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8월 14일, 방한 첫날 한국주교단과의 면담을 위해
천주교중앙협의회 소성당으로 입장하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8월 14일 방한 당시 한국 주교단과의 만남에서 사전 배포된 원고에는 없던 아래 내용을 추가하면서까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한국교회에 주문하였다. 그는 한국교회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여러분의 교회는 번영하는 교회이고, 선교하는 훌륭한 교회이고, 커다란 교회입니다. 교회의 예언자적 구조에서 가난한 이들을 제거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마십시오.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 하나의 웰빙 교회, 그런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교황의 권고는 죽비소리처럼 매섭다. “이는 정신적 웰빙, 사목적 웰빙에 대한 유혹입니다. 곧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아니라 잘사는 자들을 위한 중산층의 교회가 되려는 유혹입니다.”그는 왜 이런 염려를 하는 것일까.
2014년 한국 천주교회 통계에 따르면 한국가톨릭 신자수는 556만 971명으로 우리나라 전체 인구 5241만 9000여 명 가운데 10.6%를 차지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제까지의 꾸준한 가톨릭 성장세는 대사회적 정의ㆍ인권활동과 나눔, 성직자와 수도자의 청렴성과 종교적 헌신 등에서 타종교와 차별화한 결과로 분석되고 있다.
하지만 신자비율에 있어 서울특별시, 그 중에서도 강남지역이 월등히 높은 등 도고촌저(都高村低)의 도시집중화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도시화, 특히 사회적 영향력 증대와 교회성장 사이에 밀접한 관련성이 있었다는 의미다. 이것이 교황이 염려한 번영의 신학과 웰빙 교회를 추구하는 교회의 중산층 현상과 보수화를 촉진시키고 있다.
명동성당의 극적인 변화는 그 단적인 예다. 그때 그 시절 명동성당은 벼랑 끝에 내몰린 사회적 약자들의 피난처였으며, 오랜 시간 모두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문을 걸어 잠근 명동성당, 특히 ‘재개발’된 명동성당에 사회적 약자들을 받아줄 피난처는 없어 보인다.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힘없는 이들에게 희망이었던 성당 언덕이 이젠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숨차다.
문제는 교황의 염려대로 한국가톨릭교회가 비복음적 유혹에 빠져들고 있는데, 그를 막아야할 교회언론이 자기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흐름에 휩쓸려가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양식있는 이들이 던지는 ‘한국가톨릭교회에 언론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늘 뼈아프기만 하다.
지난해 11월 13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는 취임 첫 기자회견 자리에서 국내 일간지 기자들을 향해 “언론인들도 성직자들인데 성직을 잘 수행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일반 언론의 역할이 성직 수행이라면, 교회언론이야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사회에 대한 무감각·무관심·무책임의 3무(三無) 교회언론
흔히들 한국가톨릭 교회언론을 사회에 대해 무감각·무관심·무책임으로 일관하는 3무(三無) 언론이라고 비판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은 교회는 ‘세상의 모든 것’을 복음의 빛으로 밝혀줄 의무가 있다고 하였지만, 한국가톨릭교회의 양대 교계언론 <평화신문>과 <가톨릭신문>은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까막눈처럼 보여 진다. 교회가 엄연히 세상 속에 존재하는데, 두 신문은 교회와 ‘직접’연관되지 않으면 세상의 그 어느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을 뿐 아니라 ‘일란성 쌍둥이’라 느껴질만큼 1면 톱에서부터 지면구성까지 차별성이 없어 혹여 ‘보도지침’시대를 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의혹마저 들게 한다.
최근 몇 년 사이에도 세상에는 가슴 아프고 슬픈 일들이 무수히 펼쳐졌었지만, 두 신문의 지면은 오로지 What a beautiful world! 용산에서 폭력 진압으로 세입자들이 불붙은 몸으로 추락사해도, 4대강이 썩어가도, 강정과 밀양에서 공권력 발길질에 마을주민들이 쓰러져가도, 쌍용차 해고자들이 줄지어 죽음의 길로 떠나가도, 김진숙의 한진중 고공농성이 한 해를 넘겨도, 대선 부정으로 헌정 질서가 흔들려도, 생계형 자살이 이어져도, 세월호 비극에 온 국민이 피울음을 삼켜도, 교회의 품에 갇힌 두 신문은 게토적 행복에서 깨어날 줄을 몰랐다. 지금 교회언론이 존재감이 없는 이유는, 바로 고난의 현장에 함께 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동일한 사회문제일지라도 교회와 직접 관련되면 그런 3무적 감각에서 홀연히 깨어난다는 점, 상징적 사건이 2009년의 용산 4구역과 가재울 4구역의 재개발 보도였다. 용산 참사에는 눈 감던 두 신문이 정진석 추기경이 가재울 뉴타운 사업으로 철거 위기에 처한 가좌동성당을 ‘위로 방문’한 일은 “성당은 재개발 대상이 아니다”라며 대서특필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로’라는 정교분리원칙이 여기에도 적용되는가.
거기에다 더욱 안타까운 점이 최근에 와서 <가톨릭신문>보다 87년 민주화체제의 소중한 결실 <평화신문>이 ‘가톨릭 조선’이란 비판까지 받을 정도로 보수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30일자의 ‘전국 교구장 2015년 사목교서 발표’기사는 그 비근한 예다.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라는 <가톨릭신문>에 비해 <평화신문>은 “성경과 기도 중심의 삶으로 새로운 복음화에 나섭시다”를 타이틀로 뽑았다. 소속 교구장의 “기도는 새로운 복음화의 활력”이라는 사목 지침을 외면할 수 없는 점을 감안할지라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과 더불어 전국 교구장 사목교서 주제 그 흐름이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으로 나아가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아쉬움이 들었다. 그나마 양대 언론이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이후 조금씩 변화의 몸짓을 보이며 사회문제에 눈뜨고 있는 점은 고무적이다.
▲ 전국교구장 <2015년 사목교서> 발표 소식을 1면에 게재한 <평화신문>과 <가톨릭신문>
사회적 관심과 교회 내부 비판에 있어 교회언론은 외눈박이 되지 않아야
거기에다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종교를 걱정한다’는 이 종교 위기 시대에 교회언론이 교회 내부 비판에 교회언론이 손 놓고 있는 점은 또 어떠한가. 개신교 대형 교회들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스캔들이 헌 가죽부대처럼 터지는데서 알 수 있듯이, 교회인들 비리·부조리·불의가 왜 없겠는가. 강남지역의 가톨릭 신자비율이 전국 평균을 곱절로 상회한다는 사실이 말해주듯 한국가톨릭교회는 이미 우리 사회 기득권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가톨릭교회가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력이 높아져 가면서 사회 흐름을 주도할 만큼 주류화 되었다는 의미이고, 교회 쇄신과 사회 개혁이 이미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길이라는 의미다. 교회언론이 내부 감시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사회문제에도 둔감한 교회언론에게 교계 내부 감시자 역할을 기대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인가. 물론 교회언론이 언론으로서의 제 기능을 못할 만큼 이토록 위축된 것은 교구 소속에다 교구가 스폰서라는 요인뿐 아니라 폐쇄적인 교계제도 안의 언론이라는 특수성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참된 교회가 없으니 올바른 교회언론도 없다’는 말처럼 교회언론은 결국 교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교회언론의 예언적 비판기능 상실은 작금의 교회 보수화의 결과이자 교회가 예언적 누룩을 버린 현실의 반증이다. 교회언론 종사자들이 ‘가톨릭이념과 저널리즘의 충돌과 조화의 어려움’을 털어놓지만 예언적 비판기능 앞에 가톨릭이념과 저널리즘은 전혀 어색하지 않게 하나로 만날 수 있다.
현재의 교회언론이 이런저런 곤란지경에 처해 있지만, 편집권 독립을 투쟁으로 쟁취해서라도 대사회적 대교회적 비판기능만큼은 회복시켜야 한다. 교회언론은 교권을 눈치 보는 일 없이 오로지 언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며 사실과 진실 추구에 매진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 역시 복음적이라면 교회언론의 언론자유와 편집권 독립은 보장해주어야 한다. 언론이 살아있지 않는 곳은 반드시 부패한다. 드러나지 않아 안으로 곪는 부패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없다. 까막눈 교회언론을 즐기다보면 교회 역시 언젠가 치명타를 입을 것이다. 거기에다 1990년대 이후 인터넷 시대가 도래하면서 교회 내부 문제들의 사회적 확산을 통제하기 힘들어지자, 교회언론에 대한 교권의 호교론적 통제가 더욱 강화되는 느낌이다. 심화되는 교회언론의 순치는, 교회 전체를 위해서도 대단히 불길한 상황 전개가 아닐 수 없다.
▲ 비교계 가톨릭교회언론 <지금여기>와 <가톨릭프레스>
교회에 예언적 자극을 주고 야성을 회복시키는데 교회언론이 앞장서야
교회언론의 이런 행태는 역으로 교회의 야성을 잃게 만드는데 일조한다는 것에 심각성이 있다. 과연 작금의 한국가톨릭교회에 사회복음화를 위한 ‘예언적 자극’을 사회에다 줄 수 있는 교회 장치들이 온전히 작동되는가. 오히려 교회마저 시대의 흐름을 좇아 견고한 보수성(保守城)을 쌓아올리고 있지 않은가. 가난한 이들이 마음 편하게 어깨 펴고 들어갈 성문(城門)은 폐쇄된 지 오래, 교회의 들판에선 예언적 외침이 들리지 않고 교회의 언덕에선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다.
복음의 시작인 광야의 소리, 평생을 광야에서 살았던 야인(野人) 세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 앞서 복음의 길을 닦은 교회의 모태요 텃밭이었다. 공생활을 앞둔 예수께서 광야의 사람을 굳이 찾아가 세례 받으시고,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래아에서 활동을 시작하신 것은 교회의 눈길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런 야성(野性)이 세속에선 본류가 아니라 지류로 여겨지나 교회만큼은 야성이 본류이다. 교회가 그 야성을 잃어버릴 때면 곧장 교회다움을 잃고 부패에 빠져들고 불의에 귀 어둡고 눈멀어졌지만, 교회 안에 야성이 살아 숨 쉬고 예언적 자극을 주는 장치가 온전히 작동할 때면 그리스도의 영성으로 충만하였다. 교회쇄신이란 결국 ‘야성의 회복’외 다른 말이 아니다.
그 예언적 자극을 주고 야성을 회복시켜 교회를 교회답게 복음적으로 만드는데 있어 교회언론의 역할 그 중요성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정론직필의 교회언론이 필요한 이유다. 한국가톨릭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비록 인터넷언론이지만 비교계언론 곧 제도권 밖의 교회언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5년 전에 출범한 것은 그런 오랜 갈망의 결과물이었다. ‘교회에 약이 되고 세상에 밥이 되는 언론’이라는 기치를 내건 교회언론 <지금여기>는 그동안 양대 교계언론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인 용산, 대한문, 쌍용차, 4대강, 밀양, 광화문, 두물머리, 강정 등에서 일당백으로 눈물과 피땀 흘리며 고군분투하였다. ‘다다익선’이라고 이런 가톨릭 대안언론들이 곳곳에서 많이 생겨나 교회 쇄신의 촉진자 역할을 각자의 위치에서 다양하고도 온전히 다하게 되기를 바란다. 쇄신과 개혁의 시작은 언제나 언로의 확보에서부터 비롯되는 까닭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하는 교회언론에서 더 나아가 가난한 이들의 교회언론 되기를
<가톨릭프레스>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 폐막 반세기인 뜻 깊은 해에 교회 쇄신과 사회민주화의 깃발 아래 새로운 교회언론을 표방하며 출범했다. <가톨릭프레스>가 교회언론을 넘어 우리 사회에서 자기 소리조차 낼 수 없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는 착한 사마리아인 같은 언론이 되었으면 한다. 그들의 소리가 하느님의 소리(Vox Populi, Vox Dei)로 세상과 교회 안에 다시 울리도록 하는 예언적 외침이 되라는 것이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그렇게 외친 그분은 세상으로 강생하신 하느님의 말씀, 하늘로부터 파견된 언론이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고 자신의 사명을 선포하셨던 그분. 교회언론의 사명 역시 그러할 수밖에 없다고 보면 교회언론이 머물 눈길과 들을 귀와 외칠 입술에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운명적이다. 하지만 나는 <가톨릭프레스>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가난한 이들이 독자가 되고 그들이 애써 찾아 읽고 싶어지는 ‘첫 번째’교회언론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그분의 둘레에 가난한 이들이 늘 함께 했듯이 말이다. 그렇게 그분의 삶과 뜨거운 가슴 그 불씨를 지금 이 시대에 다시 살리는 <가톨릭프레스>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 필자 정중규
[덧붙이는 글]
정중규: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부소장. 천주교 대구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인권복지위원. 정책네트워크 내일 장애인복지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