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동 벼룩시장을 가다
1. 최근 LP를 재생할 수 있는 오디오를 구입했다. 어렸을 적, LP는 접근하기 어려운 대상이었다. LP를 재생하는 오디오는 대부분 가격이 비쌌고 그것을 구입할 욕구나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카세트 테이프로 음악을 듣는 정도였고, CD가 나온 이후로는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모든 음악은 CD로 수집하게 되었다. LP나 카세트테이프의 재생 시간이 30분 이내인 반면, CD는 60분 이상 판을 갈지 않고 들을 수 있다는 점도 CD를 선호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자연스럽게 LP와 테이프는 소멸되었고 모든 음악 앨범은 CD가 장악하게 되었다.
2. 시대의 변화는 CD마저 점차 사라지게 만들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CD로 앨범을 구입하는 대신 음원을 다운받거나 스트리밍을 통하여 감상한다. 소유에 대한 인식도 달라져 굳이 구입하여 갖기보다는 공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 흐름 속에서도 일종의 ‘레트로’ 붐이 일어났고, LP에 대한 향수와 가치를 새롭게 조망하는 시선이 등장하였다. LP를 경험했던 장년들에게는 과거의 낭만을 기억하는 수단으로, 최근 젊은이들에게는 새로움을 발견하는 오래된 미래로 선택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새로 음악을 발표할 때 LP판을 내는 가수들이 늘어나고 있고, LP를 만드는 공장이 다시 가동되었으며, LP를 재생하는 턴테이블 생산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3. 우연하게 홈쇼핑에서 LP를 재생할 수 있는 오디오를 구입하게 된 이유도 이런 시대적 변화가 준 자극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음원을 재생할 수 있음에도 가격이 20만 정도밖에 하지 않는다는 점도 큰 메리트였다. 하지만 오디오를 구입하고 난 후, 한참 동안 LP를 듣지는 못했다. LP판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동네 헌책방에서 한 장의 LP를 듣고 시험 작동을 한 후 본격적인 LP 구입을 계획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LP 구입의 최적 장소가 황학동 벼룩시장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4. 황학동 벼룩시장은 신당역에서 내려 갈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청계천 산책길을 걷다가 동대문 오간수교 다음에 있는 다산교를 통해 성동공업고등학교 옆 골목으로 들어가는 코스를 택했다. LP 구입을 겸해 운동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벼룩시장 골목에 들어서자 오래된 녹음기와 턴테이블을 파는 가게도 보였고 LP 판매점이 곳곳에 나타났다. 과거에 어떤 의도도 갖지 않고 스쳐 지나갔던 LP가 이제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이다. 하나의 선택이 변화를 이끌었고, 그것은 새로운 세계로 나를 진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5. LP가 관심을 받게 되자 가격도 상당하게 비싸졌다. 지명도 있는 한국 가수들의 오래된 앨범은 최소 2만원 이상을 호가했다. 그 중 김광석 같은 특별한 가수의 앨범 중에는 10만원 이상을 부르는 앨범도 있다고 한다. 그래도 이 곳은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듯했다. 시장 조사를 위해 살펴본 종로 5가의 레코드 상의 LP는 이 곳보다 비쌌기 때문이다. 한국 가수들의 LP를 살펴보다가 구매를 포기했다. 대부분 음반은 CD로 갖고 있고 굳이 비싼 돈을 치르고 구매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LP의 음색이 주는 매력을 경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음악 그 자체의 가치와 특징에 주목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LP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그들의 취향을 변호하겠지만 말이다.
6. 그래도 쇼핑 나온 목적을 위하여 5천원 코너에 모아 놓은 LP를 살펴보았다. 대부분 클래식 음반과 이름없는 외국가수들의 음반이었다. 하나하나 살펴보던 중, 개인적인 보물을 발견했다. 리처드 클레이만의 연주곡집이었다. 이 음반에는 80년대 내가 가장 좋아했던 연주곡 <가을의 속삭임>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음반을 구입할 이유는 충분했고, 그것도 5천원 코너에서 발견했다는 점이 즐거웠다. 겸사겸사 한국 가곡전집 5장도 구입했다. 3만원으로 풍성한 쇼핑을 했다는 기분이다. 옆에 있는 4-5만원하는 음반의 가격에 결코 꿀리지 않은 무게감이다.
7. 한동안 시대의 흐름에 밀려 ‘고물’이 되었던 LP가 다시 주목받으면서 ‘골동품’으로 가치를 회복하였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나와는 관계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LP를 만나게 된 것도 특별한 경험이다. 사람들의 삶에서 어떤 일이 어떤 계기를 통해 관계를 맺는 가는 알 수 없다. LP 앨범 구입은, 지나갔지만 결코 소멸되지 않은 삶의 과정에 대한 수수께끼를 들려준다. 현재는 끊임없이 과거와 교류하는 것이며, 과거의 어떤 힘이 현재의 나에게 어떤 방식으로 작용할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삶은 이렇게 끊임없는 순환과 반복을 통해 미래로 향해 가고 있다.
8. 황학동 벼룩시장을 나오면서, 또 다시 올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LP만 갖고 있는 내용의 특별함은 없고지나치게 가격만 인플레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구입한 LP판을 통해 LP의 특징을 가끔 음미하면 족할 뿐이다. 차갑고 기계적인 소리로 구박받는 CD지만, 나에게는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은 음악의 친구이다. 집안 가득히 쌓여가는 CD를 보면서 음악을 가깝게 만들어주었던 CD의 매력에 감사한다. 지금도 나는 동네의 음악도서관에서 빌린 CD를 통해 나의 컬렉션을 늘리고 있다. 음악은 연주자도, 가수도, 재생도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우선적인 것은 음악 그 자체가 갖고 있는 힘이다. 음악감상은 그것을 발견하는 작업인지 모른다. 누가, 무엇을 통해 연주하여도 매력적인 작품을 만나는 그 순간이다.
첫댓글 음악이 건네는 선물은 언제 받아도 좋다! 아름다운 선율에 빠지게 되는 시간, 삶에서 최고의 순간이다. 마음에 와닿는 음악을 발견하는 순간의 기쁨, 더이상 바랄 것이 없는 세계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