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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여행기
2009년 10월 29일
국토의 97%가 아나톨리아 반도로 서남아시아에 속해 있고 3%는 유럽 대륙의 동남부 트라키아 반도에 위치하고 있는 국가이다. 이 두 대륙을 잇는 도시로 동서 문화의 접점이 되고 있다. 정식 국명은 '터키 공화국(Republic of Turkey)'이다.
한때 인류 역사의 최강국으로 군림했던 나라들의 중심 무대였던 나라, 메소포타미아와 오리엔트 문명을 잉태하였고,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 이슬람권과 기독교 문화가 기묘하게 모자이크 되어 있는 나라, 숨겨진 유적지를 100만 명의 고고학자가 100년 동안 발굴하여도 고작 10%정도만 발굴 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문화의 보고지...가슴 설레는 이 땅에 드디어 왔다. 터키인들은 유럽의 땅 3%를 얻기 위하여 ‘에게’해에 떠 있는 그 무수한 섬들을 모조리 그리스에게 양도했었던, 그래서 터어키쉬가 아니라 투루키에라고 당당하게 얘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마도 동양의 이슬람 문화권이 서양의 기독교 문화권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통치했던 오스만 제국에 대한 무한한 자긍심과 향수를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의 6.25 전쟁에 수많은 청년들을 평화를 위해서 보내준 터키는 우리와 형제의 나라로 인식되리만큼 친근감을 주는 나라다. 실지로 대하는 사람마다 기쁘게 반겨주는 모습이다. 특이 나는 금화전투당시 이들 파병된 젊은 병사들의 불충분한 군 보급품에서 미군과의 차이점에 하등에 원망하지 않고 웃으면서 전선을 지키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대목에 감사를 표할 수밖에 없는 과거의 역사가 있다.
GMP.8.000불이며, 목화생산이 중요한 품목이다. 한국이 섬유기술을 이전 해주었다고 한다. 도로망은 100년 마다 일어나는 지진 때문에 철도를 많이 못 시설하며, 주로 도로를 이용하는데, 화물차의 많은 왕래로 파손이 심해 이곳 대통령 까지 큰 부담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터키 입국 수속은 다른 유럽과 다르게 간단했다. 길 양편에는 새로운 아파트가 많이 건설되어 있다. 산들은 약간 척박한 느낌을 주고 과일 맛은 대체로 좋은 편이다. 특히 석류가 유명하다. 버스가 쉬는 곳에는 반듯이 석류 차 장사가 대기하고 있으며 맛은 괜찮다. 우리나와 기후가 같고, 서쪽과 동쪽이 일기 차가 있다. 서 유럽 쪽으로 젊은이들이 일자리 구하려고 많이 이주하고 있다. 국민 경제가 아직은 불안한 이유 때문이다. 이들은 월경하여 3d업종에 종사한다. 양도 터키가 세계에 3위로 많은 소득을 얻고 있는데, 실은 중국이 1위, 2위가 뉴질랜드다.
아침에 골든 오디세이 호텔에서 배에 탈 예정시간 때문에 일찍이 이곳에 도착하니 아주 알뜰한 한국인 여주인(40대)의 친절한 배려로 간단한 음식이지만 정성을 다하여 우리일행을 맞아 주고 잠시나마 6시에 출발할 수 있게 넓은 장소에 있는 아늑한 소파에 잠을 청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대에 고맙고 ferry를 타는 곳까지 와서 우리가 승선하는 모습까지 검정색 롱코트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홀로 손을 흔들어 주는 그 모습에 정말 찡한 마음에 이별의 아픔을 살펴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국의 아름다운 아줌마의 정에 잠시 감동을 받고 이곳을 떠났다.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이 먼 이국으로 시집 온지 이년 되었다는 새색시 장 세연씨다. 여름 한 철만 유명한 휴양지로 사람이 벅적거리다가 한겨울에는 거의 사람 구경하기도 힘든 시기란다. 약 오만 명이 산다는 이 섬에 한국인은 오직 세 사람이다. 우리를 마중 나온 장 세연씨와 그녀의 시고모부 내외분 너무 먼 곳으로 결혼해 와서 그것도 남편은 이스탄불에 있어 한 달에 한두 번 만날까 말까 하면서 산다.
우리처럼 간간이 히오스 항에서 배를 타고 체쉬메로 건너가는 한국 관광객들을 중간에서 연계해주고 근근이 호텔 유지를 하고 있다고 한다. 아침은 아주 간단한 토스트와 우유, 커피로 때우고 그러나 여주인은 정말로 정성껏 음식을 챙겨주는 하나하나의 정성에 고마움을 느끼면서 아침 식사를 마친다.
히오스항에서 체쉬메로 오는 약 1시간 20분 정도의 배안에서 덜 잔 잠을 해소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뒤처겨 본다.
터키의 에베소로 이동하여 로마시대의 2만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 원형 대극장을 보면서 그 옛날 이미 문화의 멋을 아는 그리스인들의 생활태도에 또한 방음장치가 너무나 잘 이루어진 이런 거대한 극장이 지어져 있다는 사실에 감탄한다. 로마 원형극장은 117년에 완공된 3층 규모의 건축 전형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부채모양으로 넓게 퍼진 이 극장은 원래 연극 상영이나 시민의회가 열리던 곳이었으나 후에는 맹수와 검투사의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1964년 발굴되기 시작하여 지금은 거의 원형을 복원하였다.
다음에 간 곳은 사도 요한의 교회터인테, 입구에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두어 입구 앞에서만 둘러보고 나왔다. 이 도시의 행정명은 '셀축'인데 사람들은 이곳을 '에페스' '에베소' 등으로 부른다. 왜냐하면 성경의 한 부분인 '에페소서'를 사도 요한이 집필한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 바울이 3년간 머물면서 초기 7대 교회의 하나인 '에페스 교회'를 세운 곳이기도 하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생애의 마지막 시기를 이곳에서 보냈다고 하여 기독교 성지의 하나로도 유명한 곳이다. 고대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였다는 '아르테미즈 신전'이 이제 기둥만 하나 덩그렇게 남았다. 또한 조금 떨어진 곳의 건물이 예수를 위해 세운 '이슬람 사원'이고 기둥 왼쪽이 셀축성이고, 오른쪽이 사도 요한의 교회 터가 있다.
예수를 위해 지어 준 '이슬람 사원'을 바라보면서 이슬람교의 원리는 공존공생이지, 종교를 빙자하여 무자비하게 테러와 살육을 감행하는 그러한 것은 안인 듯싶다. 다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교리를 변형시켜 세뇌시킨 결과로 보여 진다. 모든 종교의 원리가 사랑과 평화를 벗어나는 것이 있을까? 하고 반문되는 현장이다.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바꾼 것이겠지...
터키는 역사적으로 로마시대와 기독교 문화를 거쳐 오스만투르크와 이슬람의 문화를 지낸 곳으로 국토 곳곳의 수많은 역사 유적지로 유명하다. 하지만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있다는 이유로 유럽에서는 동양처럼, 동양에서는 유럽처럼 인식되기도 하며 선진국의 유럽에 비해 여러 가지 면에서 뒤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에게해 및 지중해 연안은 겨울이 온화하고 비가 많으며 여름은 건조하고 뜨겁다.
넓은 영토에서 다양한 기후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여행은 언제 어느 지역을 가는지에 따라 준비물이 달라야 할 것 같다. 전체적으로 대륙의 내륙은 대륙성 기후로 우리나라와 비슷하지만 해안지방은 해양성 기후를 보인다. 다만 우리나라와 다른 것은 건조하고 일교차가 심하기 때문에 보온에 주의해야 한다는 점이다. 봄과 가을이 짧으며 여름은 건조하고 겨울엔 비나 눈이 잦은 우기성 기후를 보인다. 일반적으로 4~5월, 9~10월이 가장 여행하기 좋은 시기이다. 특히 7.8월에는 더위와 많은 인파 때문에 견디기 힘들 정도인데 이스탄불은 더욱 심하다.
* 파묵깔레로 가는 언덕을 오르다가, 또 한번 놀란다. 성스러운 도시라는 뜻의 히에라 폴리스 다른 도시들이 교통과 무역을 위해 대부분, 해안가나 강에 인접해 세워지는 것과는 달리 내륙의 언덕에 이 도시가 세워진 이유는, 온천을 이용한 질병의 치료와 휴양이라는 성립목적 때문이었을 것이다. 터키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였다는 히에라폴리스는 찬란했던 영광의 세월 속에 사라지고. 온천수와 목화의 성으로 더 알려지게 되었다. 기원전 190년 페르가몬의 왕조였던 유메네스 2세에 의해 만들어져 로마 시대의 온천지로서 2,3세기에 가장 번영 하였다. 페르가몬 왕국의 실질적 창건자로 알려진 텔레포스의 아내 히에라를 기념하여 만들어져서 "히에라폴리스"로 불린다. 12세기에 십자군이 이곳을 점령했으나 살라흐는 그곳을 탈환했으며(1175), 후에 훌레구와 그가 이끈 몽골군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그들은 이 도시를 완전히 파괴했다. 도시의 유적지는 광범위하지만 거의 전부 후대의 것이다. 터키의 심장 이스탄불에서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국도를 달리다 보면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무대 트로이를 만나게 된다. 거대한 목마와 눈인사를 마치고 남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다섯 시간 남짓 더 달리면 파묵칼레(Pamukkale)에 이른다.
* 파묵깔레는 터키어로 목화의 성(Cotton Castle)이라는 뜻으로 자연이 빚어낸 예술품이다. 멀리서 보면 지면이 완전히 눈으로 덮인 뜻한 언덕 같지만, 사실은 산 위에서 수천 년을 두고 산화칼슘 성분의 온천수가 흘러내리면서 물이 고인 자리가 움푹 패여 천연의 노천 온천탕을 만든 것이다. 수천 년을 끊임없이 흐르는 온천수에 표면이 깎인 석회암은 둥그스름하게 변해, 몽실몽실한 솜털 모양을 이루었다. 바위 색깔은 크림색이고 온천수가 담긴 탕은 연한 초록빛을 띄어 더욱 독특한 풍경을 연출한다. 옥빛에 가까운 이 온천수가, 몸에 좋은 미네랄 성분을 함유하고 있고 질병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수천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져왔다. 흰 대지 위로 저녁 해가 어리면, 대지는 핑크빛으로 붉게 물들고, 어둠이 깔린 평온한 밤에는 달빛이 석회암에 고인 물마다 금빛으로 반사되어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한다..........성곽을 연상케 할 만큼 거대한 석회석 유적과 환상적인 온천으로 이름 높은 이곳은 지구촌을 통틀어 20여 곳밖에 없는 인류 복합유산지역 가운데 하나다. 현실인가 환상인가 10여 곳이 넘는 명소와 이색적인 볼거리가 흩어져 있지만, 이곳을 찾은 방문객들이 가장 먼저 향하는 곳은 하얀 석회석으로 이루어진 자연유산지역이다. 거대한 석회석 기둥과 솟아오르는 온천수를 보고 있으면 어느새 무아지경에 빠져든다. 수십~수백 미터의 둘레와 10여 미터가 넘는 높이를 자랑하는 수많은 석회석 기둥이 흡사 목화솜처럼 보인다고 해서 ‘목화성’ 파묵칼레란 지명이 붙었다. 계단식 경작지처럼 보이기도 하는 석회석 기둥들이 빚어내는 분위기는 빛의 각도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진다. 태양이 중천에 떠 있는 대낮에는 하얀 석회석과 에메랄드 물빛이 어우러져 눈이 아릴 정도로 빛나지만, 이른 새벽과 저녁에 바라보면 ‘혹시 환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신비감이 감돈다. 이 지역의 석회석 기둥을 제대로 관람하려면 먼저 신발을 벗어야 한다. 맨발로 높이에 따라 전혀 다른 촉감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석회석 층으로 이루어진 정상 부근은 그냥 걷기도 어렵지만 중간 부분은 흐르는 온천수가 석회석을 매끄럽게 매만져 발 마사지를 해도 좋을 정도다. 아래쪽에는 도자기를 만드는 점토와 비슷한 부드러운 석회 가루가 깔려 있어 마치 솜 위를 걷는 뜻한 느낌을 준다. 그중에서도 파묵깔레의 석회층은 자연이 만들어 낸 경이로운 산물로, 대지 상부에서 흘러 내려온 석회 성분을 포함한 물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결정체를 만들고 이것들이 점차적으로 쌓여져서 현재와 같이 광활하고 희귀한 경관을 만들어 낸 것이다. 딱딱해진 광활한 석회층의 패인 곳에 상부 쪽에서 흘러내려온 온천수가 담겨 야외 온천을 만들기도 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만들어진 파묵깔레 석회층은 그 광활함에서 놀라고, 크림색의 종유석과 같은 신기한 모습도 발견된다. 멀리서 파묵깔레 석회층을 바라보면 목면을 뭉쳐놓은 듯 보인다. '파묵깔레'라는 지명이 터키어로 '목면의 성'의 뜻을 가진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석회봉과 노천 온천, 솜(cotton castle)의 성을 뜻하는 파묵깔레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하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계단식 절벽으로 이루어진 야외 온천이며, 마치 흘러내리고 있는 용암이 굳어진 것처럼 보이는 크림색의 종유석은 온천수의 계속적인 범람과 지구의 불규칙한 휴지기에 생성된 것으로 자연의 신비를 보여준다.
족 욕을 하는 여러 여행객들이 서로 신발을 벗고 맨발로 이 신기한 곳에서 걸어 다니며, 발 운동을 한다. 외국 관광객(일본, 독일, 미국)들이 많이들 모여 즐긴다.
현란한 조각으로 장식된 파묵칼레 원형극장 유적지의 무대 기둥. 높이가 7∼8m에 이르고 둘레도 1m가 넘는다. 극장 건축물과 무덤 유적지 사이에 있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개선문은 크기와 모양이 같은 세 개의 아치로 이루어져 있다. 로마의 개선문과는 사뭇 다른 독특한 형태다. 개선문을 지나면 아폴론신전 터를 비롯해 건물의 일부만 남은 휴양시설 님파이온, 비잔틴의 대표적인 교회유적지 빌립보 교회 등이 흩어져 있다.
저녁에 호텔 하리시에 투숙하고 이곳 야외 온천욕을 즐겨본다. 물 온도는 적당한 체온을 유지할 정도로 좋은 편이고, 늦은 밤 시간에도 여러 나라의 남녀가 혼합된 손님들이 즐기고 있었다. 밖에 기온은 좀 쌀쌀한 체온이지만 이렇게 여러 외국인들과 수영복을 입고 체온을 녹이니 우리 부부도 하루 종일 여행에 지친 피로를 말끔히 가시는 듯하다.
10월 30일(7일째)
* 이스탄불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관문이자 두 대륙을 지배했던 제국의 도읍지로서 번성했던 도시, 중세와 근세를 이어 주면서 동시에 중세와 근세를 모두 지배했던 메가로 풀리스(거대도시)이스탄불의 옛 이름은 콘스탄티노풀이다. 서기 330년 5월11일에 로마의 유명한 콘스탄틴 대제가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콘스탄틴의 도시라는 뜻의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도시에는 아직도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모스크들이 가득하다.
맨 처음 만난 '바리우스 목욕탕은 냉탕, 온탕, 열탕 사우나, 탈의실 휴게실 스포츠 실 등으로 방이 나누어져 있었고 한 곳에서 불을 때어 관을 통해 천장에 설치된 파이프를 통해 따뜻한 공기 순환 방식으로 난방을 한 것으로 추축되는 건물이다. 목욕탕의 크기는 한 번에 천 명 정도 수용한 수 있는 시설이며, 남, 여가 함께 사용하였으나, 시간대를 조절하여 공용으로 이용했다고 하니, 지혜로움도 새롭다. 목욕탕 오른쪽으로 멀찍이 보이는 두 줄의 열주 사이는 도로이며 그 위쪽의 둥근 공간은 ‘오디온'이라 불렀던 야외 음악당이 있는데 음향의 퍼짐이 그렇게도 잘 조화롭게 이루어지게 만들어 놓았나 싶게,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하드리아누스 신전에 다다르면 황제에게 바쳐진 엄청난 신전임을 실감한다. 138년 에페스 시민들이 지어 로마의 오(五)현제로 추앙받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바쳤다고 한다. 국가의 내실을 다지고, 제국의 기초가 되는 제도들을 혁신했으며 학문과 예술을 위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던 황제에게 속국의 시민들이 지어 바친 것으로, 그 섬세한 아름다움이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어 에페스 유적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유적이라 할 만합니다.
우리 일행들 중에 여인들만 사이좋게 앉아 있는 곳은 바로 공중화장실이다.
그 오랜 옛날에 아래로 물이 흐르게 만든 수세식 화장실이라 하니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었다. 겨울에 차가울 땐, 노예들을 먼저 앉혀 자리가 데워지면 마님들이 와서 앉았다고 한다. 온 몸을 둘러쓰고 다니던 숄로 아래쪽을 가리고 앉았다고 한다.
* 셀수스 도서관은 에페스의 유적지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으로 손꼽히는 건물이다. 유일하게 전면의 이층 구조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에는 얼마나 화려하고 웅장했을까를 상상할 수 있다. 소아시아의 총독이었던 셀수스를 기념하기 위해 135년 그의 아들이 시작하여 손자 대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완공 당시 이 도서관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터키의 ‘버가도’ 도서관과 함께 세계 3대 도서관의 하나로 12,000권의 두루 말이 장서를 소장하고 있었다. 후대에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파괴되고, 지진 등으로 다시 붕괴되었으나 1970~78년 사이에 오스트리아에 의해 복원 되었다. 1층 전면으로 8개의 기둥이 있고 각각 4곳의 조각상은 지혜, 지식, 지능 및 덕망을 의미하나, 복제품이며 진품은 비엔나 박물관에 있다. 셀수스의 무덤은 도서관 중앙의 지하에 위치해있다고 전한다.
인류가 존재하기 시작하면서 아마도 함께 있었을 뜻한 고대의 유곽 광고가 있는데, 이광고의 표현이 걸작이다. 발자국 옆의 여인의 얼굴과 발자국 위의 하트 모양, 그리고 돈과 장미 다발 그림의 광고 내용인즉 "여인을 사랑하고 싶은 사람은 돈과 장미꽃을 들고 앞쪽 방향 오른쪽으로 오시오. 단 이 발자국 보다 발 크기가 작은 사람은 출입 금지" 아마도 '매춘'이란 말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한 필요악이지 안나 보인다.
매춘을 금지하는 이슬람 문화권에는 성범죄가 그렇게 많다는데.....
이곳에서 앞으로 쭉 보이는 길은 당시의 활발히 중요하게 이용된 중앙 도로 같은 큰 길로 항구로 이어지는 거대한 도로가 보인다. 예전에는 저 거리 끝에 항구가 닿아 있었고 항구에서 물건을 싣고 배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으며 이집트에서 온 클레오파트라가 쇼핑하러 이 도 위를 전차를 타고 지나갔다고 한다.(믿거나 말거나)
에페스는 로마시대의 지역이름이며 지금의 셀축과 쿠샤타스를 합친 지역이다. 헬라어로 “인내”라는 뜻의 에페스는 로마당시 최대의 도시이자 동서양을 이어주는 세계적인 무역도시 이자 요충지였다. 성 마리아가 이곳에서 만년을 요한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았다고 하며, 부엌, 응접실, 침실 이렇게 3칸으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정갈한 집도 있다.
이곳을 관광 후 카파도키아로 이동. 호텔 club urgup에 투숙한다.
10월 31일(8일째)
카파도키아에서 괴레메(그리스어)는 터키의 역사적인 영역인 카파도키아의 도시이다. 그곳은 메브세히르 주에 있으며 괴레메 국립공원은 1985년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목록에 들어갔다. 이곳에 최초로 정착이 이루어진 때는 고대 로마시대이다.
괴레메 골짜기(자연이 만들어낸 기암괴석이 펼쳐진다)는 비둘기 집으로 가득한 바위산으로 바위를 깎아 조그마한 구멍을 여러 개 만들었는데 이는 비들기의 배설물을 구하기 위하여 만들었고, 이곳에 먹이를 놓으면 비둘기들이 머물게 하여 변을 모아 비둘기 계곡의 적은 땅에서 농사를 짓는데 비료로 쓰고 또 알을 얻어 영양을 보충 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서기 6세기 이후 9세기 까지 그리스도인의 중심지로 수도하기에 좋은 곳으로서 약 400여개의 교회가 있었다.
* 웃치사르(뽀족한 바위라는 뜻의 천연요새)는 옛날 화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시간이 지나면서 풍화작용으로 이름다운 조각 전시장이 되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네로 황제의 박해를 피해 약250년 간 이곳에 피신 은둔 생활을 했고, 그들은 자연을 이용하여 지하도시를 건설하고 기도처, 동굴 교회, 주택, 학교 등을 만들어 생활하며, 그 후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뒤 교회가 타락하자 초대교회 수도사들이 수도원을 건설하여 신앙생활을 했다. 그 후 이슬람 이교도들이 침입할 때 기독교인들이 적을 피해 이곳을 또다시 찾아 생활을 했다. 지금은 터키인들의 개인소유로 주거용으로 이용된다. 그리고 파샤 계곡(3개의 버섯모양 바위로 유명한 )등을 관광하고 시내를 돌아 데린구유라는 곳에 도착 한다.
* 데린구유는 깊은 우물이란 뜻이며, 1960년에야 발견된 것인데 이곳에 사는 한 마리의 닭이 구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자 이를 이상히 여긴 주민의 신고로 당국이 발견하게 되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종교 탄압을 피하기 위해 건설한 아주 좁은 굴로 이루어진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던 미스터리한 지하 도시인데, 지하 100m까지 미로 속에서 평생을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죽어간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종교 박해의 현장 속엔 아직도 소름이 끼칠 정도의 느낌인 냉기가 돌며, 으스스한 관들도 불 수 있다. 아래 처음 1층에 들어가면 천정에 구멍이 나 있다. 이곳은 외부에서 식량 등 물품을 내려 보내는 곳이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지하 8층으로 70-85m까지 분포 되었다고 하며 더 깊은 곳은 18-20층까지로 매몰 등으로 아직 복원되지 않은 곳이 많다고 한다. 1. 2층은 부엌, 저장고, 침실, 응접실, 와인 창고 등이며 3. 4층은 무기 저장고, 은신처, 각종 터널이 있고 3층의 경우 지하 도시 간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한다. 거리는 약 9km나 떨어져 있다고 한다. 포도를 짜서 술을 만들어 아래고 보내 보관할 수 있는 장치도 만들어 있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범법자가 있게 마련이어서 감옥도 있다. 또한 교회도 있고, 십자가 모양으로 교회를 만들었다. 수용인원은 약 만 명가량이란다. 이런 거대한 미로를 길기도 하게 이 지하도를 건설하는데 얼마나 걸렸을까하고 반문이 든다. 이집트 피라미드는 십만 명이 30년 걸려 지었다는데 말이다. 데린 구유의 경우는 그 해답을 아직 얻지 못했다고 한다. 절베 계곡을 관광한 후, 앙카라로 이동한다.
11월 1일 (9일째)
터키의 기후는 지역에 따라 다르다. 동서의 넓이가 큰 관계로, 온난한 흑해 연안, 내륙은 대륙성 기후 그리고 해안지방은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을 받고 있다. 삼면이 바다인 터키의 해안선은 무려 8,000㎞에 달한다. 터키의 인구는 6천 2백여만이며, 약 41%가 농촌 지역에 살고 있다. 터키에서는 터키인 외에도 쿠르드인, 아제르바이잔인, 러시아인, 그루지야인,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아랍인도 거주한다. 종교는 이슬람교다.
터키는 신약성서의 사도행전과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에페소 교회, 세르미나 교회 등의 7개의 아시아 교회들이 존재했으며, 콘스탄티노플 신경 니케아 등 초대교회의 교리가 공의회를 통해 정리된 곳이라는 점에서 교회역사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 니케아 신경(Symbolum Nicaenum)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예수는 신이 아닌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던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여 고백한 초대교회의의 신앙 고백이다. 팔레스타인 공동체의 세례 신경을 기초로 하여 '동질'이라는 용어를 보완한 카에사리아의 에우세비오의 신경을 기준으로 공포되었다. 이 신경은 삼위일체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며, 특히 성자의 동일실체(同一實體), 강생, 죽음, 부활을 강조하고 있다.
고백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믿나이다.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 전능하시고,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믿나이다.
오직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세대에 앞서 성부로부터 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빛에서 나신 빛이 시요, 참 하느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일체시며, 만물이 다 이 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나이다.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성령으로 또 동정녀 마리아께 혈육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음을 믿으며,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묻히셨음을 믿으며, 성서 말씀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라 믿나니,
그 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니,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시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며,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하나시며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공교회(公敎會)를 믿으며,
죄를 용서하는 하나의 세례를 알고 믿나이다. 죽은 이들의 부활과 후세의 영생을 믿고 기다리나이다. 아멘.>
* 이스탄불의 유적과 문화 이스탄불은 커다란 역사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도시로서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수많은 유물들이 남아 있다. 보존이 잘 된 기념물들로는 예레브스탄 궁전(지하 궁전)과 콘스탄티누스 궁전이 꼽힌다. 고대에 세워진 많은 그리스도교 교회의 상당수가 지금도 사용되고 있으며 더러는 모스크로 이용되기도 한다. 이들 중 가장 큰 것은 아야 소피아로서 1453년 모스크로 바뀌었다가 1935년에 박물관이 되었다.
아야 소피아 ‘아야 소피아’는 “성스런 지혜”를 뜻하는 이름으로 <성 소피아>라고도 한다.
* 성소피아는 터키어로는 Ayasofya. 성 소피아 사원, 신성한 지혜의 교회(Church of the Divine Wisdom)라고도 하며, 비잔틴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지휘로 콘스탄티노플에 세워진 교회인데, 매우 독특한 이 건물은 세월이 흐르면서 파손되기도 했지만 세계적으로 위대한 기념물로 평가된다. 돔을 올린 바실리카 양식이며 놀랍게도 6년 정도의 짧은 기간에 지어져 537년에 완공되었다. 이스탄불의 상징적인 건물로서 콘스탄티누스 2세 때 (360년) 세운 교회가 본체다. 지금 남은 건물은 537년에 세워진 것으로서 비잔틴제국 때는 그리스 정교의 대성당이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정복된 이래로 이슬람의 사원으로 쓰이고 있다. 1934년부터 박물관이 됐다. 건물 내부는 비잔틴 시대의 문화를 잘 보여주는 모자이크 벽화가 남아 있다. 하지만 이 벽화들은 이슬람 사원으로 쓰일 때 덧칠 되었다가 20세기 들어와 고고학자들이 발견했다. 2층 천정에 남아 있는 그리스도를 안는 성모 마리아와 황제 가족의 모자이크가 유명하다.
* 부루 모스크는 이스탄불 제 2의 모스크라고 한다. 황제의 지시에 의해서 메카 순례 길에 들릴 수 있도록 건축한 것이다. 모스크 돔에는 6개의 첨탑이 세워져 있는데 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첨탑은 대부분 모스크의 상징물인데 6개로 통일되고 있다. 메카의 첨탑은 13개에서 4개까지인데 이는 모스크의 규모를 나타낸다. 벽면은 푸른 색 계통의 모자이크로 되어 있는데 수정을 빻아서 만든 타일이다. 강도 7에 이르는 매우 단단한 것이다. BC 650년경에 이룩된 것으로서, 손으로 만지면 모두 금으로 변한다는 마이다스왕의 전설도 이곳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 토프카프 궁전은 15세기-19세기에 걸쳐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황제(슐탄)가 400여 년간 살았던 궁전이다. 포스포루스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언덕위에는 과거에 대포가 설치되어 있었다. 여기서 토프카프란 이름이 유래하게 되었다고 한다.
1855년 돌마 바르체 궁전이 새로 지어질 때까지 오스만제국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였다. 이곳에 전시된 유물들은 화려하다. 궁전의 앞마당에는 하렘이 따로 지어져 있고 황제의 여인들이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여러 장식들이 화려하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토프카프 궁전에는 문서·도기·갑옷·직물 등 터키의 중요한 수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돌마 바르체 궁전이 새로 지어질 때까지 오스만제국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였다.
* 돌마 바르체 궁전은 1855년에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한 것으로서 내부 장식이 금과 은으로 치장되었고. 이곳에 전시된 유물들은 화려기로 유명하다. 광장이 18개. 방 340여 개가 된다.
* 예레부스탄 지하궁전은 이스탄불에 남아 있는 몇 개의 저수지 중에서 이곳이 가장 크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처음 만들어 놓은 것을 유스티니우스 1세 때 확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비잔틴제국시대 이곳은 물이 부족한 이스탄불지역의 주요 저수지였고 그 뒤 오스만투루크 제국시대에는 토프카프 궁전의 저수지였다. 입구에서 계단을 내려가면 로마시대의 건물을 만나게 된다. 336개의 돌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이 건물이 넓은 지하공간을 만든다. 한 가지 놓칠 수 없는 것은 메두사의 머리다. 1984년 보수공사 때 처음 발견되었다. 뱀의 머리를 하고 눈을 부릅뜬 얼굴 조각상으로 가장 큰 기둥에 조각 되었다. 가이드는 그리스에서 약탈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의 돌 조각품을 약탈해서 지하 저수지의 기둥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강한 자의 만행이 아닐 수 없다
농업국가인 터키의 주요 작물은 밀, 쌀, 면화, 담배, 개암, 과일 등이다. 주요 가축은 양이며, 세계유수의 면화와 양모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공업은 급속하게 발전하여 농산물, 치금, 섬유, 자동차나 텔레비전, 농업 기기의 생산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터키에 산재하는 주요 광물은 석탄, 크롬, 철, 구리, 보크사이드, 대리석, 유황이다. 터키 음식으로써는 터키 커피, 케밥, 터키 홍차 등이 유명하다. 그 중에도 케밥은 세계적인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터키는 돌궐과 고구려의 동맹 이후로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다. 터키가 한국 전쟁 때 대한민국을 지원함으로써, 한국에서 잊혀져 있던 터키는 다시 '형제의 나라'로 재조명받고 있다.
터키는 유럽 정치권력의 중심지였다. 항상 힘의 중심축에 있었고 그런 만큼 많은 정치적 소용돌이를 겪어야 했다. 이곳은 일찍부터 그리스 신화의 핵심인 트로이 전쟁의 본고장이다. 그리스 신화에 유명한 트로이 유적이 지금에 이르러 발굴되고 있다. 이런 역사적 소용돌이 중에서 현재의 터키를 있게 한 케말 파샤는 민족의 지도자로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터키는 1919년 패전국이 되어 연합군에게 점령되었다. 그리하여 대부분은 영국의 지배하에, 이즈메리 지역은 그리스의 지배하에, 안토니아 지역은 프랑스 지배하에 있었다. 케말 파샤는 1920년 그리스 연합군의 침입을 저지하고 이즈메리 지역을 탈환했다. 그는 이 전쟁에서 그리스군 6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런 노력으로 1923년 로잔 조약에 의해 단독정부를 구성하고 영토를 회복했다. 그 이후 정치적 지도자로서 케말 파샤의 치적은 1. 1923년 민주공화제 선포. 2.1928년 언어개혁, 아랍어 중심. 3.1938년 여성 정치 참여. 4. 태양역 사용(아랍역 폐지). 5.일부다처제 폐지(그 이전 11명까지 허용) 등의 큼직한 일을 이루었다.
케말 파샤는 신식여성인 아내와 이혼하고 여러 명의 양녀를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중의 하나는 터키 최초의 공군 파이로트가 되었다. 여성의 사회참여의 모범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런 지도자의 노력에 힘입어 터키는 정치적으로 매우 안정적인 나라가 되었지만 아직도 쿠루드족 분리주의 자에 의한 저항이 끊이지 않고 있다.
* 한국공원은 한국 참전 용사의 무덤이 안치된 것을 기념하고 있고,
* 아타튀르크('투르크인의 아버지'라는 뜻)는 터키의 군인·개혁가·정치가이며 터키 공화국의 창시자, 초대 대통령으로 알려진 그는 터키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에 3국 동맹(영국·프랑스·러시아의 동맹)에 대항해 터키의 해방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그의 투쟁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신생국이 그들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도록 자극했으며 그의 묘를 구경한 후. 이스탄불로 이동했다
* 톱카프 궁전(보석관)=이스탄불에서 가장 볼 만한 곳으로 1478~·1853년 약 400년 동안 오스만제국의 지배자들이 살았던 성으로 400년간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에 있었다. 궁전의 메인 전시관인 보석관에는 에메랄드가 박혀 있는 단검. 세계에서 3번째로 큰 86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등을 구경한다.
토프카프 궁전은 포스포루스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언덕위에는 과거에 대포가 설치되어 있었다. 여기서 토프카프란 이름이 유래하게 되었다고 한다.
도자기관에는 특히 14~19세기 중국과 일본산 자기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토프카프 궁전은 중국산 자기 1만 2,000점과 일본산 자기 8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중국산 자기는 원, 명, 청 시대의 것으로 청자기와 백자기가 주를 이룬다. 중국산 도자기는 9~10세기경 중동 지역에 수출되기 시작하였는데, 오스만 조정에서는 중국산 자기를 대량 수입하여 즐겨 사용하였다. 일본 자기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에 들여온 것으로 큐슈 지방의 아리타에서 생산된 것인데, 선적한 곳의 이름을 따 붙인 이마리 도자기가 대부분이다. 일본산 자기 중에는 오스만 군주가 특별 주문하여 제작된 것도 있다.
마당 오른쪽에 있는 부엌 궁전은 군주를 비롯해 궁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직분에 따라 열 개의 별도 주방을 갖고 있었다. 하루에 두 번 궁중음식이 준비되었고, 해가 긴 여름철에는 해지고 두 시간 후쯤 군주와 하렘의 황실 가족들에게 음식이 제공되었다. 주방에서 만들어진 음식은 200여 명의 사람이 줄을 서서 접시를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식탁에 올려졌다. 궁전의 주방에서는 주로 양고기를 포함한 육류가 준비되었는데, 하루에 양 200마리가 소비되었다고 한다. 생선은 원하면 요리할 수도 있었으나, 거의 먹지 않았다.
세 번째 지복의 문은 군주와 군주의 측근만이 통과할 수 있는 문으로, 이 문 뒤에 있는 제3중정(III. Avlu)에서는 군주의 즉위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이곳에서는 남성 출입금지 구역으로 알려진 하렘이 있는데, 하렘 건물에는 약 250개에 이르는 방이 있다. 오스만 제국 전성기에는 쉴레이만 1세 시대에는 하렘에 사는 사람들의 수가 1,000명에 이르렀고, 군주가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는 곳으로 가는 비밀 통로도 만들어졌다. 지복의 문 바로 뒤쪽에는 외국 사절을 접견하는 알현 실이 있다. 또한, 이곳에는 오스만 제국 시대의 각종 보석과 보물을 전시한 보석관이 있다. 수없이 많은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가 박힌 선물들이 즐비하다. 성물관(聖物館)에는 1517년 셀림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가져왔다는 무함마드의 수염과 이빨, 그가 들었던 군기, 그의 발자국 주조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집트를 정복한 술탄 셀림 1세는 1516년 8월 칼리파직을 이양 받음으로써 이스탄불이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다. 칼리파란 이슬람 세계의 최고 통치자의 칭호인데, 이전에는 바그다드와 카이로가 이슬람 세계를 통치하는 주요 도시였다. 최근에는 이슬람 과학과 기술을 설명한 이슬람 과학관이 개설되었다.
*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 문 맞은편에 있는 올림포스산의 제우스에게 바친 신전 터. 4세기경 고트족의 침입으로 파괴되기 전에는 파르테논 신전보다 더 웅장했다고 한다. 원래 84개의 기둥이 있었으나, 지금은 코린트식 대리석 기둥 15개만 남아 있다.
11월 2일 (10일 째)
아침 식사 후 보스포러스 해협(흑해와 마르마라 해를 연결하여 터키의 아시아 지역과 유럽 지역을 가르는 해협)를 크루즈(정규선)한다.
* 그랜드 바자르= 그랜드 바자르 시장은 이스탄불에서 자유 시간을 으레 주는 곳이란다. 그랜드 바자르 시장의 쇼핑이다. 시장은 넓고 다양한 물건들이 많아서 여행객들을 즐겁게 한다. 여행객들은 온갖 희귀한 물건들을 골라 온다. 가면, 그림, 와인, 전통의상. 터키석. 인형. 홍차 잔. 옛날 동전, 가죽 가방 등등. 여기저기서 즐거움의 탄성의 소리가 쏟아져 나온다
아내는 금은의 장신구 악서사리 제품에 눈길을 보낸다. 상인들은 한국인의 대거 몰려가자 싱글벙글 하며 물건을 흥정했다. 자신의 가게에 없는 물건은 다른 가게에서 가져오기도 하고 다른 가게를 소개해 주기도 했다. 가이드의 조언을 받아서 물건을 대폭 깎아도 그들은 그저 웃으며 대응한다. 옆을 지나던 다른 사람들도 몰려온다. 나중에 서로 비교해 보니 그렇게 많이 깎았어도 산 값는 비슷비슷했다. 그러나 대부분 값싼 물건을 많이 샀다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듯했다. 아마도 나이든 사람들은 60년대의 동대문시장이나 남대문 시장을 연상했을지도 모른다. 시장에 가서 우리는 그 민족의 삶이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생생한 삶의 현장이 시장이기 때문이다. 한국인 자주 많이 다녀와서 그런지 한국말도 잘들 한다. 가난해도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들, 항상 싱글벙글 즐겁게 웃으며 지내는 사람들, 이곳에 가면 삶의 여유가 발견된다. 결국 삶의 참 된 가치는 이런 작은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일이 아니겠나 싶다. 시장에서 상인들과 웃으며 흥정을 하다 보면 이들이 매우 친근하다는 느낌이 든다. 18개의 출입구와 4천개이상의 상점들이 들어서있는 지붕이 있는 시장이란 뜻이며, 이곳에서 특히 많은 상품이 있으나 유독이 금은 세공품이 여려 종류와 온갖 모양을 가춘 아름다운 세공의 솜씨에 한번 놀라움을 갖게 하는 장소다. 여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상점들이 많이 있다. 이곳에서 이곳 주민이 한국말을 사용하는 것을 들으니 기분도 상승되며 흡족한 마음이 생겨 왠지 자랑스럽기만 하여진다. 사실 터키는 우리가 형제의 나라라고 부를 만큼 역사적 인연이 겹쳐 있다. 고구려 때에는 흉노, 또는 돌궐이라는 명칭으로 알려 졌고, 국민성이 깨끗한 것을 좋아해서 휴일 일과는 유리창을 닦는 일이다. 이웃들이 유리창을 닦으며 서로 건너다보며 대화를 나누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한다. 깨끗해야 집 안으로 복이 들어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곳은 아직도 남성중심 사회로 특징이 두드러진다. 사람들이 대바구니에 물건을 담아서 끌고 다니는 이색적인 풍경을 볼 수 있다. 특히 지방으로 갈수록 여성의 활동은 더욱 위축 되고 있으며, 서부는 남성 정치의 중심지이고 동부는 여성 사교장의 모범이다.
* 예레부스탄 지하궁전은 이스탄불에 남아 있는 몇 개의 저수지 중에서 이곳이 가장 크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처음 만들어 놓은 것을 유스티니우스 1세때 확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비잔틴제국시대 이곳은 물이 부족한 이스탄불지역의 주요 저수지였고 그 뒤 오스만투루크 제국시대에는 토프카프 궁전의 저수지였다. 입구에서 계단을 내려가면 로마시대의 건물을 만나게 된다. 336개의 돌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이 건물이 넓은 지하공간을 만든다. 한 가지 놓칠 수 없는 것이 메두사의 머리다. 1984년 보수공사 때 처음 발견되었다. 뱀의 머리를 하고 눈을 부릅뜬 얼굴 조각상으로 가장 큰 기둥에 조각 되었다. 가이드는 그리스에서 약탈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의 돌 조각품을 약탈해서 지하 저수지의 기둥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강한 자의 만행이 아닐 수 없다.
* 오벨리스크(오벨리스크=바늘)는 높고 좁으며 4개의 면을 지닌, 점점 가늘어지는 피라미드 모양의 꼭대기를 지닌 기념 건조물이다. 고대 오벨리스크들은 한 덩어리의 암석으로 만들어졌다. 오벨리스크에는 전승을 기념하거나 왕의 위업을 과시하는 문장이나 모양을 새겼는데, 태양 숭배 즉 태양신과 혹은 호루스와도 관계가 있다고 한다. 현존하는 최대의 것은, 이집트 제18왕조 하트솁수트 왕의 카르나크 신전에 세운 것으로 높이 30m이다. 이보다 작은 이곳에 있는 것을 구경한다.
시내관광 후 이스탄불공항에서 인천으로 ke956편 21시 20분 출발을 하기위해 미리 공항에 도착하여 지루한 시간을 보낸다. 다른 사람들은 마지막 여행지라서 그런지 선물들을 사려고 분주히 다닌다.
11월 3일(11일째)
터키 국민들은 대체로 활기가 넘쳐 보이며, 미소가 많아 보이는 사람들이라고 느껴지며 대하기가 편하다. 이번 여행에서 외국의 보다 좋은 면을 더 배우고 귀국하게 되어 기쁜 마음이다. 인천공항에 오후 1시 10분에 도착했다.
첫댓글 잘읽어 보았습니다. 저도 다녀왔는데요 .선생님이 글을 올린것보니 영화필림처럼 생각이 나는군요. 수고 하셧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