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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스타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눠봤지만 그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단 두 가지로 압축된다. 또 만나고 싶은 사람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 배우 엄지원은 그런 의미에서 전자에 속하는 대표적 케이스다. 엄지원을 처음 본 것은 지금으로부터 딱 1년 전이다. 우정 출연했던 영화 <야수> 개봉을 앞두고 인터뷰 촬영을 하기 위함이었다. 워낙 콧대 높은 깐깐한 여배우들에게 많이도 치여본 탓에 그녀들에게 적당히 웃어가며 비위를 맞추는 노하우는 이미 터득했던 터라 엄지원과의 첫 대면 역시 무난하게 촬영을 끝마쳤다. 저녁이 되어 와인을 겸한 인터뷰가 이어졌다. 술이 조금 들어가 자리가 편안해지자, 누구보다 활발하고 쾌활하며 심지어 털털하기까지 한 엄지원의 진짜 매력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나만이 알고 있던 엄지원의 진짜 매력을 <에스콰이어> 독자에게도 전할 시간이다. 소문만 무성하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영화 <가을로>가 드디어 개봉한다는 소식에, 촬영을 마치고 40일이 넘게 뉴욕을 다녀온 그녀를 만났다.
“윤세진이라는 여자를 연기했어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생존자 역인데, 외상 후 장애를 겪고 있죠. <가을로>란 영화는 사랑을 잃어버린 한 남자와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갖게 된 여자가 여행의 끝에서 삶의 희망을 발견한다는 주제를 담고 있어요.” <가을로>의 감독은 김대승이다. 임권택 감독의 오랜 수제자 생활을 거쳐 <번지점프를 하다> <혈의 누>를 만든, 배우라면 누구나 같이 하고 싶어 한다는 스타 감독이다. 그러고 보니 엄지원의 필모그래피에는 늘 당대 최고의 감독이 함께했다. 배우라는 타이틀을 달아준 <똥개>의 곽경택부터 그 타이틀을 확인시켜준 <극장전>의 홍상수 모두 그렇다. “영화를 선택할 때 첫 번째로는 시나리오, 다음은 감독을 봐요. 영화가 제게 맞을 것인지의 여부는 감독을 직접 만나보면 알 수 있죠. ‘저 사람은 내가 믿고 갈 수 있겠구나’ 하는…. 김대승 감독님은 칭찬 안 하면 100년간 서운해하기 때문에 꼭 해야 해요(웃음). 무엇보다 김대승 감독의 장점은 본인 스스로 자신의 영화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인 것 같아요. 배우들이 선호하는 이유는, 상업적인 면과 작품적인 면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능력 때문일 거예요. 완벽하지 않으면 절대 오케이 하지 않는 그의 성격이 배우 입장에서는 든든하다고나 할까? 내 것만 잘하면 그 외의 상황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요.” 정말 환하게 웃는 실제의 엄지원과 그동안 보여줬던 작품 속의 캐릭터가 사뭇 대조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우울하고, 상처 많고, 비밀스러운, 어딘가 폐쇄된 듯한 모습이 그녀가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보여준 대부분의 역할이었다. 이번 <가을로> 또한 대사보다는 내면 연기가 주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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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작품은 <진주라 천리길>이라는 밝은 로맨틱 코미디물이에요. 건방지지만 이제 우울한 역할은 <가을로> 이후 당분간 쉬고 싶어요. 사실은 <가을로>의 세진이 역이 참 힘들었거든요. 깊건 얕건 간에 캐릭터 자체가 슬픔이나 고통에 처해 있으면 배우 역시 어느 정도 영향을 받기 마련이니까요.” 차분하게 필모그래피를 쌓아오면서 캐릭터에서 빠져나오는 법도 조금씩 깨달았다는 그녀의 연기력은 감독들에게는 인정받기 시작했으나 비교적 관객 수나 상에서는 운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욕심은 없을까? “관객이 많이 들어 히트작을 내면 스타 파워가 생기고 상업적인 면에서도 성공할 수 있겠지만, 전 그냥 제 연기를 인정해주는 감독님과 팬들이 계시다는 것으로 만족해요. 이것은 또 다른 기회가 있다는 것 아니겠어요? <가을로> 역시 잘되면 좋은 거고 안 돼도 할 수 없죠, 뭐. 그래도 작업 자체의 결과물이 제가 만족할 정도로 나왔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껴요. 참, 상복은 없었던 것 같아요. 언젠가 하나는 받아야겠죠.” <가을로>와 같은 날에 개봉하는 할리우드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부담되지 않느냐니까, 뉴욕에서 이미 봤지만, 개봉하면 또 볼 거라며 재미있다고 치켜세운다. ‘쌩얼 미인’이라 불릴 정도로 피부가 좋다는 칭찬에, 이제는 관리해야 한다면서 난생처음 30만원이 넘는 고가의 화장품을 3개월 할부로 산 이야기를 유쾌하게 꺼낸다. 배우라고 다 이렇게 기자 앞에서 자신의 감정 상태에 쉽게 몰입해가며 솔직할 순 없다. 내 앞에 있는 자가 조신한 캐릭터의 여배우, 엄지원이 맞는지 일순 착각까지 들정도였다. “스타 의식은 진짜 별로 없는 편이에요.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한 계단씩 천천히 올라갔기 때문이겠죠. 사람들 눈에 띄는 게 싫으면 그냥 안 나가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배우란 직업의 숙명이죠, 뭐. 팬을 향해 활짝 웃어주는 것은 연기가 아니라 제가 해야 할 도리고 진심이니까요.” 며칠 전, 엄지원에 대한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했다.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 엄지원의 벅찬 눈물과 함께 순조로운 개막’.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 영화로 선정된 <가을로>의 주연 배우 자격으로 인사를 하던 도중 거의 얼굴의 반을 적실 정도로 눈물을 쏟아냈던 것. 시상식도 아닌 개막식 행사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흔치 않은 경우라, 현장에 있던 관계자나 네티즌 모두 궁금하다는 반응을 쏟아냈다. 사회를 본 안성기는 “엄지원 씨가 저러는 거 보니까, 이야… 나중에 꼭 영화구경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녀를 안 이상 그것은 결코 우아한 가식이 아니었다. “민망해요. 촬영을 하던 지난 10개월의 긴 시간이 문뜩 떠오르고, 전국 각지를 돌며 힘들게 81회 차의 촬영을 하던 생각이 불현듯 나니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어요. 그 앞에 모인 1만여 명의 관객들도 너무 소중했고요.” 많은 여배우가 생존 전략으로 솔직함을 택한다. 이것은 때론 우아한 가식으로 포장되어 대중의 눈을 가리고, 밝힐 것과 밝히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성공하여 진실만을 말하는 듯한 눈빛으로 대중을 설득하기도 한다. 그러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보여준 엄지원의 행동은 이러한 여배우들의 전략과는 거리가 먼 진짜 엄지원다운 것이었다. 카메라 플래시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힘차게 손을 흔들고, 입을 벌리며 놀라고, 관객의 반응에 눈물까지 흘리는 것, 이 모두는 그 어떠한 여배우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녀이기에 가능했던 것이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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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이 되고 나니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갈 수 있는 것 같아 즐거워요. 여자로서는 잘 모르겠고요(웃음). 도저히 안 되는 것은 인정하는 포용력도 생기고, 한결 여유로워졌죠.” 그녀의 말을 찬찬히 들어보니 문득 서른이란 나이가 부러워졌다. 나 역시 가끔 “나도 날 잘 모르겠어”라는 식으로 자신에 대한 정답은 회피하고 말았으니까. 엄지원에 대한 부러움은 서른이란 나이뿐만이 아니었다. 며칠 전 한 지인이 그녀의 유창한 영어 실력을 보고 깜짝 놀라던 것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주홍글씨>의 첼리스트 역할 역시 오랜 시간 영화를 위해 준비한 첼로 연습 덕에 한결 빛났다. “어떤 목표가 생기면 별 잡념 없이 그냥 쭉 하는 편이에요. 목표를 이루고 말겠다는 심한 집착을 가지면 행복하지 않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가족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어요. 쉰 살을 바라보시지만 어머니는 중국어 공부에 여념 없으시고, 아버지와 언니 역시 늘 무언가 공부하는 스타일인 덕에 자연스럽게 그랬던 것 같아요.”
촬영을 마치고, 저녁 식사로 삼겹살을 구워 먹는 도중 엄지원이 입을 열었다. “사실,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누구 못지않게 힘든 무명 시절을 거쳤죠.” 지리학과 학생에서 우연한 기회에 모델로 데뷔해 쇼 프로그램과 다양한 작품의 조연을 거쳐 지금의 배우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기까지 그녀는 정말 야무지게 꿋꿋이 발전해왔다. 첫 영화였던 <찍히면 죽는다>의 연기에 실망한 나머지 2년여간 두문불출하며 연기 수업에 매진했고, 아침 드라마 <황금마차>의 호연 후 영화에 재도전하기 위해 <똥개> 오디션만 세 차례나 치러내며 배역을 따냈다. 약해 보이지만 강단 있는 내공으로 차근차근 한 단계씩 올라선 여배우, 엄지원. 대중이 그녀를 사랑스럽게 보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가슴속에 품은 별을 꼼수 부리지 않고 착실하게 머리 위로 떠오르게 만드는 ‘지혜로움’을 지녔기 때문이 아닐까? “다음 작품이 끝나면 인도의 사막에 가고 싶어요. 침낭을 덮고 누워 있으면 하늘에 담긴 수많은 위성과 별이 떨어지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게 보인대요. 그러다 보면 눈물도 같이 떨어지고, 그것을 겪고 나면 많이 성숙해질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눈물을 흘릴수록 성숙해가는 배우 엄지원의 내일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자료 출처 : 에스콰이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