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의 추억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자전거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개화기 때로 추측하고 있다. 서재필
박사가 독립문신축현장에 타고 갔다는 기록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자전거 공장은 1944년 전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경성 정공이라고 한다.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이
기업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자전거를 만들게 되었을 것이다. 기아자동차를 설립한 고 김철로 회장은
국내 최초의 자전거 3000리 호를 개발한 한다. 기아자동차의 자전거사업부문은 1979년 분사해 현재의 삼천리자
전거가 되었다. 1965년 국내 최초로 해외에 수출되었다. 내가 1981년 사우디 현장에 근무할 때에도 현지 시장에
서 삼천리자전거를 보고 기뻐하였던 기억이 있다. 그러니까 내가 10살인 1960년경에 선화동에서 빌려 탄 낡은 자
전거는 아마도 1950년경 그 당시에 우리나라 기업에서 만든 3000천리호 자전거일 확률이 높을 것으로 추측해 본
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에 우리 학교에도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통학하는 몇 명의 학생이 있었다. 우리 반에는 자
전거로 통학하는 아이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마도 5, 6학년 고학년 소수의 학생이었을 것이다. 특히 기억
나는 학생은 초등학교로 올라가던 언덕길이 좌측에 있는 정원이 넓은 집에 살던 은행집 고학년 선배의 모습이다.
그의 어렴풋한 아우라가 연녹색 자전거와 함께 생각난다. 그가 탔던 자전거가 언덕길을 힘겹게 올라와 은빛 운동
장을 달리던 모습이 어린 나의 눈에는 너무도 멋진 모습으로 비쳤었나 보다. 나도 그처럼 자전거를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었다. 그 당시 학교에서 어느 선배의 자전거 뒷좌석에 올라타 도청 앞 개천 둑길을 따라 선화
동 집으로 돌아갔던 적이 있었다. 선배의 허리춤을 붙잡고 개천으로 떨어질까 오금이 저리며 무서워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선화초등학교 쪽에 어느 골목에서는 자전거 대여점이 있었다. 나도 자전거를 배워서 선배들처럼 통학하고 싶다
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님께 자전거를 사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우선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되어 나는 용돈을 모아 자전거 타기에 도전하게 되었다. 자전거 대여점에는 낡은 자전거가 몇 대 있었고 5원
을 내면 30분을 빌려주는 자전거 수리점을 하는 집이었다. 그 당시 나의 하루 용돈이 하루에 2원이었으므로 내게
5원의 임차료는 상당한 가치를 지닌 거금이었다.” 자전거 타기” 도전하는 첫날 나는 바로 자전거를 탈 수 있었
다. 공터에 있었던 친구(?)들이 넘어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으면 된다는 ”자전거 타기“ 법칙을 알려주었기 때문이
었다. 여하튼 나는 몇 번의 넘어지기를 반복한 후에 자전거를 배워 자주 선화동 자전거 집을 자주 이용하게 되었
다. 그리고 마침내 어머니에게 자전거를 사달라고 조르게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린 나에게 위험한 자전거를
사주실 리 없었다. 그 대신 어머니와 함께 자전거 대여점에 가서 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자전거를 탔었다.
어머니 앞에서 힘껏 뽐을 내며 자전거 타기를 하였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이 혼자 자전거를 배워 곧
잘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멀리서 물끄러미 바라보시곤 하셨다.
한때 ”자전거“는 ”자전차“라고도 불리었었다. 실제로 자전거가 자동차공장에서 생산되기도 하였었고, 그만큼 자
전거가 귀하고 소중한 귀중품으로 대우받았던 증거일 것이다. 자원이 부족하고, 기술이 부족하였던 시기에 자전
거는 훌륭한 교통수단이자 운반수단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어린아이들의 자전거는 거의 장난감 수준으로 여겨져 판매되고 있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는 부잣집 아이
들만 탈 수 있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귀한 물건이었다.
우리 큰아이의 자전거를 사주던 30여 년 전에도…….
손녀 아이의 세발자전거를 밀어주는 요즈음에도…….
예전 대전 사범에서 있었던 ”자전거의 추억“이 어머님과 함께 문득문득 떠 올라 피식 웃음 짓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