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안과 박헌영 박헌영이라는 이름은 내 어릴 적 까마득한 기억에 묻혀 있다 때가 되면 불쑥 튀어나오고는 했다. 집안 행사 때 어른들이 술 한 잔 드시면 은밀하게 그러나 이상한 열기에 휩싸여 언성이 높아지고 으레 들려오던 이름. 그 이름이 금기어였다는 걸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였다. 빨갱이. 공산주의자. 공산주의자가 집안 어른들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고 어머니께 여쭈어 본 것은 고2때였다.
내가 알아낸 비밀은 큰 집 큰당숙이 좌익이었다는 것, 북한인민군이 광주를 점령했을 때 광주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었다는 것, 군인과 경찰이 광주를 다시 수복했을 때 백아산에서 빨치산활동을 했다는 것, 무등산을 거쳐 광주에 식량투쟁을 나왔다가 소구루마에 식량을 가득 싣고 돌아가던 중 화순 너릿재에서 경찰에 붙잡혔다는 것, 대구재판소에서 사형받을 날만 기다리는데 큰 집 작은 당숙이 집안 전재산을 털어 대구로 가서 형을 구해냈다는 것, 작은 당숙이 여름 옷을 입고 지게에 돈다발을 가득 지고 대구에 가셨다가 겨울이 되어서야 돌아오시면서 추워서 혼났다는 것, 그래서 큰당숙은 동생을 끔찍히 아낀다는 것.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어마어마한 비밀이었다. 누구에게도 털어 놓을 수 없는, 혼자서 되새겨 보면 짜릿한 스릴넘치는 비밀이었다. 내가 큰당숙께 이 비밀을 알고 있노라 고백한 것은 80년 서울의 봄 때였다. 나는 박정희가 일본군 장교였으며 남노당 조직책이었지만 숙군에 걸려 동지들을 팔아먹고 살아남은 배신자라는 내용의 유인물을 충장로에 뿌린 적이 있다. 고문 좀 당하고 박정희가 죽자 풀려났는데,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 꽤나 했었다. 그 때 매맞은 데는 푹 삭은 시동물이 최고라며 비방을 알려준 분이 바로 큰당숙이셨다. 다음 해 시제를 모시고 나서 음복으로 언성이 높아질 무렵 나는 대구형무소에 계셨을 적 사정을 여쭈어 보았다. 그러자 당숙은 돌연 박헌영과의 인연을 길게 말씀하셨다. 친척 어르신들은 지겹다는 듯 시큰둥하셨지만 말리지는 않으시고 점자코들 계셨다.
큰당숙은 일제때 고창고보를 나오시고 측량기사로 일하셨다. 해방 몇 해 전 어느 날 동료 측량기사가 옷차림은 허름하지만 귀티나는 얼굴에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벽돌공장 인부 한 사람을 집으로 데려 왔다. 하숙을 하고 싶다고. 당시 큰당숙은 지금 문화전당 옆 전대병원 가는 길 부근에 비교적 좋은 일식 2층집에 살고 있었는데, 찬모가 바로 내 어머니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집은 밤이면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여가 은밀히 모이는 아지트가 되었고 모스크바대학 출신 최고 엘리트에게 공산주의이론을 공부하는 학습장이 되었다. 큰당숙은 일제 패망 이전에는 조선공산당 비밀당원으로 있다가 해방 이후 한 때 조선공산당 광주시당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90년대 나는 이 집안 비밀을 전남지역 건국준비위원회 관련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안종철에게 털어 놓았다. 안박사는 크게 관심을 보이며 인터뷰 계획까지 세웠다. 안타깝게도 큰당숙은 그 해 겨울 98세를 일기로 명을 달리하시고 말았다.
큰당숙이 돌아가시고 한 해 두번 모시는 시제 때마다 6촌 형님들께 박헌영과 함께 살았던 이야기를 청하고는 한다. 형님들은 박헌영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했다고 자랑하신다. 형님들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김씨 아재로 불렸다. 밤에 자주 찾아오고 했던 사람들 윤곽도 몇몇은 그릴 수 있는 듯 서로 우김질 하기도 한다. 그 중에는 키가 작달막한 여성도 있었다고 한다. 형님들은 그 사람들이 무슨 일은 하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기억하지는 못했다. 형님들이 기억하는 최대 화제거리는 김씨 아재를 자주 찾아오던 어떤 청년이 청상과부인 내 어머니를 흠모해서 청혼했지만 퇴짜 맞았다는 염문이었다. 나는 형님들 기억을 되살려서 당시 박헌영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 사업을 하던 동지들의 면면을 확인해 보고자 여러 차례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아직 여나무 살에 불과했던 형님들이 기억하는 단편으로는 무망한 노릇이었다.
몇 해 전 나는 두 학기에 걸쳐 한국현대철학사를 강의한 적이 있다. 그 기회에 박헌영에 관해 좀 세세히 공부했다. 그 시대를 살던 인걸들이 그 만큼 신산한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춘향전을 문학사적으로 복원한 김태준은 빨치산 공작 중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천재철학자 박치우는 빨치산전투 중 사살되었다. 그래도 그들은 박헌영에 비하면 사정이 오히려 낫다. 적어도 북쪽에서라도 혁명영웅 칭호를 받고 있지 않은가. 불굴의 혁명가요 조선 최고의 마르크스주의사상가인 박헌영은 남북 어느 쪽에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근래 들어 박헌영 평전을 비롯한 일대기가 몇 권 출간되어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가 남긴 족적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부족하다. 무엇보다 미제의 간첩이라는 북한의 공식적 평가를 반박할 사료가 아직 부족하지 않나 싶다. 더하여 해방 3일만에 8월테제를 작성하고 조선공산당을 재건할 수 있었던 저력은 어디서 나왔는지 전혀 해명되어 있지 않다. 김철수와 같은 이는 마지막까지 변절하지 않고 일제와 싸웠던 도덕적 견결성에서 그 원인은 찾기도 한다. 하지만 도덕성만으로 단 3일 만에 당을 재건할 수 있을까. 이미 지하당 조직이 구축되어 있고 은밀히 활동하고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모두가 광주 은거 4년 동안 이루어졌을 테니 개인사나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에서 이 기간 광주에서 박헌영의 삶과 활동은 그 중요성이 자못 크다할 것이다. 기왕의 박헌영 평전이나 연구물은 이 대목에 관한 서술이 매우 빈약하고 구체적이지 못하다.
어찌 되었건 광주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박헌영이 광주에서 조선공산당의 불씨를 살렸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더욱이 그 비운으로 해서 더 위대해진 이 불굴의 혁명가가 한 때 기거했던 곳이 우리 집안 큰집이었다는 것이 더없이 자랑스럽다. 이 자랑스러운 역사적 사실은 집안의 은밀한 전설일 뿐 공식기록 어디에도 없다. 큰당숙 살아계실 때 녹취라도 해 놓았다면 공백이 메꾸어질 수 있었을 것을. 광주은거 4년간 협력자들은 누구였고 전국 조직선은 누구였는지 밝힐 수 있었을 것을. 아쉬움은 더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