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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시야의 운명
역대하 22:2-9
22:2 아하시야가 왕이 될 때에 나이 사십이세라 예루살렘에서 일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아달랴라 오므리의 손녀더라
22:3 아하시야도 아합의 집 길로 행하였으니 이는 그 모친이 꾀어 악을 행하게 하였음이라
22:4 그 부친이 죽은 후에 저가 패망케 하는 아합의 집 교도를 좇아 여호와 보시기에 아합의 집 같이 악을 행하였더라
22:5 아하시야가 아합의 집 교도를 좇고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요람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아람 왕 하사엘로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 사람들이 요람을 상하게 한지라
22:6 요람이 아람 왕 하사엘과 싸울 때에 라마에서 맞아 상한 것을 치료하려 하여 이스르엘로 돌아왔더라 아합의 아들 요람이 병이 있으므로 유다 왕 여호람의 아들 아사랴가 이스르엘에 내려가서 방문하였더라
22:7 아하시야가 요람에게 가므로 해를 받았으니 이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 아하시야가 갔다가 요람과 함께 나가서 임시의 아들 예후를 맞았으니 그는 여호와께서 기름을 부으시고 아합의 집을 멸하게 하신 자더라
22:8 예후가 아합의 집을 징벌할 때에 유다 방백들과 아하시야의 형제의 아들들 곧 아하시야를 섬기는 자들을 만나서 죽였고
22:9 아하시야는 사마리아에 숨었더니 예후가 찾으매 무리가 예후에게로 잡아다가 죽이고 이르기를 저는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던 여호사밧의 아들이라 하고 장사하였더라 이에 아하시야의 집이 약하여 왕위를 지키지 못하게 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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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에 보면
전쟁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을 행하기 전에는
주로 이기는 쪽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러면 지는 쪽은 누군가요?
그 나라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을 얕보고
건방지게 달려들던 이방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나라가
안정된 국토를 가지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만들고 난 뒤,
안일에 빠져서
하나님보다도 세상살이에 정신이 없을 때에는 전쟁에서 누가 이기느냐하면,
분명히 우리의 상식으로는
하나님이 함께 있는 쪽이 이겨야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있는 나라가 지고
여호와를 섬기기는커녕
여호와를 모독하는 이방나라가
도리어 승리해 버리는 사태가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방나라를 이기게 해준다고 해서
이방나라가 이스라엘보다
죄가 없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이건 뭐냐하면,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맞는데
하나님께서 전쟁이라는 상황을 유발시켜서
하나님 믿는 백성이
하나님 믿는 백성답게 살 수 있도록
갖가지 조치를 내리는 것입니다.
갖가지 조치를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편이라는 말을
여러분들이 잘못 생각하면
내 소원대로 다 들어주시는 하나님인 줄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어 낸다는 뜻입니다.
내 욕망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얼씨구나"하고
다 들어주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에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님 모르는 사람과는
다른 관리체제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다른 인생을 사는 겁니다.
세상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살지만
이제 우리한테는
더 이상 나의 인생이라는 게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준 인생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슬퍼하지 마세요.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라고 했습니다.
사생아가 뭐가 좋습니까.
부모가 있어야 좋잖아요.
그러니까 부모가 계시다는 이 자체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타내시느냐하면
우리 멋대로 살지 못하도록
늘 이렇게 주위에서 상황을 만들어내시고
아직까지 못 깨닫는 것을
어떤 일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뜻을 위함이지
우리 뜻을 위함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주기도문에 보세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 지상에서 말입니다.
달리 말씀드리면
저와 여러분, 우리 자신을 통해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주옵소서,
이런 기도가 주기도문 속에 들어있잖아요.
제가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이
우리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있다는 이 말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을 때
저는 상당히 괴로워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하나님이 모두 다 하면
우리는 아무 할 게 없겠네,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선택하시고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다스리면
인간은 가만히 놀고 있으란 말이고
아무 것도 할 게 없다는 말인가"
이렇게 반발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의 관심사는 뭐냐하면
"아니 기도도 안 하는데
하나님께서 다 들어준다면
기도할 게 뭐 있느냐"라는 생각을 갖는다는
이것이 제가 보기에는
어쨌든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의 포부나 뜻을 이루자는
꿍꿍이속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이에요.
욕심이 가득 찬 사람이란 말이죠.
거기에 대해
제가 지적을 하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여러분의 뜻을 이루지 않습니다"고 하니까
그 사람들이 삐쳐 가지고
"그러면 하나님 뜻대로 하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되겠네,
전도도 하지 말고 가만히 놀까,
좋다 그러면 교회 잘 돌아가겠다"라고
반발을 하는 거예요.
제가 다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의 꿈과 우리의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힘을 빌릴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철저하게 우리를 꿈을 뭉개고 뺏어 버립니다.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실현하고자 하시는 취지이며
우리는 그 뜻을 위해
하나의 도구로 부름 받은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전쟁에 있어서의
승리자냐, 실패자냐 하는 것은
이방나라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사람들의 태도가 어떠냐 에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승리가 오느냐
아니면 이스라엘에게 패배가 오느냐가
결정되는 겁니다.
저 이방나라는 숫자 많은 것을 자랑하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사람들도 같이
숫자 많은 것을 자랑해 버리면
그건 패배자가 되는 겁니다.
진짜 전쟁은
누가 많은 힘을 확보 했느냐의
양적인 싸움이 아니고
누가 하나님 앞에 순수하냐의 전쟁입니다.
교회도 교인 몇 명이냐의 숫자 싸움 하지 말고
어느 교회가 순수하게 하나님 앞에 복음 적이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집단이냐가
중요한 거예요.
얼마나 하나님 앞에 순수하냐 말입니다.
숫자는 아파트촌에 가면 숫자가 많아지고
저 촌 골짜기에 가면
교인이 텅텅 비어 숫자가 없지요.
한국 최고의 부흥사가
봉화 골짜기에 가 보세요.
숫자 몇 명 모이는지.
교회를 볼 때
숫자를 본다든지,
교인을 본다든지,
목사의 프로필을 본다든지,
재산의 증가를 본다든지 하는
이 사고방식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순수하지 못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전쟁을 통해서
우리에게 징계를 내리시고 말씀하시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그러한 사고방식은
이제 좀 벗어나라는 거예요.
가진 것 자랑하고,
양적인 것 자랑하고,
권력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하잖아요.
내 중심의 대부분이
어디에 쏠려있고
어디를 향하며
누구에게 의지하고 있느냐,
우리는 이 싸움을 해야되고
역시 하나님도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 보면
"아하시아가 아합의 집 교도를 좇고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요람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아람 왕 하사엘로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 사람들이 요람을 상하게 한지라".
아람은 여호와 안 믿는 이방나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아하시야는
유다 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믿는 나라가
하나님 믿지 않는 나라한테
지더라는 말입니다.
이방나라가 착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네 사고방식이
하나님백성답지 못하다는 것을
경고하는 거예요.
그래서 징벌을 내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 징벌의 내막이
7절부터 나오는데
이게 좀 재미있습니다.
7절에 "아하시야가 요람에게 가므로
해를 받았으니
이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
이것을 설명을 하면
남쪽에 있는 왕의 이름이 아하시야이고
북쪽에 있는 하나님 믿는 나라 왕의 이름이 요람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람하고 아하시야하고
서로 친구처럼 지내는 상태예요.
그런데 친구처럼 지내는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싫다는 겁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외롭잖아요.
사람이 외로우니까
친구를 사귈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 친구를 사귈 때에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네가 과연 하나님의 뜻을
우선적으로 관련시켜
친구를 사귀느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염두에 두고
친구를 사귀느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선이 되어서
친구를 사귀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뜻은 뒷전에 버려버리고
친구위주로 친구를 사귀느냐
그것을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사람이 인생을 사는데
솔솔하게 재미나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아마도 가장 즐거울 때가
아마도 죄지을 때가 제일 재미있을 겁니다.
만약에 죄를 안 짓겠다고 생각하면
인생이 살맛 나겠습니까?.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혹시 이것도 죄가 아닐까?
저것도 죄가 아닐까?
이거 너무 걸거적거리는 게 아닐까?
이렇게 되면
사는 맛이 사라질 것은 뻔합니다.
사람이 친구를 사귀는 심리는
죄는 짓고 싶고
또 죄를 지어야
인생이 짜릿한 맛이 나는데
혼자 죄 지으면 그 책임이
전부 자기한테 돌아오니까
친구를 사귀면 같이 동조가 되어서
용기가 나고 재미도 나고
또 죄 짓고 난 뒤에
책임도 자기 혼자 다 덮어쓰는 게 아니어서
친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자기의 심적인 스트레스가 적게 쌓이게 되죠.
맞지요?
우리 모습이라는 겁니다.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이틀에서 벗어날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업습니다.
사람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하는 그 순간,
자기가 생생하고 탱탱하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됩니다.
이건 누구를 나무라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그 순간부터
아담과 하와 머릿속에는
선악과 따먹고 싶다는 것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지 마라는 것까지 정복을 해야
살아가는 만족을 얻겠다고 여기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자리인
신의 위치까지 올라서고자
따먹지 말라는 것을 따먹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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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7절에 보면
"아하시야가 요람에게 감으로 해를 받았으니
이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
제가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유는,
누군가를 암살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으로 훈련받는 과정을 거칩니다.
마음만 있다고
소기의 성과를 이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총, 칼이 동원되고
쏘는 방법과 구조를 아는 것으로
실패할 확률을 줄이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저격수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죄 짓고 도망치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천사는
우리를 범인으로 여겨서 죽이려고
총,칼 들고 다가오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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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이 본문에서는
'하나님께로 말미암는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사귀지 말아야 될 친구를 사귀어서
북쪽 왕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까불다가
드디어 아람나라와 붙었는데
큰 사단이 난 겁니다.
그런데 그게 모두 배후에
하나님께서 유다왕 아하시야를 벌하기 위해서
계획하신 일입니다.
일부러 하나님께서
그렇게 몰아 넣으신 것입니다.
네가 친구 잘못 사귀어서
한번 혼나 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개입되지 않는 모든 것은,
사실은 하나님보다
나의 인생에 즐거움이 우선이 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거예요.
기도도 그러하고,
찬양에 빠지는 것도,
봉사에 빠지는 것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께로"라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7절에 보면 나옵니다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해놓고는
아하시야가 갔다가
요람과 함께 나가서
임시의 아들 예후를 맞았으니
그는 여호와께서 기름을 부으시고
아합의 집을 멸하게 하신 자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아합의 집이라는 것은
북쪽 이스라엘 나라를 말하죠.
하나님은 그냥 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지시고 예후라는 사람을 찍습니다.
이 사람은 특별히 하나님께 선택받아서
아합의 집을 아주 몰살하게 하기 위한
저격수와 같은 역할을 할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별난 사람이 등장해서 나를 괴롭힐 때에
"하나님 저 별난 놈이 정말 성가시내요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릴 때,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엉뚱한 인물을 등장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가장 괴로운 상황을 엮어내십니다.
"이건 양보 못할 내 행복, 짜릿한 경험인데
왜 오랫토록 유지시켜 주시지않고
무참하게 짓밟히고 깨뜨리시는 겁니까?
우리들이 좌절시키시고,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일들이
자꾸 일어나게 하십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우리를 싫어해서 일으키시는 일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를 사랑해서 일으키시는 일이 라는 것입니다.
엉뚱한 사람이 나타나서 자신을 괴롭힌다,
그러면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됩니다.
핑계나 변명으로 자신을 감싸려 하지마시고
자신의 들보를 들여다봐야 되요.
다면히 수치와 원망이 뒤따르겠지만
수치를 드러내게하신 용기와
하나님께대한 감사로 이어질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버렸으니까
하나님은 엉뚱한 사람을 등장시켜서
나의 가는 모든 길을 다 부숴 버리고
진짜 저격수처럼 나를 잡아서
나의 죄에 대해서 쏘아대는
저격수 역할을
누군가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여기 예후라는 사람은
원래 북쪽나라
요람 왕을 치기 위한 사람인데
남쪽 왕이 그것도 모르고
짝짝꿍이 되어 친구가 되어 있으니까
9절에 보면
"아하시야는 사마리아에 숨었더니
예후가 찾으매
무리가 예후에게로 잡아다가 죽이고 이르기를
저는 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던
여호사밧의 아들이라 하고 장사하였더라".
예후라는 저격수가
북쪽 왕만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남쪽 왕도 죽여버리는 거예요.
남쪽 왕은 들러리로 죽여 버리는 거죠.
죽이면서 이런 소리를 합니다.
"아이고 자기 아버지 여호사밧은
하나님 잘 믿던 사람인데
아들이라고하는 놈은 이렇게 악한 일을 해 가지고
내 손에 다 죽느냐"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이번 전쟁에서 누가 패배했습니까?
유다 나라이죠.
군사력이 모자라서 패배했습니까?
아니지요.
정신만 제 정신으로 돌아오면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은 우리한테 다 맡기시고
홀로 낮잠 주무시고
그냥 팔짱끼고 계시는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에 대해서
철저하게 인사관리 하시고
조절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조절하시는가?
우리의 소원은 몰래 죄짓고
신나게 사는 것인데
그때 그때마다 엉뚱한 데서 일이 터지고,
엉뚱하게 나의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계획에 차질을 일으키면서
"네가 지금 하나님 생각하고 일했느냐
아니면 하나님은 뒷전이고
네 욕심만 챙겼느냐"고
우리에게 묻고 계시는 그런 일을 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순간적으로
인생의 패배를 느끼고
실패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보면
"아! 하나님께서 철저히 나를 굽히시는 구나.
이게 복이구나,
이게 바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구나"라고
돌이키게 하십니다.
이것이 신앙의 진정한 승리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관리하시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할 때에
그 부족함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재벌이 될 때에 만족합니까?
주입되고 왜곡된 생각으로
자기의 논리가 먹힌다고 기뻐하겠습니까?
과연 예수 믿는다고 부족한 것이 없습니까?
집에 쌀이 떨어질 수도 있고
직장을 그만둘 수도 있는데
부족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잖아요.
그러면 무엇에 부족함이 없습니까.
한시라도 회초리를 들지 않을 때가 없는 것이
우리가 부족하고
그 때마다 그 부족을 채우시는
그 회초리로 인하여
우리가 부족함이 없는 거예요. .
우리는 세상사람과 다를 바가 뭐가 있습니까.
그들이 좋아하는 것, 우리도 좋아하고
그들이 잘되면 하소연하며 시기하고 질투하는, 세상사람과 다를 바 없는
그런 심성을 가지고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말씀처럼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없으면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우리한테 부족함이 없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어디서 잘못되었으며,
무엇이 죄며,
무엇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시각으로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역시 우리의 구세주는 하나님밖에 없구나,
나를 살릴 분은
내가 깨닫음을 얻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친히 인도하시고 살리시는구나"라면서 우리가 저지를 죄를 알고
깊은 감사를 하나님께 평생토록 드려도 부족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