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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싼 도자기는 투박하고 두껍게 만듭니다. 만들거나 불에 굽는 과정에서 쉽게 금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얇고 선명한 색깔까지 넣는 값비싼 도자기는 만드는 과정부터 힘들뿐 아니라, 불에 굽기 전부터 쉽게 금이 갑니다. 구워내는 과정에서 금이 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실하지 못한 도공들은 금이 간 틈을 밀초로 메꾼 다음, 유약을 발라 흠이 없는 작품인 것처럼 내놓곤 합니다. 햇볕에 비춰보기만 하면 쉽게 확인할 수 있음에도 말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도공들은 금이 간 도자기는 그 자리에서 깨 버립니다. 금이 가지 않은 작품에는 진품을 보증한다는 의미에서 밀칠을 하지 않았다는 뜻의 라틴어(sine cera) 곧 진실(Sincere)이라는 글을 새겨 놓았습니다.
법정에 서신 예수께서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18:33b)고 묻는 빌라도에게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요18:37a)고 분명하게 대답하셨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진실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시인이면서 소설가인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i)는 “진실한 것이 더 손쉬운 것이다. 어떠한 일이든 거짓에 의해서 해결하는 것보다는 진실에 의해서 해결하는 편이 항상 보다 직선적이며 보다 신속하게 처리된다. 그리고 남에게 하는 거짓말은 문제를 혼란시키고 해결을 더욱 멀게 할뿐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나쁜 것은 겉으로는 진실한 채 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이다. 그것은 결국 그 인간의 평생을 망치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진실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열쇠라고 말했습니다.
진실하지 못한 것은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가장 나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소설가 장 그르니에(Jean Grenier)는 “카뮈를 추억하며”라는 책을 통해 “그의 작품이 지닌 특성들 가운데 하나는 모든 독자를 감동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흔하지 않은 장점이다. 나는 알베르 카뮈의 목소리가 왜 ‘폐부를 찌르는지’ 잘 알고 있다. 그는 숨김도 암시도 없다. 그는 말해야할 것을 직접적으로 말한다. 술책이 없다. 다음으로 그는 자기 자신의 전부를 걸고 말을 한다. 말을 하는 것은 그의 일부분이 아니다. 따라서 카뮈는 정신을 납득시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마음을 승복시킬 수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말과 글에 힘이 느껴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이유는 온 몸으로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말과 글뿐이겠습니까?
일도, 사랑도, 봉사와 믿음도 “온 몸으로, 진실하게” 해야 가부간 결판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는 예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범사에 진실하십니까? 진실을 위하여 목숨을 걸 수 있습니까? 죄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변호하고 합리화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인생들은 조금만 틈이 있어도 어떻게든 자신을 아름답게 위장하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진실한 삶에 자신을 헌신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눅12:42)라고 물으셨습니다.
진실한 청지기는 주인을 항상 자신의 마음에 모십니다. 주인의 있고 없음에 상관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수행합니다. 최선을 다해 끝까지 충성합니다. 한편, 인간의 자율성은 확실히 믿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중심이 없는 원을 상상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지 않은 사람들의 생각과 삶에서 진실을 찾는 것은, 나무 위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절대 복종하고 신뢰함으로 행하는 “최고의 타율”(他律)이 “최선의 자율”(自律)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는 타율을 선택할 때에만, 자율적으로 진실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또 진실은 관념이나 추상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말이 아니라 수고와 노력이 동반된 행동으로만 입증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죄와 허물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지 입증하시기 위하여 철저히 낮아지셨습니다. 물과 피를 남김없이 다 흘리셨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는 “진실”(眞實)의 영원한 모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진실한 모습으로 나올 때 가장 기뻐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심지어 종교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인 불신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실한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진실한 삶은 이 시대를 위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듭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거부할 수 없는, 반드시 감당해야만 하는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마음의 주인으로 모셔들이십시오.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진실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불신으로 가득한 이 시대에 하나님의 구원의 빛을 드러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주인을 모함하는 불의 한 시바와 그의 거짓말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여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는 다윗의 모습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다윗과 따르는 일행이 감람산 마루턱 곧 감람산 꼭대기를 막 지나자 시바가 맞으러 나왔습니다. 1-4절입니다.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과 건포도 일백 송이와 여름 실과 일백과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 왔느뇨 시바가 가로되 나귀는 왕의 권속들로 타게 하고 떡과 실과는 소년들로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곤비한 자들로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 왕이 가로되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뇨 시바가 왕께 고하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저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비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왕이 시바더러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시바가 가로되 내가 절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나로 왕의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니라”
시바는 원래 사울의 종이었습니다. 현재는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저를 위하여 밭을 갈고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을 공궤하라”(삼하9:10a)는 다윗의 명령에 따라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의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執事)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간사하고 교활한 기회주의자였습니다. 단지 땅을 관리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주인의 땅을 차지하기를 원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땅을 자신의 것으로 확보할 수 있을 것인지 심사숙고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아버지를 반역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마저 다윗을 떠났습니다. 상황은 다윗을 궁지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윗이 곧 압살롬이 이끄는 혁명군을 제압하고 왕위를 회복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이 상황을 잘만 이용할 수 있다면,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윗의 마음을 사기 위하여 나귀와 떡과 과일과 포도주를 준비했습니다. 다윗이 행진하는 길목에 나타났습니다. 무슨 뜻으로 가져왔느냐고 묻는 다윗에게, 다윗과 다윗을 따르는 백성들을 위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모든 것을 므비보셋이 보냈다고 확신한 다윗은 마음이 흡족했습니다. 그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시바는 자신의 주인이 혼란을 틈타 은혜를 베풀어준 다윗에게 등을 돌렸다고 거짓말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사울의 유일한 상속자라는 것을 빙자하여 다윗을 아주 몰아내고 왕이 되려 한다고 모함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절뚝발이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삼하4:4a)고 말씀합니다. 므비보셋은 절뚝발이였습니다. 이는 그가 도저히 왕위를 계승할 수 없는 결격사유(缺格事由)를 가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지금까지 다윗에게 넘어간 왕위를 되찾기 위하여 어떤 준비나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바가 그를 모함한 이유는 물욕(物慾) 때문이었습니다. 시바는 돌아가는 정치 군사적인 상황이 다윗에게 유리하게 회복될 것이라고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지혜로운 사람이었던 반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주인이라도 모함하고 배신할 만큼 어리석고 미련한 기회주의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아들에게 쫓기는 입장에 있었던 다윗은 그가 품은 의도를 깊이 헤아려볼 수 있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시바가 제공한 호의에 감동해 공정함을 잃고 말았습니다. 또 다소나마 사울 집안이 부상(浮上)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요7:24) 곧 모든 문제는 공정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가 자신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호의를 베풀어준 시바에게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가 이번 경우처럼 다른 사람에 대해서 모함하는 것을 믿는 것으로 나타날 때는, 편파적이고 잘못된 판단의 기초가 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을 내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신19:15),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딤전5:19) 곧 무엇인가를 판단할 때는 반드시 두 세 명의 증인을 세워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잊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군가의 주장이 옳다거나 그르다는 단서가 잡히기 전까지는 판단을 보류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믿을 만한 친구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 말을 기초로 누군가를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친구나 친구의 말을 믿지 않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이러한 성경의 원리를 믿음으로 받고 순종한다면, 정말로 많은 고통과 싸움을 피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정보와 험담은 확실히 다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선입견적인 판단에 기초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꾸며낸 험담은 악합니다. 실제로 시바는 므비보셋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설령 진실을 말했다 할지라도, 다윗은 그가 말한 내용에 대한 다른 측면에 대해서 들을 때까지는 판단을 유보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시바의 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해야한다”(약1:19)는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언행의 신중함은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는 것을 잊고 말았습니다. 므비보셋을 은혜를 베푼 사람의 고난을 이용해 반역이나 꾀하는 파렴치한(破廉恥漢)으로 단정지어버렸습니다. 므비보셋이 소유하고 있던 모든 것을 시바에게 주는 경솔한 결정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시바에게 너무도 쉽게 속아넘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실 시바는 다윗이 영원히 승리하기를 진심으로 바랬을 것입니다. 그래야 주인의 소유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형태의 아첨과 왜곡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입니다.
예수께서 저주하신 추악한 죄입니다. 속마음은 갖추지 않은 채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꾸민 위선이요, 외식입니다. 악한 꾀로 남을 속이는 사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마치 재앙처럼 여기고 피해야합니다. 아첨하는 자들의 유혹을 물리쳐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오늘날 티끌만큼이나 흔합니다. 악을 실행하는 크고 효과적인 도구 가운데 하나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뷸의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것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신은 물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진실하십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바르고 공정하게 판단하십니까?
“문명인은 뭐든지 글로 기록하려 든다. 그래서 항상 종이를 가지고 다닌다. 그들이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도서관에 가보면 책들이 많지만 누가 그 책을 다 읽는단 말인가? 우리는 종이가 필요없다. 진실이 담긴 말은 그의 가슴에 깊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영원히 기억된다. 인디언은 결코 그것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다. 그러나 문명인은 기록해놓은 종이를 잃어버리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는 인디언의 지적대로, 그들에게 문명의 발전은 없어도 진실은 있습니다. 진실은 문명의 발전보다 더 중요하고 값집니다. 우리 인생들의 문제는 대개 진실을 은폐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발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는 진실이 없습니다.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진실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진실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떠나 있습니다. 진실과 맞닥뜨리기 싫어합니다. 진실은 괴롭기 때문입니다.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입니다. 물이 오염되면 그 속에 사는 물고기가 죽고, 땅이 오염되면 거기 심겨진 나무가 제대로 살 수 없듯이, 진실을 잃어버린 사람은 이미 그 생명을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또 진실을 잃어버린 삶은 빈 껍데기일 뿐입니다. 진실이 사라진 곳은 썩어 냄새날 뿐입니다. 우리가 속한 사회와 사랑하는 사람들이 깊은 절망 속에 몸부림치며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 역시 바로 이 진실이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다할지라도, 만약 그것이 진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무익합니다. 비록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진실하게 행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가치와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로 결정하신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 하라”(슥8:16-17)고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진실할 뿐 아니라, 참된 진실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모든 일을 판단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영국 극작가이자 시인인 셰익스피어(Shakespeare, William)는 “인간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는 진실치 못하면서 남이 자기에게 어찌 진실하기를 바라겠는가. 만약 스스로에게 진실하다면, 밤이 낮을 따르듯 대개의 일이 순리대로 풀릴 것이다. 진실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 진실을 구하자. 진실로 무장하자.”라고 말했습니다. 한 신학 대학의 졸업시험에 “당신은 어떤 목사가 되고 싶습니까?”라는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곤혹스러웠던 학생들은 시험이 끝나자마자 담당교수를 찾아가 “이번 시험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정답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교수는 웃으며 “세줄 이상 쓴 사람은 0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의아해 하며 바라보고 있던 제자들에게 “그것은 거짓말이기 때문이지. 답은 간단해. 진실한 목사!”라고 말했습니다. 진실은 모든 것의 기초입니다. 진실이 있어야 지식도 재능도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집이 결국에는 무너질 수밖에 없듯이, 진실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진실은 죽음보다 무섭습니다. 사람은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진실은 죽어서도 말을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4:10b)고 외치시게 합니다. 오늘 우리는 진실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진, 진실을 찾기가 너무도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진실하십니까? 진실을 바르게 분별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십니까? 진실한 삶을 살기 위하여 기꺼이 환난과 시험과 손해와 죽음까지도 감당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체코의 신학자이면서 종교개혁자인 얀 후스(Jan Hus)는 화형을 당하는 순간에도 “진실을 배우며 진실을 사랑하며 진실을 말하며 진실을 양보하지 않으며 죽을 때까지 진실을 지키라”고 외쳤습니다. 전신기를 발명한 모스(Morse, Samuel F. B.) 교수는 실험할 때, 혹시 계속해서 그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 지 몰라 쩔쩔매던 경험이 있느냐고 묻는 허베이(George W. H-ervey) 목사에게 종종 그런 일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제가 하는 실험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그런 쉬운 문제들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문제가 생겼을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좀 더 많은 빛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그러면 일반적으로 빛이 옵니까?”라는 허베이 목사의 질문에 “예”라고 대답한 그는 계속해서 “제가 발명한 것으로 인하여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저에 대하여 굉장한 영예를 안겨줄 때마다 저는 제가 그 영광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 자신이 그런 훌륭한 발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제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위해서 그것을 만들어야 할 필요를 갖고 계신 하나님께서 그 일을 맡길 사람을 찾다가 저에게 맡기신 것뿐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위대한 과학자인 동시에 하나님의 진실한 청지기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의 주인으로 모실 때 비로소 진실할 수 있습니다. 능동적으로 진실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 진실을 근거로 바르게 판단하고 선한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구체적인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떠난 삶은 우리를 죄와 죽음과 저주와 불행과 절망으로 몰아넣습니다. 영혼과 삶을 황폐케 만듭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뜻과 계획과 목적 등 모든 것을 철저히 내려놓으십시오. 아버지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셔들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복종하십시오. 자율적으로 진실을 선택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아무리 큰 손해가 주어진다 할지라도 진실하게 살기 위하여 힘쓰십시오. 그것을 통해 진실을 분별하고, 바르게 판단하고, 하나님까지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진실한 삶을 살아야하는 자신의 사명에도 온전히 충성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