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여인의 청혼, 공정 여행가를 자처하다
처음 여행을 떠난 데는 대학 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 실망감도 한몫했다.
“11년 전이네요. 수능 시험을 치르고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많이 울었어요. 가난한 집안 형편 탓에 부모님께 대학 등록금을 달라고 할 용기가 없었고 장학금을 받아야 했으니까요. 재수는 꿈도 못 꿀 상황이었죠. 원하던 대학 대신 지방 국립대에 장학생으로 간신히 입학했지만, 지인들 보기가 부끄러웠어요. 그때 어릴 적 꿈 하나가 생각나더라고요. 세계 일주였죠.”
학업을 미루고 먼저 꿈을 이루기로 했다. 2009년, 무작정 호주로 가서 접시를 닦고 식당 청소를 했다. 이름난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은 과외를 해서 돈을 쉽게 버는데, 타국에서 힘들게 돈을 벌어야 하는 신세가 서글프기도 했다는 한영준(31)씨. 이듬해에는 아시아로 날아갔다. “태국 방콕 여행 중에 클럽에서 현지인 여자와 얘기할 기회가 있었어요. 외모도 출중하고 영어도 꽤 잘했는데, 분위기가 무르익자 난생처음 본 제게 청혼을 하더군요. 자초지종을 들으니 어머니와 남동생 셋을 부양하려면 돈을 벌어야 하는데, 외국 남자와 결혼하면 경제적 문제가 한 방에 해결될 거라고 믿더라고요. 관광객으로 넘실대는 방콕의 거리, 그 이면에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면하기 힘든 방콕 사람들의 서글픈 삶이 눈에 들어왔죠. 그때 공정 여행을 하자고 마음먹었어요.”
공정 여행이란 현지인의 경제활동과 자연환경, 문화를 존중하는 방식이다. 그 존중의 첫걸음은 여행지의 사람들을 마음에 품는 것. 세계 어느 도시를 가든 프리 허그부터 시작했다. 한 사람을 안아줄 때마다 100원씩 적립해 그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기부했다. 프리 허그를 하면서 세계 각국의 친구를 사귀고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어 좋았다.
‘오리지널’로 태어나 ‘카피’로 살지 말기를
무일푼으로 여행을 떠난 지 어느덧 여섯 해, 사람들은 그를 보면서 말한다. 돈이 있으니 여행도 하는 거 아니냐고.
“여행이란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님을 알리고 싶어요. 착하지 않아도 착한 일을 할 수 있고, 돈이 없어도 나눌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고 싶고요. 워낙 모험을 좋아해 노숙과 구걸로 6개월만 살자고 결심했죠. 잘 곳을 구하지 못해 무수히 많은 밤을 거리에서 잤고, 먹을 것을 얻지 못해 굶기도 했지요.”
166cm, 어른 남자치고 작은 키지만 그는 입버릇처럼 모델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어떤 상황이나 조건 때문에 못 한다는건 핑계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여행 경비를 구걸로 마련한 건 사실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한국에서 보육원 봉사를 하며 배운 마술 실력을 발휘하거나, 재산 목록 1호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주고 100원씩 받아 현지인을 돕는다.
“저는 결코 착한 사람이 아니에요. 착한 일을 하는 못된 사람이죠. 스리랑카를 여행하며 좋은 사진을 찍고 싶어서 카메라를 바꿔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런데 그 돈이면 스리랑카 사람들의 꿈인 집 한 채를 지을 수 있더라고요. 건축을 조금 배워 스리랑카와 과테말라에 집 세 채와 농장 열 곳을 지었는데,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저는 남을 위해 봉사하지 않아요. 저를 위해 봉사하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줄 알았던 제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뿌듯합니다. 게다가 주변과 사회가 조금씩 변하니 안 할 수 없잖아요.”
그는 어머니에게 나눔을 배웠다고 말한다. 자식 등록금은 못 줘도 빚내서 남을 돕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어머니를 원망하며 비뚤어진 학창 시절을 보냈다. 밤새 술을 마시고 시험을 보러 간 적도 있다. 모범생도 공부 잘하는 학생도 아니었지만, 친구들을 웃기는 재주가 있었다. 노는 데는 무조건 1등. 중·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들은 거지가 되어 세계 일주를 하다가 저개발국에 집과 학교를 짓는 그의 괴짜 같은 삶을 보면서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입을 모은다.
“누가 그러더군요. 왜 우리는 ‘오리지널’로 태어나 ‘카피’로 살기 위해 노력하느냐고요. 한 사람 한 사람이 귀한 가치가 있는데, 모두 똑같이 수능 시험을 잘 봐야 하고 명문대를 가야 할까요. 물론 그런 노력도 존중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해서 좌절할 필요가 없어요. 키 작고 왜소한 체형에 ‘흑수저’조차 없던 저도 여행하며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만들어가잖아요. 노력과 희생이라는 대가가 반드시 따르지만요.”
꿈과 공의 공통점? 던지고 받는 것!
그는 자신이 도와야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간다. 지금도 볼리비아의 산골 마을 포코포코에 처음 갔을 때를 떠올리면 놀랍기만 하다.
“포코포코 지역은 해발 1천800~3천500m에 있어 산소가 희박해요. 토질이나 수질, 기후도 좋지 않아 사람이 살기 힘들고 질병의 위험도 많죠. 마을 주민이 ‘신도 버린 땅’이라고 말할 정도예요. 최소한의 안전과 생계가 보장되지 않아 국제기구의도움조차 받을 수 없는 곳이니 저 같은 개인이 들어갈 수밖에요. 주민은 90%가 영양 결핍 상태. 게다가 성교육이 없어 열다섯 살밖에 안 된 여자아이들이 임신해 있고, 주민 절반은 제2의 에이즈라 불리는 샤가스(Chagas)병에 감염됐어요. 어른들도 공식 언어인 스페인어를 할 줄 몰라요. 아이들에게 성교육이나 위생 교육을 하고 스페인어를 가르칠 학교가 필요했죠.”
기업의 후원 없이 100원씩 모아 학교를 짓기로 한 때가 2013년. 곧장 후원자 모집에 들어갔고, 2년간 학교를 짓는 데 5천만 원 정도가 투입됐다. 친구 기일에 망자의 이름으로 후원한 사람도 있고, 가구 배송할 때마다 혹은 카페에서 차 한 잔 팔때마다 100원을 적립해 기부한 사람도 있다. 버스에서 모금하거나 길거리에서 구걸한 친구, 초등학교 아이들이 매달 100원씩 후원금을 보내기도 했다. 이렇게 모인 후원금으로 희망꽃학교에 뼈대를 세우며 바닥을 깔고 책상과 책장을 샀다. 포코포코가가 속한 칸토 포코포코 산하 1천500여 명의 학생들에게 학기마다 학용품도 제공했다.
“희망꽃학교를 개교한 다음 날 아무도 안 올까 봐 걱정하며 문을 열었는데, 아이들이 가득 차 앉을 곳이 없었어요. 의자 하나에 둘이 앉았을 정도죠. 그만큼 아이들의 공간이 절실했어요. 국제기구와 비영리단체가 세운 학교 중 상당수는 유지되지 않고 있어요. 단체나 기업의 후원이 끊기면서 100% 재정 지원을 받던 학교가 무너지는 거죠. 수많은 사람의 정성으로 지은 희망꽃학교가 그 전철을 밟지 않도록 시스템과 재정을 견고하게 만든 뒤 진짜 교장 선생님을 모실 계획이에요. 제가 할 일은 거기까지입니다.”
그는 왜 “100원만 주세요”라고 외칠까? 게다가 후원 상한액은 1만 원이다.
“기업명을 달아주는 조건으로 몇몇 기업이 후원을 제의했지만 거절했어요. 구속이나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죠. 정기후원자는 1천500명. 그것도 더는 받지 않아요. 필요한 돈보다 많은 돈이 있으면 의미가 변질되기 쉽죠. 제가 많은 돈을 관리할 그릇도 안 되고요. 후원자 중에는 매달 100원을 보내주는 사람도 많아요. 앞에서 말했듯이 보여주고 싶었어요. 100원의 기적을! 모두 안 될 거라며 고개를 젓던 꿈이 눈앞에 실현되는 걸, 그래서 100원을 보내는 마음이 절대 하찮지 않다는 걸 말입니다.”
이제 그는 구걸하지 않는다. 부자라며 허세를 떤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어디가 가난합니까?” “손길이 필요한 곳이 어디인가요?” 하고 묻는다. 국제 구호 활동가도, NGO 활동가도 아닌 여행가의 신분으로 남을 돕고 싶다. 이를 ‘나눔여행’ 이라 말하는 한영준씨. 희망꽃학교의 새 교장을 모신 뒤 여행자의 도움이 값지게 쓰일 새 개척지로 향할 것이다.
“꿈과 공의 공통점이 뭘까요? 던지고 잡으러 가는 거예요. 남미에 학교를 지었으니 이제는 병원도 짓고 싶어요. 여행자이기에 품을 수 있는 꿈이죠.”
미즈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