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의 태실에 관한 연구 - Ⅱ.울진지역 소재 태실 - 2.羅谷胎室
2.羅谷胎室
1)位置와 自然環境
나곡태실(나실태봉)이 위치한 곳은 행정구역상으로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나곡 4리"에 해당되며
자연부락명칭으로는 "胎封"으로 불려지고 있다.(도면3)
북면 원자력발전소 정문에서 7번국도를 따라 삼척방면으로 4.3km정도 가면 도로 왼쪽에 "나곡4리"마을 표석이 나오고, 여기로 들어서면 마을 바로 앞 검성리로 가는 방향의 태봉교 옆 태봉산이
나타난다.
나곡태실은 主山으로 보이는 산의 북쪽으로 경사를 두고 뻗어내린 산줄기의 말단부에서 봉긋하게 솟아오른 봉우리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사진18)
태실이 위치하고 있는 봉우리의 모양새는 흡사 삿갓을 놓은 듯한 형상이어서 주산에서 뻗어내린
방향인 배후산측의 경사가 약 17°인 것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삼면의 비탈면은 약 40°내외의 경사
를 이루고 있으며, 태봉산의 바로 아래에는 서쪽에서 흐르는 조그마한 내가 태봉산의 북쪽으로 돌
아 동해안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태봉산 주위로는 논이 형성되어 있고 동북쪽으로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태실이 자리한 태봉산 주위에는 左靑龍, 右白虎의 역할을 하는 산줄기가 태봉산을 감싸안듯 돌려져 있다.
이 태봉산에는 소나무가 주종을 이루며 태실이 위치한 봉우리 정상부에는 노간주나무가 밀생하여 있다.
2) 胎室의 現況
태실이 위치한 봉우리의 정상부는 원형평탄지(지름 6m)로 되어 있으며, 그 중앙에 굴토된 흔적이
있다. 이 평탄지의 중심부에 태실이 조성되었음을 알리는 아기태실비(阿只胎室碑)가 정상의 북동
쪽 방향에 세워져 있으며 비는 앞면 방향인 북동쪽으로 5°기울어진 상태로 있다. 이 아기태실비의
뒤편 남서쪽으로 1m떨어진 곳에 원형구멍(지름 2m ×깊이 0.5m)이 움푹 파인 흔적이 있다. 이것은 도굴에 의한 굴토 흔적으로 마을 주민에 의하면 비 뒤의 이 구멍이 胎函(圓形蓋付石函)이 묻힌 자리라고 한다.(사진19)
3)文獻資料
나곡태실에 관한 기록으로는 여러 문헌에 나타나고 있는데,
『蔚珍郡誌』上 舊誌 古蹟條에 의하면
"胎封은 在郡北羅谷里胎封洞葛嶺越便山南麓하니 宣祖四十一年 戊申(萬曆三十六年)에 封王女阿只胎
室하고 築壇建碑하야 名其地曰胎封이라"라 하고
『江原道誌』卷3 古蹟名所條의 蔚珍편에 의하면
"胎封 : 在郡北羅谷里胎封洞葛嶺越便山南 宣祖戊申封王女阿只胎室 壇建碑名其地曰胎封"라 하고
『한국지명총람』7에 의하면
"태봉-산(胎峯山) 【산】북면 나곡리와 검성리 사이에 있는 산.
높이214m. 광해군 11년(1619) 6월 23일에 낳은 공주의 태를 묻었음."
"태-비(胎碑) 【비】태봉산 위에 있는 차돌로 된 비. 높이 약 1m. 광해군 11년(1619)에 낳은 공주
의 태를 묻고 같은 해 11월 4일에 비를 세웠음."라 하고
「朝鮮時代 胎室에 관한 一硏究」에 의하면
"墓主人公 : 王女阿只氏
所在地 : 慶南 蔚珍郡 北面 羅谷 4里
時 期 : 萬曆 47年(光海君 1年)
碑 銘 : 碑前面 ; 王女阿只氏胎室, 碑後面 ; 萬曆四十七年六月二十三日生"라 하고
『鄕土史硏究』第二輯 胎封古事에 의하면
"北面 羅谷 4里 胎封洞 나곡국민학교에서 서쪽으로 約 800m쯤 가면 王女阿只의 胎室이 있다. 이곳
은 當時 宮中 法度에 따라 王의 權威를 全國에 宣揚할 目的으로 王女의 태반을 이곳에 묻게 하고
비를 세운 것인데 이로 因하여 이곳 地名을 胎封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지금도 높이 約 100m되는
조그마한 봉우리위에 큼직한 碑가 서 있어 碑面에 萬曆三十六年戌申王女阿只胎室이라 기재되어 있다. 생각 컨데 萬曆 36年은 李朝 14代 宣祖 41年에 해당되는데 宣祖는 宣祖 41年 2月에 在位 41年 春秋 57歲로 돌아 가셨으니 이 胎封古事는 宣祖가 돌아가시던 해에 일어난 일임으로 宣祖의 끝 아
이인 10女 貞和翁主의 胎室이 틀림없으리라 본다.
貞和翁主는 溫嬪韓氏의 小生으로써 東昌尉 權大恒의 妻가 되는 분이다. 그런데 지난 1968年頃에
서울에 있다는 靑年 두 사람이 와서 胎室附近을 배회하는 것을 간첩으로 誤認하여 警察에서 逮捕하였는데 調査結果 고분 도굴자들로서 未遂에 그쳤기에 訓放했는데 그후 그들이 다시 와서 自動車用 "작끼"로 胎室 윗 뚜껑(가로 1.5m, 세로 1m, 두께 30cm)을 들어 올리고 그 속에 있는 금요강을 훔쳐갔다 한다."라 하고
『전국문화유적총람CD-ROM』제3집에 의하면
"울진태봉산 비석은 대리석으로 이수와 비신을 1석으로 깍고 비좌는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이 비석
은 전면의 ‘萬曆四十七年六月二十三日生 王女阿只氏胎室’이라는 글귀로 보아 조선 광해군 11년
(1619)에 만든 공주의 태실이다. 胎峯의 유물은 모두 도굴되어 없어졌다고 한다.
비 전체높이는 1.62m, 전면자경 2.5cm인데, 비좌에는 장방형으로 치석하고 전면에 2條의 방형을
음각하고 眼像을 刻出하였으며 얹히는 면에는 覆蓮을 새겼다."라 하고
그 외에 간략하게나마 나곡태실을 소개한 문헌이 몇있으나 앞에서 소개한 문헌들과 함께 실제 조
사내용과 틀린 것이 많아서 이번 기회에 바로 잡고자 한다.
4)胎室石物과 遺物
(1)아기태실비(사진20∼28)
아기태실비는 碑首와 碑身이 한 돌(一石)로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碑座가 또 다른 한 돌로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다.
아기태실비의 전체높이는 168cm인데, 비수의 높이는 34cm, 너비 61cm, 두께 28.5cm이며, 그 중 보주만의 높이는 10cm, 둘레는 59cm이고 비신의 높이는 91cm, 너비 52cm, 두께 20.7cm이다.
비좌의 높이는 43cm, 너비 91.5cm, 두께 58.3cm이며 碑座口는 가로 55cm, 세로 22cm이다.
비수에는 앙련과 보주가 장식되어 있으며 앙련의 위쪽에는 연꽃줄기를 형상화한 조각이 양각되어 있어 꼭 연꽃봉오리를 뒤집어서 덮어놓은 듯하다. 비좌는 장방형을 이루고 있는데, 그 윗면은 네모
서리 각을 죽여 비스듬하게 깍아 복련으로 양각장식되어 있으며 비좌의 앞면과 뒷면에는 2개의 안
상이, 좌우 양측면에는 1개의 안상이 음각장식되어 있다.
비신은 잘 다듬어서 표면이 반질반질하며, 이 비신의 앞뒷면 중앙부에는 楷書體로 2cm내외 크기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는데, 앞면의 위 2자만 훼손되어 잘 알아볼 수 가 없으며, 나머지 글자는 선명하게 잘 나타나 있다. 앞면은 22자, 뒷면은 13자로 모두 한 줄로 세로로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을 보면
前面 : (皇明)萬曆四十七年六月二十三日生王女阿只氏胎室
後面 : 萬曆四十七年十一月初四日立
으로 앞면의 판독되지 못한 2자는 자세히 보면 " "로 볼 수 있는데, 다른 곳의 태실비의 예와
현재 확인할 수 있는 남은 자획으로 보아 "皇明"임이 분명하다.
이는 광해군 11년(1619년, 己未, 萬曆 47년) 6월 23일에 태어난 왕녀 아기(阿只)의 태를 그 해 11
월 4일에 안치하고 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2)태지석
태지석은 가로 27cm ×세로 27cm의 크기로 글씨체는 楷書體로 음각되어 있다. 제작시기는 1619년
이다. 명문수는 38자이고 字徑은 1.5cm이다.
글씨 내용은 다음과 같다.
前面 : 皇明萬曆四十七年六月二十三日亥時生
王女阿只氏胎
後面 : 萬曆四十七年十一月初四日己時藏
출토지는 未詳이라 하나, 앞에서 설명한 나곡태실의 아기태실비와 내용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이전에 도굴되었던 나곡태실의 태지석이 분명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5)胎主檢討
아기태실비와 태지석의 명문을 판독한 결과에 의하면, 태실의 胎主는 광해군 11년 6월 23일 오후
9∼11시 사이에 태어난 왕녀 아기이다. 그리고 장태는 그 해 11월 4일 오전 9∼11시 사이에 행해졌
다.
이 태실의 胎主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光海君의 家系를 살펴 볼 필요가 있는데,
『璿源錄』에 의하면
" 宣祖大王 ... 二男 光海君...娶文化柳氏 ...一男 桎 年戊戌 娶密陽朴氏...妾一女 己未
朴生遠... "
으로 광해군은 2명의 부인에게서 1남 1녀의 자식을 낳았는데, 문성군부인 柳氏에게서 戊戌年(1598
년, 선조 31년, 만력 26년)에 폐세자 桎을, 숙의 尹氏에게서는 己未年(1619년, 광해군 11년, 만
력 47년)에 옹주를 낳았다.
숙의 윤씨에게서 태어나 朴生遠에게 시집간 옹주의 출생년도인 己未年은 나곡태실의 아기태실비와 태지석에 나타난 生年(만력 47년)과 같으므로, 바로 이 옹주가 나곡태실의 胎主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