오름으로 불렀다. 위에 있는 세 오름이라는 데서 연유한 이름으로, 아래쪽에 있는 세 오름에 대응되는 것이다.
병풍바위 안내판을 지나면서부터 경사가 완만해진다. 윗세오름을 옆으로 우회해 걸으니 눈밭에 윗세오름대피소 지붕이 고갤 내밀고 있다. 윗세오름대피소는 1,677m로 우리나라의 대피소 중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정문으로 돌아가니 제설을 잘 해둬 이용에는 불편이 없다. 어리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밀어닥쳐 시끄럽다. 반가운 소란스러움이다. 컵라면으로 몸을 녹이고 전열을 가다듬는다. 대피소 직원들이 돈내코로 가는 건 무리라며 만류한다. 서귀포 산꾼인 강상철씨와 이태봉씨가 거든다. 아직 12시도 되지 않았다. 남벽 분기점까지만이라도 가보자고 설득해 눈 속으로 향한다.
- ▲ 윗세오름에서 어리목으로 내려서는 숲길. 대중적인 코스라 길이 비교적 잘 다져져 있다.
몇 발짝 가지 않아 통제소의 직원이 막는다. 열흘 이상 다니지 않아 눈이 깊다며 열 명이 와도 오늘 중으로 길을 뚫기가 어렵다며 엄포를 놓는다. 갈 수 있는 데까지만 가겠다고 직원을 달래 통과한다. 공단 직원은 30분 이내에 돌아오게 될 거라며 눈의 위력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강씨와 이씨가 설피를 신고 앞에서 길을 낸다. 눈 덮인 구상나무들이 큰 덩치의 설인처럼 버티고 섰다.
눈보라가 칼날처럼 노출된 피부를 찾아 날카롭게 파고든다. 앞 사람과 몇 미터만 멀어져도 페이드아웃 된다. 사람에게서 잊혀지지 않으려 힘을 짜내 걷는다. 시야는 5m를 넘지 않아 사진 찍기 어렵다. 갈수록 눈이 깊다. 발이 빠져 체력 소모가 크다. 눈썹에 고드름이 맺혀 불편하다. 걸음이 쉽지 않다. 맞바람이라 눈 뜨고 있기 어렵다. 고글을 끼면 김이 서려 희미하기는 마찬가지다. 온통 하얗다. 풍경만으로는 이곳이 북극인지 남극인지 분간할 수 없어 설렌다. 우리나라 어느 산에서 이런 설산의 진수를 체험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결국 되돌아 어리목으로 향한다.
영실에서 윗세오름대피소까지 마주치는 사람 한 명 없이 적막했는데, 어리목 코스는 줄을 서서 올라온다. 사람들이 곧 이정표다. 완만한 눈의 평원이지만 눈보라가 심해 시야는 몇 미터를 넘기 어려워 이곳도 백지풍경이다. 등산로를 따르는 짐 운반용 모노레일이 간혹 눈에 띈다. 사제비동산에 닿자 길이 숲으로 든다. 조폭 같은 칼바람이 잦아들자 숲이 아늑하다. 고도를 내릴수록 바람이 잦아들고 시야도 열린다. 같은 한라산이라도 높이에 따라 변화가 심하다.
어리목의 숲은 섬세한 크리스털 숲으로 탈바꿈했다. 겨울산을 처음 찾은 이들에겐 동화에 나올 법한 장면이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크리스털 숲을 빠져 나오자 스노체인을 감은 차들이 서 있는 어리목 주차장이다.
- ▲ 영실에서 윗세오름으로 이어진 가파른 오르막길. 눈이 깊어 러셀이 쉽지 않다.
산행 길잡이
굵고 짧은 눈과의 한판 승부
적설기가 아닌 때에 영실~윗세오름~어리목 코스는 넉넉하게 4시간이면 된다. 그러나 적설기에는 변수가 많으므로 나름 준비가 필요하다.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1100도로에서 영실휴게소까지 차량 통행이 가능한지 여부다. 영실탐방안내소(064-747-9950)에서 확인가능하다.
1100도로 영실 입구에서 영실휴게소까지 5km 중간쯤에 영실탐방안내소가 있는데 제주시에서 오는 버스는 여기까지 운행한다. 40분 정도 걸으면 들머리인 영실휴게소가나온다. 적설기에는 영실 입구에서 승용차 통행이 불가한 경우, 스노체인을 감은 차만 통과시키는 경우, 스노체인을 감은 4륜구동 지프차만 통과시키는 경우가 있다. 길의 위험도에 따라 다르다.
- ▲ 영실휴게소
11월부터 2월까지 동절기에는 영실탐방안내소에서 12시 이후로는 입장을 통제하며 윗세오름통제소에서는 오후 1시 이후에 남벽분기점으로 가는 코스를 통제한다. 영실휴게소에서 윗세오름대피소까지는 4km에 1시간 30분이 걸린다. 그러나 겨울에는 적설량에 따라 2~3시간 정도 걸린다. 계곡에서 능선으로 올라서면서 가파른 오르막이 나오는데 이곳 길의 상태에 따라 소요시간이 결정된다.
윗세오름대피소에서 어리목으로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완만하고 사람들이 많이 이용해 금세 길이 다져지는 대중적인 코스다. 하산길로 내려가는 데 4.7km에 1시간 20분 정도 걸린다. 겨울에는 샘을 기대하기 어려우므로 물은 미리 준비해야 한다. 윗세오름대피소는 대피만 가능하고, 숙박은 불가능하다. 컵라면(1,500원), 커피(500원), 생수(700원), 초코바(1,000원), 건전지(1,500원), 아이젠(5,000원) 등을 판다. GPS로 확인한 산행의 실주행거리는 8.8km, 5시간 정도 걸린다.
교통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영실을 지나는 1100도로 버스가 있다. 11월부터 3월 말까지는 1일 7회(08:00, 09:00, 10:00, 11:00, 12:20, 13:40, 15:00) 운행하며 50분 걸린다. 요금 2,000원. 어리목으로 하산 후에는 중문에서 제주시로 되돌아가는 1100도로 버스를 타면 된다. 09:55, 10:55, 11:55, 12:55, 14:15, 15:35, 16:55에 버스가 있으며 제주버스터미널까지 20분 걸린다. 요금 1,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