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곶, 간절곶의 유래와 한반도 역사
경상북도 포항시 장기반도 끝에는 영일만을 이루면서 돌출해 있는 호미곶이 있다.
조선의 풍수지리학자 남사고(南師古)선생은『동해산수비록(東海山水秘錄)』에서 한반도는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모양으로 백두산은 코, 이곳은 꼬리에 해당한다고 묘사하였다. 그래서 호랑이의 꼬리라는 뜻의 호미곶(虎尾串)이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빨리 해가뜨는 곳 울산 간절곶(艮絶串)
해돋이 명소로 알려져 있는 곳은 호미곶(虎尾串)과 함께 동해안 최고의 일출 여행지로 꼽히는 울주군 서생면 대송리에 ‘간절곶(艮絶串)’이 있다. 그런데 동해안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이 바로 간절곶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간절곳 명칭의 유래는 어부들이 먼 바다에서 이곳을 바라보면 긴 간짓대(대나무로 된 긴 장대)처럼 보여 간절끝(艮絶)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간절곶의 한자를 그저 간절하다 할때의 간절인줄 안다. 그런데 실제 간절하다 할때의 한자는 간절(懇切)이지 간절곶의 간절(艮絶)이 아니다. 간절곶을 알려주는 교통 표지판에는 한자가 정확하게 나와 있다. 그런데 간절곶의 실제 유래는 더 심오하다.
그러면 간절곶艮絶串의 실제뜻은 무엇일까?
간절곶의 간(艮)은 간방(艮方)을 뜻한다.『주역』「계사전」을 보면 간(艮)은 東北之卦也니 萬物之所成終而所成始也이니 故로 曰成言乎艮이라, 간艮은 동북방을 가리키는 괘이니, 만물의 끝과 시작이 이루어지는 곳이라. 고로 성인의 말씀이 간방(艮方)에서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대한민국이 바로 동북東北 간방(艮方)이다. 간절곶(艮絶串)이란, 간艮이 끊어지는 곳, 여기가 간방艮方의 끝이라는 뜻이다. 옛날 신인들이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이다.
간(艮)은 日과 氐(근본 저)의 합성어로 일출지근(日出之根, 해가 뜨는 근원 자리)이라고 한다. 또한 우리 민족의 정서라고 하는 한(恨)이라는 글자를 보면 간방(艮)의 마음(心)이라는 뜻이다. 간(艮)이라는 글자의 형상을 아기가 자궁에서 자라는 모습으로 보기도 한다. 이는 지난 해 여문 열매가 봄이 되어 새싹을 내는 것과 같다. 간괘(艮卦)는 이렇게 마침과 시작, 열매, 새싹을 상징한다.
자연과 인간, 문명의 근본을 깨닫는 것은 팔괘의 이치에 있다. 음양의 법칙을 알아야 된다는 말씀이다. 나무 한그루의 생명 운동을 알면 자연의 춤사위, 팔괘가 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나무 전체를 보면 뿌리와 줄기가 있다. 뿌리와 줄기는 음양 한 짝이다. 뿌리는 보이지 않는다. 땅 밑에 들어가 보이지 않는 ‘뿌리’가 ‘손(巽)괘’이고 뿌리에서 쭉 뻗어 올라오는 ‘줄기’는 ‘진(震)괘’다. ‘진震’은 봄기운이다. 양 기운으로 쭉 뻗쳐 올라온다. 진震의 성질이 그렇다.
☳ 진괘를 보면 두 효는 음이고 제일 아래에 양효가 있다. 음이 꽉 누르고 있어 반발을 하며 뻗는 양의 힘이 가장 강한 것이다. 그게 목(木) 기운이다. 그걸 뇌성벽력으로도 얘기하고, 제우스 신화에서는 번개로도 얘기했다. 사람으로는 진괘를 장남, 손괘를 장녀로 비유한다.
그 다음에 이파리가 있고 꽃이 핀다. 줄기에서 뻗어 나온 꽃과 열매가 음양 짝이 된다. ‘꽃’은 ‘태(兌)괘’, 꽃이 피고 나면 맺는 ‘열매’가 ‘간(艮)괘’다. 간艮은 열매다.
형상으로 말하면 자연계의 산(山)도 간艮이다. 간艮은 음 기운이 딱 멎어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 아래에 음효가 두 개 있고, 위에 간상련(艮上連)으로 양 기운이 음에 묶여 있다. 가장 정적이면서 무언가 거대한 생명의 약동이 느껴지는 것이 산이다. 그리고 ☱ 태(兌)가 꽃인데, 간태(艮兌)가 합덕하여 간艮은 막내아들(小男), 태兌는 막내딸(小女)이다. 뿌리에서 줄기가 뻗어 올라와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때, 나아가 만물이 태어나고 자라는 생성의 전 과정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음양의 두 요소가 있다. 즉, 나무의 모든 변화를 이끄는 근원, 나무를 존재하게 하는 생명의 근본이 있다. 바로 ‘물’과 ‘불’이다. 불은 태양에서 온다. 그 태양 불이 ‘이(☲離)괘’다. 그 다음에 땅속에 있는 물 기운은 ‘감(☵坎)괘’다. 이 물과 불이 생명의 중추 작용을 한다. 사람으로는 중남(中男),중녀(中女), 차남 차녀다.
‘감(坎)’은 물인데, 하늘에서는 달(月)이다. 그리고 불[離]은 태양(日)이 근원이다. 감리일월(坎離日月)
나무의 뿌리와 줄기, 꽃과 열매는 일월(日月)의 물과 불 기운을 받아 생성된다.
물과 불을 받아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이렇게 해서 여섯 괘다. 이 여섯 괘를 사람으로 말하면 한 아버지 어머니 밑에 있는 3남 3녀다. 이 모든 생명은 하늘과 땅에서 태어나 하늘과 땅의 변화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지를 뜻하는 ‘건곤(乾坤)괘’가 있다.
뿌리와 줄기 ‘진손(震巽)’, 꽃과 열매 ‘간태(艮兌)’, 그리고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물과 불 ‘감리(坎離)’, 천체로 말하면 일월(日月), 이 여섯은 건곤(乾坤), 천지부모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부 팔괘다. 이처럼 나무 한그루에서 팔괘의 이치를 쉽게 배울 수 있다.
인류의 꿈은 간도수(艮度數)에 담겨있다. 간도수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간艮은 열매다. 간艮은 초목의 열매요, 인간의 열매요, 문명의 열매이며 역사의 열매다. 방위로 말할 때는, 문왕팔괘에서 동북방이 간방(艮方)이라고 했다.
동북방에서 변화가 끝나고 새로 시작된다.
다시 말해서 동북방에서 열매를 맺는다.
동북방에서 변화의 한 주기가 끝난다. 그래서 동북방을 간방艮方이라고 한다.
인류문명도 뿌리문화에서 줄기문화를 거쳐 열매문화로 완성된다. 인간도 문명도 가을철에 열매를 거두지 못하면 헛일이다. 간도수란 바로 ‘인간과 자연과 문명의 추수정신’을 상징한다. 이걸 느껴야 한다. 열매는 ‘씨종자’다. 열매 속에 뿌리, 줄기, 이파리, 꽃 등 변화의 모든 과정이 다 들어있다. 열매에는 종終과 시始가 함께 존재[終於艮 始於艮]한다.
‘종만물시만물자(終萬物始萬物者)는 막성호간(莫盛乎艮)이라, 간艮은 만물의 변화를 끝매듭 짓고 새로운 변화를 시작하는 곳으로, 간방艮方보다 더 번성한 것이 없다’고 했다. 이 간艮보다 더 번성한 게 없다. 간艮보다 그 변화가 더 강력한 것이 없다. 간방보다 변화의 모습들이 더 강렬하고 구체적인 데가 없다. 간방艮方 한반도는 분단이 된 채 이념의 극한 대결이 아직도 안 끝났다. 지구촌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최후의 분단국이다.
그럼에도 오늘의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 한민족은 역사의 진실이 왜곡 날조되어 혼을 완전히 상실했다. 동방 역사의 진실을 바로잡는 길이 무엇인가? 내가 한국인이 되는, 진정한 한국인이 되는 도가 어디 있는가? 시원 역사를 바로 세우고 민족혼을 되찾아야 한다.
세계사 속에서 사라진 한국 고대사
실제로 서양 여러 나라의 역사 교과서에는 고대 한민족의 실체가 단 한 줄도 제대로 나와 있지 않다. ‘한반도의 북부는 한사군을 통해 중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는, 터무니없는 역사가 마치 진실인 양 그대로 유포되고 있다.
캐나다의 밴쿠버에 있는 브리티쉬 콜럼비아 대학의 한국학과 학장 베이커는 ‘한국역사는 한사군 이후부터 기록에 있으므로 진정한 한국사는 고려부터이다. 그 이전은 하나의 통합된 나라가 아니었고 단지 고구려인, 신라인, 백제인들이 있었을 뿐이다.’ 이것이 북미에서 가르치고 있는 ‘한국 고대사의 실상’이다. 이미 동북공정은 캐나다인들의 의식 속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다.
지금 이 순간 일본과 중국은 동서고금을 통해 지구촌의 어떤 나라도 저지른 적이 없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 우리의 상고사는 중국과 일본에 의해 너무도 오랫동안 왜곡과 말살의 질곡에 갇힌 채 신음해 왔다. 역사의 맥이 단절되어 천애의 고아 아닌 고아가 된 동방의 한민족, 선천 인류사에서 강대국들이 저질러 온 온갖 불의가 ‘동북아의 고대사’에 압축되어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독도 망언, 벼랑 끝에 서 있는 한민족의 미래, 동북아의 시원역사, 그 진실을 바로잡지 못한 채 오늘날 한민족은 혼 빠진 역사의 주인공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영어의 코리아(korea)가 고려에서 온 것이다. 고려의 창업시조 왕건이 나라 이름을 정할 때 북방의 고구려 유민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고려라고 했다. 그리고 그 전에는 북쪽의 대조영(大祚榮)의 아버지 대중상(大仲象 : 대진국 열황제)이 세운 대진국(大震國 : CE 668~926)과 남쪽의 소위 통일신라라고 하는 후신라의 남북국 시대가 있었다. 또 그 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사국시대가 있었고, 그보다 앞서서는 열국시대가 있었다. 즉 북부여를 중심으로 백제의 전신인 마한, 가야 땅의 번한, 신라의 전신인 진한, 평양 쪽의 최숭(崔崇)이 세운 낙랑국(樂浪國 : BCE 195~CE 37), 동부여, 동옥저, 동예 등의 여러 나라 시대가 있었다. 낙랑국은 서기전 195년 12월, 연나라의 인구 증가로 인해 압박이 가해오자 준왕(準王, BCE194~ BCE 108)이 다스리던 번조선에 살던 최숭이 백성들을 이끌고 대동강 유역(지금의 평양)으로 이주하여 낙랑국을 세웠다. 흔히 알고 있는 중국의 한 무제가 설치했다고 하는 한사군의 낙랑군과 최숭의 낙랑국은 전혀 다르다.
옛 고조선은 과연 한나라에게 망했나?
전국을 통일한 진(秦 : BCE 221 전국통일 ~ BCE 207 멸망)나라가 15년 만에 망하고 난 후, 한 고조 유방(劉邦)과 초패왕 항우(項羽)가 6년 동안 아주 피가 터지도록 싸운다. 결국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한(漢 : 전한 BCE 206~CE 8)제국을 열게 되는데, 그 7대 임금이 무제(武帝 : BCE 141~ BCE 87)다. 오늘의 사가들은 북쪽의 흉노를 굴복시킨 한 무제가 자신감을 얻어 동북방의 고조선을 쳐들어왔다, 그리하여 준왕(準王)을 몰아내고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그 자리에 식민지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마치 준왕이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무엇인가?
준왕은 고조선의 서쪽 날개였던 번조선(番朝鮮)의 부단군이었을 뿐이다. 또한 진조선(辰朝鮮)의 마지막 제왕인 고열가(古列加) 단군이 장수들의 거듭된 화란 속에 퇴위하여 고조선 본조시대가 마감(BCE 238년)된 것은, 찬적 위만(衛滿)이 번조선을 점거하여 스스로 왕위에 오르기(BCE 194년) 44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특히 고열가 단군 시절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춘추시대 BCE 722~ BCE 403, 전국시대 BCE 403~ BCE 221)의 혼란기에 처해 있었다. 사실이 그러할진대 당시 한족이 고조선을 위협한다거나 고조선을 찬탈할 여력이 어디 있었겠는가!
역사학계에서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라고 주장하고 있는 위만조선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위만(재위 BCE 194-BCE 180)은 본래 중국 한족 출신으로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죽마고우였던 노관의 부하이다. 중원을 평정한 한 고조는 여태후와 더불어 개국공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 때 연나라 왕 노관은 흉노로 달아나고, 위만은 조선인으로 변장한 뒤 부하 1 천 명과 함께 왕검성에 와서 번조선의 준왕에게 거짓 투항을 했다. 이에 준왕은 덕으로써 그를 받아 주고 서쪽 변경을 지키는 수비대 책임자로 임명까지 했다.
그러나 그 곳에서 한족 망명 집단을 이끌고 몰래 세력을 기른 위만은 이듬 해 준왕을 배반하고 왕검성을 쳤다. 그리고 나라 이름은 그대로 둔 채 스스로 왕이 되었다(BCE 194).
『삼국유사』에서 말한 위만조선은 바로 우리 민족의 서쪽 영토였던 번조선의 한모퉁이를 잠깐 강탈하여 지배했던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그런데 현 역사학계에서는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준왕을 잡아먹은 위만 같은 배은망덕한 자가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하였다는 것이다.
『사기』에도 분명히 위만을 연나라 사람[蒸人]이라고 기록했을 뿐 아니라, 안정복의『동사강목』에서는 ‘위만은 나라를찬탈한도적’이라했고,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용은 ‘위만은 한 명의 강도에 불과하다[尺一强盜]’고 하였다. 이처럼 위만은 중국 한족의 인물로서,한마디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배은망덕한 떠돌이 도적인 것이다.
위만정권은 손자 우거왕 때에 이르러 밖으로는 한무제의 침입과 안으로는 지도층의 분열로 인해 결국 망하게 된다(BCE 194-BCE 108)
조선 역사를 부활시킨 동명성왕, 고두막한 한 무제는 그 여세를 몰아 고조선의 뒤를 이은 북부여로 쳐들어온다. 그런데 당시 북부여의 4대 고우루(高于婁) 단군은 워낙 심성이 유약하여 제대로 맞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중에 병사하고 만다. 그리하여 우리 조선 민족이 다 넘어가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는데, 이를 지켜보고 있던 고조선 47대 고열가 단군의 후손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한 무제의 군대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다.
고두막한은 기원전 108년, 졸본(卒本)에서 나라 이름을 ‘북부여’에서 동방의 대광명이라는 뜻의 ‘동명(東明 : 동명부여, 또는 졸본부여)’이라 바꾸고 동명왕으로 즉위한다.
그리고 기원전 87년에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조선 역사 부활의 푯대를 다시 세우니, 이분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이다. 이 때 본래 북부여 4대 단군의 승계자인 해부루(解夫婁)가 동쪽으로 가서 가섭원(迦葉原) 땅에다 나라를 세우는데, 동쪽에 있는 부여라는 뜻으로 동부여(東夫餘)라 했다.
해부루는 북부여 4대 단군의 동생이다.
그리하여 고두막한이 북부여의 5대 고두막 단군이 되는데, 그때부터 북부여의 후기시대[後北夫餘]라고 한다.
북부여는 시조 해모수(解慕漱) 단군으로부터 6대 만인 고무서(高無胥) 단군 때에 막을 내린다. 6대 고무서 단군은 딸만 셋이었다. 그 둘째딸이 소서노(召西弩)인데, 고주몽과 혼인을 시켜 사위로 삼아 주몽으로 하여금 북부여를 계승토록 한다. 그리하여 고주몽이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되었으며, 그 후 기원전 37년에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로 변경하여 고구려 700년 역사의 창업 시조가 된 것이다. 이것이 고조선이 멸망한 후 열국시대로 들어서는 과정이다.
왜 중국인들은 부여사를 말살했을까?
북부여가 단군조선을 계승하였다. 이것이 한민족 고대사의 국통맥을 바로잡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 역사에서는 북부여 역사라는 게 완전 말살됐다. 그 역사의 원형이「삼성기三聖記」상, 하 두 편과 「단군세기檀君世紀」에 나온다. 「단군세기」에는 47대 단군 역사가 나오고 「북부여기北夫餘紀」상, 하에는 북부여의 역사가 나온다. 「북부여기」상에 해모수 단군서부터 역대 단군들이 나오는데, 5대 단군 고두막한이 바로 동명성왕이다. 고두막한은 중국 한족의 침략을 받아 완전히 멸망할 위기에 놓인 우리 동방 조선의 역사를 부활시킨 인물이다. 그런데 중국 한 무제가 고두막한을 죽이려고 덤벼들었다가 참패를 당했다. 한 무제가 패퇴한 대사건, 이것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수치였다. 중국 5천년 역사에서 당태종이 안시성에 와서 양만춘 장군한테 화살을 맞아 눈 빠진 것보다 더 부끄러운 사건이다. 그래서 중국의 역사가들과 국내 사대주의자들이 이 북부여 역사를 완전히 뿌리 뽑아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민족 역사의 맥, 사통의 허리가 잘려버렸다. 그래서 국통 맥이 연결이 안 된다.
지금 역사학자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부여의 역사를 중국의 사료에 맞추어 꿰매고 있다. 그러니 너덜너덜하다. 이렇게 꿰매면 이런 작품이 나오고, 저렇게 꿰매면 저런 작품이 나오고, 전부 애꾸눈이처럼 찌그러져 버렸다.
그 결과가 바로 예전에 방영했던 주몽이야기다. 이 드라마에서는 고주몽이 해모수의 아들로 나온다. 그게 다 중국 측 사료를 보고 만들어서 그렇다.
해모수와 주몽은 무려 120여년 이상 차이가 난다. 해모수는 북부여의 초대 단군이고 주몽은 6대 마지막 단군 고무서의 사위인데, 어떻게 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이란 말인가! 북부여는 단군조선과 고구려를 이어주는 잃어버린 열국시대의 역사의 맥을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부여사를 잘 알아야 한다. 우리 한민족을 제대로 알려면, 한민족 정신의 뿌리를 알려면 부여사를 알아야 한다.
한편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망명길에 오른 준왕은, 황해를 건너 지금의 금강 하구지역으로 피신을 왔다. 군산으로 왔다고도 하고 익산으로 왔다고도 하는데, 이후 준왕은 오늘의 청주 한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로써 대륙을 호령하던 북삼한의 시대가 끝나고, 한반도의 한강 이남 지역의 남삼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간도수(艮度數)가 뿌리내리는 과정인 것이다.
선천, 봄여름우주 상극의 이법 속에서 역사가 발전하는 상(象)을 나타내는 문왕팔괘의 진방(震方, 帝出乎震)에서 문명의 씨앗을 뿌린 제(帝,상제)께서 후천 가을우주 결실문화, 상생의 이법을 나타내는 정역팔괘의 간방(艮方, 成言乎艮)에서 출세하는가를 공자께서 말씀한 진변이간(震變爲艮)의 뜻에서 알수가 있다.
대한민국의 국통맥을 보면, 고조선(단군조선)은 나라를 삼한(三韓)으로 다스렸다. 이것을 보는 것이 우리 한민족 역사의 뿌리와 진리의 근원, 깨달음의 근원, 우주론의 근본 문제다. 동방은 조물주를 삼신(三神)이라고 한다. 조물주의 창조의 덕성인 조화신造化神(父: 만물을 내시고), 교화신敎化神(師: 以神設敎), 치화신治化神(君: 다스리시고)의 창조의 본성을 가지고 삼신(三神)이라 하는 것이다. 삼신(三神)의 본성은 첫째, 만물을 창조하는 조화신의 역할이 있고, 둘째, 깨달음을 열어주는, 가르쳐서 변화시켜주는 교화신의 역할, 셋째는 다스리는, 통치하는 치화신의 역할이 있다. 동방의 이 삼신三神 의 문명을 열어서 제도화 시키는 과정이 바로 한민족의 뿌리 역사인 환국-배달-단군조선의 역사다. 즉 우리 민족의 시원 국가인 환국, 배달, 고조선은 삼신(三神)의 삼수三數 법칙으로, 삼신의 세 가지 창조 덕성을 생활 문화로 뿌리내린 것이다.
조물주 삼신 상제의 첫 번째 본성인 조화신(造化神)의 특성을 몸으로 체득한 것이 조화시대 환국(桓國)이다. 그 때는 모든 백성이 광명(white shaman)으로 살았다. 밝아서 아주 거짓없이 진실하게 살았다.
그 다음, 교화신(敎化神)의 기운으로 문명을 열어 나간 나라가 배달국이다. 문자를 만들고 농경문화를 열고, 시장문화를 열어 교역을 하고, 약재를 만들어 병을 고치는 등 실제로 문명을 열었던 시대였다.
그리고 세 번째 치화신(治化神)의 시대가 고조선(단군조선)이다. 고조선(단군조선)을 창업한 단군성조는 훨씬 더 지존하신 분이다. 이분은 삼신 상제의 정신을 인간의 역사 통치 질서에 뿌리를 내려 나라를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다시 말해서 뿌리 문화를 종합하여 삼신 상제의 가르침을 통치 역사로 제도화시켰다. 이것이 중요하다.
교화시대인 배달국을 연 거발환 환웅이 백두산 신시(神市)에 나라를 처음 건설할 때 환국으로부터 받아내린 가르침이 바로 홍익인간(弘益人間), 제세이화(濟世理化), 광명이세(光明以世)다.
백성들을 다스려 진정한 하늘 백성으로 만드는 통치 이념을 배달국 환웅천황께서 처음으로 열어주신 것이다. 그리고 삼신의 질서, 삼신 상제의 창조 코드인 삼수(三數)를 통치원리로 하여 나라를 삼한三韓으로 나눠 다스린 것이 고조선, 정확히 말해서 단군조선이다. 이 단군조선을 후대의 한양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옛 조선, 고조선이라고 한다.
우리 역사의 국통을 아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아는 게 아니다. 우리 민족이 섬겨 왔던, 조물주의 창조 섭리, 인간이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살아왔느냐 하는 삶의 과정과 역사의 깊은 섭리를 아는 것이다. 우리의 고대사는 간도수(艮度數) 실현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단군조선이 건국된 지 1,048년이 지나,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22대 색불루 단군에 이르러 도읍지를 백악산 아사달(현재의 길림성 장춘)로 천도를 한다.
그리고 그동안 병권이 주어지지 않았던 부단군이 다시리던 번한(番韓)과 마한(莫韓)에 병권을 일부 나누어 줌으로써 삼한 체제의 동요가 서서히 일기 시작하였다. 이에 삼한관경(三韓觀境)의 체제는 무너지고 대신 두 분조의 독립된 병권이 인정되는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의 삼조선 체제(分權管境)로 개편되었다.
그 후 43대 물리 단군의 재위 말기인 기원전 426년에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화충이 반란을 일으켜 아사달이 점령되고 물리 단군이 피난길에 붕어하고 만다.
이 때 구물 장군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군을 토벌하고 44대 단군으로 즉위한다. 그리고 국정을 쇄신하기 위해 국호를 조선에서 대부여로 개칭하고 백악산에서 장당경(요령성 개원)으로 천도하였다. 나라를 근본적으로 혁신해서 다시 살려보려고 몸부림쳤으나 이미 진조선(진한)의 중앙정부 권력은 크게 약화되고 번조선(번한)과 마조선(마한)의 목소리가 높아져 있었다. 중앙정부인 진조선의 권한이 축소되고, ‘좌우의 두 조선’이 형식적으로 진조선을 받드는 형국이 되자 장군들의 반역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고조선은 점점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238년, 47세 고열가 단군에 이르러 마침내 고조선은 2,096년의 장구한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고조선이 망하면서 역사의 무대는 북삼한에서 한강 이남의 남삼한으로, 대륙에서 반도로 옮겨오게 되었다. 즉, 동방 문명의 원 핵 자리요 숨구멍인 동북 간방(艮方)으로 조여들어 온 것이다. 이로써 한민족은 본격적인 간(艮)도수 실현의 역사 시대를 준비하게 되었다.
‘구변지도(九變之道)’끝에 이루어지는 ‘대한’
고조선이 어떻게 망하느냐, 그리고 우리 민족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어 나가느냐는 것을 예언한 사람이 있다. 9천년 역사를 이어 온 우리 한민족의 국운을 예언한 위대한 인물, 그가 바로 고조선 6대 달문 단군 때의 신지(神誌) 발리(發理)이다. 그는 대우주의 조화옹 삼신 상제을 예찬하고 한민족사의 뿌리 되는 역대 열성조의 성덕과 치적을 칭송하면서, 단군조의 앞날과 한민족의 국운에 관한 예언을 남겼다. 그것이『신지비사(神誌秘詞)』이다. 여기서 그는 단군조선은 삼신 상제의 섭리로 수도 셋을 두고 세 임금이 다스리는 삼경의 균형이 무너지면 고조선이 망한다고 했다.
‘이 땅 동국의 역사는 아홉 번 바뀐다[구변지도(九變之道)]’고 했다. 나라 이름이 크게 아홉 번 바뀐 뒤에 새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
발리의 예언처럼 실제로 우리나라는 ①환국 ②배달 ③조선 ④북부여(열국시대) ⑤고구려(4국시대) ⑥대진국(발해)·신라 ⑦고려 ⑧조선 ⑨대한민국으로 아홉 번 나라 이름을 바꾸었다. 그렇다면 신지 발리가 한민족 통사의 대강을 논하면서 전하고자 한 진정한 뜻은 과연 무엇일까?
아홉 번 변한다는 것은 열 번째로 나라이름이 바뀌어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역사가 열린다는 뜻이다. 그것은 분열의 극단을 뜻하는 ‘9’수의 천지 상수 원리에 의해 나라이름이 아홉 번 변하면서 한민족이 선천 분열시대를 종결짓는다는 것이며, 나아가 10무극의 통일시대인 후천을 열고 완전한 통일국가로 거듭 태어나리라는 의미인 것이다. 아홉 번은 3×3=9로, 생장성(生長成) 삼변성도(三變成道)의 원리를 의미한다. 삼신 상제의 섭리에 의해 1단계 환국-배달-조선의 뿌리국가 시대, 2단계 북부여를 중심으로 하는 열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사국시대-대진국(발해)과 후신라의 남북국시대, 3단계 단일왕조 시대인 고려-조선을 거쳐 오늘의 대한민국이 열렸는데 이 나라가 또 남북으로 분단이 되었다. 이처럼 세 번 변화를 거쳐 온 한민족의 분열과 통일의 역사 과정은 장차 지구의 중심 땅이 될 간방艮方의 남조선에서 실현되는 인류문명 대통일 도수, 즉 간(艮) 도수에 의해 그 종지부를 찍는다.
인생사를 대국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여는 지름길이 바로 역사를 아는 데에 달려 있다. 역사란 다름 아닌 인간이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지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이룩한 문명 진화의 총체이다.
오늘의 우리는 과거 역사가 만든 작품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모르면 현재를 진단할 수도 없고, 미래를 준비할 수도 없다. 역사를 모르면 미래가 없다.
지구촌의 정세를 훤히 꿰뚫어보는 국제정치의 대가라 해도, 인류의 원형 문화와 시원 역사를 모르고서는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문명, 인류의 미래 문명을 알 수도 준비할 수도 없는 것이다.
역사를 모르면 왜 내가 인간으로 태어났으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는가‘를 알 수 없다. 인생의 희망찬 미래를 열기 위한 진리의 눈을 뜰 수가 없다.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자식을 낳아 놓고서 성(姓)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지금 한국인은 제 나라 역사도 모르는 정신적 미아로 살고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진정한 한국인으로 살려면,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알아야 된다. 그 중에서도 한민족의 창세역사와 원형문화를 알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뿌리 역사는 왜곡되어 잃어버리고 꼬리 역사만 배우고 있다. 우리의 뿌리 역사와 한(韓) 문화의 원형을 확실하게 파악하는 일은 오늘을 살고 있는 한국인 모두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일이다.
그동안 우리의 시원 역사를 단절시키고 파괴한 여러 손길이 있었다. 그 가운데 첫째가, 중국에 의한 역사 왜곡과 그 왜곡 내용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우리 유학자들의 존주사대尊周事大 사상’이다.
공자가 주창한 유교는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요, 그 밖의 민족은 중국에 예속된 오랑캐에 불과하다는 중화주의(中華主義)를 제창한다. 유학을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은 고려와 조선의 존화(尊華) 사대주의자들은 이 중화주의 사관을 그대로 답습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역사에 끼친 해악은 너무나 심각하다.
고려의 유학자들은 한민족의 국통(國統) 맥이 기자조선에서 위만조선, 남삼한, 신라로 연결되는 것으로 왜곡하였다. 그에 앞장 선 인물이 고려 중기 때 김부식이다.
김부식은 묘청의 북벌운동을 진압하고 우리민족의 고유사상, 낭가사상(郎家思想)을 말살한 경력을 가진 삼국사기의 저자로 신라의 독자적인 연호사용을 사대정신에 위배된다고 비판하고 우리민족을 침략한 당나라 이세민을 우리 당태종(我唐太宗)”이라고 칭하였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는 철저하게 비아(非我)의 입장에서 서술한 책으로 우리 역사를 편찬할 때 발해사(渤海史)를 논하지 않았을 정도로 중국을 지극 정성 섬기며 삼국사기 서술 주체가 중국이고, 객체가 한국이다.
그의 열렬한 모화(慕華,중국의 사상을 숭상하여 섬김)정신은 망국멸족(亡國滅族, 나라와 민족을 함께 망하게 함)의 사대사관의 전통이 되어 후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위징 등이 쓴 『수서(隋書)』에 이런 구절이 있다. “고구려(高句麗)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토지(帝將討之)라.” 고구려가 교만하고, 오만하고, 공손하지 않아서 수양제가 장차 토벌을 하려고 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고구려를 아(我)로 바꿔놓고는 "아(我)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帝將, 이걸 상장토지(上將討之)라.
우리나라의 역사를 쓰면서, 우리가 교만하고 오만해서 중국의 임금이 치려고 했다… 는 식으로 쓸 수가 있을까? 참으로 황당한 내용인 것이다. 이처럼 "김부식은 비아(非我)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또 하나 예를 들면, 신라 650년 진덕여왕 4년에 당나라 고종의 ‘영휘’라는 연호를 처음 쓴 부분에 대해서도 주석을 달기를, “옛날에 법흥왕이 연호를 스스로 썼는데, 아, 편방(偏邦,중국의 변두리)의 소국으로서 왜 연호를 쓰나?
당 태종이 꾸지람을 했는데도 연호를 고치지 않다가, 650년에 고종의 연호를 갖다 쓰니, 허물을 능히 잘 고쳤다고 할 수 있도다” 이런 식이다. 이것이 국보로 보존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의 역사서에 나오는 구절들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사정이 이러하니 중국의 입장에서 쓰여진 사대주의 책이라고 비판받아도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통해서 중국을 흠모하고 존중하는, 존화사대주의 사상을 정립한 것이다. 그가 지은 삼국사기는 그 이후의 모든 역사왜곡의 기본 원전이 되었다.
한국을 점령한 일본제국주의자들도 바로 이 책을 얼씨구나 하고 악용하여 소위 반도사관, 식민사관, 왜식사관을 날조해 낸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그러한 사관에 따라 학교에서 역사공부를 하고 있다.
그는 삼국사기를 저술하면서 고구려를 계승한 대진국(발해)의 역사는 완전히 지워버린 반면, 같은 시대 신라 역사는 망하는 날까지 세세히 기술하였다. 그러면서도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것은 사대정신에 위배된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묘청, 정지상 등이 고토 회복을 위한 발판으로 벌인 서경천도 운동을 벌였을 때, 김부식을 대표로 하는 집권층 유학자들이 이것을 권력 장악을 위한 음모라고 몰아붙였다.
유교를 국교로 신봉하는 조선은 개국 초 춘추(공자)와 자치통감 강목(주자)만 사필(史筆)로 여기고, 한민족 정통사서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압수 소각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역사,철학,종교,문화의 중요한 자료들이 말살되었다.
주체적인 사관을 주장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서 죽임을 당하는 최악의 상황이였다. 그래서 우리역사가 사대주의 사관에 의해서 철저히 왜곡되고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모든 역사가 왜곡이 되었다.
태종은 서운관(書雲觀)에 보관되어 있던 고유사서들을 공자의 가르침에 어긋난다하여 소각하였으며, 세조에서 성종까지 3대에 걸쳐 전국 관찰사에게 사서 수거령을 내렸다. 이렇게 우리의 정통 사서들이 소실된 것은, 오늘날 우리 역사의 올바른 인식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고 있다.
한민족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중국측 사료와 이 땅의 사대주의 사서에 크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광해군 때 청 태조 누루하치가 보낸 국서를 보면 조선의 사대 근성이 적나라하게 고발되어 있다.
“요동은 본시 조선의 국토다. 지금 명나라 사람들이 그 땅을 빼앗았는데, 너희는 명나라가 원수인 것도 모르고 도리어 신복하고 있다”고 조선을 꾸짖고 있다. 그리고 더욱 가관인 것은 조선 유학자들이 보였던 중국의 사상을 숭상하여 섬기는 모화정신(慕華精神)이다. 이것은 진실로 한국사의 뿌리를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망국멸족(亡國滅族)의 표본이다.
세종 때 최만리는 훈민정음 제정 반대 상소를 올리면서 “조종(祖宗)” 이래 지성으로 중국을 사사(師事)하고 모두가 중국 제도를 본받아 왔는데 만약 훈민정음이 중국에 전해지는 날에는 사대모화에 부끄러운 일이라“하였다.
조선의 학자들은 명(明)을 ‘본조(本朝)’,즉 ‘내 나라의 조정’이라 부르며, 우리의 역사에 대해 ”단군시대는 아득한 태고시대라 증명할 수 없고, 기자(箕子)가 봉해지고 나서야 겨우 문자를 통했으며, 삼국시대 이전은 별로 논할 만한 것이 없다“고 폄하하였다(대동야승(大東野乘) 기묘록별집(己卯錄別集)
또한 명나라 군주를 ‘우리의 황상(皇上)이라 하고, 명나라 조정을 ’천조(天朝), 또는 ‘성조(聖朝)로 불렀다(본국청개종계주본(本國請改宗系奏本) 기자께서 동쪽으로 오셔서 가르침을 베풀었으니 오랑캐가 바뀌어 중국인[夏]이 되었고 드디어 동쪽의 주(周)나라가 되었습니다['숙종실록(肅宗實錄)' 7, 9]”라고 하였다.
옛날 유학자들의 의식이 다 이렇게 되어 있다. 유가문화의 썩어빠진 역사의식으로 인해 나라가 망해 버렸다. 伏草 최인(崔仁)은 이 같은 행태를 두고 ‘조선은 한일합병으로 망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전에 한중합병으로 망하였다’라고 일갈하였다.
조상의 비문 첫 머리에 유명조선(有明朝鮮:명나라에 속한 조선)을 내세우고, 조선 백성을 명(明)의 신민(臣民)이라 하고, 한문은 진서(眞書)로 존중하면서 한글은 언서(諺書)로 무시하였으니, 분명히 한중합병이라는 것이다. 고려와 조선 역사를 돌이켜보면, 참으로 혼 빠진 민족이 아니고 무엇인가.
단재 신채호는 외래종교, 외래사상에 물들어 역사와 문화를 다 잃어버린 가련한 한민족에 대해 이렇게 통탄하였다.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利害) 밖에서 진리를 찾으려함으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
불교의 스님, 일연의 "삼국유사"는 고조선조에서 석유환국(昔有桓國)의 환국을 자신이 주석을 달면서 ‘위제석야(謂帝釋也)’라 하여 환인천제의 환국을 불교의 제석환국으로 바꾸고, 또한 환웅천황이 내려오신 태백산(백두산)을 지금의 묘향산이라 하고 단군 왕검의 도읍지인 아사달(阿斯達)을 지금의 평양이라고 하는 등 배달국, 고조선의 광활한 영역을 반도 안으로 축소하였다.
고려 때 송(宋)나라 사신이 기자묘(箕子墓)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자 그 때 한 사람도 알지 못한다고 하자, 고려 숙종 7년(1102) 예부상서 정문(鄭文)이 무주고총(無主古塚)을 하나 찾아 임금께 청하여 서경(평양)에 가짜 기자묘(箕子墓)와 기자 사당을 만들었다.
또한 서경의 반듯한 도로 흔적들을 기자(箕子)가 만들었다는 정전제(井田制)의 증거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 기자 정전터와 평양 을밀대 북쪽에 있던 기자묘를 조사하면서 그 허구가 밝혀졌다. 기자 정전터는 고구려시대 도시 구획 흔적이었고 기자묘에서는 사기 파편과 벽돌조각만 나왔다.
기자에 관한 진실을 말하자면, 그는 무왕에 의해 풀려난 후 상나라 유민을 이끌고 당시 고조선(번조선)의 국경지역인 산서성 태원(太原)으로 이주하였다. 망명지 조선 땅에서 6년 정도 살다가 고향 서화(지금의 하남성 서화현)로 돌아가 생을 마감하였다.(산동성 조현에서 서남쪽으로 약 15km 왕성두촌이라는 작은 마을의 들판에 작고 초라한 모습의 기자묘가 있다.)
당나라 때 사마정의 '사기색은(史記索隱)'은 “기자의 묘가 하남성 몽현[蒙縣: 현재의 상구현(商邱縣)]에 있다”고 썼다. 최남선도 “평양의 기자묘는 고려 중기 이후 견강부회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기자조선설은 “중국인이 이민족을 동화하는 정책의 산물”이라고 했다.
중국에 의해 왜곡 조작된 기자조선의 실체
‘원래 은나라에 기자, 비자, 미자라는 세 분의 어진 현인이 있었는데, 은나라가 망하자 그 중 한 사람인 기자가 동방으로 가서 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기史記』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서 “봉기자어조선封箕子於朝鮮”이라고 하여, 주나라를 연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임명했다고 했다. 하지만 본래 기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紂의 이복형제로서 ‘기’라는 땅의 제후였다. 그는 은나라가 망한 뒤 벼슬을 않겠다 하고서 옛 고국으로 내려간 사람이다. 그런 그가 무슨 왕이 되었단 말인가. 사마천이 붓대를 갖고 그렇게 조작을 한 것이다.
‘단군조선’이란 말은 전혀 없고, 약 3,100년 전에 기자가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그런 거짓말 역사를 쓰고 있다. 이는 이 땅의 역사가 중국의 제후국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매도하기 위한 것이다.
주은래(저우라이언,周恩來) 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
1963년 6월28일 주은래 총리는 조선과학원 대표단 접견시 중국과 조선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중국과 조선, 두 민족 관계는 제국주의 침략으로 중지 될 때까지 3, 4천년 이상 매우 긴 시간이었다. 이러한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원인이다.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여졌다.
먼저 양국민족의 발전에 대한 과거 중국 일부 학자들의 관점은 그다지 정확한 것은 아니었고 그다지 실제에 부합하지 않았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서 살아왔다.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 경백호 부근은 발해(渤海)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다. 이 나라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존재했다. 따라서 조선족이 조선반도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도 오랫동안 살았다는 것이 증명된다. 다만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이 있고 또한 이 지방에 가서 현장조사하고, 비문과 출토문물을 찾고, 역사흔적을 연구하는 것은 또한 권리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신들을 돕도록 하겠다. 이렇게 긴 역사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문자로 기록된 역사자료도 연구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자료를 연구하려면 중국과 조선 두나라 동지들이 반드시 하나의 공통된 관점을 세워야 한다.
항상 봉건대국의 태도로 당신들을 무시'모욕하면서 당신들을 침략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중국역사학자들은 반드시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여러분들의 머리위에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 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고, 평양에서 그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역사왜곡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단 말인가?... 이하 생략
대만학자 노간(勞幹)은 중국문화론집(中國文化論集(2), 中韓關係論略)에서 “우리들은 동방사람들을 동이(東夷)라고 부른다. 이(夷)자와 인(仁)자는 통용된다. 인(仁)자와 인(人)자 또한 한 근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 있어서 인(人)자를 일컫는 것은 그 근원이 동방에서 나왔으며, 만약 동이족이 문화적으로 선진이고, 후대에 와서 서방사람들이 이를 빌어 쓴 것이다.”
俄們常常把 東方的人稱爲東夷 而夷字和人字是通用的仁字和人字也是出於一源 那魔漢語中 ‘人’的稱謂 支於還有出於東方的可能…. 假若夷人先成文化的先進 夷人先用了‘人’字作爲全人類的名類 西方候起的部族 可能再爲借用的(中國文化論集(2), 中韓關係論略).
일본 학자 고꾜 야스히꼬(오향청언, 吾鄕淸彦, こきょうきやひこ)는“사마천의《사기(史記)》25권은, 단군 조선이 중원 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중국이 단군 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 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러시아의 역사학자 유 엠 부찐도 그의 저서《고조선(古朝鮮)》에서 "한대(漢代) 이전에 현토와 낙랑 지역에 이르렀던 조선의 영역은 한 번도 중국의 제후국(諸侯國)이 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연(燕)나라나 주(周)나라에 예속된 적이 없다." 그리고 기자조선(箕子朝鮮) 설은 주왕(周王)이 자신의 지배 하에 있지 않은 영토를 마치 통치한 것처럼 꾸민 전형적인 예라고 말하고 있다.
또 "중국의 역사가들은 연나라가 중국의 동북쪽 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연나라의 역할을 과장해서 표현해 왔다." 그러며, 당시 국력으로 보아 연나라가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쌓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서량지(徐亮之) 교수는《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1943년 10월 초판) 에서 이렇게 썼다.
“4,000 여 년 전 한족(漢族)이 중국 땅에 들어오기 전에, 중원(中原)의 북부 및 남부를 이미 묘족(苗族:東夷)이 점령하여 경영하고 있었다. 한족이 중국에 들어온 뒤에 점점 서로 더불어 접촉하였다.”
"은(殷)과 주(周) 이전과, 은나라 주나라 대에도 동이의 활동무대가 실로 오늘날의 산동, 하북, 발해 연안, 하남, 강소, 안휘, 호북지방, 요동반도, 조선반도의 광대한 지역을 모두 포괄하였는데「산동반도」가 그 중심지였다."
“중국의 책력법(冊曆法)은 동이(東夷)에서 시작되었다. 책력을 만든 사람은 희화자(羲和子)이다. 그의 혈통은 은(殷)나라, 상(商)나라의 동이족(東夷族) 조상이다. 동이가 달력을 만든 사실은 실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 “역법(曆法)은 사실 동이(東夷)가 창시자이며, 소호(小昊) 이전에 이미 발명되었다.” -曆法實倉始於東夷 而且小 以前便已發明.
한글재단 이사장인 한갑수(韓甲洙) 선생이 미국 공군지휘 참모대학에 입교했을 때, 같은 입학생인 중국학자 서량지(徐亮之)교수가 한 박사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귀국은 우리 중국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抱朴子)를 감추고 중국역사를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본인(서량지)이 학자적 양심으로 중국인으로서 사죄하는 의미로 절을 하렵니다.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큰 절을 올렸다 한다.
중국 역사학자인 왕동령(王棟齡)은《중국사(中國史)》에서 “한족(漢族)이 중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현재의 호북(湖北), 호남(湖南), 강서(江西) 등 지방은 본래「苗族(東夷)의 영속지였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이(九夷)인데 임금은 치우(蚩尤)였다.”
묘족(苗族)은 오늘날 양자강을 중심으로 한, 호북 호남성 등지에 분포되어 있는 소수민족이며, 위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도 고대에는 동이족의 한 지류였음을 알 수 있다. 구려(句麗)는 구려(九黎), 구이(九夷)를 말하는 것으로, 이 구이의 군주가 치우(蚩尤)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黎東夷國名也 九黎君號蚩尤是也 蚩尤古天子 三苗在江淮荊州 (史記, 五帝本紀).
“4천년 전 (…) 현재의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 등지를 이미 묘족(苗族)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한족(漢族)이 들어오면서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麗)이며, 군주는 치우(蚩尤)이다.”《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
소련의 역사학자요 인류학자인 시로코고르프(シロコゴルフ)는《중국사》에서 "주전 3,000년경 동이족(東夷族)은 이미 황하 양자강(揚子江) 서강의 중류이동(中流以東)의 중간 지역에 살았으며,
지나족(支那族)은 이보다 1,500~2,000년 후에 동방천자 치우(蚩尤)가 다스리는 동이족(東夷族)의 나라인 강회(江淮)지방에 진출하였다."고 하였다.
일제의 대륙침략에 따라 중칭(重慶)으로 후퇴한 장개석(蔣介石) 총통은 함께 피난 온 상해임시정부의 김구 주석 일행을 위로하기 위해 만찬에 초대했었다고 한다. 이때 장 총통은 자기 고향이 옛 백제 땅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우의를 다졌다고 한다.
장 총통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동지적 입장에서 이런 역사인식을 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들은 김구 주석은 충격과 함께 자괴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고 뒷날 술회한 바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제가 중국 땅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김구 주석은 전혀 알지 못했었다고 한다.
장개석의 고향은 양자강(揚子江) 남쪽 절강성(浙江省)이므로 옛 백제는 양자강 이남지역까지 지배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서량지나 임혜상 같은 양심있는 중국사학자들은 중국역사의 상고사는 한민족의 역사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가시마 노보루같은 일인학자는 한(漢)족은 기껏해야 한(韓)을 흉내내어 이름붙인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식자층은 양자강 유역이 전통적으로 동이 9족의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장개석은 이 사실을 너무 잘알고 있었기 때문에 상해 임시 정부의 이시영 부통령에게 역사는 제대로 알고 독립운동하시는가 하고 물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역사교과서에는 어느 한구석에도 이런 기록이 없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 기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하게 왜곡되었음을 반증해 주는 하나의 예증에 불과하다. 고대역사를 다룬 사서 삼국사기,삼국유사 두 책은 중국이나 일제는 굳이 수거하지 않아도 될만큼 주체성을 상실한 책이었기에 이 두 책만은 남겼다.
일제에 의해 왜곡 조작된 한사군의 실상
조선의 역사가 중국의 식민지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일제가 조작한, 역사말살의 학설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한사군漢四郡 대동강설’이다. 한나라 무제가 한반도의 대동강 유역에 낙랑, 임둔, 진번, 현도라는 네 개의 식민 구역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어떠한가?
BCE 108년, 한 무제가 위만의 손자 우거를 멸하려고 국경을 넘어 쳐들어왔다. 전쟁 초기에는 우거왕의 일방적인 승리가 이어졌지만, 장기전으로 가면서 내부의 반란에 의해 결국 왕검성은 무너지게 된다.
우거의 정권은 조선의 왕위를 찬탈해서 만든 한족 정권이기 때문에, 니계尼谿에서 상相이라는 벼슬을 하던 참參이 주동이 되어 우거를 죽여 버렸다. 그러고서 조선의 유민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한나라 군에 대항하여 피 터지는 조선족의 독립전쟁을 한 것이다. 당시 조선족의 독립운동이 워낙 강력하게 일어나서 그곳에 자기네들의 사군四郡을 세울 수도 없었다. 이 전쟁의 결과에 대한『사기』의 내용을 보면 한 무제는 고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좌장군 순체와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에게 5만7000명의 대군을 주었다. 두 장군은 1년이 넘는 전쟁 기간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귀국했다. 그러자 한 무제는 좌장군 순체는 사형시킨 후 시신을 조리돌리는 기시(棄市)형(棄市刑, 목을 자르고 시체를 길거리에 버리는 형)을 내렸고, 누선장군 양복도 사형선고를 내렸다가 막대한 속전(贖錢)을 바치자 목숨은 살려주되 귀족에서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켰다.
위산(衛山)은 고조선과 강화협상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이미 사형 당했으며, 제남(濟南)태수 공손수(公孫遂)도 마음대로 군사형태를 바꾸었다는 이유로 사형 당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마천의 이 기록을 보더라도, 결코 한나라가 승리한 전쟁이 아닌 패전인 것이다.
사마천(BCE 135년~ BCE 90년)은 이 전쟁의 목격자였음에도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정벌하고 사군(四郡)으로 삼았다”라고만 적고 사군의 개별적 이름도 적지 않았다. 한사군을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확고하게 각인시킨 세력은 일제 식민사학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국사 교과서에서는 한반도 내에 낙랑, 임둔, 진번, 현도의 한사군이 있었다고, 일제에 의해 조작된 역사를 그대로 가르쳤고, 한국인은 이것을 어린 시절부터 외우고 다녔다.
일본의 식민사관에 의해 우리의 시원역사가 뿌리째 뽑혀버렸다.
‘석유환국(昔有桓國)’의 글자 한자를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국(國)을 인(因)으로 바꿔서 7천 년 역사를 싹 제거해 버렸다. ‘너희들 역사는 다 신화의 역사다. 환인, 환웅, 단군은 다 신화의 인물이다’라는 것이다. 이 식민사관의 ‘왜독倭毒’에서 우리는 아직도 전혀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 1922년 조선 총독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 시책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 등을 들춰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아버지와 조상)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일본은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이후에, 1910년 11월에 조선총독부 산하에 ‘취조국’을 두고서,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조선총독부 관보(官報)를 근거로 보면, ‘51종 20여 만 권 정도를 가져갔다’
일본인들은 서적 약탈뿐 아니라 1922년 12월 달에 ‘조선사편수회’ 즉, ‘조선사편찬위원회’를 만들어서 1938년까지 본문만 35권이 되는『조선사(朝鮮史)』를 일본인들이 만든다.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 이병도는 今西龍(이마니시류)의 수서관보로 들어가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왜곡하는 데 일등 공로자가 된다.
이병도의 화려한 약력
1925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을 지냈고, 34년 진단학회(震 檀學會) 창립에 참여, 광복 후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52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54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이듬해 국사편찬위원, 56년 진단학회 이 사장, 60년 교육부장관 역임 등.
역사 날조에 앞장섰던 사람이 서울대학교 교수를 거쳐 교육부장관까지 했으니 우리 역사가 해방 후에도 바로잡힐 리가 없다. 그리고 그 밑에서 역사를 배운 후학들은 도대체 어떤 역사를 배웠겠는가? 또 강단 주류학파로 일컬어지는 그들이 지금도 사학계를 주도하고 있다.
서양의 실증주의 사학에 의한 ‘양독洋毒’
이 과학주의, 실증주의 사관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직접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믿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들은 유물로 증명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역사가 2,700년이므로, 우리의 역사는 고작 2,700년 밖에 안 된다고 주장한다.
가령 3백년 전에 살았던 10대 조상의 무덤을 파보면 특수한 경우를 빼놓고는 그 무덤 속에서 유골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럴 경우 그 무덤에서 유골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족보의 기록을 믿을 수 없으니 10대조 할아버지가 실존한 인물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가? 이렇듯 중국에 의한 역사 왜곡인 ‘중독’, 일제 식민사관의 ‘왜독’, 서양 실증주의에 의한 ‘양독’의 폐해로 우리의 역사는 그 상처가 너무도 깊다. 『단군 조선은 신화다』, 이것이 그들이 펴낸 책제목이다. 하지만 역사의 실상은 어떠한가?
중국에서 최근 80년 동안 만리장성의 북쪽 너머에 있는 요하와 대능하 지역을 발굴했다. 거기서 5,500년에서 최고 9,000년 된 유물들이 나왔다. 황제문화의 상징인 용龍 조각물과 헤아릴 수 없는 옥기玉器들이 발굴되었다. 특히 놀라운 것은, 이 요하문명이 만리장성 안에 있는 황하문명보다도 몇 천 년이나 앞선다는 사실이다. 인류의 뿌리 문화, 동북아의 원형 문화가 드러난 것이다.
이로 인해 중국의 학계와 정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요동, 요서, 만주 지역은 본래 자기네의 활동무대가 아니라, 동방 한민족의 조상인 동이東夷족의 중심무대였기 때문이다.
이에 중국은 동북아의 창세문화의 주도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즉각적으로(2002년), 저 유명한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착수하였다. 그동안 중국인들은 만리장성 밖은 오랑캐들만 사는 곳이라고 하더니, 만리장성 밖 내몽고 적봉지역에서 7,000년~8,000년 전의 토기와 문화유적들이 쏟아져 나오자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여기가 바로 중국 한(漢)족의 발원지라는 것이다.
대만의 사학자 서량지(徐亮之)교수는 그의 저서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서 "은나라, 주나라 무렵의 동이족(東夷族)의 활동범위는 중국 산동반도, 하북성(북경 등지), 발해연안, 하남성, 강소성(상해 등지), 안휘성, 호북성, 요동반도, 조선반도 등이며 그 활동 중심지는 산동반도였다"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중국학자 이제(李濟)는 물론 부사년(傅斯年)도 단군 조선족(東夷)의 문화라고 인정한 용산문화(흑도문화)가 감숙성 옆의 섬서성 지역까지 분포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충분히 입증되어지는 사실이다.
식민사학자들의 아킬레스건, 환단고기의 출간 과정
운초 계연수선생은 1911년에 만주 관전현에서 스승 해학 이기(李沂,1848~1909)의 문중에서 전해 오던 『태백일사』(8권으로 구성)와 다른 4권의 정통 사서를 한 권으로 묶어 간행하였는데, 1920년 만주 관전현, 압록강 부근의 조선인의 사설학교 배달의숙(倍達義塾a)에 일본 헌병대가 들이닥친다. 이 학교는 독립운동가인 석주 이상룡 선생과 송암 오동진 장군이 출연, 설립한 뒤 일대 독립군 및 그 자녀들에게 조선의 역사와 혼을 가르쳐오던 터였다.
일본 헌병들은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계연수선생을 체포하고 계연수선생과 여러 교사들이 수집하고 연구한 책과 저술, 자료 등 3천여 점을 강탈해 헌병대로 실어갔다고 한다. “헌병대가 강탈한 온갖 자료들 가운데는 당연히『환단고기』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일본 헌병들은 운초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펴낸 바로 그 인물인 것을 알고는 온갖 고문을 가하고는 사지를 다 잘라서 압록강에 내다버렸다. 그렇게 토막토막 잘려진 선생의 시신을 동포들이 수습하던 장면을 직접 목격한 분이 그의 제자인 한암당 이유립 선생이다.
이유립 선생은 평안북도 삭주의 유지이자 독립운동가인 해학 이기의 제자 이관집의 아들이고 열세 살부터 배달의숙에서 계연수선생에게서 배웠다. 계연수선생과 이관집 선생은 일찍부터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환단고기桓檀古記”』를 가지고 북한에서 내려온 이유립 선생이 대전에서 한 20년을 살면서 60년대 전후로 해서 “커발환“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그분이 남한에 내려와서 고등학생과 대학생, 또 뜻이 있는 사람들에게『환단고기』를 대전 은행동에서 우리의 역사 원본을 가르쳤다. 그 가운데 양종현이라는 제자가 지금 청주에 살고 있다.
그런데 그 분의 증언을 작년과 재작년에 한 열다섯 시간 정도 직접 들었는데, 양종현씨는 60년대에 다른 사람들하고 이유립 선생님 면전에서 신해년 1911년에 나왔던『환단고기』의 초간본을 가지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박창암 장군이 쓴 자유지에 이유립 선생이 60년대에 기고를 하기 시작할 때는 환단휘기로 책을 소개 했었다‘라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 양종현씨는『환단고기』로 쓰여져 있었던 초간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증언을 하고 있다. 운초 계연수 선생이 우리의 시원역사를 선언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였기 때문에 일제에 잡혀서 죽도록 맞고 사지가 잘려서 압록강에 버려졌는데, 그 시신이 건져질 때 흐느껴 울던 열다섯 살 소년이 바로 한암당 이유립이다. 이유립 선생이 그 명을 아주 무섭게 가슴속에 새겼을 것이다.
예로부터 민간에 비장되어 온, 안함로의『 삼성기 상』, 원동중의『 삼성기 하』,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범장의『 북부여기』, 일십당 이맥의『 태백일사』, 이 다섯 종의 책을 한 권으로 엮은 책이『환단고기桓檀古記』다.
신라 고승高僧 안함로(安含老,579~640)에서 조선조 이맥(李陌,1455~1528)에 이르기까지 거의 천 년 세월에 걸쳐 다섯 사람이 저술한 사서가 하나의 책으로 묶여진 것이다. 이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글들을 편집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삼성기(三聖紀)라는 책은 세조실록에도 그 책 이름이 나온다. 민간에 이미 알려져 있었다는 얘기다.
신라, 백제 전후부터 내려오던 고귀한 우리의 역사 기록을 거반 망라해서 묶어 놓은 책이다. 신라 때부터 마지막 왕조 근세조선 때까지 당대의 최고 지성인 다섯 분이 천년에 걸쳐서 기록한 것이다.
“예로부터 전해오던 한민족의 고유사서들 대부분은 전란이 빈번하여 사서들이 소실된 경우가 많았고 외적에게 탈취되어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궁궐과 많은 절, 건물들이 불에 타면서 그곳에 있던 서적들도 소실되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유학에 물든 조선 조정은 우리 고유 사서를 민간으로부터 수거하여 궁궐에 비장하였다가 전란이나 화재로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환단고기』에는 『신지비사神誌秘詞』, 『진역유기震域留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조대기朝代記』, 『고기古記』, 『밀기密記』, 『대변경大辯經』, 『삼한비기三韓秘記』,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고려팔관 잡기高麗八觀雜記』 등 현재 전해지지 않는 고유 사서의 이름이 나온다. 이렇게 한민족사의 참 모습을 확인시켜 줄 사서들이 거의 다 사라져버린 지금, 『환단고기』와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 등 몇 종의 책들이 겨우 전해지고 있다.
『단기고사』는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대진국을 세운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발해문자로 쓴(729년) 책이다. 전수 과정의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1959년 국한문으로 번역되었지만, 6·25 사변 때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단기고사』는 구전되어온 자료를 토대로 복원된 것이다. 『규원사화』는 그 서문에 의하면, 북애노인北崖老人이란 인물이 숙종 2년(1675년)에 지었다. 총 다섯 부분으로 나눠져 있으며, 환인, 환웅, 단군의 삼성조시대를 모두 다루고 있다.
『제왕연대력』은 신라시대 최치원이 지은(890년경)대표적 저술 중의 하나로 신라 역대 왕력이다. 원본은 일제 때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 홍종국洪種國이 필사한(1929년) 필사본만 전한다. 고조선의 1세, 2세 단군에 대한 서술이 나온다.
『환단고기』를 조작했다고 하는 위서론을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를 하는데 첫째는 1911년에 나왔던『환단고기』의초간본이 없어졌다는 얘기를 하고 있지만, 일본이 환국을 뿌리 뽑아서 우리민족의 환국과 배달과 단군조선의 역사를 말살시켜버린 것을 보면『환단고기』의 초간본을 그들이 분명히 본 것이다. 신해년 1911년은 일제에 의해 사서 수거령이 내려진 해였다.
후대 사람들한테 한민족사의 뿌리역사와 혼이 담긴 『환단고기』가 전해져야 되는데, 자칫 잘못하면 일제에 의해서 빼앗길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계연수 선생은 1980년에 공개하라고 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유립 선생이 죽기 직전 책이 나왔다.
1980년도 직전까지는 이승만 정권부터 박정희 정권의 군부통치 유신체제 시절로 표현의 자유가 금지되던 시기였다. 때문에 80년 서울의 봄 이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시대에 그동안 음지에서 숨어있던 민중서적과 금서들이 봇물터지듯 나왔다. 결과적으로 계연수 선생은 적절한 시기에 환단고기를 세상에 알리라고 하는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행촌 이암(杏村 李灸,1297~1364)선생의 후손 가운데서 현손인 고려 중종( 中宗) 15년(1520년) 이맥李陌(1455~1528)선생이 찬수관(撰修官)이 되면서 자기 윗대 할아버지로부터 전수내려온 단군세기(檀君世紀)라든지, 조선 왕조에서 살아남았었던 우리의 역사서를 집대성 해서 여덟권의 『태백일사太白逸史』書를 냈는데, 그 첫 번째 책이 바로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다.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를 읽어봐야 이 동북아 역사의, 역사 정의가 바로 잡힐 수 있는 것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중국과 일제가 저지른 역사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사서이다. 그런데도 일제 식민사학 추종자들이 그들의 영달과 직결된 자신들의 아성을 방어하기 위해 뿌려 놓은 위서 바이러스에 많은 국민들이 감염이 되어 있다. 위서론자들의 본질적인 이유는 식민사학이 붕괴되어 자신들의 기득권이 상실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환단고기』를 전해준 분들이 대부분 절식(絶食)으로, 또 일본 제국주의 침략주의자들에게 잡혀서 사지가 잘리고 그렇게 무참하게 죽었다. 이『환단고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병도선생 이후 지금 강단 사학은 식민사학의 큰 틀은 전혀 극복이 안돼 있다.
평양 강동현에 대박산에 있는 4,092년 전의 구을(丘乙)단군릉(檀君陵)
단군조선의 실재를 보여 주는 것으로, 평양 강동현에 있는 대박산에서 단군릉이 1993년 발굴되었다. 여기에서는 왕과 왕후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었으며, 북한은 단군릉을 거대하게 개건하여 성역화하였다. 그리고 1926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모금운동을 하여 평양 강동현 단군릉을 보수하고 해마다 제사를 올린 바도 있다.
평양 단군릉은 7세 구을단군임을 밝혀주는 환단고기
『환단고기』원문에는 “BC 2092년 7월 구을단군이 남쪽으로 순수하여 풍류강(風流江)을 건너 송양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어 곧 세상을 뜨니 대박산大博山에 묻혔다.”
『단기고사』에는 풍류강을 비류강이라 하였는데 송양도 강동江東이라 하여 그곳에 묻혔다고 하였다.『신단실기』도 『강동릉변』에서 송양을 강동현이라 했으며 제1세 단군왕검의 릉이 아니라 후대 단군의 릉이라 하였다.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 대밝산 동남쪽 기슭에는 옛날부터 단군릉이라고 무덤 하나가 있었다. 대박산은 우리말 “밝산, 한밝산”의 음차音借이다.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을 일컫는데 이동의 흔적에 따라 곳곳에 백산, 장백산, 태백산, 소백산, 백악산, 불함산이란 이름을 남기고 있다.
구을단군은 이 해 유난히 순행이 잦아 장당경(藏唐京) 고역산(古曆山)을 비롯해 남쪽 지경에 이르는 풍류강을 넘어 강동이라고도 하는 송양에 이른 것이다. 얼마 전에 북한에서 대대적으로 개축한 단군릉이 전에는 평남 강동군이었던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이다. 지명과 기록이 세 사서(史書)가 일치한다.
또한 1530년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현 서쪽 3리에 둘레 410자나 되는 큰 무덤이 있는데 이를 단군묘라고 한다”는 기록을 내세우는 것과 또 『조선왕조실록』숙종과 영조 대에 강동의 단군묘 수리 및 보수 기록이 적혀있고 정조 때 평안감사에게 “강동사또가 봄가을로 단군묘에 제사 지내는 것을 제도화하라”는 지시사항이 나온다는 점을 볼때 좀더 명확해 진다.
이정기(李正己) 왕국의 대당항쟁은 국내문헌으로는 환단고기에만 나온다.
중국대륙에는 서기 761년부터 817년까지 4대 58년간 당나라와 맞서며 산동반도 일대를 장악했던 독립국가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고구려 유민 이정기가 세운 평로치청왕국이다.
이정기는 고구려의 유민으로 본명은 회옥이다. 국내 문헌으로는 유일하게 환단고기에 기록되어있다. 특히『환단고기』에는 이정기가 대제라는 큰 나라를 세우자 대진국(발해) 문황제가 군사를 보내 싸움을 돕게 한 기록이 처음 나타난다.
<환단고기>'태백일사' 당에 항거한 이정기의 활약 부분
大興四十五年淄靑節度使李正己擧兵拒唐軍帝逾將助 戰李正己高句麗人也生於平盧二十二年師衆逐軍帥李希逸立正己卒子納統父衆五十六年納卒子師古代其位及卒其家人不發喪潛使迎師道於密而奉之
대흥45년(단기 3114,781)에 치청절도사 이정기가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 군대에 항거하니 , 임금께서 장수를 보내어 싸움을 돕게 하였다. 이정기는 고구려인으로 평로에서 태어났다. 대흥 22년에 병사들이 군의 통수자 이희일을 쫓아내고 정기를 세웠다.
이정기가 죽자 아들 납(納)이 아버지를 따르던 무리를 거느렸다. 대흥 56년에 납納이 죽자 아들 사고(師古)가 그 자리를 계승하였다. 사고師古가 죽자 그 집사람들이 발상發喪을 하지 않고 몰래 사람을 보내 밀 땅에서 사도를 맞아들여 받들었다.
고구려 유장 이정기가 중국 중동부 15개 주에 대제(大齊, 평로치청)라는 큰 나라를 세우고, 4대 58년간 다스린 기록이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처음 나오는데, 이것도 1997년 처음으로 발간된 책 <고구려를 위하여>(김병호, 하서출판), 그리고 KBS 역사스페셜 ‘중국 속에 또 다른 고구려가 있었다, 이정기 왕국(2001.5.16)’에서 역사적으로 확인되었다.
고조선 8조금법(八條禁法) 전체를 보여주는 환단고기
범금팔조(犯禁八條)라고도 하며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으로 8조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8조 중에서 3조의 내용만이 한서 지리지 연조(燕條)에 전하며 그 내용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바와 같다.
①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相殺, 以當時償殺).
② 남의 신체를 상해한 자는 곡물로써 보상한다(相傷, 以穀償).
③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소유주의 집에 잡혀들어가 노예가 됨이 원칙이나, 자속(自贖:배상)하려는 자는 50 만 전을 내놓아야 한다(相盜, 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人五十萬).
그런데 8조문이 유일하게 전부 적혀있는 책은 환단고기란 책이다.
22세 색불루 단군은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8조금법을 제정하였다. 8조금법은 여덟가지 죄와 각 죄에 대한 처벌을 정한 삼성조(三聖祖,환인,환웅,단군) 시대의 최초의 성문법이다. 법규의 제정은 강력한 통치 체계를 갖춘 고대국가로서이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사회분위기와 경제질서가 그만큼 어수선해졌음을 나타낸다.
환단고기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에있는 8조문은 아래와 같다.
1, 사람을 죽이면 그 즉시 죽음으로 갚는다(相殺以當時償殺) :
2, 사람을 상해하면 곡식으로 갚는다(相傷以穀償)
3, 도둑질하는 자는 남자는 재산을 몰수하여 그 집의 종이되고 여자는 계집종을 삼는다(相盜者男沒爲其家奴女爲婢)
4, 소도(성역)를 훼손하는 자는 둔다(毁蘇塗者禁錮)
5,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시킨다(失禮義者服軍)
6, 게으른자는 부역에 동원시킨다(不勤勞者徵公作)
7, 음란한 자는 태형으로 다스린다(邪淫者笞刑)
8, 남을 속인자는 잘 타일러 방면한다(行詐欺者訓放) 자신의 잘못을 속죄한 자는 비록 죄를 면해 공민이 될 수 있지만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시집가고 장가들 수 없었다(欲自贖者雖免爲公民俗猶羞之嫁娶無所수)
이리하여 백성이 마침내 도둑질하지 않았고 문을 닫고 사는 일이 없으며 부인은 정숙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전야와 도읍을 개간하고 음식을 그릇에 담아 먹었으며 어질고 겸양하는 교화가 이루어졌다.(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상)
지금의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고조선의 8조금법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환단고기에는 한서지리지에 빠져 있는 나머지 5개 항목까지 모두 상세히 열거 되어있다. 이 8개 조항은 고대 사회의 법률 제도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상까지도 알아볼 수 있게 하는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이것만으로도 단군조선은 이미 고대국가로서 체계와 면모를 완전히 갖춘 문명국가라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은나라 갑골문 기록이 환단고기의 고조선 기록과 일치한다.
은나라 왕 무정(武丁)의 귀방(鬼方) 공격 기록
(21세 단군 소태) 재위 47년 경인(BCE 1291)년에 은나라 왕 무정(武丁)이 전쟁을 일으켜 이미 귀방(鬼方)을 물리치고 나서 다시 대군을 이끌고 삭도,영지 등의 나라를 침공하다가 우리 군사에게 대패하여 화친을 청하고 조공을 바쳤다. [단군세기] 671
귀방(鬼方) : 지금의 중국 산서성 북쪽 내 몽골의 음산 산맥 일대에 살던 족속이다. 은나라때는 빈(邠) 지역에 살던 주나라 조상인 고공단보가 이들의 침략을 피해 기산 남쪽 위수 지역으로 옮기기도 했다.
단군세기의 21세 소태단군 47년 조의 기록이 초기 갑골문 기록에도 똑같이 나타나는 것은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와 신빙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은나라의 갑골문에서도 <단군세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유물,유적이 발견되었다.
즉 BC 1291년 단군조선 제21대 소태단군 재위 때 은나라 왕 무정(武丁)이 ‘귀방(鬼方)’을 쳤다는 기록이 단군세기에 남아 있는데, 은나라의 갑골문에서는 은나라의 귀방(鬼方) 정복 사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서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다.
중국 하나라의 멸망과 은나라 건국에 관한 환단고기 기록이 입증되다.
“13세 흘달단군 갑오 16년(B.C1767) 이 해 겨울에 은(殷)나라가 하(夏)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 걸왕(桀王)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단제께서 읍차인 말량으로 하여금 구환(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 하니, 은나라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어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하나라 걸왕이 조약을 위반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약속을 깨려 하였다.
이에 은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 우량을 파견하여 견(畎)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樂浪)과 합쳐서 진격하여 관중의 빈.기(邠.岐)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다.”라는 기록이다.
위 기록에서 우리는 단군조선의 의중에 따라 하나라와 은나라의 판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단군세기>의 기록은 중국의 고대 사서인 한나라 사람 유향이 쓴 <설원 권모(設苑權謀)> 편에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그 기록의 신빙성을 말해주고 있다.
은나라 건국태조 탕왕(성탕)
“성탕이 걸왕을 치려 하자 이윤이 말하기를 “청컨대 걸왕에게 바치는 공물을 막고 그의 행동을 살펴보십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걸왕이 진노하여 구이(九夷=단군조선)의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이윤이 말하기를 “아직 때가 아닙니다.
저들이 아직도 능히 구이(九夷)의 군사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잘못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성탕은 사죄하고 다시 공물을 바쳤다.
이듬해에 탕왕이 다시 공물을 끊어버리자 걸왕이 노하여 다시 구이(九夷)의 군사를 요청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윤이 “됐습니다.”라고 말하자 탕왕은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잔당을 토벌하니 걸왕은 남소씨의 땅으로 도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위 <단군세기>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설원의 기록은 하나라와 은나라 교체기에 성탕이 포악무도한 걸왕을 내쫓고 은왕조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두나라 간의 패권 싸움에서 성패의 관건을 쥐고 있던 구이(九夷) 곧 단군조선의 강한 영향력 때문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입증해준다. 북경대 교수 푸쓰넨傅斯年도 “탕이 걸을 내쫓은 것은 동이가 하나라를 멸망시킨 것과 같다고 하였다.
환단고기에서 밝힌 대진국(발해) 황제 연호, 발해공주묘를 통해 입증되다.
밝혀지지 않았던 발해(대진국) 3대 문왕 대흠무의 연호가 환단고기에 ‘대흥大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서기 1980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출토된 정효공주 묘지 비문에서 문왕 대흠무가 자기 존호를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歷孝感金輪聖法大王’이라 하고
불법의 수호자로 자처한 데서 드러나, 환단고기가 사료로서 가치 있음이 과학적으로 실증되었다. 환단고기가 그 연호를 기록한 것은 진서임을 입증하는 사례가 된다.
대진국(발해)은 세조(대중상)로부터 15세 259년간 존속한 나라였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보면 대진국 황제들의 묘호, 년호, 시호에 대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위의 년호는 <신당서>에 기록된 년호와 일치하고 있으며, 1949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출토된 정효공주묘지 비문에서 문왕 대흠무가 자기 존호를 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 이라 한 것과도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연개소문의 조부와 증조부 이름을 밝힌 환단고기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은 태조太祚, 할아버지는 자유子遊, 증조부는 광廣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가운데 연개소문의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이름은 <태백일사>를 제외한 어떠한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1923년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의 묘지에서 천남생의 증조부 이름을 ‘자유(子遊)’로 명기하고 있어서 <태백일사>의 진가가 드러나게 되었다. 천남생의 고조부(연개소문의 증조부) 이름이 ‘광廣’임은 태백일사에만 드러난다.
영양무원호태열제(26세) 홍무 9년(단기 2931,598)에 열제께서 서부대인 연태조를 보내어 등주를 토벌하고 총관 위충을 사로잡아 죽였다.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씨이고 선조는 봉성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태조(太祚), 할아버지 이름은 자유(子遊), 증조부는 광(廣)이고 나란히 막리지를 지냈다” -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1117P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연태조가 대대로(大對盧)로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대로는 제 1위의 관등이고 막리지는 최고위 관직인데 천남생묘지명(泉男生墓志銘)에는 막리지로 나와 있다.
대진국(발해)의 제대로된 황제 연호는 환단고기에서만 보여준다.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대진국(발해)의 전신인 후고구려와 대진국(발해)의 건국과정이 상세히 나와 있으며, 대진국(발해) 황제들의 묘호, 년호, 시호에 대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신당서에서도 연호가 나오나 대조영부터 연호를 기록하고 있다. <당회요>의 기록에 의해 김육불과 황유한의 책에는 13대 대현석(명종)과 15대 대인선(애제) 사이에 위해라는 이름의 왕이 13년간 다스린 것으로 나온다.
서기 668년 9월 21일 당나라에 의해 고구려의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당시 서압록하(지금의 요하)를 지키던 대진국(발해)장군 대중상은 패망한 고구려 유민을 모아 동쪽 동모산에 이르렀다.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라 하고 연호를 ‘고구려의 영광을 거듭한다’는 뜻으로 ‘중광重光’이라 하였다.
고구려의 옛 땅 회복을 자신의 천명이라 여겼던 대중상이 699년 5월 붕어한 뒤, 태자였던 대조영이 뒤를 잇게 된다. 기존 사서에서는 대중상의 붕어 전 해인 698년에 대진국(발해)이 건국된 것으로 전부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환단고기』 「대진국본기」에 의하면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 그 해 대중상이 대진국(발해)의 전신인 후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나온다.
제위에 오른 대조영은 홀한성(지금의 상경 용천부)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는 대진(大震), 연호를 천통(天統, 하늘의 법통을 계승한다)이라 하였다.
8세 우서한(于西翰,BCE 1,993년) 단군의 20분의 1세법
고조선의 조세제도는 생산량의 20분의 1을 바치는 입일세였다.
환단고기를 보면 8세 우서한 단군시절 무신 원년(기원전 1993) 백성들의 세금부담을 줄이기 위해 이십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는 법을 정하여 널리 쓰이게 하며, 있는 곳과 없는 곳이 서로 보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단군 우서한은 평복을 하고 하나라에가 잠행을 한 다음, 귀국하여 관제를 크게 새로 고쳤다. 천부인과 길조를 상징하는 삼족오가 궁전에 날아 들자 사람들은 단군 우서한의 큰 성덕을 칭송하였다.
8세 우서한단군때 생산량의 20분의 1을 세금으로 바치는 세법을 정했다고 하는데 중국의 맹자가 “白圭曰吾欲二十而取一何如 孟子曰子之道貊道也 20분의 1세는 맥인(貊人)의 방식”이라 한 것으로 보더라도 [환단고기]의 이 기록은 대단히 신뢰할 만한 것이다. 이에 비해 전국시대 당시 중국은 10분의 5 세법이었으며, 이러한 20분의 1 세법은 홍익인간 이념대로 나라가 다스려졌음을 입증한다.
맹자는 단군조선에서 이렇게 낮은 세금을 거둬들이면서도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규모가 큰 사원이나 궁궐,종묘 등을 짓지 않고 관직도 많이 설치하지 않았으며 지배귀족이 검소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맹자 <고자告子>편) 315
중국에서 정전법은 하은주(夏殷周) 3왕조에 걸쳐서 시행되었는데 당시 조선의 영향을 받아 10분의 1을 취하는 십일세였다. 그후 전국시대에 이르러 정전제가 붕괴되기에 이르자 맹자가 다시 균전제를 주장하였는데 20분의 1세를 10분의 1로 바꾸어 고조선의 세법을 모방하였음을 감추고 선대 요순의 유제라 거짓말을 하였다. 맹자(孟子, 기원전 372년~기원전 289년)는 공자의 사상을 이어 발전시킨 유학자이다.
전국 시대 추(鄒)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가(軻)이고, 자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이다. 어릴 때부터 공자를 숭배하고, 공자의 사상을 발전시켜 유교를 후세에 전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환단고기에 기록된 장수왕 연호가 발굴된 불상으로 입증되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연호 ‘건흥(建興)’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는 장수왕이 즉위하자,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보인다. 건흥 연호는 1915년 충북 충주 노온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光背名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고구려 불상에는‘건흥오년세재병진建興五年歲在丙辰’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때 백제불상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임자년인 412년에 사망하게된다. 즉위년 칭원법에 따라 이 해를 장수왕 즉위 원년으로 삼아 본다. 그러면 장수왕 즉위 5년은 병진년이다. 따라서 병진년 불상 광배명과 <태백일사>를 통해 ‘건흥’이 장수왕 때의 연호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환단고기의 사료적 신빙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라 할 수 있다.
환단고기는 백제의 시초와 건국과정을 자세히 알려준다.
소서노와 두 아들의 자립
고주몽이 재위할 때 일찍이 말하기를 “ 만약 적자 유리가 오면 마땅히 태자로 봉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서노는 장차 자신의 두 아들(비류와 온조)에게 이롭지 못할 것을 염려하다가. 경인년(BCE42년) 3월에 사람들에게 패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다는 말을 듣고 남쪽으로 달려가 진,번 사이에 있는 바다 가까운 외진 땅에 이르렀다.
소서노의 어하라 피봉과 비류의 계승
그곳에 산지 10년 만에 밭을 사서 장원을 두고 재산을 모아 수만 금에 이르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따르는 자가 많았다. 남으로 대수에 이르고 동으로 큰 바다에 닿는 5백리 되는 땅이 모두 그의 소유였다.
그리고 주몽제에게 사람을 보내어 글을 올려 섬기기를 원한다고 했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고 칭찬하며 소서노를 책봉하여 어하라라는 칭호를 내렸다. 13년 임인년에 이르러 소서노가 세상을 떠나고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온조의 백제건국
이때 마려 등이 온조에게 이르기를 “ 신들이 듣기를 마한의 쇠망이 임박하였다 하니 가서 도읍을 세울 때라 생각하옵니다” 하니 온조가 “좋다”며 허락하였다. 이에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 먼저 마한의 미추홀(지금의 인천부근)에 이르러 사방을 돌아다녀 보았으나 텅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오랜 뒤에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주: 북악산)에 올라 살만한 땅을 찾앗다. 그때 마려 , 오간 등 신하 열명이 간하였다. “오직 이곳 하남 땅은 북으로 한수를 끼고 동으로 높은 산이 자리잡고 있으며 남쪽으로 기름진 평야가 열려있고 서쪽은 큰 바다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곳은 하늘이 만든 험한 지형과 땅의 이로움이 얻기 어려운 형세이오니 , 마땅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다른 곳을 더 찾지 마옵소서 ”온조가 신하 열명의 의견을 쫓아 드디어 하남 위지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백제라 하엿다. 뒤에 비류가 세상을 떠나자 그 신하와 백성이 그 땅을 바치며 복종했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위지성 : 하남 위례성. 위지성의 위치는 고대사에서 오랫동안 풀지 못한 수수께끼였다. 1500년 동안 잊혀졌던 위지성은 최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서울 송파구의 풍납토성으로 밝혀지고 있다.
* 어하라 : 고주몽 성제가 책봉한 백제 건국 과도기의 왕의 호칭, 백제 건국의 시초는 고구려의 제후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그 뒤에도 계속 백제왕을 어하라라고 불렀는데, 이는 고구려가 백제를 제후국으로 거느린 황제 국가였음을 내외에 과시한 것이다.
[주서][백제전]을 보면 " 백제왕의 성은 부여씨이며 왕호는 어라하인데 백성들은 건길지라 불렀다"라고 하여 환단고기의 어하라와 기록상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백제 왕을 부르던 칭호임을 알 수 있다.
환단고기는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출생비밀을 밝혀준다.
신라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북부여 시조 해모수의 5대손 파소의 아들이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가 부여 황실의 딸이라는 환단고기의 기록은 ‘신라가 부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주는 획기적인 내용이다. 그런데 종래에서는 사대주의 사관의 왜곡, 날조에 의해 중국 진나라 사람들이 한반도로 들어와 신라를 세운 것으로 잘못 인식돼 왔다.
삼국유사 감통에는 “선도산 신모는 본래 중국 황실(한라라 8세 소제나 9세 선제의 딸이었는데 이름은 사소娑蘇였다”라고 하였고 또 사소가 처음 중국에서 진한에 와서 박혁거세를 낳았다고 기록하여 파소와 박혁거세의 혈통을 중국 한족 혈통으로 왜곡시켜놓았다. 그러나 정작 중국 사서에 그런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신라新羅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어머니는 파소婆蘇다. 파소는 고두막한高豆莫汗의 딸로서 남편이 없이 임신한 여인이다. 그런 파소는 몰래 진한辰韓 나을촌那乙村으로 도망을 가서 박혁거세를 낳았다.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기(檀君記) 제47세 고열가(古列加)조의 기록을 보면 “ 단군 고열가임금이 아사달에 살게되자 오히려 백성들은 그를 추앙하여 존경했으며 제후 또한 감히 괴롭히는 자가 없었다. 혹 말하기를 박(朴)씨, 백(白)씨가 모두 그의 먼 후손이며 혁거세(赫居世) 역시 단군의 먼 후손이라 한다.
지금 문헌으로는 밝힐 수가 없어 그것이 확실한지는 알지 못하겠다.(檀君旣徒居阿斯達而 國人猶推尊之 諸侯亦無敢逼者 或曰 朴氏白氏 皆其後裔 而赫居世亦出於檀君之後云 今文獻無徵 未知其確矣)” 고 기록하고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 태백일사(太白逸史) 제6편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의 기록을 보면
(斯盧始王仙桃山聖母之子也 昔有夫餘帝室之女婆蘇 不夫而孕 爲人所疑 自嫩水逃至東沃沮 又泛舟而南下抵辰韓奈乙村 時有蘇伐都利者 聞之 往收養於家而 及十三岐祥然夙成 有聖德 於是 辰韓六部共尊爲居世干 立都徐羅伐 稱國辰韓亦曰斯盧)
“사로(斯盧)의 처음 임금은 선도산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 제실(帝室)의 딸 파소(婆蘇)가 있었는데 남편 없이 아들을 배어 사람들의 의심을 받게 되자 눈수(嫩水)로부터 도망쳐 동옥저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의 나을촌(奈乙村)에 이르렀다. 이 때에 소벌도리라는 자가 그 소식을 듣고 가서 집에 데려다 거두어 길렀다.
나이 13세가 되자 뛰어나게 영리하고 숙성한데다가 성덕이 있었다. 이렇게 되어 진한 6부의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여 거세간(居世干)이 되니, 도읍을 서라벌에 세우고 나라이름을 진한(辰韓)이라 하고 또한 사로(斯盧)라고도 하였다.”
호태왕 비문 속 광개토대왕 17세손의 비밀은 환단고기로 풀린다.
호태왕 비문에 광개토대왕이 17세손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광개토대왕이 고주몽으로부터 13세손이라고 되어 있다. 19대왕에서 6번의 형제상속 또는 종손상속을 제외하면 주몽의 13세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환단고기를 보면,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로부터 4세손이 고주몽이므로 따져보면 17세손이 된다. 이것을 통해 고구려 역사 900년 미스테리도 풀린다. 기원전 232년에 해모수가 단군이 되고, 고구려가 기원후 668년에 망했으므로 정확히 900년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중국사서 중의 하나인 신당서에는 당의 시어사 가언충이 고려비기를 인용하여 ‘고구려는 900년을 넘지 못하고 80 먹은 당의 장수에게 망한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 역시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당의 가언충이 고구려는 漢대로부터 나라를 가져 오늘날 900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라고 지적했다. 즉, 고구려의 역사에 대해 김부식이 잘못 판단하고, 오히려 당의 가언충이 올바르게 봤다는 것을 환단고기를 통해 증명하게 된다.
당나라 고종과 가언충의 대화.
당나라 고종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당시의 당나라 군주였다. 백제를 멸망시킨 때로부터 8년이 지난 서기 668년에 신하인 가언충賈言忠이 고종을 격려하기 위해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
30년 가까이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는 고구려와의 전쟁에 지쳐 있는 자신의 주군을 격려하기 위한 말이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보장왕 편에 나오는 말이다. “고구려의 비기(秘記)에서는 ‘900년이 안 되어 80대장이 멸망시킬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씨가 한나라 때부터 나라를 가진 이래로 오늘날 900년이며 장수 이적의 나이가 80입니다.”
‘건국 900주년이 되는 해에 80대장에 의해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는 고구려 서적의 예언을 활용하여, 고구려 건국 900주년이 되는 금년에 80세 고령의 이적 장군을 파견해서 공격하면 올해는 꼭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실제로 그 해에 80세의 이적 장군이 평양성을 함락함에 따라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당나라가 서기 668년에 고구려에 대한 총공세를 강화한 것이나 평양성 함락의 영광을 일부러 80세 노장에게 맡긴 것은, 민간의 예언서를 활용하여 고구려 멸망이 마치 하늘의 조화에 의한 것처럼 비춰지도록 하기 위한 당나라 사령부의 상징조작 기술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종과 가언충의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서기 668년 현재의 당나라 사람들은 고구려가 900년 역사의 나라라고 인식했다는 점이다. 서기 668년으로부터 900년을 소급하면, 기원전 233년이 된다. 그러므로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기원전 233년이 고구려의 건국연대인 것이다.
고구려는 신라는 물론이고 한나라(기원전 202년 건국)보다도 훨씬 더 먼저 건국되었던 것이다. 한편, 북한 측에서는 고고학적 유물을 바탕으로 기원전 277년이 고구려의 건국연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료를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고조선 멸망 이전에 이미 고구려가 존재했다는 <한서> 의 기록, 광개토태왕이 주몽의 12세손이 아니라 17세손이라는 광개토태왕릉 비문의 기록, 멸망 당시의 고구려가 건국 900주년이 되었다는 가언충의 발언을 종합할 때, 우리는 기원전 37년에 고구려가 건국되었다는 김부식의 주장이 거짓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고구려는 233년 혹은 277년에 건국되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서 고구려 역년이 900년이 되는 것인가 ?
고주몽이 해모수를 태조로 하여 제사를 모셨다는 환단고기 삼성기 상의 기록에 해답의 실마리가 있다.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운 때 (BCE 239)부터 계산하면 900년이 약간 넘는다. 고구려는 북부여의 연장선상에 있는 나라이므로 북부여가 원고구려라 할 수 있다.
고구려가 망하고 대중상이 세운 대진국도 처음에는 국호를 후고구려라 하였다. 원고구려- 고구려 – 후고구려로 이어지는 역사는 우리 국통맥을 잇는 결정적 요소 중의 하나이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서는 왜를 격퇴한 광개토태왕의 기록을 통해서 광개토태왕비문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한번은 바다를 건너 이르는 곳마다 왜인을 격파하셧는데 당시 왜인은 백제를 돕고 있었다. . 백제가 앞서 왜와 은밀히 내통하여 왜로 하여금 잇달아 신라의 경계를 침범하게 하였다. 이에 열제께서는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웅진.임천.와산.괴구.복사매.우술산.진을례.노사지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에 천제를 올리고 돌아오셨다.
이때에 곧 백제.신라.가락의 모든 나라가 모두 조공을 끊이지않고 바쳤고 거란.평량(감숙성 지역)도 모두 평정 굴복시켰다. 임나와 이국, 왜의 무리가 신하라 칭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해동의 융성이 이때에 절정을 이룬다." -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
고구려의 식민지 왜
영락 10년(단기 2733,400)에 삼가라가 모두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를 모두 임나에서 통제하여 열나라로 나누어 다스리면서 연정이라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직접 관할 하엿으므로 열제의 명령없이 마음대로 하지는 못하였다. -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1147
환단고기를 통해서만 밝혀지는 동명왕(東明王)의 정체 : 동명東明과 주몽은 다른 인물
동명신화는 최초의 기록인 <논형>(1세기)부터 6세기 문헌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아닌 부여의 건국신화로 구분하고 있는데 반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동명왕편> 등에서는 주몽의 건국신화로 되어있다. 따라서 동명이 어떻게 왜곡됐느냐 하는 실체가 오직 <환단고기><삼성기>에서만 밝혀지고 있다.
BCE 108년 한나라 무제가 요하의 우거정권(우거는 번조선을 찬탈한 위만의 손자)을 멸한 뒤 군현을 설치하고자 대군을 동원하여 동방(당시 북부여)을 침략했다. 이 때 거국적으로 위병을 일으켜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한족 침략군을 막아낸 북부여의 구국영웅이 고두막한이다.
고조선 47세 고열가단군의 후손인 그는 거병에 앞서 졸본에서 동명왕으로 즉위하였고, 훗날 민심을 얻어 북부여 5대 단군에 즉위하였다. 고두막학은 동명이라는 나라의 왕 동명왕)으로 22년간 재위하였고 북부여 5세 단군(고두막 단군)으로 27년간 재위하였으나 합하여 49년간 왕과 단군으로서 나라를 다스렸다.
동명(東明)은 흔히 고구려를 개국한 주몽으로 알려져 있으나 연개소문의 아들인 연남산의 묘지명에 "옛날에 동명東明은 이군에 감응되어 표천을 건넜고, 주몽은 광명으로 잉태되어 패수에 임하여 도읍을 열었다(昔者 東明感氣 踰俵川而啓國 朱蒙孕日 臨浿水而開都) 라고 하여 동명(東明)과 주몽이 전혀 다른 인물로 기록되어있다.
천남산묘지명(泉男産墓誌銘).
大周故金紫光祿大夫行營繕大匠上護軍遼陽郡開國公泉君墓誌銘幷序」君諱男產遼東朝鮮人也昔者東明感氣踰㴲川而開國朱蒙孕日臨浿水」而開都威漸扶索之津力制蟠桃之俗雖星辰海嶽莫繫於要荒而俎豆詩」
書有通於聲敎承家命氏君其後也乃高乃曾繼中裏之顯位惟祖惟禰傳
대주(大周)의 고(故)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행영선대장(行營繕大匠) 상호군(上護軍) 요양군개국공(遼陽郡開國公) 천군(泉君)의 묘지명(墓誌銘) 및 서(序) 군(君)의 휘(諱)는 남산(男産)이니 요동(遼東) 조선인이다.
옛날에 동명(東明)이 기(氣)를 느끼고 사천(㴲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朱蒙)은 해를 품고 패수(浿水)에 임해 수도를 열어, 위엄이 해뜨는 곳[扶索]의 나루에 미치고 세력이 동쪽 지역[蟠桃]의 풍속을 제압하였으니 비록 성진(星辰)과 바다와 산악이 변방지역[要荒]에 걸려 있지 않았어도 예절[爼豆]과 시서(詩書)는 성교(聲敎)에 통하여, 가(家)를 잇고 씨(氏)를 받았으니 군(君)은 그 후예이다.
삼국사기에는 동명과 주몽을 같은 인물로 기록해놓았다. 그러나 김천령金千齡(연산군때의 문관)은 자신이 지은 부에서 “동명이 창업하고 주몽이 계승하였다 東明啓其赫業 朱蒙承其餘波”라고 하여 동명과 주몽이 전혀 다른 인물임을 전하였다.
다른 역사 기록서인 <만주원류고> 권1 부여조에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고 부여는 색리에서 나왔는데 부여는 고구려의 북쪽에 있고 색리 또한 부여의 북쪽에 있었으므로 동명은 (색리에서) 남쪽으로 달아나 부여에 이르렀고 주몽은 역시 (동부여에서) 남쪽으로 달아나 고구려에 이르렀다. 高麗出自夫餘 夫餘出自索離 夫餘在高麗北 索離又在夫餘北 故東明南走而至夫餘 朱蒙亦南走而至高麗 ”로 기록되어져 있다.
광개토대왕비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는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 <대변경大辯經> <왈曰>
柵城有 太祖武烈帝 紀功碑 東鴨祿之皇城有 廣開土境大勳蹟碑 安州淸川江厓上有 乙支文德石像 烏蘇里江 책성유 태조무열제 기공비 동압록지황성유 광개토경대훈적비 안주청주강애상유 을지문덕석상 오소리강
外有 淵蓋蘇文頌德碑 平壤牧苒峰中麓有 東川帝朝天石 朔州巨門山西麓有 乙巴素墓 雲山之九峰山有 淵蓋 외유 연개소문송덕비 평양목염봉중록유 동천제조천석 삭주거문산서록유 을파소묘 운산지구봉산유 연개
蘇文墓
소문묘
책성에는 태조무열제 기공비가 있고, 동압록 황성에는 광개토경대훈적비가 있으며, 안주 청천강 절벽위에는 을지문덕석상이 있고, 오소리강 밖에는 연개소문 송덕비가 있으며, 평양 목염봉 중턱 기슭에는 동천제조천석이 있다. 그리고 삭주 거문산 서쪽 산기슭에는 을파소의 묘가 있으며, 운산 구봉산에는 연개소문의 묘가 있다.
환단고기는 고구려가 북부여에서 나왔음을 알려주는 소중한 사서다.
광개토 대왕비와 모두루비는 고구려는 북부여에서 나왔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환단고기는 이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 모두루 묘지와 광개토왕릉비는 고구려사 연구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자료들이다.
모두루 묘지는 광개토왕(廣開土王) 때의 북부여 수사(守事)인 모두루의 묘지(墓誌)다. 1935년 10월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集安縣)에서 발견되었다. 광개토대왕비와 모두루 비에 모두 고구려는 북부여에서 왔음(出自)을 밝히고 있다.
“옛적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의 아들이며.. (광개토대왕비) “하박(河泊)의 손자(孫子)이며 일월(日月)의 아들인 추모(鄒牟) 성왕(聖王)이 북부여에서 나셨으니,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천하사방(天下四方)이 알지니...”(모두루 묘비)
해모수의 북부여 건국
대단군의 통치권이 약화되고 부단군과 지방 군장들의 목소리가 커지던 고조선 말기에 한민족의 새 역사가 개창되었다. 해모수는 요하 상류에 위치한 고조선의 제후국인 고리국 출신으로 단기 2095년에 웅심산에서 기두하였다(삼성기 상, 북부여기) 그 후 백악산 아사달을 점거하고 당시 47세 고열가 단군의 빈자리를대신하여 오가 부족장의 6년 공화정을 철폐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해모수를 단순으로 추대함으로써 북부여 역사가 시작되었다 (BCE 232)
북부여는 (원)고구려라고도 불렸다.
고구려는 해모수께서 태어난 고향이므로 북부여를 또한 고구려라고도 불렀다 (단군세기)
고구려의 본래 이름은 ‘고리’,‘구려’이다 [삼성기]에는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이 해모수를 시조로 삼아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해모수가 태어난 곳이 서압록의 고리이므로 후에 북부여를 고구려라고도 불렀는데 주몽이 그 이름을 계승하여 고구려라 한 것이다.
고구려는 해모수의 북부여(원고구려)와 주몽의 고구려(본 고구려), 대중상의 대진국까지 합쳐서 1165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후에 왕건이 고구려의 맥을 계승하여 고려라 하였으니 고구려(고리,구려,고려)의 정신은 1631년(BCE 239~ CE 1392)을 이어온 것이다.
♣移記 淸雅 安 承 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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