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학과 망명, 고단하고 위험한 세월
♣ 하와이에서 시작한 최초의 남녀공학
이승만의 아버지는 방랑객이었다.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아 전국을 누비다가, 몇 달 만에 나귀의 목에 달아놓은 바울 소리와 함께 돌아오곤 했다. 부친의 피를 이어받은 이승만 역시 한자리에 가만있지 못하는 기질이었다. 그 당시의 한국인으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세계 곳곳을 누볐다.
물론 독립운동 하느라 어쩔 수 없이 오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승만 본인도 돌아다니기를 워낙 좋아했다. 그것은 리더로서는 중요한 장점이었다. 그만큼 견문이 넓어지고 현장을 확인하여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해야 할지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핍박」 집필을 마친 이승만은 특유의 활동력을 발동하여, 하와이 여러 섬을 구석구석 순방했다. 무려 45일이 걸렸으니 그야말로 샅샅이 뒤진 것이다. 본인의 활동 무대가 될 하와이를 자세히 살피는 동시에 4천 여 교민들의 생활상도 직접 목격했다.
그것은 여행인 동시에 업무 파악이었다. 이승만은 하와이 순방 도중, 숱한 소녀들을 만났다. 학교도 못 다니고 어려서 중국인이나 본토인에게 팔려가 한국말도 모르는 아이들이었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강요당하는 딱한 처지에 있는 소녀들도 많았다. 이승만은 여행을 마치고 호놀룰루로 돌아오면서 사정이 어려운 6명을 데리고 왔다. 그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하와이에서의 교육 운동이 시작되었다.
일찌기 이승만은 감옥에서 교육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한 바 있다. 그때 쓴 글 가운데 앞에서도 소개한 <미국흥학신법>이 있다. 그중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이밖에도 또 한 가지 부연할 것이 있는데, 동방의 아직 개명(開明)되지 못한 여러 나라를 위하여 이제 논급하려고 한다. 생각건대 배움이란 사람이 반드시 다해야 할 직분이며 거기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사람이 배우지 아니하면 반드시 총명하지 못하고, 총명하지 못하면 성현의 글을 읽고 올바른 도리를 깨우치지 못한다. 그러면 아마도 그 폐단은 우둔해지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차 거리낌 없이 나쁜 짓을 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또 한번, 시대를 앞서가는 이승만의 혁명적 통찰이 빛난다. 사람 취급 못받던 여성도 교육시켜야 한다는 선구적인 생각이다. 이 생각을 실천에 옮긴 곳이 바로 하와이였다. 이승만은 한인 중앙학원에서 당시로서는 거의 혁명적인 교육 방법을 도입하였다. 그것은 남녀공학 제도의 실시였다.
이승만이 한인 중앙학원 원장에 취임하자마자 19명의 여학생이 모여들어 공부하겠다고 청해왔던 것이 계기였다. 이승만은 그들을 위하여 기숙사를 마련하고 입학시켰다. 이로써 남학생과 여학생이 함께 공부하게 되었다.
남녀공학은 '남녀 7세 부동석'(不同席)이라는 유교적 개념에 깊이 물든 한국인들에게는 너무나 급진적인 조치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한국인들 뿐 아니라 일부 미국인들까지도 상당히 반대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녀공학 정책을 포기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승만의 선구적인 조치를 환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남녀공학 제도는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 교포 사회에서도 대환영이었다.
이것은 한국 교육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역사적으로 이승만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남녀공학 제도를 도입한 인물로 당연히 기록되어야 한다. 그의 평생을 따라다니는 '최초'는 하와이에서도 붙여졌다.
한인 중앙학원에서는 영어, 성경, 우리말, 한문, 한국 역사를 가르쳤고, 민족혼과 독립 정신 고취에 주력했다. 한인 중앙학원 기숙사 학생이었던 박 에스더의 회고담이다. "나는 기숙사에 들어가서 비로서 애국심에 눈을 떴습니다. 우리는 아침마다 태극기를 계양하고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 모두가 울었어요.
나는 그때 나이가 어려서 이승만 박사가 어떤 분인지 자세히는 몰랐어요. 그저 어른들이 애국자라고 해서 존경했을 뿐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말을 잘 듣지 않거나 화가 나면 양 볼을 부풀려가지고 훅훅하고 불어대곤 했습니다. 어른들은 그분이 옥중에서 고문을 하도 많이 받아서 생긴 버릇이라고 하더군요."
♣ 태평양 비전, 그리고 교민들과의 사연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위해선 반드시 수반되는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해의 기틀을 마련하는 교육, 의무감을 고양시키는 윤리적 종교, 그리고 목표 달성을 위한 행동이었다. 이들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민주주의는 글자그대로 국민이 주인된 세상이다. 주인된 국민이 교육도 받지 못하고 종교심도 없으며 공익을 위해서 행동하지도 않으면,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 없다. 교육으로 일깨워지고 종교로 교화(敎化)된 국민들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행동할 때, 민주(民主)의 세상이 열린다. 이승만의 견해는 오늘날, 포퓰리즘이 판을 치는 민주 만능의 시대에, 귀담아 들어야할 탁견이다.
그의 민주주의론은 하와이에서의 교육 활동의 과정에서 체득된 것인듯하다. 교육, 종교, 행동은 그의 교육 지침 속에 스며들어 있다. 한인 중앙학원의 뒤를 이어서 이승만이 세운 한인 기독학원은 네 가지 교육 지침을 표방했다. 1) 교육과 기독교 지향의 학생활동 2) 한국인의 주체성 확보 3) 젊은이들의 지도력 향상 4) 사회 교육의 추진
학교 교사진은 대부분 미국인들이었다. 강의는 주로 영어로 진행되었다. 교과목은 하와이 공립 초등학교 과정을 이수하는 것이었다. 기독교 정신에 투철한 인재를 길러내고자 했고 성경 공부를 강조했다. 채플 시간에 주로 설교한 이승만은 한국인은 한국인과 결혼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 학교의 장점은 비용이었다. 학생들이 기숙하며 공부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최저로 줄였다. 가난한 집 아이들도 큰 걱정 없이 다니게 했다. 수업료는 무료였고 기숙사비는 실비 정도만 받았다. 하지만 가난해서 기숙사비도 내기 어려운 형편이면 그것도 면제해주었다.
훗날 국가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초등학교 의무 교육을 실시한 교육 대통령 이승만의 업적은 하와이에서부터 차근차근 쌓여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인 기독학원을 통하여 양유찬(의사 및 주미 대사), 박관두(건축 설계사), 김찰제(화학 기술사) 등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한국고 하와이 교민 사회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승만의 나라 세우기는 언제나 사람 기르기로부터 시작했다.
최영호는 1985년 9월에 만난 무명의 할머니와의 대화를 소개한다. 그녀는 한인 기독학원에서 기숙하면서 초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5학년 정도였을 때, 수업을 마치면 오후에는 백인 가정에 가서 일을 했다.
어느 날 저녁 일을 마치고 학원으로 돌아오기 위해 버스 정류소로 가는 중, 갑자기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가까스로 정류장까지 갔지만 날씨가 사납고 버스도 오지 않아 어둠 속에서 겁을 먹었다고 한다. 이렇게 공포에 질려 몇 시간 동안 폭풍우와 암흑 속에 갇혀 있었는데, 난데없이 이승만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때 어린 나이의 여학생으로서 정말 천사의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반가웠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학원에서 저녁 식사를 할 때 그 학생이 보이지 않자, 이승만은 사방에 연락하여 소재를 파악하려고 했다. 그래도 알 수 없자 폭우 속을 걸어서 8킬로 정도 되는 버스길을 따라 찾아왔다는 것이다. 이 할머니는 나중에 이승만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 되었지만, 이승만은 아주 따뜻하고 세심하게 학생들을 돌보아주는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1898년 일 년 동안 세 개의 신문을 창간하는 신기록을 수립한 언론인 이승만은 하와이에서도 언론 활동에 주력했다. 1913년 9월 20일 <태평양잡지>를 창간했다. 이 잡지는 17년간 계속되었고 1930년 <태평양주보>로 바뀌었다. 주필로 활약한 이승만은 교포들의 가슴 속에 기독교 신앙과 애국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일에 주력했다.
잡지 이름으로 '태평양'을 고집한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하와이가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섬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승만은 태평양을 한민족이 살아가야할 삶의 공간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더 이상 대륙의 끝자락이 아니라 해양을 향한 교두보로서 지정학적 파워를 갖는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희망을 표출한 것이었다. 오늘날 5대양 6대주로 뻗어가는 대한민국은 이승만이 품었던 꿈의 실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