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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2021년 봄호
【김현경의 회고담 11】
김수영 시 읽기 (1)
일시 : 2021년 2월 10일, 23일, 3월 2일
장소 : 경기도 용인 자택
맹문재 : 미국에 다녀오신 지 2주간 격리가 어제 끝났네요. 이 코로나19의 상황에서 무탈하게 돌아오셔서 참으로 다행이에요. 올해는 김수영 시인 탄생 100년이 되어요. 여러 가지 일들을 마련하고 또 마무리 지으려고 하는데, 이 대담도 그 한 가지이에요. 그동안 10회의 대담을 가졌는데 이번에는 김수영 시인의 시작품들을 살펴보려고 해요. 시는 산문과 다르게 상징성이 강하고 난해해 전부 이해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지요. 그렇지만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시는 것들이 분명 시 공부에 큰 도움이 될 것이에요. 지금까지의 대담에서 논의한 작품들은 생략하고, 작품의 발표 역순으로 여쭈어볼게요. 선생님께서 좀 더 기억하는 데 유리할 것으로 생각해서입니다.
김수영 시인의 마지막 작품은 잘 알려지다시피 「풀」입니다. 이 작품은 1968년 5월 29일 퇴고한 것으로 원고 끝에 적혀 있고, 『현대문학』 8월호에 발표됩니다. 그런데 6월 16일 김수영 시인께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지요. 따라서 이 작품은 청탁을 받아 쓰신 것인지, 아니면 유고 작품으로 발표되는 것인지 궁금해요. 김현경 여사님께서 『현대문학』에 작품을 보내셨는지요?
김현경 :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요. 김 시인이 『현대문학』에 가져다준 것도 같아요. 김 시인은 시를 쓰면 항상 초고에 날짜를 써요. 다른 원고들은 내가 원고지에 청서했는데, 「풀」은 김 시인도 직접 원고지에 옮겨 적었어요. 물론 내가 쓴 것도 있지요. 그 무렵에는 김 시인의 시가 묶혀둘 수 없을 정도로 잘 팔렸어요. 김 시인의 여동생인 수명 시누이가 『현대문학』에 근무하고 있을 때예요.
맹문재 : 「풀」을 쓸 때의 상황이나 인상이 기억나시는지요?
김현경 : 일 년 중에 5월 달은 좋잖아요. 곡식들이 한창 자라구요. 마포 구수동의 집 뒤가 다 밭이었어요. 「풀」은 김 시인이 아주 기분이 좋아 쓴 것 같아요. 흥분하지는 않았지만, 만족하는 인상을 보였어요. 처음 「풀」을 읽었을 때 풀이 요동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4․19 이후의 시들이 투쟁적이라면 「풀」은 정서적이잖아요.
맹문재 : 다음으로는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라는 작품이에요. 전체 9연 중에서 제1~3연의 내용은 다음과 같아요.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 테이블도 많으면/걸린다 테이블 밑에 가로질러 놓은/엮음대가 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은/미제 자기(磁器) 스탠드가 울린다//마루에 가도 마찬가지다 피아노 옆에 놓은/찬장이 울린다 우리문이 울리고 그 속에/넣어둔 노리다케 반상 세트와 글라스가/울린다 이따금씩 강 건너의 대포 소리가//날 때도 울리지만 싱겁게 걸어갈 때/울리고 돌아서 걸어갈 때 울리고/의자와 의자 사이로 비집고 갈 때/울리고 코 풀 수건을 찾으러 갈 때”. 집안에 있는 가구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것으로 보이네요.
김현경 : 내가 부엌 옆에 다이닝룸을 만들고 반지하로 목욕탕도 만들었어요. 서까래 같은 나무들로 마루를 받치게 해놓았으니까 걸어다니면 좀 울려요. 그래서 김 시인은 스탠드가 울리고 찬장이 울리고 유리문이 울린다고 시에 썼어요. 소리에 매우 민감한 분이었기 때문에 그러했나봐요. 평소에는 책상도 넓고 햇볕도 잘 들고 해서 좋아했는데 시에서 이렇게 묘사했네요. 내가 김 시인이 생각하지 못한 면이 있었는가 봐요. 그 다이닝룸의 테이블과 의자, 스텐드, 찬장 등은 도봉구에 있는 김수영문학관에 기증했어요.
맹문재 : 다음 작품이 「원효대사-텔레비전을 보면서」이에요. 이 작품에서는 영화 <25시>를 본 이야기가 나와요. 김수영 시인은 포로수용소를 유유히 걸어 나와 철조망 앞에서 탄원서를 들고 보초가 쏘는 총알에 쓰러지는 소설가를 생각하면서 시인으로서의 사명을 생각하고 있어요. 이 작품에는 “식모”가 나오는데, 다른 작품에 나오는 “순자”인가요?
김현경 : 텔레비전을 안방에 못 놓고 식모 방에 놓았어요. 언덕 위에 텔레비전이 있는 집이 있어 동네 아이들이 몰려가 보았는데, 귀찮게 하는지 쫓겨나곤 했어요. 그래서 우리 집에 텔레비전을 놓으니 둘째 아이인 ‘우(瑀)’가 제일 좋아했어요. 김 시인은 가끔 텔레비전을 봤어요.
“식모”는 “순자”가 아니고 다른 식모였어요. 순자는 어린 나이인데도 살림을 아주 잘했어요. 전라도 아이인데 계모에게 학대를 많이 받아 인두로 지진 자국이 얼굴에 있을 정도로 불쌍했어요. 어느 날 순자의 아버지가 두루마기를 입고 모자를 쓰고 찾아왔어요. 계모가 세상을 떠 혼자 살기가 어렵다고 했어요. 순자가 가지 않으려고 하는 걸 내가 달래서 보냈어요. 순자를 생각해 월급을 통장에 모아두었는데 찾아 주었어요. 순자 다음으로 친구의 집에 있던 아이를 데리고 왔어요. 친구가 미국에 이민 가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어요. 김 시인이 돌아가신 뒤인 1968년 9월 신문로 집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곳에서도 같이 있었어요. 참으로 일을 잘했어요. 그러다가 1971년 용산구 이촌동에 들어선 한강맨션아파트의 분양을 받아 이사를 가면서 그 아이와 헤어졌어요. 신문로의 집에서와 같이 2층에서 옷을 만들었는데, 좁기도 했고 식모가 필요 없게 되었어요. 일하는 아이들을 세 명 두고 있었는데, 옷을 만들면서 식사도 함께 마련했기 때문이에요.
맹문재 : 다음의 작품이「성」이네요. 이 작품은 어디에 발표된 것인지요? 그리고 처음 읽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요?
김현경 : 김 시인이 돌아가시고 난 뒤 발견한 작품이에요. 「성」과 「김일성 만세」「죄와 벌」 등이 ‘보관’이라고 쓴 봉투에 들어 있었어요. 나한테 보여주기가 뭐했던가 봐요. 처음에 「성」을 보았을 때 별난 것을 다 썼다고 생각하면서 부끄러웠어요. 그래서 찢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잘 보관해 시집을 만드는 데 넘겼어요.
맹문재 : 「세계 일주」에는 “그대”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는 21개국의 지도나 손수건 등을 선물로 주기도 해요. 누구인지 아시는지요? 작품에는 “분풀이로 어리석은 나는 술을 마시고/창문을 부수고 여편네를 때리고/지옥의 시까지 썼지만” 같은 표현이 나와요. 실제로 김수영 시인이 술에 취하면 집에 들어와 이와 같은 행동을 했는지요?
김현경 : “그대”는 박태진 시인이에요. 그 분이 해운공사에 재직하면서 영국에 주재했는데, 김 시인에게 편지를 보내오고 시작품도 보내오고 했어요. 김 시인은 그것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았아요.
김 시인이 술 취하면 재떨이나 타구를 창밖으로 내던져요. 돌멩이를 들고 와서 집안의 가구를 부숴버린다고 한 적도 있었어요. 오죽하면 내가 안방의 창문에 유리 대신 합판을 댔을까요? 시인들과 술을 마시다가 자기 보고 빨갱이나 반동분자라고 부르는 등 비위에 안 맞으면 그게 다 내가 받아야 할 몫이었어요. 밖에서 속상한 일을 집에 와서 푸는 것이지요. 집에서는 술을 한 방울도 안 마셨어요. 지금 생각하면 내가 잘도 견디어 내었다고 생각해요. 김 시인이 주정을 할 때마다 내가 진정하세요, 참으세요, 하면서 달랬어요. 돌멩이를 뺐는데도 힘들었어요. 그래도 내가 반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지금 생각해도 잘한 것 같아요. 주사(酒邪)가 없는 열흘이나 보름 동안은 그렇게 순할 수가 없어요. 집안이 그지없이 평온했어요.
맹문재 : 「미농인찰지」의 내용을 보면 “우리 동네엔 미대사관에서 쓰는 타이프 용지가 없다우/편지를 쓰려고 그걸 사오라니까 밀용인찰지를 사 왔드라우”라고 시작해요. 그리고 매부에게 편지를 쓰려다가 미농인찰지여서 그만두어요. 시의 끝 부분은 “당신이 사준 북어와 오징어와 이등차표와/경포대의 선물과 도리스 위스키와 라즈베리 잼에 대해서/미안하지 않소 당신의 모든 행복과 우리들의 바닷가의/행복의 모든 추억에 대해서 미안하지 않소”라고 얘기하고 있어요. 언젠가 소개해주신 강릉의 매부 이야기 같은데, 그 상황에 대한 설명을 좀 부탁드려요.
김현경 : 그때는 시 원고지가 귀했어요. 김 시인은 초고를 쓸 때 줄이 없는 종이에 늘 썼어요. 종이에 아주 예민했어요. 물론 청서를 할 때는 원고지에 썼지요. 어느 날 내가 “미농인찰지”를 사왔어요. 문구는 늘 충무로 입구에 있는 마루젠(丸善)에 가서 사 왔어요. 김 시인이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 미군 책임자로부터 파카 만년필을 선물 받았는데, 잃어버려 내가 똑같은 것을 사다 드리기도 했어요. 충무로에 있는 마루젠 옆에 일본 서적을 파는 서점이 있었어요. 그래서 김 시인이 나와 함께 그곳에 가 하이데거 전집을 구입했어요. 어느 날 내가 그것을 발견해 그런 책이 있다고 하니 좋아하며 같이 가서 산 것이에요. 김 시인은 하이데거 전집을 아주 정중하게 열심히 읽었어요. 자기가 얘기하고 싶은 것이 그대로 있다고 하면서 신기해했어요. 그렇게 좋아하며 공부했어요.
작품에 나오는 매부는 강릉에서 의사 생활을 한 채헌덕 씨에요. 김 시인의 둘째 여동생인 김수련의 남편이지요. 1969년 칼(KAL)기 납북 사건이 일어나 매부는 북한에 납치되었어요. 참으로 안타까워요. 그 매부의 강릉 병원이 아주 잘 되어 밥 먹을 새도 없었어요. 내가 여름에 인조 속의를 만들어 보내기도 했어요. 우리는 매부에게 초대받아 최고급으로 대접을 받고 올라왔어요. “이등차표”를 끊어줘 타고 왔어요. 그때는 일등 차표가 없어 최고 좋은 좌석이었고, 지정석이었어요. 김 시인은 강릉의 매부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돈이 있으면 얼마나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가를 조금은 느낀 것 같아요. (웃음)
실제로 김 시인은 매부에 대한 답례로 편지를 썼어요. 『김수영 산문 전집』에 들어 있는 조카에게 보낸 편지가 그것이에요. 연필 깎는 기계를 사서 선물로 보내기도 했어요. 조카가 훈이, 영이, 승이 셋인데 영이는 딸이에요. 조카에게 보낸 그 편지는 내가 김 시인의 시 전집을 간행하려고 수련 시누이에게 부탁해 받아 신구문화사에 넘긴 것이에요.
맹문재 : 「여름밤」의 배경은 마포구 구수동 집으로 보여요. 여름밤의 상황을 좀 들려주세요.
김현경 : 여름밤에 과일 깎아 먹고 얘기하고 그랬지요. 이 시를 썼을 때는 생활의 여유가 좀 생겼어요. 김 시인의 원고료도 들어오고 그랬어요. 주사가 없는 날은 우리 부부가 정말 다정했어요. 집 뒤의 밭에 무도 심고, 배추도 심고, 호박도 심고, 박도 심고 했어요. 박으로 만든 바가지를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어느 날 내가 전원생활이 그리워 안양쯤 가서 살면 어떻겠냐고 물어보았어요. 나는 그러자고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김 시인은 반대했어요. 세계가 돌아가는 것을 알아야 하므로 통신이 필요하다고, 시골에 가면 그렇게 못 한다고 말했어요.
맹문재 : 「사랑의 변주곡」에 나오는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 같은”은 구절은 김수영 시인의 어머니가 계신 창동 집의 상황 같아요.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라고 하고 있는데, 잘못된 시간이란 어떤 것인가요?
김현경 : 창동에 계시던 시어머니를 말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심부름하는 아이는 ‘만용’이에요. 우리가 양계를 접으면서 양계를 하는 창동 시댁에 만용이를 보냈어요. 김 시인이 창동 집을 좋아했어요. 수명 시누이가 살던 초당이 있었는데, 비가 오면 벗어 놓은 신발이 다 젖기는 했지만 아담한 것이 좋았어요. 나중에 헐었어요. 김 시인은 자신이 살아가던 때가 군정 시절이었기 때문에 잘못된 시대라고 인식하고 있었어요. 그만큼 정치의식이 분명했어요. 그래서 언제든지 불편함을 가졌어요. 김 시인은 공적인 자리에 취직이 어려웠어요. 나도 그랬어요. 그래서 우리는 닭을 키우고 양장점을 한 것이에요.
맹문재 : 두 분이 공적인 자리에 취직이 어려웠다는 사실이 새삼 다가오네요. 다음의 작품은 「판문점의 감상」인데, 다음과 같은 상황이 나와요. 설명을 좀 부탁드려요.
31일까지 준다고 한 3만 원
29일까지는 된다고 하고 그러나 넉넉잡고 내일까지 기다리라고 한 3만 원
이것을 받아야 할 사람은 1․4후퇴 때 나온
친구의 부인
이것을 떼먹은 년은 여편네가 든 계(契)의 오야가 주재하는
우리 여편네는 들지 않은 백만 원짜리 계의 멤버로 인형을 만들어 파는 년이라나
이 3만 원을 달러 이자라도 내서 갚아 달라 달라고 대드는 바람에
집문서를 갖고 가서 무이자로 15개월만
돌려 달라고 우리가 강청한 사람은 이 돈을 받을 사람과 한 고향인 함경도 친구
―「판문점의 감상」 부분
김현경 : 계주는 나하고 진명고녀 동창인 송학숙이에요. 인천에서 기차 통학을 했어요. 박인환 시인의 부인인 이정숙과 같은 반이었어요. 그때 우리 학년은 송죽(松竹) 두 반이었어요. 한 반에 50명씩이었는데, 졸업할 때는 40명 정도 되었어요. 송학숙 친구의 남편이 진명고녀의 교무과장이었어요. 그래서 믿고 계를 들었어요. 김이석 소설가의 부인인 박순녀가 나에게 계를 들어 달라고 해서 같이 했어요. 김이석 소설가가 1964년 세상을 뜨는 바람에 살아가는 일이 힘들어 그랬던 것이지요. 그런데 어느 날 계주가 돈을 갖고 도망을 친 것이에요. 그 친구가 허영심이 많아 남편의 월급 이상으로 낭비해 집에서 쫓겨나게 생겼으니 그랬던가 봐요. 그녀가 살고 있는 효자동 집에 두세 번 찾아갔었어요. 일본 적산 가옥이었어요. 김 시인이 모른 체할 줄 알았는데 함께 갔어요. 가 보니 아이들은 있는데 부부는 볼 수 없었어요. 끝내 계주를 만나지 못해 박순녀 소설가의 돈을 내가 다 갚아주었어요. 김 시인이 돌아가신 뒤까지 갚았어요.
맹문재 : 「네 얼굴은」은 앞의 작품인 「판문점의 감상」과 관계가 깊다고 느껴져요. 전체 6연 중 제1~2연에서 “네 얼굴은 진리에 도달했다/어저께 진리에 도달했다/어저께 환희를 잃었기 때문이다//아아 보기 싫은 머리에 두툼한 어깨는/허위의 상징/꺼져라 20년 전의 악마야”라고 썼어요. “네 얼굴은” 누구일까요?
김현경 : 내 얼굴로 읽혀요. “집에는 차압(差押)을 해온 파일 오버가 있는데도/배자 위에 얄따란 검정 오바를 입고/사흘 전에 술에 취한 흘린 가래침 자국―/아니 빚쟁이와 싸우다 나오는 길에 흘린/침 자국” 같은 표현이 바로 「판문점의 감상」에 나오는 상황이에요. 돈을 못 받자 계주의 파일 오버를 차압해서 집으로 가지고 오기도 했거든요. 이 작품에서 나를 아주 부정적으로 그렸는데, 역설이에요. 김 시인은 이런 식으로 나에 대한 사랑을 얘기했어요.
맹문재 :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시가 잘 이해되네요. 다음의 작품이 「설사의 알리바이」인데, 김수영 시인이 설사를 하는 등 몸 상태가 안 좋았는지요? 「시」「아픈 몸이」「먼 곳에서부터」 등에서 보면 김수영 시인은 감기를 앓는 등 몸이 자주 아팠던 것 같네요.
김현경 : 김 시인은 기관지가 좋지 않았어요. 김 시인의 아버지도 천식으로 돌아가셨잖아요. 김 시인은 위장도 좋지 않았고, 결핵성 치질도 앓고 있었어요. 그래서 집에는 항상 약을 준비해야 되었어요. 어떤 날은 눈이 발목까지 드는데도 나가서 약을 사왔어요. 약국은 시청 앞에 일본 약을 수입해서 파는 곳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곳에서 샀는데, 약값도 상당했어요. 기관지가 약한데다가 술을 폭음해서 배가 아프거나 하면 치질도 재발해 일주일이고 보름이고 약을 먹어야 했어요. 그러니 거의 매일 약을 먹는 셈이었지요. 그때는 집안의 구조가 허술했기 때문에 감기가 잘 걸릴 수밖에 없었어요. 김 시인은 추위를 많이 탔어요. 그래서 겨울에는 내가 방장(房帳)을 쳤어요.
맹문재 : 「이혼 취소」에 대해서는 하실 말씀이 많을 것 같아요. 우선 그 정황부터 듣고 싶네요. 계주가 도망치는 바람에 소개해준 “내 친구의 미망인”에게 빚보증을 선 것을 갚아주는 일이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기도 하네요.
김현경 : 그 무렵 나도 좀 지쳤어요. 내가 김 시인을 위해 봄 여름에 집을 계속 고쳐 나가고 돈을 벌어 좋은 물건을 사서 집에 들였는데, 그것을 좋아하면서도 작품을 쓸 때는 안 좋게 여기고 또 술을 먹고 들어와서는 돌멩이로 부순다고 하니 싫어졌어요. 김 시인이 원고료도 들어오고 하니 좀 자신감도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내 식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이고 뭐고 다 주겠다, 아이들은 당신이 키우기가 어려우니 내가 키우겠다, 그리고 박순녀 소설가의 곗돈은 내가 다 갚아주겠다 등을 말하고 집을 나왔어요. 일하는 양장점에서 자고 집에 안 들어갔어요. 그랬더니 한 일주일 즈음 되어 김 시인이 양장점으로 찾아와 집에 들어가서 얘기 좀 하자고 하더라구요. 가게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었어요. 그래서 가게를 대충 정리하고 집에 들어가니 서재에서 심각하게 얘기하더라구요. 더 이상 안 되겠다고. 김 시인 나름대로 생각도 했고 미안함도 들었겠지요. 나도 나이가 사십이 넘었고, 김 시인만 한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저녁을 함께 먹는 것으로 집에 들어왔어요.
맹문재 : 「이 한국문학사」에서는 배척보다는 포용하는 자세로 한국문학사를 고민하고 있어요. 덤핑 출판사에서 번역하는 일을 소개하고도 있어요. 실제로 김수영 시인은 번역 작업을 많이 했는데, 이 상황에 대한 말씀을 듣고 싶네요.
김현경 : 소공동 상업은행 뒤에 가면 외국 잡지를 파는 노점상이 있었어요. 거기에 나와 같이 가서 『애틀랜틱』이나 『보그』 같은 잡지를 샀어요. 우리의 데이트 코스였지요. 내가 일본 잡지를 보고 대중 소설을 한 편 쓰기도 했어요. 김 시인은 그곳에 산 잡지에 실린 글 중에서 필요한 것을 번역해서 잡지사에 팔았어요. 그러다가 중앙문화사의 번역 일을 하면서 『사상계』나 『현대문학』 등으로부터 청탁을 받기 시작했어요. 그때 중앙문화사에서 공보처의 번역 일을 맡아 출판했어요. 김 시인의 번역은 알아주었어요. 교정볼 것도 없다고 했어요. 번역하다가 조금만 이상한 것이 있으면 도서관에 가서 찾아 해결했어요. 옥스퍼드 사전 등 여러 사전이 집에 있었지만, 사전으로 해결이 안 되는 것이 있으면 도서관에 갔어요. 도서관을 많이 다녀 중앙도서관의 사서하고 친했어요. 현대문학사의 조연현 주간이 김 시인한테 헌신적으로 잘해주었어요. 전화와 텔레비전을 놔주고, 김 시인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뒤 버스 회사와 사고를 처리하는 과정에도 많은 수고를 해주셨어요. 그때 수명 시누이가 현대문학사에 근무하고 있기도 했지요. 물론 수명 시누이가 현대문학사에 입사할 때는 김 시인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몰랐지요.
맹문재 :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 따르면 당시에 갈비 한 그릇이 “50원”이었던가 보네요. 이 작품에 나오는 “붙잡혀 간 소설가”는 누구이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찾아오는 야경꾼들”의 상황에 대해 좀 들려주세요.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한 이야기도 나오네요.
김현경 : 그때 갈비탕 한 그릇의 가격은 그 정도 했겠지요. 가끔 외식으로 불고기를 먹으러 <진고개>까지 갔어요. 내가 충무로에 있는 ‘푸른사상사’에 놀러 갔을 때 맹 시인과 함께 그 집에 간 적이 있지요. 1963년쯤 개업했는데 사람들에게 아주 인기가 있었어요. 특히 불고기가 유명했어요. 김 시인은 외식할 때는 개고기를 좋아했어요.
붙잡혀 간 소설가는 남정현 씨에요. 미국을 풍자한 「분지」를 『현대문학』에 발표해 아주 논란이 컸어요. 옛날에는 도둑 따위를 막기 위해 밤에 순찰을 도는 야경꾼이 있었어요. 딱따기를 두드리며 동네를 돌았지요. 그 비용을 동네 사람들이 내었는데, 한 달에 20원 정도 했는가 봐요. 김 시인의 포로수용소 생활에 대해서는 여러 번 얘기했지요.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 김 시인에게 헌병을 하라고 했는데 하지 않았대요. 헌병을 하면 뒷돈이 많이 생겨 금방 부자가 되는데도 김 시인은 거절했대요. 포로수용소 야전병원 소장이 김 시인에게 물품 창고 열쇠를 맡겼대요. 영어도 잘하고 정직해 그만큼 신임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김 시인에게 『뉴스위크』나 『라이프』 같은 잡지를 보라고 건네주고, 나중에는 틀니까지 만들어주었지요.
맹문재 : 「적 1」과 「적 2」라는 작품이 있어요. “적”은 누구를 나타내는 것일까요?
김현경 : “적”은 바로 나예요. 나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 것이에요. 적이라는 것은 자신의 의지, 이해관계, 이념과 반대되는 것이잖아요. 나를 거기에다 갖다 붙인 것이에요. 자기 학대와 반성을 나를 통해 한 것이지요. 김 시인이 세대주 역할을 못하면서 내가 하니 고맙게 여기면서도 때로는 세속적인 것을 마땅하지 않게 여겼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에 나타나는 ‘적’이 김현경 선생님을 가리킨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발견이네요. 다음 작품은 「미역국」이에요. 관련된 이야기를 좀 들려주세요.
김현경 : 이 시는 양계를 그만둔 뒤 쓴 것이에요. 이 무렵에는 번역 일 등으로 생활의 여유와 질서가 있었어요. 내가 미역국을 자주 끓여드렸어요. 잘 드셨어요. 밥상을 아무렇게나 차리면 안 되었고 어느 정도 반찬이 있어야 했어요.
맹문재 : 「제임스 띵」의 상황을 들려주실 수 있는지요? 여기에서 ‘제임스 띵’은 미국의 영화배우 제임스 딘(James Byron Dean)을 나타내는 것이겠지요.
김현경 : 이 작품은 신문 배달하는 아이들이 사무를 인계하는 이야기인데, 그럴 때 신문값도 매듭을 지어야겠지요. 김 시인은 내가 집에 들어와야 신문값을 내었는지 안 내었는지 알 텐데, 그들이 신문값을 계산해 달라고 하니 짜증스러웠겠지요. 내가 밖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상황을 직접 보지는 못했어요. 집안의 살림을 내가 했으니 김 시인은 가정 경제에 대해서는 몰랐어요. 그때 우리 집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구독했어요.
김 시인은 제임스 딘을 아주 좋아했어요. 그가 출연한 <에덴의 동쪽>, <이유 없는 반항>, 그리고 <자이언트> 등이 아주 인기였어요. 김 시인은 제임스 딘의 연기, 눈짓, 몸짓 등을 보면서 타고나 배우라고 했어요. 우리는 좋은 영화가 상영되면 을지로 2가에 있는 ‘중앙극장’이나 충무로에 있는 ‘수도극장’에 가서 보았어요.
맹문재 : 「65년의 새해」 작품은 어떤 계기로 쓴 것인지요? 내용은 조국 광복을 쓴 것으로 보이네요.
김현경 : 1965년 『조선일보』에서 연두시, 즉 신년시로 청탁을 해 발표한 작품이에요. 내가 원고를 청서했는데, 김 시인이 거대한 신문사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어요.
맹문재 : 「이사」의 상황이 궁금하네요. 작품은 다음과 같아요.
이제 나의 방은 막다른 방
이제 나의 방의 옆방은 자연이다
푸석한 암석이 쌓인 산기슭이
그치는 곳이라고 해도 좋다
거기에는 반드시 구름이 있고
갯벌에 고인 게으른 물이
벌레가 뜰 때마다 눈을 껌벅거리고
그것이 보기 싫어지기 전에
그것을 차단할
가까운 거리의 부엌문이 있고
아내는 집들이를 한다고
저녁 대신 뻘건 팥죽을 쓸 것이다
―「이사」 전문
김현경 : 마포구 구수동 집에 양계를 접고 방을 연립주택처럼 네 칸 만들었어요. 세 칸은 세를 주고, 제일 끝에 김 시인의 서재를 만들었어요. 큰 유리문을 달아 방이 밝고 시원했지요. 김 시인의 방은 산언덕이 가깝기 때문에 자연에 가까운 것이지요. 서재를 만드는 날 실제로 팥죽을 쑤어 세를 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어요. 그런데 1년도 못 되어 땅 주인이 무허가 집이라고 난리를 쳐서 헐었어요.
맹문재 :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작품의 풍경이 눈에 선하네요. 「X에서 Y로」 역시 말씀을 들으면 이해가 잘 될 것 같네요. 이 작품에서 김수영 시인은 마포구 구수동을 ‘시골’이라고 여기고 있어요.
김현경 : 1960년대 초반 그곳은 시골이에요. 우리 집이 있고 그 아래 캐비넷을 만드는 공장이 있었어요. 주인이 자주 바뀌어 다른 공장을 하기도 했어요. 우리 집 아래 한강 쪽으로 초가집이 있었는데, 경북 성주가 고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어요. 남편이 아이 하나 데리고 집안에서 살림을 하고, 아내가 참기름을 이고 나가 팔아서 생활했어요. 그런데 그 남편이 아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으로 보였어요. 집안 살림도 아주 잘했고, 쪼그마한 밭도 잘 가꾸었어요. 그 집 사람들이 가끔 생각나요. 그리고 그 아래 작고 예쁜 양옥이 한 채 있었어요. 타일로 만든 깨끗한 집이었는데, 내가 샀어요. 김 시인이 돌아가시기 1년 전에 사서 세를 주었어요. 그런데 신문로에 전세로 이사 와서 그 집과 양계장하며 살던 집을 팔았어요. 시댁의 사업이 잘 안 되어 그랬어요.
양옥집 뒤에 조애실이란 시인이 살고 있었어요. 조 시인의 시작품 「곰」이 성북동에 있는 ‘국제 스카이웨이호텔 곰의집 마당’에 조각되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재미있는 시작품이에요. 이름을 ‘鳥哀失’이라고 임의로 써서 김 시인한테 연하장을 보낸 적도 있어요. 조애실은 월남한 시인이었는데, 결혼하지 않고 있었어요. 윤곤강 시인과 모윤숙 시인과 친한 사이였어요. 조애실 시인은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와 모윤숙 시인에 관한 얘기도 들려주었어요. 모윤숙의 『렌의 애가』와 얽힌 사연도 재미있었어요. 모윤숙은 유엔 총회 한국 대표였는데, 지부 사무실이 덕수궁 안에 있었어요. 유엔 인도 대표였던 메논과도 관계가 깊었어요.
맹문재 : 메논(Vengalil Krishnan Krishna Menon)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다음과 같네요.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 결렬되자 유엔에서는 남북한 자유로운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했는데, 그때 위원단의 의장이 인도의 대표 메논이었네요. 위원단의 활동이 이북에서는 소련의 반대로 불가능해지자 남한에서만 총선서를 치렀는데, 메논의 역할이 컸어요. 해방 정국의 상황이 좀 더 이해되네요. 지금까지 알고 있던 마포구 구수동의 상황도 구체적으로 들어오네요.
「강가에서」 작품에는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저이는 나보다 가난하게 보이는데/저이는 우리 집을 찾아와서 산보를 청한다”라고 시작하고 있어요. 이 작품에 나오는 “저이”는 누구인지요?
김현경 : 김00라는 시인인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네요. 꽃가게를 하던 사람이었어요. 우리 집에 한 번 온 적이 있는데, 김 시인이 동네 막걸리집으로 데리고 갔어요. 김 시인이 돌아가신 뒤 문상을 오기도 했어요. 나한테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한테 가서 체비지(替費地)를 좀 부탁해 얻어 꽃가게를 함께하자고 했어요. 그러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했어요. 그렇지만 내가 거절했어요. 김현옥 서울시장이 김 시인의 무덤을 하얀 국화꽃으로 채울 만큼 관심을 보여주었어요. 우리 집에 쌀 한 가마니를 보내주었고, 무슨 일이 있으면 도와주겠다는 연락을 인편으로 보내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내가 찾아가질 않았어요. 그때는 신문로에서 하는 바느질이 잘 되기도 했어요.
맹문재 : 「거위 소리」는 어떤 상황에서 쓴 것일까요? 작품에 나오는 일본식 한자어인 “호마색(縞瑪色)”을 한국식 한자어인 “호마노색”으로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여러 가지 빛깔이 겹겹이 줄이 져 있는 석영과 단백석, 옥수의 혼합물”이라고 정의되어 있네요.
거위의 울음소리는
밤에도 여자의 호마노색 원피스를 바람에 나부끼게 하고
강물이 흐르게 하고
꽃이 피게 하고
웃는 얼굴을 더 웃게 하고
죽은 사람을 되살아나게 한다
―「거위 소리」 전문
김현경 : 내가 친구에게 후레아 스커트를 만들어준 적이 있어요. 옷 색깔이 호박색이었어요. 김 시인이 그 친구가 입은 스커트 모습을 보고 아주 예쁘다고 그랬어요. 후레아 스커트는 넓고 주름이 저절로 떨어지는 옷이에요. 김 시인이 그것을 보고 쓴 작품 같아요.
맹문재 : 「거대한 뿌리」에서 “김병욱” 시인에 대해서는 이전의 대담에서 자세하게 들려주셨어요. 저는 2013년 「김병욱의 시에 나타난 세계 인식 고찰」이란 논문을 학회지(『한국문학이론과 비평』)에 발표한 적도 있어요. 이 작품에는 “이사벨 버드 비숍 여사”가 나오는데, 아마도 김수영 시인이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을 읽었다고 보여요. 그런데 이 책은 1994년 이인화 소설가가 번역해서 ‘살림’ 출판사에서 처음 간행되어요. 그러므로 다른 책을 읽은 것 같은데요.
김현경 : 김 시인이 영어로 된 책을 보았던 것 같아요. 일본어로 된 것도 보았는지, 좀 헷갈리네요. 김 시인이 아주 재미있게 읽고 나서 나에게 보라고 건네주었어요. 김 시인은 좋은 책은 꼭 나에게 읽어보라고 권했어요. 김 시인은 이 작품에서 나타냈듯이 우리의 전통을 아끼려고 했어요.
이 작품에 나오는 인경 소리는 일종의 통행금지 신호 소리에요. 대궐에 있는 수위병들이 인경을 치면 대문이 닫혔어요. 사직동에서 가까운 대문이 자하문이지요. 자하문 밖으로 내려가 우측에 강 씨 집안이 있었어요. 현진건 소설가의 집도 있었는데, 양계장을 했어요. 우리 친할머니가 강 씨에요. 친할머니의 친척 중에 강 상궁이라고 서답방(궁중의 ‘빨래터’)에 있다가 궁이 망하니 우리 집에 와 빨래 등 집안일을 했어요. 바느질 솜씨가 대단했어요. 우리 할머니는 키가 아주 컸어요. 선비인 할아버지는 서울 남자로 키가 작고 이쁘게 생겼어요. 그런데 낮잠을 자도 한 이불에서 잘 정도로 금실이 좋았어요. 강 씨 할머니는 두 딸을 두었는데, 큰고모가 최남선 씨의 형인 최홍선 씨 집으로 시집을 갔어요. 최홍선 씨는 을지로 4가에서 <홍제약국>을 운영했어요. 큰고모는 키가 아주 컸어요. 민 씨네 집으로 간 작은고모는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아주 미인이었어요. 얼마나 얘기를 재미있게 하시는지 우리가 넋을 잃고 들었어요. 민 씨네 집은 전매국을 했어요. 내가 거기에서 나온 칼표 담뱃갑을 우리 집의 광에서 본 적이 있어요. 빨간색이었는데 아주 예뻤어요.
맹문재 : 「죄와 벌」에 대해서는 이전에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어요. 그 상황을 좀 더 들을 수 있을까요
김현경 : 안소니 퀸이 출연한 영화 「길」을 둘째 아이와 함께 보고 나오다가 그 일이 있었어요. 이탈리아의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가 만든 영화에요. 차력사의 조수 노릇을 하면서 그를 사랑하는 한 여성을 그렸어요. 순정의 사랑이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그녀가 불던 나팔 소리가 떠올라요. 김 시인이 그 영화를 보고 나와 길거리에서 나를 우산대로 때린 이유를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여러 가지 일들이 작용했겠지요.
맹문재 : 「반달」에는 “차밭” 얘기며 “개똥” 얘기며 “얼굴의 사마귀” 얘기가 나와요. 작품에 나온 내용들이 사실인지요?
김현경 : 그럼요. 마포구 구수동 집 앞에는 결명차를 키우는 밭이 있었어요. 무나 배추를 심은 채소밭도 있었구요. 그리고 ‘복실이’라는 개를 집에서 키웠어요. 유정 시인이 갖다 주었어요. 우리가 양계 일을 접은 뒤 만용이와 그 개를 양계를 하는 창동 시댁에 보냈어요. 김 시인의 얼굴에 사마귀가 있었다고 했고, 아들 눈에도 있었어요. 그런데 자라나면서 자연적으로 없어졌어요.
맹문재 : 「돈」이란 작품을 보면 김수영 시인은 수중에 용돈이 없거나 부족했던 것으로 보여요. 실제로 그랬는지요?
김현경 : 김 시인은 원고료를 비롯해 돈이 생기면 모두 나에게 주었어요. 돈에 대한 관심이 없었어요. 외출할 때 필요해서 얘기를 하면 내가 드렸어요. 그런데 돌아가시는 날에는 신구문화사에서 번역료로 10만 원을 받아서 3만 원을 따로 챙겨 안주머니에 넣었어요.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어요.
맹문재 : 「여자」란 작품에는 포로수용소에서 본 여성들이며 “과외공부 집에서 만난 학부형회”의 여성들을 얘기하고 있어요. 포로수용소의 상황은 이전의 대담에서 말씀해주셨으니 생략하고, 과외공부의 상황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요?
김현경 : 종로구 당주동에서 한 큰아이의 과외공부 상황을 그린 것이에요. 학부형회 여성들이 대단했어요.
맹문재 : 「후란넬 저고리」의 상황에 대해 말씀을 들을 수 있는지요?
김현경 : 후란넬(flannel)은 겨울 옷감 종류에요. 그때는 미군 원호 물자였어요. 김 시인에게 사다가 입히면 딱 맞았어요. 김 시인이 체격이 커 43사이즈였어요. 세비로(セビロ) 코트로 아주 멋있었어요. 김 시인은 곤색을 좋아했어요.
맹문재 : 「마케팅」에 나오는 “파리통”이며 “주사기”며 “슈빙지”며 “도배지” 등에 대해 말씀을 듣고 싶네요.
김현경 : “파리통”은 파리잡이 통이에요. 바닥에 음식물을 놓고 그 위에 물을 담은 파리통을 올려놓으면 바닥의 틈을 통해 들어온 파리가 도망가지 못하고 빠져 죽게 되지요. “주사기”는 양계장의 닭들에게 주사를 놓을 때 썼어요. 김 시인이 직접 주사를 놓았어요. “도배지”는 도배할 때 쓰는 종이에요. 집의 도배를 내가 했어요. 작품에서 보면 도배 작업을 하다가 좀 모자라 내가 김 시인에게 사 오라고 부탁을 했는가 봐요. 도배지에는 모란 그림이 있었던가 봐요.
맹문재 : 「백지에서부터」라는 작품을 보면 김수영 시인이 종이의 색깔에 민감했는가 보네요.
김현경 : 김 시인은 단색주의자였어요. 원고를 쓸 때 줄이 쳐진 종이는 절대로 쓰지 않았어요. 그래서 시의 초고를 『엔카운터』지나 『파르티잔 리뷰』가 담겼던 봉투를 뒤집어서 썼던 것이에요. 줄이 쳐진 원고지는 답답하다고 느낀 것 같아요. 작품에 나오는 “하드롱지”(Hard rolled paper)는 봉투 따위에 쓰이는 종이에요.
맹문재 : 「여수」라는 작품을 보면 김수영 시인이 “소록도”를 다녀온 것 같아요.‘여수’의 의미는 객지에서 느끼는 시름이나 걱정인데요.
김현경 : 「소록도 사죄기」란 산문도 있잖아요. 5·16군사쿠데타 이후 김종필 씨가 유화 정책으로 문인들을 소록도며 논산훈련소에 시찰을 보냈어요. 그래서 김 시인도 다녀왔는데, 술을 잔뜩 먹었다고 했어요. 못마땅하게 여긴 면이 있었겠지요. 그래도 그곳에서 나병 환자들을 돌보는 원장을 비롯한 직원들, 의사들, 수녀들, 선교사 등을 높이 칭찬했어요.
맹문재 : 1961년 6월부터 8월까지 김수영 시인은 9편의 ‘신귀거래’ 연작시를 발표해요. 「여편네의 방에 와서― 신귀거래 1」을 보면 “여편네의 방에 와서 기거를 같이 해도/나는 이렇듯 소년처럼 되었다”라고 하는데, 왜 그럴까요?
김현경 : 김 시인이 마흔 살이 되면서부터는 이전과 다르게 상당이 양순해졌어요. 술 드시는 빈도도 줄었고, 주사도 심하지 않았어요. 생활의 질서가 있었어요. 공자가 사십이 되면 불혹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깨달았는지 모르겠어요. 창동 시댁에 다녀오면 특히 그랬어요.
맹문재 : 「격문― 신귀거래 2」를 보면 시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있는 것으로 보여요. 실제로 창동 어머니가 계신 집에 가면 펌프가 있었는지요?
김현경 : 제대로 된 시인이 되었다는 모습이지요. 창동 시댁의 펌프 물이 기가 막혔어요. 약수여서 물맛이 달고 맛있었어요. 마포구 구수동의 집에도 처음에는 펌프 물을 쓰다가 나중에 수도로 바꾸었어요. 창동에서는 젖소를 기르기도 했는데, 우유 맛이 정말 고소했어요.
맹문재 : 「등나무― 신귀거래 3」는 등나무를 제재로 쓴 작품이에요. 등나무를 키웠다고 언젠가 말씀해주셨지요. 이 작품에는 “영희야, 메리의 밥을 아무거나 주지 마라”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상황을 들을 수 있을까요?
김현경 : 내가 어느 해 등나무 두 그루를 사서 한 그루는 마포구 구수동의 우리 집에 심고 다른 한 그루는 창동의 시댁에 심었어요. 그런데 우리 집에 심은 등나무는 꽃이 피지 않는데 비해 창동의 시댁에 심은 등나무는 보라색 꽃이 아주 많이 피었어요. 향기도 대단했어요. 내가 등나무가 잘 올라갈 수 있도록 하얀 틀을 짜서 놓기도 했지요. 김 시인이 마당에 물 뿌리는 일은 잘 했어요. 작품에 나오는 “영희”는 시댁에서 일하는 아이였고, “메리”는 우리 집에서 키우던 ‘복실이’를 보내기 전에 창동의 시댁에서 키우던 개였어요.
맹문재 : 「술과 어린 고양이― 신귀거래 4」의 상황은 어떤 것인가요?
김현경 : 실제로 창동의 시댁에서는 “고양이”를 키웠어요. 일부러 키운 것은 아니고 시어머니가 들고양이를 밥을 주니까 집에 들어온 것이지요. 시어머니는 동물들을 아주 소중하게 여겼어요. 젖소도 키우고 양계도 했잖아요. “술”은 시어머니가 밀주를 담갔는지 모르지요. 김 시인은 집에서 술을 한 모금도 안 마셨는데, 수성 시동생은 식사할 때 반주를 꼭 했어요. 김 시인은 창동 시댁에 가면 수명 시누이가 지내는 초당에 가서 번역 일도 하고 쉬기도 했어요. 시댁은 한참을 나가야 군부대가 보일 정도로 외딴 곳이었어요. 2천 평의 땅에 시댁의 집과 김 시인의 조상 묘를 지키는 묘지기의 집이 있었어요.
맹문재 : 「모르지?― 신귀거래 5」에서 “함경도 친구와 경상도 친구”는 누구인지요? 표준어 문제도 언급되고 있네요.
김현경 : 함경도 친구는 유정 시인이고, 경상도 친구는 박훈산 시인을 말하는 것 같아요. 두 시인은 사투리를 안 쓰려고 했지만 나올 수밖에 없었지요. 김 시인이 외출할 때는 손수건을 깨끗이 빨아 다리미로 다려서 드렸어요. 그때는 휴지가 귀했잖아요.
맹문재 : 「복중(伏中)― 신귀거래 6」에서 “계수가 아이를 배서 조용하”다는 것과 “2년이나 대학에서 떨어진 아우놈”의 상황은 어떤 것인지요?
김현경 : “계수”는 수성 시동생의 부인이에요. 이름이 김순례예요. 김일성종합대학 의과대학에서 공부했대요. 정말로 실력이 대단했어요. 내가 둘째를 낳을 때 그 동서가 받아주었는데, 별로 아프지 않고 잘 낳았어요. 그 동서는 딸 둘을 낳았어요. ‘동대문 부인병원’에서 일하다가 나중에 송자 시누이의 남편인 홍영식 씨가 도봉구에서 <홍 소아과>를 운영할 때 그 옆에서 일했어요. 대학에서 떨어진 아우는 수환 시동생 얘기에요. 경기고를 나와 서울대 시험을 보았는데 잘 안 되었어요. 송자 시누이는 경기고녀를 나와 서울대에 갈 실력이었는데, 집안을 생각해 이화여대 약학과로 진학했어요.
맹문재 : 「누이야 장하고나!― 신귀거래 7」의 상황은 어떤 것인지요?
김현경 : 6․25전쟁 때 수강 시동생은 대한청년단에 들어가 활동하는 바람에 북한군에 끌려가 처형당했고, 수경 시동생은 월북했어요. 수강은 시어머니가 <유명옥>이란 설렁탕집을 운영할 때 많이 거들고 참으로 성품이 착했어요. 수경은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한 수재였어요. 잘생겼고, 학교의 야구부장을 지낼 정도로 남달랐어요. 그런데 참으로 아까워요. 우리가 돈암동에서 살림을 차리고 있을 때 수경 시동생을 데리고 있기도 했어요. 김 시인이 수경 시동생을 참으로 이뻐했어요. 수경 시동생을 아주 좋아하는 수명 시누이의 한 친구가 있기도 했어요. 6․25전쟁이 끝난 뒤에도 우리 집에 자주 놀러왔어요. 수명 시누이의 방에 수경 시동생의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김 시인이 그 모습을 보고 쓴 작품이에요.
맹문재 : 「누이의 방― 신귀거래 8」에 나오는 “누이”는 누구인지요? 방에는 1950년대에 활동한 미국의 영화배우인 “킴 노박”(Kim Novak)의 사진이며 국내 소설책들을 잘 정리해놓았네요.
김현경 : 수명 시누이를 말해요. 작품에 나와 있듯이 방은 항상 깨끗하고 정리 정돈이 잘 되어 있었어요.
맹문재 : 「이놈이 무엇이지?― 신귀거래 9」는 무엇을 노래한 것인지요? 실제로 김수영 시인은 시계를 차지 않고 지냈는지요?
김현경 : 김 시인은 시계 없이 살았어요. 몸에 치장하는 것을 싫어했어요. 여행도, 낚시질도, 파티장에도 가지 않았어요. 뇌물 받은 것도 없구요. 자신은 의용군이 아니라 낙오자라고 했어요. 자유주의자 그 자체에요. 작품에서 “이놈”은 막연하지만 반동의 마음이 아닐까 싶네요.
맹문재 : 「‘4․19’ 시」를 쓴 상황을 듣고 싶네요.
김현경 : 김 시인은 4․19혁명 이후 정말 물 만난 물고기같이 많은 작품을 썼어요. 그런데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 반공을 국시로 발표하자 우리는 언제 잡혀갈지 몰라 불안한 마음으로 신당동 친정집에 가서 숨어 있다가 왔어요. 그 뒤 정부에서 소록도나 논산훈련소를 갔다 오라고 하고, 시를 발표해도 탄압이 없어 다행이었어요. 그래도 「김일성 만세」는 발표하지 못했지요.
맹문재 : 「쌀 난리」를 보니 1961년 무렵 쌀 파동이 있었던가 보네요.
김현경 : 쌀 파동은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난 뒤에 있었지요. 「양계변명」이라는 산문에도 나오듯이 쌀값이 오르자 닭 사료값도 올랐어요.
맹문재 : 자료를 찾아보니 5․16군사쿠데타 이전에는 쌀 한 가마니가 1,540원이었는데, 2년이 지난 1963년에는 4,400원으로 올랐네요. 증권 파동도 있었고, 정부가 화폐단위를 ‘환’에서 ‘원’으로 변경하고 10분의 1로 평가절하하는 통화 긴급 조치를 단행했지만, 미국의 원상회복 요구로 사실상 실패하며 경제가 더욱 나빠졌네요. 이와 같은 상황을 토대로 작품을 읽으니 더욱 이해가 되네요.
「사랑」이란 시에서 “너의 얼굴”은 누구일까요?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사랑」 전문
김현경 : “너의 얼굴”은 당연히 나지요. (웃음) 김 시인은 나를 인정해주었어요. 나한테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날 시어머니하고 대화하는 것을 들으니 “준이 에미는 진짜 재주가 많은 여자입니다”라고 말하더라구요. 김 시인과 나는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친구 같았어요. 감각과 감수성도 비슷했어요. 서점에도 같이 드나들었구요. 김 시인은 모든 일들을 나한테 얘기해주었어요.
맹문재 : 「나가타 겐지로」(永田絃次郞)에 나오는 “김영길”은 누구인지요? “나가토(長門)”라는 여가수를 아는지요?
김현경 : “김영길”은 “나가타 겐지로”의 한국 이름이에요. 재일동포 가수인데, 1960년에 북송되었어요. 재일교포들이 1960년대에 북한으로 많이 우대받고 갔는데, 막상 가보니 기대했던 것보다 못해 나중에 후회들을 했어요. 결국 돈이 있는 재일동포들이 이런 방식으로 북한에 돈을 빼앗긴 것이에요. “나가토”는 잘 모르겠는데, 재일교포 여가수가 아닐까 싶네요.
맹문재 : 「그 방을 생각하며」에는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라는 표현이 나와요. 김수영 시인은 4․19혁명이 완성되지 못하자 실망이 컸는지요?
김현경 : 실망을 많이 했어요. 그때는 관리들이 와이료(蛙餌料)를 먹고 일을 처리할 정도로 사회 질서가 제대로 서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김 시인이 술을 많이 드셨어요.
맹문재 : 「가다오 나가다오」는 미국과 소련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주제의식이 분명한 작품이에요. 이 작품에 나오는 “명수 할버이/잿님이 할아버지/경복이 할아버지/두붓집 할아버지”는 실명으로 보이는데요?
김현경 : 이 시를 읽으면 김 시인의 마음이 참으로 착하다는 것을 느껴요. 그 분들은 우리가 살던 마포구 구수동의 동네 사람들이에요. “명수 할버이”는 밭쟁이예요. 호박, 오이, 김장 배추 등 농사를 잘 지었어요. “잿님이 할아버지”도 농사꾼으로 파, 시금치 등을 지어 지게에 싣고 팔러 나갔어요. “경복이 할아버지”도 농사꾼이었어요. “두붓집 할아버지”는 두부와 콩비지를 파는 가게를 하는 분이었어요. 우리가 닭을 키우기 전에 돼지를 키운 적이 있는데, 돼지 사료로 콩비지를 그 집에서 사오기도 했어요. 내가 직접 물지게로 지고 왔어요. 「사치」라는 시에 그 두붓집 딸 얘기가 나오지요. 그 집 딸이 우리 집에 와서 도배하는 일을 도와준 적이 있는데, 그 얘기에요. 그 집 딸이 나를 좋아해 우리 집에 놀러 오기도 했고, 나도 그 집에서 비지를 기다릴 때 안방에 들어가 몸도 녹이고 했어요. 김 시인이 길에서 명수 할아버지 등을 만나면 공손히 인사를 잘해요. 그런 태도가 보기 좋았어요. 동네 할아버지들은 김 시인이 좋은 사람 같은데 몸이 약해 집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여편네는 살아보려고 닭도 기르고 발발거리는데 김 시인은 집에만 있으니 그렇게 생각했던가 봐요. (웃음)
맹문재 : 「거미잡이」에서 “아내가 마루에서 거미를 잡고 있는/꼴이 우습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사실인지요? 그리고 “나는 오늘 아침에 서약한 게 있다니까”라는 구절은 무슨 의미일까요?
김현경 : 마포구 구수동의 집이 밭 한가운데 있는데다가 산이 가까우니 거미가 집안에 많이 들어왔어요. 집안 구석에 거미줄이 처져 있었어요. 그래서 거미줄을 걷는 거미채도 집에 마련해 두었지요. 내가 거미를 잡는 모습을 보고 김 시인이 잔인하다고 느꼈는가 봐요. 김 시인은 자연과 생명을 존엄하게 여겼어요. 그와 같은 모습이 김 시인의 사랑이에요. “아침에 서약한” 것은 좋은 시인이 되고, 좋은 남편이 되겠다는 다짐이기도 하겠지요.
맹문재 : 「푸른 하늘을」은 많이 알려진 작품이지요. 이 작품을 썼을 때의 상황을 좀 들려주세요.
김현경 : 4․19혁명 때 학생들의 봉기에 자극을 받아 쓴 것이에요. 김 시인은 초고를 쓰면 언제든지 나를 불러 청서를 시켰는데, 내가 쓰면서 읽어보니 아주 좋더라구요. 김 시인도 마음에 들어 하는 표정이었어요. 김남조 시인이 시집을 보내온 봉투를 뒤집어 초고를 썼어요. 『동아일보』에 발표했는데, 당시의 신문사 기자가 일반적인 기준보다 원고료를 훨씬 많이 주었던 것 같아요.
맹문재 : 「육법전서와 혁명」에 대해서 말씀을 듣고 싶네요. 이 작품은 “4․26혁명은 혁명이 될 수 없다”고 한 면으로 보아 이승만 대통령이 이 날 하야 성명을 발표했지만, 진정한 혁명 차원에서는 미흡하다고 보고 있네요. 실제로 외무부 장관인 허정을 중심으로 세워진 과도정부는 4․19혁명 정신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이념이나 정책을 제시하지 못했지요. 결국 이승만 개인만 퇴진하고 정치체제는 그대로 남은 것이지요.
김현경 : 김 시인이 4․19혁명 이후 적극적으로 현실참여의 시를 쓴 것이에요.「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만시지탄은 있지만」 「기도」 「하…… 그림자가 없다」 등등의 작품도 그렇지요.
맹문재 :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에 나오듯이 관공서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었는지요? “영숙아 기환아 천석아 준이야 만용아” 등이 나오는데, 모두 실명으로 보이네요.
김현경 : 그 당시 학교, 파출소, 면사무소 등등의 관공서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사진이 다 걸려 있었어요. “기환”이는 신당동에서 인쇄소를 하던 시어머니 남동생의 아들 이름이에요. 김 시인 외삼촌의 아들이지요. “영숙”이는 그 “기환”이의 누나예요. “천석”이는 창동 시댁의 묘지기 아들이에요. 술을 먹고 웃기는 소리를 잘했어요. 논다니 같았어요. 시어머니가 <유명옥>이라는 설렁탕집을 운영할 때 와서 일을 돕기도 했어요. 환도한 뒤 우리가 성북동에서 살 때 “천석”이가 리어카에 총각무를 두 가마니를 싣고 와서 수련 시누이와 함께 담가 먹은 적이 있어요. 정말 맛있었어요. 이 이야기를 내가 『샘터』에 쓴 적이 있어요. “준”은 우리 큰아들이고, “만용”이는 양계할 때 일하던 아이예요.
맹문재 : 「파리와 더불어」는 어떻게 쓰인 작품인지요? “나는 죽어가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구절이 와 닿네요.
김현경 : 내가 파리통을 사서 집에서 사용했는데, 김 시인이 그것을 보고 쓴 작품이에요. 김 시인은 상주사심(常住死心)의 마음으로, 즉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사셨지요.
맹문재 : 「미스터 리에게」에서 “미스터 리”는 누구일까요?
김현경 : 명동의 <은성> 집에 김 시인의 얘기를 들으려고 술을 사주면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대요. 이 씨 왕조의 후예인데, 하는 일은 없고 커다란 기와집에서 어머니하고 산대요. 결혼도 하지 않았대요. 김 시인은 그 사람에게 술을 얻어먹지 않으려고 했어요. 김 시인은 무위도식하는 사람을 아주 싫어했어요. 그 대신 동네의 농부들을 좋아했어요. 만용이와 순자도 굉장히 이뻐했어요. 공부도 열심히 하는 사람을 좋아했어요. 김철 시인이 우리 집에 올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서울대 학생으로서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에요. “미스터 리”는 명동백작으로 불리는 이봉구로 읽히기도 해요.
맹문재 : 「싸리꽃 핀 벌판」에 대해서 설명을 부탁드려볼까요.
피로는 도회뿐만 아니라 시골에도 있다
푸른 연못을 넘쳐흐르는 장마통의
싸리꽃 핀 벌판에서
나는 왜 이다지도 피로에 집착하고 있는가
기적 소리는 문명의 밑바닥을 가고
형이상학은 돈지갑처럼
나의 머리 위에서 떨어진다
―「싸리꽃 핀 벌판」 전문
김현경 : 마포구 구수동의 집 옆 산언덕에 싸리꽃이 많이 피어 있었어요. 아주 이뻤어요. 만용이가 싸리꽃을 베어 빗자루로 만들어 쓰기도 했어요. 내가 양계업을 하는 등 식구들이 모두 바쁘게 움직이니까 김 시인도 심리적으로 바빴겠지요. 그래서 피곤을 느낀 것이에요. 양계 일은 하루 열두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바빴어요.
맹문재 : 「파밭 가에서」 역시 마포구 구수동 집에서의 생활을 담은 것 같네요.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김현경 : 실제로 내가 파를 심어 팔았어요. 우리가 다 먹지 못하니까 구멍가게에 가져가 판 것이에요. 처음에는 도매로 넘겼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단으로 묶는 것이 더 이익이 될 것 같아 나중에는 묶어서 팔았어요. 파를 판 돈으로 반찬값을 마련했어요. 멸치도 사고 푸줏간에 가 고기도 사고 했지요. 또 신문을 깨끗이 모아 팔았어요. 신문 한 관을 묶어 가지고 가면 소고기 한 근을 바꾸어주었어요. 그래서 신문을 모으는 재미가 쏠쏠했어요. 그때는 신문이 4면에 불과했어요.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라는 것은 내가 돈 버는 일에 매달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지요. 내가 돈을 버는 대신 소중한 것을 잃는다고 본 것이에요.
맹문재 : 소중한 말씀들을 들려주셔서 감사해요. 강민 선생님이 소개해주셔서 제가 김현경 선생님을 뵌 지 어느덧 7년이 되었네요. 그동안 강민 선생님은 세상을 뜨셨구요. 참으로 시간이 빠르다는 것을 새삼 느끼네요. 앞으로 한두 번만 더 하면 선생님과의 대담이 마무리되겠네요. 늘 건강하세요.
■ 김현경
1927년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태어나 경성여자보통학교(현 덕수초등학교)와 진명여고를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수학했다. 김수영 시인과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다. 에세이집 『김수영의 연인』 『우리는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공저)가 있다.
■ 맹문재
대담집으로 『행복한 시인 읽기』 『순명의 시인들』, 시론 및 비평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 『지식인 시의 대상애』 『시학의 변주』 『만인보의 시학』 『여성시의 대문자』 『여성성의 시론』 『시와 정치』가 있다.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