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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은혜동산 JESUS - KOREA 원문보기 글쓴이: 죤.웨슬리
출애집기(出愛執記) ― 어느 시골 목사의 고백록 ― 김종길(金宗吉)
1. 국민교육헌장의 추억 바람을 타고 흘러간 세월은 빛바랜 추억이 되었다. 쓸쓸하고 아련한 추억을 공유한 이들을 만나서 따뜻한 차 한 잔 나누고 싶다. 이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를 풀어내려 한다. 마음을 열고 내 이야기를 들어줄 벗이 있으면 좋겠다. 넋두리가 지루하더라도, 귀를 기울여주면 고맙겠다. 청소년 시기에 나는 심한 우울증과 심기증(心氣症)으로 부대꼈다. 불안과 허무의 기분에 사로잡혀, 견디기 힘든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국민교육헌장’의 마지막 문단에 나오는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이라는 구절이 가슴에 와 닿았다. 목표를 잃고 정처 없이 방황하던 나는 국민교육헌장을 이정표로 삼았다. 일본의 ‘교육 칙어’를 모방한 국민교육헌장을 높이 평가할 의도는 없고, 당시에 그것이 나에게 영향을 미친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학교생활에서는 신념과 긍지를 찾지 못하고 매사에 의욕을 상실했다. 유신 교육을 내세워 군대식으로 간섭하고 통제하는 학교가 감옥처럼 여겨졌다. 나는 억압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더 이상 모범생이나 착한 아들을 연기하고 싶지 않았다. 자기불신과 열등감에 부대끼는 나에게는, 건전한 ‘자신감’과 건강한 ‘자존감’을 지니는 일이 절박한 과제였다. 그래야 권태와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념과 긍지”를 찾아서 홀로 길을 떠나기로 했다.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칠 무렵에 주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 사건으로 어머니는 크게 낙심하여 한동안 일손을 놓았다. 막상 학교에서 나오니 갈 데가 없었다. 내 신세가 망당대해에 표류하는 일엽편주와 같았다. 한동안 삼류 극장에서 온종일 영화 관람으로 소일했다. 그러다가 운명적으로 스파르타쿠스(Spartacus)를 만났다. 하워드 패스트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스팔타커스”는 나를 위해 제작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스파르타쿠스로 살기로 다짐했다. 니체의 말을 빌리면, ‘낙타’로 살기를 거부하고 ‘사자’가 되기를 선택한 것이다. 자기를 혁명하기 위한 투쟁신조를 작성했다. “내 운명을 사랑하자 … 내가 사람이라는 것은 싸움꾼이라는 뜻이다. 투지(鬪志), 그것은 생명력이고 생의 의욕이며 승리 이전의 승리다.” 부당하게 시비하는 이들에게 두려움을 무릅쓰고 덤벼들었다. 내 이빨과 내 손톱으로 외롭게 싸워야 했다. 막상 맞붙어 싸워보니, 상대방이 종이호랑이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깡다구와 싸움의 기술이 조금씩 늘어갔다. 싸움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리할수록 남들이 보기에는 건달패와 어울리는 불량 청소년이 되어갔다. 타인에게 굴종하지 않으려면,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가 <군주론>에서 충고한 대로, ‘사자의 심장’과 아울러 ‘여우의 머리’를 갖추어야 한다. 교도소 같은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 뼈저린 외로움을 느끼면서 홀로 배움의 길을 걸었다. 더 이상 교실에서 교과서 수업을 받지 못했지만, 시립 및 국립 도서관에서 읽고 싶은 책을 찾아서 읽었다. 나에게 도서관은 일종의 대안학교이자 독락당(獨樂堂)이었다. 스승이나 길라잡이도 없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길을 더듬어 나갔다. 도서관에서 잡다한 책을 읽는 가운데, ‘자기계발’에 관심하게 되었다. <신념의 마력>, <적극적 사고방식>, <불가능은 없다> 등 신념과 긍지에 관련된 책을 찾아 읽었다. 그러한 책에서 희망과 용기를 얻고자 했지만, 돌이켜 보니 잃은 것도 많았다. 긍정과 적극을 강조하는 자아계발은 자아를 강화하고 욕망을 조장하였으며,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를 간과하고 사회 구조악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기독교 진리를 오해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차츰 실존주의(existentialism) 철학으로 이끌렸다. 무엇 때문에 어려운 책을 붙들고 씨름했는지 모르겠다. 어린 나이에 철학에 관심했다는 것은 그만큼 내 삶이 고달팠다는 것을 방증한다. 김태길의 <인간의 존엄성과 성실>과 안병욱의 <현대사상> 등을 안내서로 삼아 철학을 독학했다. 니체(F. W. Nietzsche)는 가면 벗기와 현실 긍정을 역설했다. 초인(超人) 사상을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왠지 그에게 친근함을 느꼈다. 나는 ‘권력의지’와 ‘운명애(amor fati)’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단독자와 주체성을 역설한 키르케고르(S. Kierkegaard)는 나로 하여금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너는 자유다.” 이러한 사르트르(J. P. Sartre)의 주장은 내 행동의 지침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학교를 중퇴한 것이 잘한 일은 아니지만, 후회하지도 않는다. 자퇴 이후에 내 선택과 행동에 스스로 책임을 졌다. 타의와 타율에 이끌려 산다는 것은 고역이다. 기가 죽고 주눅이 들어 살기를 거부했다. 싫은 것은 싫다고 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게 되었다. 우울증과 심기증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졌다. 아마도 ‘투쟁’과 ‘독서’를 통하여 허약했던 심기가 강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기까지 숱한 날 동안 삶의 뒤안길을 걸어왔다. 자기계발서는 실용주의적 기독교로 내 관심을 유도했다. 부흥회에서 들은 설교는 내 믿음이 옳음을 증명해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제 발로 걸어서 교회에 나갔다. 그 곳이 동대문 근처 이대부속병원 옆에 있던 ‘충신교회’이다. 늦가을 저녁 즈음에 교회 문을 두드리니, 전도사님이 창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장발에다 검게 물들인 군복을 입고 있는 나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갓난아기가 누워있는 방에 들어가서 전도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념을 얻고 마음을 잡고자 교회에 왔노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교회 청년부에 참석하게 되었다. 청년부는 대학생과 직장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존 구성원들은 유대가 견고하여 외부인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내면의 상처와 열등감에 부대끼던 나는 그들에게 지기 싫어서 가면을 쓰고 허세를 부렸다. 교인들은 나를 요주의 인물로 경계했다. 아무튼 나는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때때로 기도원에도 다녔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고 괴테(J. W. von Goethe)가 말했던가.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나의 방황은 끝나지 않았다.
2. 출애집기(出愛執記) 교회에 다닌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뜻하지 않은 일을 겪게 되었다. 새 학기가 되어 고등부에서 새로운 회원들이 청년부로 올라왔고, 그 가운데 한 여학생이 눈에 띄었다. 다정(多情)도 병이던가. 연약하고 예쁘장한 그녀를 보면 가슴이 설렜다. 사귀고 싶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나는 고교 중퇴생이고, 그녀는 연세대학교 신입생이었다. 오를 수 없는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아야 했다. 그런데도 그에게 마음이 끌렸다. 지독한 집착이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사귈 수 없는 내 처지가 원망스러웠다. 후레아들이 서러웠고, 대물린 가난이 한스러웠다. 나는 세상에 반항하며, 운명에 절규했다. 어찌하여 활과 화살이 없는 사냥꾼으로 태어났는가? 그러면서 맨손으로 독수리를 잡으려 했을까? 돌이켜보면, 당시의 치기 어린 행동이 참으로 부끄럽고 미안할 따름이다. 한동안 마음을 잡고 공부하여 대입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가정형편상 나는 일반 대학에 진학할 엄두를 못 내고, 육군사관학교를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분심잡념으로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다. 결국 육사 시험에 낙방했다. 모든 꿈을 접고, 군대에 입대했다. 전방에서 3년간 육군 하사관으로 복무했다. 끊임없는 훈련과 작업으로 몸이 고달팠지만, 군대생활은 과거를 끊는 기간이 되었다. 고려대 ROTC 출신인 소대장은 나의 인문학 소양에 관심을 보였다. 연대 군목인 채수일 목사님과 대화하면서 신앙과 지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부조리와 폭력이 일상이 된 환경에서 연대에 소속된 ‘불멸교회’는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야외 작업과 내한 훈련으로 악화된 상악동염을 야전병원에서 수술했는데, 문제가 생겨서 부산에 있는 국군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의료사고는 나에게 전화위복이 되었다. 몇 달 동안 병원에서 요양하면서, 오랜만에 제대로 독서할 수 있었다. 그때 읽은 책 가운데 법정의 <무소유>와 프롬(Erich Fromm)의 <소유냐 존재냐>는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욕망이 삶의 원동력일까, 아니면 괴로움의 뿌리일까? 욕망은 생존의 원동력이다. 그런데 조절되지 않은 욕망은 화근이 된다. 성서도 욕심을 경계한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는다”(야고 1:15).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이루어진다면 행복할 것인가? 욕망에는 끝이 없다. 인간에게는 욕망을 스스로 통제할 능력이 없다. 제한 없는 소원 성취는 도리어 재앙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탐욕은 우상 숭배”(골 3:5)라고 한 것이다. 자족은 소유에 비례하고, 욕구에 반비례한다. 소유가 한정되어 있다면, 절욕(節慾)하고 자족(自足)하는 것이 행복 지수를 높이는 길이다. 욕망을 충족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욕망을 극복하는 것은 더욱 좋은 일이다. 십계명의 서언에 명시되었듯이, 야웨는 해방과 자유의 하나님이다. 그분은 그 옛날 히브리 사람들을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탐욕과 집착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사는 것이 구원이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우리는 ‘소유(Having)’에서 벗어나 ‘존재(Being)’로 나아가야 한다. 어떻게 애집(愛執)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막 8:34). 자기부정(自己否定)은 거룩한 체념이며 선택과 집중의 기술이다. 인생은 선택이다. 잘 선택하려면, 잘 포기해야 한다. 버릴 것과 잡을 것을 구별하여, 버릴 것을 단호하게 버릴 때 소중한 것을 잡을 수 있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 “나를 속이지 말자, 집착하지 말자, 큰 바보가 되자”는 뜻이 담긴 “무자기(毋自欺), 무소유(無所有), 위대우(爲大愚)”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자기계발식 기독교 대신에 ‘출애집(出愛執)’의 신앙을 선택했다. 그 전향은 내 생애의 일대사였다. 국군통합병원에 입원해 있던 초가을 어느 날, 길가에 피어있는 패랭이꽃을 발견하고 쪼그리고 앉아서 떨리는 가슴으로 들여다보았다. 화단에 자리 잡지 못하고, 철 지나서 핀 패랭이꽃은 예쁘면서도 애처로워 보였다.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하마터면 그것을 꺾을 뻔하였다. 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꽃을 꺾어 가지지 않는다. 가질 것인가, 사랑할 것인가? 애욕과 집착은 괴로움을 가져온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지지 말라. 미운 사람도 가지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운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法句經). 나는 그 야생화를 그곳에 내버려두고, 오며가며 그냥 바라보기로 하였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다. 상대방을 쾌락의 대상과 도구로 삼는 소유양식의 사랑은 서로를 소외시킨다. 칼릴 지브란은 <예언자>에서 “사랑은 소유하지도 않고 누구의 소유가 되지도 않는다”고 노래한다. ‘출애집’은 현재진행형이다. 광야에서 방랑하던 히브리 사람들이 떠나온 이집트를 그리워했듯이, 여전히 나는 애욕과 집착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문득문득 까닭을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마음이 시려온다. 외로움과 그리움이 가슴 깊은 곳에 배여 있다. ‘소유하지 않는 사랑’은 마음뿐이다. 마음 한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던 욕망이 고개를 든다.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 이별의 상처가 불현듯 재발되곤 한다. 공허한 내면을 달래줄 사람을 찾는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우리의 외로움과 그리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외로울 만큼 외로워하고, 그리울 만큼 그리워하며, 아플 만큼 아파하다가, 마침내 ‘홀로 서기’를 이루어내야 할 것이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되, 집착하지 말자. 마음을 다하여 만나고, 미련 없이 떠나보내자.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되, 감정에 속지 말자. 무소유(無所有)하고 방하착(放下著)하자. 출애집은 자유를 향한 여정이다.
3. 신학 수업 군대에서 제대한 이후에, 한동안 삼각측량 현장에서 일했다. 측량기를 메고 산을 오르내리는 일이 힘들지는 않았지만, 내가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 현장에서 틈틈이 수도생활에 관한 책들을 읽었다. 수도원에 들어가서 ‘무소유’와 ‘출애집’을 제대로 수행하고 싶었다. 현장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은성수도원을 세운 엄두섭 목사님을 찾아 갔다. 수도생활에 대한 관심이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어머니를 모셔야하기에 출가를 결행하지 못했다. 대학에 진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기로 했다. 남산에 있는 도서관에서 일 년 남짓, 허리를 동이고 공부했다. 국가에서 시행한 사교육 금지 조치는 독학에 익숙한 나에게 유리했다. 거품을 빼고, 자신의 능력에 맞추어 학습계획을 세웠다. 마지막으로 주어진 기회로 생각하고, 주요 과목들을 기초부터 철저하게 학습했다. 진로를 앞두고 칼뱅(Jean Calvin)과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를 비교하며 연구했다. 오랜 고민 끝에 후자를 선택했다. 대입학력고사를 치르고, 신학대학에 진학했다. 늦깎이로 학문의 길에 들어섰다. 과거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열심히 공부했다. 학점 관리에 상관하지 않고, 강의실과 도서관을 오가며 배움의 즐거움을 누렸다. 청소년기에 습득한 철학적 사유는 신학을 공부하는 데에 유용했다. 특히 실존주의 철학이 나에게 미친 영향이 컸던 것 같다. 틸리히(P. Tillich)와 불트만(R. Bultmann)의 신학이 낯설지 않았다. 틸리히의 철학적 신학은 나에게 생각의 좌표를 제공했다. 읽기에 어렵던 하이데거(M. Heidegger)의 글도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수도원의 영성에 관심하며, 에카르트(Meister Eckhart)와 머튼(Thomas Merton)에게도 귀를 기울였다. 전통 신학을 반성하고, ‘범재신론(panentheism)’과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에 관심했다. 화이트헤드(A. N. Whitehead)의 유기체철학은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고, 동양적 사유가 옳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Process)’ 개념과 하나님의 ‘실재(Reality)’를 주제로 삼아 석사학위 논문을 썼다. 신앙의 균형을 이루고자, 에큐메니컬 신학과 아울러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했다. 성서비평은 양날의 칼이다. 그것은 성서에 정직하게 접근하는 방법론이지만, 현학적으로 치우치면 성서의 권위와 가치를 침해한다. 나는 조심스럽게 ‘역사-비평’을 수용했다. 유대교의 뿌리인 토라(Torah)에 관심했다. ‘언약적 율법주의’는 유대교가 은혜의 종교임을 보여주며, 기독교와 대화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한다. 샌더스(E. P. Sanders)와 던(James Dunn)이 제안한 ‘새로운 관점’에서 “신명기에 나타난 은혜와 율법”의 관계를 연구하여, 구약학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페르시아 종교의 이원론(dualism) 및 그리스 철학의 실체론(substantialism)에 정초한 기독교신학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 중세 신학의 머릿돌인 ‘사도신경’은 로마 제국의 권력과 교회 정치의 산물이었다. 상징과 은유로 표현된 성서본문과 신앙고백을 문자적으로 읽을 때, 오해가 발생한다. 따라서 ‘비신화화’ 내지 ‘탈문자화’를 통하여 기존의 교리는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궁극적 실재인 하나님은 규정할 수 없는 절대무(絶對無)이기에, ‘하나님을 넘어선 하나님(God beyond God)’을 만나야 한다. 역사적 예수는 믿음의 전형이며 삶의 모범이다.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라는 것은, 그는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충분히 증거하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모범적으로 대변하였다는 뜻이다. 천국(天國)은 죽어서 가는 실체적인 피안의 세계가 아니다. 예수 운동의 핵심인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가리킨다. 종교와 학문에서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그쳐야 한다. 감리교 종교재판에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과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를 이단 사상으로 단죄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자유주의든 개혁주의든 신앙과 신학은 하나의 의견이므로 각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잘못 생각할 수 있다. 절대적 진리는 없다. 확신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편견과 독선을 경계하자. 강을 건너면 배를 버리듯이, 언젠가 진리에 이르면 신학과 종교마저 버려야 하리라.
4. 목회(牧會)와 수도(修道) 오늘날 한국 교회에 만연한 신앙은 “사영리”에 집약된 기독교 근본주의, “삼박자 축복” 이 근거한 번영 신앙, “예수 천국, 불신 지옥”에 표출된 타계 신앙 등이다. 예수를 믿는 목적이 현세에서 복을 누리고 살다가, 죽은 다음에도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겠다는 것이다. 과연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일까? 아니다! 그것은 사이비 복음이다. 종교의 본질은 아집과 탐욕에서 벗어나게 하고, 본연의 자기를 회복하며, 자기를 초월하여 타자를 위한 존재로 살도록 이끄는 것이다. 욕망과 경쟁을 부추기는 신앙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맘몬(mammon)을 숭배하는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나는 ‘예수 목회’ 또는 ‘수도 목회’를 목표로 삼았다. 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 그는 나의 구주요 사표다. 누구보다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뜻이 가장 잘 드러났다. 그리스도인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고, 하늘의 복음을 선포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는 로마 제국과 예루살렘 성전 체제에 맞서다 십자가형을 받았다. 우리는 예수를 신격화하기보다 예수처럼 하나님을 믿고 예수처럼 살아야 할 것이다. 내가 꿈꾸는 교회는 은과 금은 없어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있는 교회이다. 교회는 세상의 권력과 성공을 거부하고, 예수의 열심과 단순한 삶을 배워야 한다. 예수 목회는 지금 여기서 ‘예수의 길’을 걸으며 역사적 예수의 얼과 삶을 재현하는 것이다. 소유와 쾌락과 권력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나 자신을 던져 실험하기로 작심했다. 농촌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 자발적으로 가난한 교회, 불의에 저항하는 교회, 생명을 살리는 교회를 꿈꾸었다. 수도원적 가치인 “청빈(淸貧) 정결(貞潔) 순명(順命)”을 생활지침으로 삼았다. 그리고 1990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주제인 “정의 평화 창조보전(JPIC)”을 목회방침으로 삼았다. 이곳 ‘덕다리(德多里)’라는 지명은 ‘외딴곳’이라는 뜻인 ‘넉다라지’라는 사투리에서 유래하였다. 목회 환경은 열악했지만, 수도하기에 적당했다. 나는 수도사와 아울러 혁명가가 되고 싶었다. 사례비를 적게 받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생활했다.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고 낮은 자리에 앉기로 다짐했다. 수도생활의 일환으로, 규칙을 정하고 성무일도를 행했다. 기회가 주어지면 대학교에 출강하여 구약성서를 가르쳤다. 고독과 침묵을 지키려 애썼지만, 사회 참여를 외면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법과 체제는 지배 계급의 기득권을 수호하고, 국가 권력은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한다. 대법원 청사에 새겨진 “자유 평등 정의”가 구현되는 좋은 세상은 언제쯤 오려나? 교회는 빈자와 약자를 편드시는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교세가 약하여 별로 영향력이 없지만, 우리 교회는 반전평화 운동에 참여하고,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반대하며, 자본을 위해 생명을 죽이는 4대강 개발을 막고자 기도하였다. 비록 빈들에서 외치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예수 목회를 지향하는 교회에는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교인들은 들어야 할 말씀보다는 듣고 싶어 하는 설교를 들으려 한다. 렘브란트(Rembrandt)의 작품 “세례 요한”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오늘날의 세태를 고발한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모두들 딴전을 부린다. 대중에게 수도생활이나 예수의 길은 매력이 없다. 교인들은 예언적 설교를 부담스러워한다. 교회의 상황은 갈수록 어렵다. 한국 사회에서 ‘사영리’와 ‘삼박자 축복’ 그리고 ‘예수 천국’을 거부하고 목회할 수 있을까? 자아와 욕망으로 가득한 시대에 수도 목회는 가능한가?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여전히 시골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내세울 것은 없지만, 이제까지 한 길을 걷고자 애써왔다. 소명인가 아니면 객기인가? 떠날 기회를 놓치고 이곳에서 너무 오랜 세월을 보냈다. 돌이켜 보니, 내 딴은 예수의 길을 걷는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세례 요한의 길을 추구하여 왔다. 예수는 민중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을 품었다. 세례 요한은 광야로 나가서 그곳으로 나아오는 자들에게 외쳤다. 위대한 선지자인 그는 시대적 사명을 완수했다. 목회자인 내가 따라야 할 스승은 나사렛 예수이다. 그런데 나는 어설프게 세례 요한을 흉내 냈던 것이다. 자기만족에 도취되어 교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것 같다. 나는 광야 같은 이곳에서 메뚜기를 먹고 짐승 털옷을 걸치고 산다는 자부심을 품었다. 책상물림이 되어 홀로 고봉을 거닐었다. 교인의 눈높이에 맞추기보다 내 수준에서 가르치려 했다. 열 사람이 함께 한 걸음 내딛기보다 성급한 마음에 혼자 앞서서 열 걸음을 나아갔다. 나는 바른 길을 걷고자 했다. 하지만 나에게 옳은 것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도 옳은 것은 아니다. 내 소신이 다른 사람에게 불편한 심기를 야기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직도 목회에 자신이 없다.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자라나지 않아서 교회조직의 생리에 익숙하지 않다. 나의 목회 실패담이 바른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에게 타산지석이 되면 좋겠다.
5. 생(生)의 구덩이 속에서 비합리와 몰상식이 판치는 세상이다. 특히 사회의 나침반인 정치와 종교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노론(老論) 세력이 친일과 독재로 부활하여 집권하고 있다. 민심을 배반하고 역사를 퇴행시키는 수구 세력의 횡포에 나라가 어지럽다. 권력을 사유화하고 탐욕을 채우는 위정자를 보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자격 미달의 지도자를 선택한 대중이 원망스럽다. 게다가 일부 교회들은 현정권을 비호하며 욕망을 부채질한다. 불의한 국가와 비굴한 교회에 대하여 울분이 쌓인다. ‘개혁’과 ‘진보’를 바라는 나로서는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세상을 바로잡고 싶으나 힘이 없다. 때때로 무력감과 고립감으로 부대낀다. 이러한 비판의식이 목회현장에서 걸림돌로 작용한다. 사업하고 목회하는 친구들이 나를 부담스러워 한다. 어설프게 권력에 도전하고 교회를 개혁하려다가 사달이 났다. 교인들의 인습적인 신앙은 변화되기 어렵다. 아무리 정의와 민주주의를 설교해도 선거 때가 되면 교인들은 수구 집단에 표를 몰아주었다. 청빈과 정의는 교인들과 상관없는 일이었다. 영향력 있는 권사가 ‘정치 설교’를 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충고했다. 교회에 오면 축복 받고 위로받아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근래에는 구원파와 신천지 등의 사이비 종파로 인하여 우리 교회가 홍역을 치렀다. 일부 교인들이 다른 우물에서 물을 얻어 마셨다. 영적 기갈을 풀어 주지 못한 내 탓이다. 자극적인 신앙을 선호하는 교인들은 표적이나 다른 교훈에 마음을 빼앗기기 쉽다. 아무 데나 가서 예언 기도나 신유 안수를 받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펄시 콜레가 본 천국이나 토마스 주남이 다녀온 천국은 우주 공간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외부에서 들어온 무리가 반발하고 문제를 일으켰다. 신천지 추수꾼으로 의심되는 이들이 교인들을 꼬드겼다. 담임목사가 천국을 부인했다고 소문을 내고 몇몇 사람들이 다른 교회로 떠났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는 기형도 시인의 “우리 동네 목사님”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했던가. 나를 지탱해주던 관계들이 하나씩 끊어져 갔다. 믿었던 교인들이 등을 돌리고 떠났다. 오랫동안 사귀었고 내 마음을 알아주리라고 믿었던 벗들이 의절한다고 통보했다. 인간사가 야속했다. 어려울 때 찾아 와서 위로해 주는 동료도 없었다. 도리어 사람들은 쓰러져가는 담장을 밀어서 넘어뜨리려 하였다(시 62:3). 교회에서 문제가 발생하자, 주변의 목회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교역자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나에게 이단 시비를 걸어왔다. 아마도 그들과 색깔이 다른 나를 눈엣가시로 여겼던 모양이다. 나는 변론을 위하여 “한국 교회와 하느님 나라”를 작성했다. 소외감과 모멸감으로 밤잠을 설쳤다. 나보다 아내가 더욱 힘들어하였다. 일련의 사건은 착한 아내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는 불안과 의심으로 시달렸다. 이제껏 발을 딛고 있던 터전이 흔들렸다. 내 딴은 하느라고 했는데, 결과가 저조하다. 나이를 먹어도 이룩한 실적이 없다. 우울증일까? 깊은 구덩이에 빠진 느낌이었다. 눈물과 구덩이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심경이 이랬을까? “어찌하여 이 몸이 모태에서 나와서, 이처럼 고난과 고통을 겪고, 나의 생애를 마치는 날까지 이러한 수모를 받는가”(렘 20:18). 어째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언제까지 인동내한의 세월을 지내야 할까? 구덩이 속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했다. 그즈음에 동양의 고전인 주역(周易)을 읽게 되었다. 주역에는 우주와 인생에 관한 통찰과 난관을 극복하는 고대인의 지혜가 담겨 있다. 옛사람과 심정이 통했다. 내가 처한 형편이 64괘 가운데 ‘중수감(重水坎)’ 또는 ‘습감(習坎)’ 괘와 들어맞았다. ‘감(坎)’은 물 또는 구덩이를 상징한다. 따라서 감괘가 포개어져 있는 ‘습감’은 거듭 구덩이에 빠지는 설상가상의 형국이다. 구약성서에서도 ‘물’이나 ‘구덩이’는 고난과 시련을 상징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큰물이 나를 휩쓸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가 내 위에 덮쳐 그것의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시 69:1-2, 14-15). 내 처지가 ‘감지(坎止),’ 곧 물이 흐르다가 구덩이에 빠진 형국이다. 다음은 습감의 괘사다. “거듭되는 어려움 속에서도 성실한 마음을 유지하면 형통하다(習坎 有孚 維心亨).” 여기서 “부(孚)”는 새가 알을 품고 있는 모습으로, 미쁜 마음을 의미한다. 이 구절은 어려울수록 성실한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함을 강조한다. 어려울수록 마음이 형통해야 한다. 마음이 죽지 않는다면 어떠한 구덩이에서도 마침내 빠져나올 수 있다. 그리하면 고난은 흉(凶)이 아니라 길(吉)이요 형통이다. 셋째 효사에서 “물용(勿用)”이라고 충고한다. 괘효사에 종종 등장하는 ‘勿用’은 사용금지 또는 비행동을 의미한다. 물구덩이에 빠졌으면, 쓸데없이 힘쓰지 말고 물이 차오를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라는 것이다. 구덩이 속에서 수양하며 정신적 내공을 쌓는 것이 요구된다. 아직 일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유부(有孚)와 물용(勿用)으로 신독(愼獨)할 때이다.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비바람은 그치지 않고 불빛은 아니 보인다. 애타게 동트기를 기다리는 파수꾼의 심정이다. 아니, 아니다!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밤이 깊어야 비로소 별들이 영롱하게 빛난다. 십자가의 요한의 말을 빌리면, 시방 나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다. 깊은 어두움 속에서 빛나는 별을 보아야 하겠다. 이 밤을 통하여 내 정신을 고양시키자. 그리할 수 있다면, 어두운 밤은 징계가 아니라 은총이다. 본회퍼(D. Bonhoeffer)의 고백처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없이” 살리라고 다짐해 본다. 날마다 내리막길을 걷는 기분이다. 어쩌면 내리막길이 나에게 주어진 선물일 수 있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을 내려갈 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틸리히에 따르면, 하나님은 최고의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근거(ground of being)”이다.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은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분을 만나려면 삶의 밑바닥으로 내려가야 할 것이다. 어두운 심연을 직시하고 성실하게 절망하며 내가 곤고한 사람임을 철저하게 인식하자. 그리고 심연에서 들려오는 세미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앞으로 남은 목회 여정에서는 외적인 성취를 지양하고, ‘참나(眞我)’를 찾는 내적 여행에 집중해야겠다. 이제는 융(C. G. Jung)이 말한 대로, 착하게 살기보다 온전하게 살자. 본연지성(本然之性)을 따르고, 내 욕망을 욕망하자. 남이 아닌 나 자신이 되어야지. 그리하려면 나의 ‘그림자’와 친해져야 한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하고 장점과 단점이 혼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함이 요구된다. 채색된 가면을 벗고 민낯으로 하나님과 사람들을 만나자. 나를 구성하고 있는 비본질적인 장식물을 배설물 같이 버리자. 앞으로 내 과제는 니체가 말한, 방황하는 ‘사자’에서 벗어나 천진한 ‘아이’가 되는 것이다. 삶은 재미있는 놀이어야 한다. 아이처럼 춤추고 노래할 수 있어야 한다. 마침내 아버지를 찾은 탕자처럼, 내가 있을 자리로 돌아가야겠다. 그리하여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기를 희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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