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을 밟으며
2000년 11월 6일, 월요일 아침. 동생과 함께 해인사 입구 홍류동(紅流洞)에 있는 청원정(聽源亭)을 찾았다.
청원정은 아버님이 생전에 여러 친구 분들과 함께 마련하신 조그마한 서원(書院)을 겸한 정자(亭子)다.
살아 계실 때는 밑의 자식들은 무심하여 찾아가 보지도 못했다가 돌아가신 후에야 뒤늦게 찾게 되었다.
형님은 여러 번 가셨으나 나는 이번이 두 번째이고, 동생은 첫 방문이었다. 청원정을 향해 가는데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어 있고 낙엽도 많이 쌓여 있었다.
나는 단풍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낙엽을 밟으며 일전에 형(慕何)님이 가야산 해인사 인근 여사(旅舍)에서
지어 부채에 곱게 쓰신 시를 떠올렸다. 一泊名山古刹傍 暮天林堅鳥歸藏 三層石塔超然立 無限風霜歲月長 길나서서 저물거든 명산고찰 찾아가자 골짜기 깊은 숲에 산새들이 돌아든다 긴세월 삼층석탑은 구름끼고 마냥섰네 -慕何-
그리고 생전의 아버님 모습을 그리면서 낙엽을 밟고 있는 나에게 동생이 느닷없이 물었다.
"형! 단풍을 영어로 무어라고 하는지 알아요?" "글쎄?, maple인가? 아니지 maple은 단풍나무이고...,
그러면 autumn leaves?" "영어에는 단풍이란 멋있는 말이 없고 겨우 번역된 것이 red leaves이지요." 제법 유식한 체한다.
" 그리고 낙엽은 fallen leaves라고 하지만 어쩐지 우리가 말하는 단풍이나 낙엽이라는 뜻을 그대로 전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 나도 한번 동생 앞이라 무식을 숨겨보려고 내 멋대로 해석을 해본다.
"그거야 삼천리 금수강산의 단풍이나 낙엽의 아름다움이나 정서를 따라 갈만한 곳이 세계 어디에 있겠어?
그리고 우리의 정서가 봄, 여름의 무성함 보다 가을의 정서에 더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은 아닐까?
낙엽의 직역이 fallen leaves이지만 우리가 우리 정서에 맞는 낙엽에 점수를 많이 준 때문이겠지." 어제(11월 5일), 우리 형제들은 고향 친지들과 함께 묘사(墓祀)를 지내기 위해 고향의 선산들을 두루 헤매었다.
촌수가 먼 산소(山所)들은 벌초(伐草)도 잘 안되어 있거나 어떤 묘에는 산돼지들이 파헤치기도 했다.
아버지의 산소에는 생전에 손수 심으신 나무들이 제법 자랐다. 특히 아주 투명한 붉은 색의 단풍나무는
멀리서 바라보아도 산소 주위를 환하게 했다. 형이 수년동안 가꾸고 꾸며오는 <소명산화원>은 서서히 우리 가족들의 꿈의 동산이 되어 가고 있다.
세 그루의 소나무, 형님 소나무, 동생 소나무, 나의 소나무. 나의 미래의 꿈은 소나무 밑에 넓은 자연석이 있고,
그 자연석 한 모퉁이에 아주 작은 글씨로 <자연을 좋아하는 世永, 1942년 11월 11일에 태어나서,
2030년 11월 11일 미수(米壽)에 자연의 품에 안기다>고 쓰여 있기를. 내가 미수까지 살고 싶은 욕심으로 이렇게 쓰는 것은 아니다.
인명은 재천(人命在天)인대 누가 함부로 천벌을 받을 망발(妄發)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알고 있는 상식과 일반적인 추세로 보아 아버지 세대의 수명에 우리는 약 10년을 더하면 된다고 한다.
아버님께서 78세에 돌아가셨으니 특별한 이변이나 내가 내 몸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면 88세 까지도 살수 있지 않겠나? 하는 가능성을 점쳐볼 뿐이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88세까지는 쉬지 않고 계속 숨을 쉬다가 만 88세 되는 시간에 약 1시간 이상 숨을 참으면 틀림없이
미수(米壽)를 누리게 될 것이다. <농담이 진담이 될 수도 있다>고 누가 말했더라? 소명산화원은 이름 그대로 화원(花園)이다. 봉분(封墳)도 없고 비석(碑石)도 없는 아름다운 화원(花園)이다.
연못과 원두막이 있고 여러 가지 정원수와 꽃나무가 있다. 수년 전 우리 형제들은 죽으면 화장(火葬)을 하기로 결의했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화원의 조화를 깨트리지 않는 후손만이 이 화원 내에 안식처를 마련할 자격을 얻는다.>는
불문율을 정했다. 우리가족의 소박한 꿈은 우리 나라의 현실과 장묘문화의 개선과 맞물려 꼭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보라매공원의 낙엽을 밟으면서 폭풍 속에 울부짖든 히포크라테스 후예들의 어제의 함성을 오늘도 듣습니다.
병원 뜰의 낙엽을 태우면서 고통스럽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한 그 순간 순간들을 다시 하나 하나 밟아 봅니다.
모든 고뇌를 불사르는 황홀한 생명력 살아 있음을 느끼는 그 아름다운 율동 그리고 따스함과 쓰라림의 정적
위인들도 밟고 거지도 밟았던 낙엽을 나도 밟고 태운다.
타는 낙엽의 연기는 혼백이 되어 대기 속으로 훨훨 날아가고
타는 낙엽의 재는 대지의 품속으로 스며든다.
우주의 커다란 생명력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낙엽은 외롭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다.
나는 낙엽을 밟으면서 꼬부랑 할머니와 뇌성마비 아동이 절룩거리면서 낙엽을 밟고 걸어가는 것을 본다.
나는 나의 낙엽을 태우면서 다윗과 로댕과 톨스토이와 슈바이처와 그리고 그들이 불태웠던 낙엽을 밟아본다.
낙엽 타는 구수한 냄새에 마취되고 마지막 타는 잿더미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에 혼을 빼앗겨 자연의 품에 안기는 나의 환영을 본다. -졸시 중에서-
2000년 10월 세영정형외과 이헌영
|
첫댓글 오래전에 읽었던 기억이 나는 글인데 다시 읽어보니 더 좋습니다. 수필 솜씨는 대단한 줄 잘 알지만 시까지 이렇게 힘 안들이고 쓸 수 있으니 전공을 잘 못 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술을 베풀고 의사로서의 직분을 다하고 있으니 시도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 이박사, 존경합니다.
조청장! 공자 앞에서 문자쓴 격으로 부끄러운데 읽어주시고 칭찬까지 해주시니 황감할 따름입니다.
석송 나도 잊고 있었든 낙옆을 휴지통 속에서 줏어 오셧군요. 고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