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때는 사정부(司正府)라 하고, 고려 때는 사헌대(司憲臺)라 하였다가, 고쳐서 어사대(御史臺)ㆍ금오대(金吾臺)ㆍ감찰사(監察司)라 하였고, 또 고쳐서 사헌부(司憲府)라 하였다.
○ 태조가 고려의 법을 좇아서 사헌부를 두어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논의 쟁집(爭執)하고 백료(百僚)를 규찰(糾察)하여 기강을 떨치고 풍속을 바로 잡으며, 원통하고 억울함을 펴게 하며, 참람한 것과 거짓된 것을 금하는 등의 일을 맡겼다. 그 밑에 감찰방(監察房)을 붙여두었고 대사헌(大司憲)ㆍ중승(中丞)ㆍ겸중승(兼中丞) 각 1명과 시사(侍史)ㆍ잡단(雜端) 각 2명과 감찰(監察) 20명을 두었다.
태종이 고쳐서 대사헌 1명, 집의(執義) 1명, 장령(掌令) 2명, 지평(持平) 2명을 두고, 감찰 25명은 다른 관리로 겸하게 하였다. 세종조 때 1명을 줄여 모두 본직(本職)을 갖게 했는데, 그뒤에 또 11명을 줄여서 문관 3명과 무관ㆍ음관 각각 5명으로 하였다.
연산 때 지평을 없애고 장령 2명을 더 두었다가 중종 초에 예전대로 회복하였다.
○ 어사(御史)의 관직을 역대로 중하게 여겼다. 그 맡은 임무가 중하고, 그 책임이 크며, 그 염려 또한 깊은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어사다운 어사는 임금에게 허물이 있으면 임금의 노여움을 거스르고 임금의 위엄에 항거하며 무서운 형벌도 사양하지 않는다. 또 장상(將相)이나 대신이 허물이 있으면 법으로 규탄하고, 종친 외척 중에 교만하고 사나운 자가 있으면 탄핵하고 공격한다. 소인이 조정에 있으면 반드시 내보내려고 하고, 탐관(貪官)이 벼슬에 있으면 기어이 쫓으려고 한다. 곧은 자를 천거하고 굽은 자를 버리며, 흐린 것을 배격하고 맑은 것을 찬양한다. 정색하고 조정에 서면 백료(百僚)가 떨고 두려워한다.그 책임이 어찌 중차대하지 않겠는가. 조종 이래로 임금의 이목(耳目)과 같은 대관(臺官) 선택을 중히 여기고, 강개(慷慨)하고 과감하게 곧은 말을 하는 기운을 길러 왔던 것이니, 이 자리에 뽑힌 자라면 그 누가 명절(名節)을 세우기를 힘쓰지 않으며, 임금의 덕의(德義)에 부응(副應)할 것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서거정(徐居正)이 쓴 <제명기(題名記)>
○ 사헌부의 청사(廳事)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다시(茶時)고 하나는 재좌(齋坐)이다. 다시라는 것은 다례(茶禮)의 뜻을 취한 것이니, 고려와 우리나라 국초의 대관은 언책(言責)만 맡고 서무(庶務)는 보지 않았다. 하루에 한 번씩 모여서 차를 마시는 자리를 베풀고 끝냈는데 국가의 제도가 점점 갖추어짐에 따라 대관(臺官)도 송사(訟事)를 심리하는 일을 겸했다. 일이 매우 번거로워지자 드디어 이곳을 상시 출근하는 장소로 만들었으니 그래도 정식 관아는 아니었다. 재좌라는 것은 모여서 상의하는 날에는 크게 모여서 큰 예(禮)와 큰일을 강의하는 것이니, 그 재좌의 이식은 출입ㆍ영송(迎送)ㆍ진퇴(進退)ㆍ배읍(拜揖)의 절목(節目)이 자세하고 엄숙하여 다른 관서의 그것과 비할 바가 아니다. 또 대중(臺中)의 고사(故事)를 추려서 겸하여 쓰기 때문에 그 예절이 비록 번거로우나, 상하 사이에 은연(隱然) 중에 경계하는 뜻이 있다. 서거정이 지은 <재좌청기(齋坐廳記)>
사헌부는 백관을 규찰(糾察)하는 관계로 공무가 몹시 번거로우며, 모든 사무가 다 엄정하고 신숙(愼肅)하여 다시(茶時)라 하고, 재좌(齋坐)라 하는 것도 예절과 법도가 각각 달랐다. 집의(執義)가 출입할 때는 대리(臺吏)가 겨드랑을 부축하고 다녔으니, 이것은 고려 때에 늙은 집의에게 하던 고사(故事)를 답습한 것이었다.
대관(臺官)과 간관(諫官)은 비록 일체라고 말하나, 그 실상은 같지 않다. 대관이란 풍화(風化)와 법도를 규찰하는 것이고, 간관이란 임금의 과실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서 대관은 계급 차이가 엄격하다. 지평(持平)은 뜰에 내려가서 장령(掌令)을 맞았고 장령은 집의를 또 그와 같이 맞았으며, 집의 이하는 모두 내려가서 대사헌을 맞는 것이 상례(常例)이다. 보통 때는 다시청(茶時廳)에 앉았으며, 재좌하는 날에는 재좌청(齋坐廳)에 모여 앉는데, 그날은 이른 아침에 사대장(四臺長)이 먼저 재좌청에 들어가면, 집의는 따로 그 청(廳)에 들어가는데, 만일 하관(下官)들이 오지 않았으면 먼저 온 상관(上官)이 막(幕)에 의지해 있다가 하관이 온 뒤에야 비로소 들어가야 한다.대사헌이 문에 들어오면 사대장은 중문 밖에서 공손히 맞고, 집의는 중문 안에서 공손히 맞아서 도로 재좌청으로 나가면 대사헌은 대청(大廳)에 앉고 도리(都吏)가 대장청(臺長廳)에 나가서 큰 소리로, “재좌(齋坐)” 하고, 거듭 네 번 외치고는 집의청(執義廳)에 나가서, “재좌” 하고 한 번 외치며, 또 대사헌 앞에 나가서, “재좌”라고 한 번 외치고 물러난다. 그런 뒤에 집의가 대청 북쪽 바라지문[牖]으로부터 휘장을 걷고 들어와서 재배(再拜)의 예를 행하고 나면 사대장은 뜰 밑에서 북쪽 문으로부터 들어와 뜰 위에 벌여 선 뒤에 청(廳)에 올라와서 재배(再拜)의 예를 행한다. 그러고 나면 여러 감찰(監察)들이 뜰에 들어와서 뵙기를 청하는데, 분대(分臺)의 서리(書吏)들이 분주히 와서 고하면 감찰이 차례로 청에 올라와서 예를 행하고 물러난다.서리와 나장(羅將)들도 각각 차례로 들어와서 재배한다. 그리고는 각각 제자리에 앉게 되는데, 대사헌도 교의에 앉고 그 나머지는 모두 승상(繩床)에 앉는다. 그런 뒤에 서리 6명이 각각 탕약(湯藥) 종지를 들고 나와서 여러 관원 앞에 꿇어앉은 뒤에 한 서리가, “봉약(奉藥)” 하고 외치면 모두 종지를 잡고 또, “정음(正飮)” 하고 소리치면, 마시고, “방약(放藥)” 하고 외치면 약종지를 내려놓는다. 또 한 서리가 “정좌정공사(正坐正公事) 제위(諸位)ㆍ기(起)ㆍ읍(揖)ㆍ환(還)ㆍ좌(坐)” 하고 드디어 당중(堂中)에 원의석(圓議席)을 펴고 모두 의자에서 내려앉는다. 벼슬에 임명된 사람이 있을 때는 서경(署經)하고 탄핵할 일이 있으면 논박(論駁)한다.이날 재좌청의 일이 끝나면 집의 이하는 도로 자기의 청으로 갔다가 조예(皂隸)가 중문 안에서, “신시” 하고 세 번 외친 다음에, 또 한 서리가 문안에서, “공청봉궤(公廳封櫃)ㆍ대장가출(臺長可出)”이라고 외치면 각각 차례로 공경해서 전송[祗送]하는데, 그들이 길을 갈 때에도 역시 차례대로 간다. 이것이 대관의 예(例)다. 간관(諫官)은 그렇지 않아서 존비(尊卑)의 예절이 없다. 상관이든 하관이든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들어가며, 만일 상관이 먼저 오고 하관이 뒤에 오면, 상관이라도 또한 북면(北面)하고 서서 하관을 기다려서 서로 읍하고 자리에 앉는다. 재좌하는 날에 약을 먹고 공사를 행하는 것을 한결같이 대부(臺府)와 같이 하며, 완의석(完議席)을 깔고 술자리를 마련하고서는 아란배(鵝卵杯)로 서로 권하여 취한 뒤에 파한다.또 후원(後苑)ㆍ모정(茅亭)에 가서 옷을 벗고 비스듬히 눕기도 하는데, 원중(苑中)이 원래 맑고 물건이 없어 혹 선생안(先生案)이나 혹은 표피(豹皮)ㆍ녹피(鹿皮)를 쓰기도 하고, 혹은 원중(苑中)의 배나 대추를 따다가 각 관서에 돌려 팔아서 포목(布木)을 얻으면 이것으로 주식(酒食)의 비용부터 충당한다. 평상시의 비용은 오로지 사헌부에 의존하였으며, 간직(諫職)에 임명되는 자는 반드시 예(例)에 의하여 잔치를 베풀고 동료들을 청해다가 술을 마셨고, 여러 곳의 연회에도 가서 참석한다. 《용재총화》
만일 금주(禁酒)할 때를 당하면 대관(臺官)은 마시지 않아도 간관(諫官)은 태연히 술을 마신다. 간관은 붉은 옷을 입은 하인이 앞에서 인도하고 대관은 검정옷을 입은 자가 앞에서 인도한다. 언젠가 금주할 때에 붉은 옷을 입은 자가 매우 취해서 검정 옷을 입은 자를 보고 조롱하기를, “나는 날마다 잔뜩 취해서 얼굴이 붉기 때문에 옷도 역시 붉지만, 너는 너의 대관(臺官)처럼 썰렁하니 술을 마시지 않아서 얼굴에 늘 검은 빛이 있기 때문에 옷도 역시 검은 것이다.” 하여 듣는 자가 모두 웃었다. 《필원잡기》
○ 원의석(圓議席)은 혹 완의석(完議席)이라고도 하는데, 좌우를 물리치고 풍화와 법도에 관계되는 일, 탄핵하는 일을 강구(講究)하고 벼슬에 임명된 자는 서경(署經)을 한다.
우리 조정의 언로(言路)가 넓지 못한 것은 완의석이 있기 때문이다. 간관(諫官)은 임금의 이목(耳目)이 되어 있으므로 마땅히 각각 듣고 본대로 논계(論啓)해야 할 터인데 반드시 완의석을 베풀어서 여럿이 의논한 뒤라야 비로소 임금께 아뢰고, 만일 의논이 모이지 못하면 비록 바른 의논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행하지 못했으니, 그 해(害)가 됨이 어찌 크지 않으리오. 옛날에는 아래로 백공(百工)에 이르기까지 모두 법을 가지고 간했으니 일찌기 무슨 완의석이 있었으리오. 《문헌비고》
○ 당(唐)ㆍ송(宋) 때에는, 임금에게 아뢰는 일은 모두 차자(箚子)를 썼다. 서거정(徐居正)이 사헌부의 장관(長官)이 되어 비로소 차자를 쓰는 법을 건의하였으니, 이것은 언사(言辭)를 드리는 데 있어 빠짐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또 후세에 근시(近侍)와 중관(中官)이 권세를 쓰는 폐단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 법을 처음 세웠을 때에 사람들이 모두 좋은 법이라 하였는데, 근래에 와서는 대간(臺諫)이 된 자가 대체(大體)를 알지 못하고 조금만 과실이 있으면 심각한 말로 나열하고 꾸며 극력 헐뜯고 하여 차자의 법을 만든 것이 오직 사람을 해칠 뿐이니 법을 세우고서 폐단이 없는 때는 천하에 없다. 《필원잡기》
○ 조종조에서는 대간이 비록 죄를 입어도 벼슬을 갈지 않았고 사헌부의 관원을 추고하는 일은 사간원으로 내려보냈는데, 지금은 추고만 하면 반드시 그 자리를 갈아버리니, 이 규례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지 못하나 조그만 일에 즉시 인혐(引嫌)하여 체직되기 때문에 대간이 된 자는 피하지 않으려 해도 무치(無恥)에 가깝다고 하며 많은 쪽을 따르게 된다. 이미 고치기 어려운 폐단이 된 것이다. 《지봉유설》
○ 대관(臺官)은 보통 관원과 달라서 비록 수십년 전만 해도 감히 편복(便服)을 입고 거리에 나서지 못하였다. 친구의 초상에 반혼(返魂)한 때에 장막을 교외(郊外)에 설치했더라도 감히 길에 나가 조상하지 못한다. 이것은 대개 이미 사사로운 초상에 감히 천담복(淺淡服)으로 길 위에 나서지 못하고, 그렇다고 홍포(紅袍)를 입고 조상할 수도 없기 때문에, 영거(靈車)가 지나간 다음 맨 뒤에 서서 상가에 따라가서 대문에 들어간 뒤에야 비로소 홍포를 벗고 옥색(玉色) 단령(團領)에 오각대(烏角帶)를 띠고 들어가며, 조상이 끝나면 다시 조복(朝服)으로 바꾸어 입고 집으로 돌아온다. 지금은 이 법이 모두 없어져서 양사(兩司)의 관원이 다 흰옷을 입고 때도 없이 출입하니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회은집》
○ 국조(國朝)의 옛 제도에 무릇 각 읍으로부터 진봉(進封)해 오는 물건들은 먼저 사헌부의 검사를 거친다. 명목없이 기증하는 물건이나, 턱없이 많은 양은 그 고을 수령을 경중에 따라 벌을 주었는데, 이 법이 폐지되어 행해지지 않은 지가 오래다. 지금 다시 이 법을 신칙해 밝혀서, 사헌부의 검사를 거치지 않고 몰래 뇌물을 주는 자가 있을 때 사헌부가 적발하는 족족 아뢰어 논란한다면 틀림없이 탐오(貪汚)를 개혁하고 청렴을 장려하는데 일조가 될 것이다. 《서파집(西坡集)》의 <경신소(庚申疏)>
○ “대각(臺閣)이란 임금의 이목(耳目)인데, 피혐제도가 생긴 뒤로 대간(臺諫)이 그 직분을 잃은 것입니다. 옛날에는 대간이 각각 언사(言事)를 해도 견제당하지 않았으므로 속에 품고 있는 바를 다 말해서 충성ㆍ아첨ㆍ굽음ㆍ곧음[忠佞枉直]을 구별하기가 쉬웠습니다. 지금의 대간은 한 가지 조그만 일을 의논하는 데도 반드시 다수의 동의가 요구되며 한 사람의 반대가 있어도 피혐이 잇달아 일어나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소견을 지키지 못하도록 하니 매우 뜻 없는 일입니다. 누구나 요순(堯舜)이 아닌 바엔 무엇이나 다 잘할 수는 없는 것인데 유독 대간에만 터럭만한 허물까지도 문책한단 말입니까. 신은 들으니 조종조에서는 대각(臺閣)이 추고를 당하면 양사(兩司)가 서로 조사ㆍ결정하여 마땅히 그 직분을 닦도록 하고 경솔히 그 벼슬을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합니다. 지금으로 말씀드리자면 옥당(玉堂)의 유신(儒臣)들이 양사보다도 중해서 비록 추고가 있어도 직임을 여전하게 가지고 있습니다.삼사(三司)의 사례는 이치로 보면 일치가 마땅할 터이나 만약 사람마다 각각 일을 말하게 되면 공연히 바람같이 와아 하고 일어나는 폐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다만 옥당의 예에 따라 많은 쪽을 따르고 전임(前任) 때의 추고 때문에 인피(引避)하지 말아야 하며, 사헌부의 관원은 조사ㆍ결정하는 자리에 참석하지 않게 하는 것이 마땅한 줄 압니다. 다만 상의 준엄한 하교가 있거나 혹은 사람의 배척을 당했을 때만 실정을 진술하여 사퇴를 요구하며 공론(公論)을 기다리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며, 공론이 이미 그가 나와줄 것을 허락하면 다시 피혐할 필요가 없습니다.또 혹시 신하로부터 사직을 청해 오더라도 전하께서 갈지 말라고 특명하시어 더욱 은혜에 감격해서 말의 책임을 한층 더 힘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삼사(三司)의 공론이라 핑계하고 기어코 그 자리를 갈고야 마는데, 이것은 사람을 쓰고 내보내는 임금의 권한이 도리어 아랫사람들에게 빼앗긴 바가 된 것이니 심히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하였다. 《지천집(遲川集)》 <정축소(丁丑疏)>
○ 태종조 때, 장령(掌令) 이방(李倣)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박경(朴經)을 탄핵하였다. 박경이 황거정(黃居正)ㆍ손흥종(孫興宗)의 죄를 잘못 논의하여 애매모호하게 아뢴 때문이다. 의정부가 이방을 관아에 내려 죄를 다스릴 것을 청했는데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런 뒤 얼마 안 되어 임금이 김여지(金汝知)에게 이르기를, “이방이 한 일이 옳지 않은 것이 아니다. 내가 대신을 공경하고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른 것이다. 좀 전에는 내가 대신의 말을 들어서 간관(諫官)을 옥에 가둔 일이 없었는데 나도 이제 늙었나보다. 이런 일을 후사(後嗣)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하고 드디어 이방을 석방하였다. 《조야기문》
○ 세종 13년 동지 하례(冬至賀禮) 때, 영상 황희(黃喜)가 망궐례(望闕禮)에 들어가 참례하였는데, 본조(本朝)의 하례(賀禮)에는 병이 나서 들어가지 못하였다. 사헌부에서 통례문(通禮門) 영사(令史)를 불러서 그 까닭을 물었다. 영사가 사실대로 답하자, 사헌부가 그 영사에게 태형(笞刑)을 가하였다. 정부가 사인(舍人)을 보내어 아뢰기를, “통례문 영사는 아무런 간여 없이 태형을 당했습니다. 또 정부는 백관의 장(長)인데 당상(堂上)의 진퇴를 사헌부에 고한 전례가 없습니다. 이제 이 같은 욕을 당했으니 부끄러움이 실로 많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사헌부의 처사는 실로 온당치 않다. 사간원에 내려서 추고하고 다시 아뢰게 하라.” 하였다. 《동각잡기》
○ 세종 4년 임인에, 금위도제조(禁衛都提調) 영의정 유정현(柳廷顯) 등이 아뢰기를, “사헌부에서 왕명을 받지도 않고 본부(本府)의 진무(鎭撫)ㆍ도사(都事) 등을 걸핏하면 헌부의 사령을 시켜 뜰에 불러들여 꿇어앉히고, 지평 이상이 모두 의자에 앉아서 진술 받고 취조합니다. 왕지(王旨)에 어긋날 뿐 아니라 더욱이 조옥(詔獄)의 관리를 사헌부가 멋대로 불러가는 것은 실로 타당치 않습니다.” 하니 세종이 전교하기를, “사헌부가 잘못했다.” 하고 그 일을 맡은 장령(掌令) 황보인(皇甫仁)을 불러 물으니, 황보인이 답하기를, “삼품은 기둥 밖에서, 사품 이하는 뜰 아래에서 일을 묻는 것이 본부의 전례입니다.” 하였다. 세종이 전교하기를, “만일 죄가 있다면 갖추어 아뢰어 전지(傳旨)를 받는 것이 옳은데, 임금의 전지를 받지 않고 삼ㆍ사품의 조정 관원을 청사 앞에 꿇어앉혀 놓고 지평이 걸터앉아서 취조한 것은 너희들이 잘못했다. 이제부터는 이런 일을 하지 말라.” 하였다. 《동각잡기》
8년 병오에 세종이 서교(西郊)의 연희궁(衍禧宮)으로 처소를 옮겼다가 다음 해 3월에 창덕궁(昌德宮)으로 돌아올 때, 좌의정 이직(李稷)ㆍ우의정 황희(黃喜) 등이 세자를 호종하였는데, 임금의 행차가 떠나기 전에 먼저 갔다고 사헌부가 공문으로 힐문(詰問)했으나, 임금이 불러서 출근[就職]하게 하였다. 《동각잡기》
○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첩 건리(件里)가 자줏빛 옷고름을 달았다가 사헌부 금리(禁吏)에게 잡혔다. 건리가 대사헌 오승(吳陞)의 기생첩에게 청탁해서 석방을 청하니, 승(陞)이 금리에게 말하여 고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에 집의 등이 승(陞)에게 공문으로 힐문한 뒤 죄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승(陞)의 벼슬을 파하라고 명하였다. 《동각잡기》
○ 장막을 걷고 술을 마시니 정갑손(鄭甲孫)이 잔을 가리키면서, “거위 알같은 저것이 무엇이냐.”고 아란배(鵝卵杯)를 물었다. 세종조 정갑손(鄭甲孫)조에 상세하다
○ 어효첨(魚孝瞻)이 부군사(府君祠)를 불사르고 헐었다. 세종조 어효첨(魚孝瞻)조에 상세하다.
○ 세조조에 이덕량은 무신으로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조야기문》
○ 중종조에 김식(金湜)은 음사(蔭仕)로서 장령(掌令)이 되었고, 명종조에 이항(李恒)은 장령에 임명되었다. 《조야기문》
○ 선조 초년에 이탁(李鐸)ㆍ박순(朴淳)ㆍ노수신(盧守愼)이 건의하기를, “조종조의 사헌부 관원은 문관이 아니라도 임명했으니, 지금도 문과 출신이 아니라도 마땅한 자가 있습니다. 망(望)에 올려 임명토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성운(成運)ㆍ임훈(林薰)ㆍ한수(韓脩)ㆍ남언경(南彦經)ㆍ성혼(成渾)ㆍ최영경(崔永慶)ㆍ정인홍(鄭仁弘)ㆍ홍가신(洪可臣)ㆍ김천일(金千鎰)ㆍ유몽정(柳夢井)ㆍ유몽학(柳夢鶴)ㆍ송대립(宋大立) 등이 전후해서 임명되었는데, 얼마 안 가서 새로 만들어낸 일이라 하여 임금의 하교로 중지시켰다. 《동각잡기》
○ 선조조에 집의 정지연(鄭芝衍)ㆍ대사헌 심의겸(沈義謙) 등이 일을 의논하다가 의견이 맞지 않는다 해서 벼슬을 사퇴하고 피혐하니, 대사간 이이(李珥)가 말하기를, “대간(臺諫)이 아무 관계 없는 일로써 서로 용납하지 않은 지가 이미 오래다. 이제 이런 폐단은 개혁해야 한다.” 하고, 임금에게 아뢰기를, “심의겸(沈義謙)과 정지연(鄭芝衍)이 근래의 규례로 말씀하면 서로 용납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만일 한 가지의 논의가 맞지 않는 것이 큰 관계가 되지 않는다면 어찌 서로 용납하지 않는 데까지 이르겠습니까. 조종조의 대간은 각각 자기의 뜻으로 아뢰어서 오직 의리의 소재만을 보고, 동료의 의논과 맞지 않는 것은 거리끼지 않았습니다. 부화뇌동하여 구차히 합의하는 것은 쇠세(衰世)의 풍습이니, 모두 다 출근하게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심의겸은 의논이 각각 같지 않고 사세가 서로 용납될 수 없는데, 억지로 서로 용납한다면 반드시 뒷 폐단이 있을 터이니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석담일기》
○ 은대(銀臺)에서 간(諫)하였다. 선조조 때 뇌물을 써서 병영(兵營)을 옮긴 옥사(獄事)에 상세하다.
○ 사헌부와 사간원을 양사(兩司)라 일컫고, 전부터 양쪽 관원은 상피하게 되어 있어 아래에 있는 자가 갈리는 것이 상례였다. 신해년에 이르러 유희분(柳希奮)이 대사간이 되었는데 대사헌과 더불어 상피해야 한다고 혐의를 끌어 말하자, 사간(司諫)ㆍ채경선(蔡慶先)이, 양사(兩司)가 서로 통하여 상피하는 규정은 법전에 없다고 하여, 나와서 집무하게 하기를 아뢰어 청해서 드디어 그릇된 규례가 생기었으며 의논하는 자가 그르다고 하였다. 《지봉유설》
○ 인조 12년 갑술에 임금이 하교하기를, “양사(兩司)에서 피혐한 것은 오도록 청한 뒤에 한 가지 일로 피하는 계사(啓辭)는 받아들이지 말라.” 하였다. 《문헌비고》
16년 무인에 좌상 최명길(崔鳴吉)이 아뢰기를, “서경(署經)하는 일은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에 서경한 한림(翰林)ㆍ옥당(玉堂)이 벼슬이 갈렸다가 다시 들어오면 또 다시 서경하고 전에 수령을 지낸 자라도 다시 임명될 때마다 다시 서경하기 때문에, 중앙 관서의 관원이 이 때문에 많이 자리를 비우고 수령도 이 때문에 서울서 오랫동안 체류하는 일이 많습니다. 서경은 그 문벌을 보고자 하는 것인데, 한번이면 족할 것이지 어찌 두세 번씩 할 필요가 있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서경하는 것이 만일 폐단만 있고 유익함이 없다면, 처음 벼슬할 때 한 번만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문헌비고》
25년 정해에 전교하기를, “대관(臺官)이 난처한 일이 있으면 사직 소(疏)를 올리는 것이 옳다. 하필 일부러 계사(啓辭)를 궐하기 위해 감히 부정한 계교를 행한단 말인가. 이제부터는 계사를 궐했다고 관직을 갈지 말도록 양사(兩司)에 말하라.” 하였다. 《후원편람(侯院便覽)》
○ 효종 경인년에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듣건대, 전에는 대간이 겸대(兼臺 다른 관직으로 대관을 겸한 것)와 더불어 상회례(相會禮)가 있었다 하오니 비록 상피의 법을 써도 좋지마는, 지금은 상회례가 없고, 또 가부를 논의하는 일도 없는데, 감찰(監察)에 이르러서는 또한 겸대라고 상피하여 까닭 없이 산관(散官)이 되는 자가 있습니다. 이 같은 형식을 위한 형식은 고치는 것이 마땅한 듯합니다. 또 서장관이 대관을 겸하는 것은 사신의 일행을 규찰(糾察)하기 위한 것이니 서장관이 사신에 대해서 상피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에게 물었다.대신이, “겸대와 상피하는 것은 사실 형식에 가까운 일인데도 준행하고 폐하지 않은 것은, 혹 법전에 실려 있는 것을 일시의 불편함이 있다고 해서 경솔히 고친다면 그 폐단이 적지 않겠기 때문입니다. 대개 상피하는 법이 극히 엄하여 혐의를 분별함에 있어 작은 일에도 삼가서 오히려 폐지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구례(舊例)가 의리에 해롭지 않은 것은 준수하는 것이 옳습니다. 서장관에 이르러서는 상피하는 것이 사리에 당연하니 정한 법을 그대로 둠이 마땅하겠나이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좇았다. 《비국등록》
○ 10년에 정언(正言)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대간은 체면이 중하기가 다른 관아와 다릅니다. 훈련도감의 낭청이나 비국당상(備局堂上)을 겸직하지 못하는 것이 구례입니다. 근래는 고쳐서 임명하거나 갈지 않고도 대간은 그대로 겸임하게 하니, 국가가 대간을 접대하는 도리가 이럴 수가 없습니다. 구례를 그대로 두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대신이 말하기를, “다른 관아의 제조도 오히려 그대로 맡고 있는데, 비국(備局)의 임무는 반드시 고쳐서 임명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좇았다. 《문헌비고》
○ 현종 임자년에 도승지 이은상(李殷相)이 아뢰기를, “대관이 하루에 두 번 아뢰는 것이 십분 온당한 일인지는 모르지만 규례를 정해서 영원히 그 길을 막는 것은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의 본 뜻은 하루에 두 번 아뢰는 것을 옳지 않다고 여기지 않는다. 조정의 신하를 외직에 보내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거늘, 이 일에 너무 급급하기 때문이다. 이 뒤로는 인명(人命)에 관계되는 일, 임금의 과실이 있을 때, 국가 대사에 관계되는 일 등, 지나간 뒤에 바로잡을 수 없는 일에 대하여는 이 예에 받지 말라.” 하였다. 《후원편람(侯院便覽)》
○ 숙종 5년에 전교하기를, “대간(臺諫)은 임금의 이목(耳目)이다. 하루나 잠시도 비워둘 수 없다. 근일에 대간이 추고 당하였다고 피인(避引)하고, 혹은 제수받은 지 오래되지 않아서 도로 사직하여 아침에 임명되고, 저녁에 옮기니, 결코 고례(古例)가 아니다. 이제부터는 실지로 병이 없거던 사표를 받아들이지 말 것이며, 또한 조종조의 고사(故事)에 의해서 양사(兩司)가 서로 추문(推問)하도록 하라.” 하였다. 《문헌비고》
○ 숙종 갑신년에 우상 이이명(李頤命)이 아뢰기를, “삼사(三司)가 금란(禁亂)하는 것은 다만 법을 행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전(贖錢)을 거두어서 경비에 보태는 것인데, 법은 이미 행해지지 못하고, 돈도 공용(公用)에 쓰이지 못하여 한갓 금리(禁吏)들로 하여금 폐를 끼치고 원망만 사게 하니 매우 옳지 못한 일입니다. 사헌부로 말하면 대각(臺閣)의 사체(事體)가 다른 관아와는 다릅니다. 단속 나가서 속전(贖錢)을 거두는 것이 극히 구차하고 어려운 일이니, 병조와 호조로부터 적당히 요포(料布)를 받아 원역(員役)들에게 지급하고, 단속에 잡히는 사람은 죄만 다스리고 □을 징계하는 것이 실로 사리에 합당하니, 서로 빈틈없이 품해서 처리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 하였다. 《비국등록》
○ 감찰(監察)은 곧 옛날 감찰어사이행(監察御使裏行)의 직책으로서 사헌부의 속관(屬官)이 되어 각각 그 책임을 맡았다. 중국으로 사신가는 일, 조정 예회(朝廷禮會), 국고 출납, 사제(祠祭), 과거 등 일에 참예하지 않는 데가 없다. 부정을 적발하고 비위의 사실을 캐내기 때문에 그가 왔다는 소리만 들어도 누구나 몸을 움츠리고 무서워할 줄 알았으니, 그 참람함을 방지하여 근원을 막는 일이 지극하다. 성현(成俔)의 <감찰청벽기(監察廳壁記)>
○ 감찰(監察)은 옛날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의 벼슬이기 때문에 속칭 전중(殿中)이라고도 한다. 만일 본부(本府)에 재좌하는 날이 아니면 성상소(城上所)가 여러 감찰들을 아무 분대(分臺)에나 모았다가 헤어진다. 이것을 ‘다시(茶時)’라고 불렀다. 차[茶]를 마시고 끝낸다는 말이다. 《지봉유설》
큰 조회든 작은 조회든 문(文) 무(武) 두 반(班)이 동서로 나누어 들어가는데, 감찰은 한 사람씩 반(班)의 뒤에 서서 조회의 의식을 살핀다. 《문헌비고》
○ 조종조에서는 신료 중에 간사하거나 참람하거나 더럽고 탐하는 자가 있으면, 여러 감찰이 밤 다시(茶時)를 그 집 근처에서 열고 그 사람의 죄악을 일일이 열거해서 백판(白板)에 써서 문 위에 걸고 가시나무로 그 문을 막고 단단히 봉한 뒤에 서명하고 간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마침내 세상에서 폐고(廢錮)되어 버리는데 이 일이 없어진 지 오래 되었다. 《지봉유설》
감찰의 임무가 극히 중하여 고려 때와 국초에는 뽑아서 임명하기를 매우 신중히 하였다. 사헌부 모임 때마다 대장(臺長 장령ㆍ지평의 별칭)의 과실을 써서 몸에 간직하였다가 달려가서 그 집 마당에 떨어뜨렸고, 재신(宰臣) 중에 탐하고 속 검은 자가 있을 경우에 밤에 그 집 문앞에 모여서 먹으로 그 대문을 검게 칠하면 그 재상은 감히 나오지도 못하며 조정에서도 감히 쓰지 못하게 된다. 그 요원(僚員)이 모여서 대(臺)에 오를 때에는 비록 왕자나 대군일지라도 만나면 말에서 내렸는데, 지금은 달아나 피한다. 행례(行禮)하는 예절과 묵척(墨尺 사헌부에 딸린 하인으로 먹칠을 전담함)을 대동하는 일은 옛날과 같으나 대장(臺長)의 과실을 써서 품고 다니는 것과 대문에 칠하는 것은 행하지 않은 지가 오래다. 《지소록》
○ 감찰(監察) 중에 급(級)이 높은 자를 방주(房主)라 하며, 상하 유사(有司)와 더불어 내방(內房)에 들어가서 정좌하고, 외방엔 고참 순으로 자리 순위를 정하는데, 그 중에 제일 고참을 비방주(批房主)라 한다. 신참을 신귀(新鬼)라 부르며, 온갖 짓으로 욕을 보인다. 방안에 있는 서까래 같은 긴 나무를 신귀에게 들도록 하며 이것을 경홀(警笏)이라 한다. 들지 못하면 무릎을 선배들 앞에 내어놓게 해서 선배들이 주먹으로 위로부터 아래까지 친다. 또 신귀에게 물고기를 잡는 놀이를 시키는데, 신귀가 연못 속에 들어가서 사모(紗帽)로 물을 푸느라고 옷을 죄다 더럽힌다. 또 거미 잡는 놀이를 시키는데, 신귀가 손으로 부엌 벽을 더듬어서 두 손이 옻 칠한 것처럼 새카맣게 되면, 그 손을 씻은 몹시 더럽고 시커먼 물을 신귀에게 마시게 하니, 토하지 않는 자가 없다. 또 신귀가 두꺼운 백지(白紙)로 명함을 만들고 이름을 써서 날마다 선배의 집에 집어넣는다. 또 선배가 무시로 신귀의 집에 오면 신귀는 사모를 거꾸로 쓰고 나가 맞아서 당중(堂中)에 술자리를 베푼다.이때 선배들은 계집 하나씩을 끼고 앉는데, 이를 안침(安枕)이라 부른다. 술이 취하면 상대별곡(霜臺別曲)을 불렀다. 대관(臺官)이 제좌(齊坐)하는 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앉는 것을 허락하고, 이튿날 새벽에 청(廳)에 나가면 상관(上官)과 대리(臺吏)가 모두 뜰에 나란히 들어와서 인사하는데, 예가 끝나기도 전에 야직(夜直)한 선배가 방안에서 목침(木枕)을 들고 고함지르면서 치면 신귀는 재빨리 도망치는데, 만일 조금이라도 우물쭈물했다가는 반드시 몽둥이로 맞게 된다. 이런 풍습은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다. 성종이 이것을 싫어하여 신참을 괴롭히는 짓을 엄금한 덕분에 조금 뜸하였으나 폐지되지 않고 대부분이 그대로 남아 있다. 《용재총화》
○ 감찰(監察)은 백료(百僚)를 규찰하고 단속하는 자리이다. 반드시 자신의 몸가짐부터 소박하게 가진 연후에 사람들의 부정과 불법을 독책(督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추한 옷, 더러운 복색 붉은 토단령(土團領)을 입었다. 조련되지 않은 말, 부서진 안장, 짧은 사모, 해진 띠를 착용하였으며, 비록 귀족이나 명사라도 구례를 철저히 지키고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명종 말년에 심의겸(沈義謙)ㆍ박순(朴淳)ㆍ박응남(朴應男) 등이 일시의 논의를 고집하여 드디어 이것을 고쳤다. 이로부터 감찰의 복색과 제도는 화려하고 산뜻한 모양이 시종(侍從)보다도 배나 나아졌고 구풍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지봉유설》 《송와잡기》
○ 감찰(監察)은 각 관서의 청대(請臺)를 맡은 서리가 값을 법리(法吏)에 바치면, 수석 서리[頭吏]가 분대(分臺)와 의논하여 그 중 모호하고 너그러운 감찰은 값을 높이고, 곧고 속일 수 없는 감찰은 값을 싸게 했는데, 이는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허적(許積>)이 감찰이 되었을 때 성품이 매우 총명하고 일을 잘 살폈다. 어느 날 혜민서의 서리가 허균(許筠)의 집에 와서 약을 짓는데, 균(筠)이 장난으로 묻기를, “요새 감찰 값은 누가 낮은가.” 하니, 답하기를, “허 감찰(許監察)의 값은 쭉정이 피[糠稷] 5홉입니다.” 하여 일문(一門)의 웃음거리로 전해지고 그는 강합랑(糠合郞)으로 불리었다. 《지소록》 ○ 허적은 곧 균(筠)의 재종형이다.
○ 경종 계묘년에 사헌부에서 아뢰어, 대감(臺監)의 월령(月令)을 그 전대로 회복하기를 청하니, 제조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이른바, 월령감찰(月令監察)이라는 것은 대개 곡절이 있는 것입니다. 대동법(大同法)이 설립되기 전에는 지방에서 진상하는 토산물의 물종(物種)을 모두 각 관아에 직접 바쳤기 때문에 12명의 감찰이 각각 한 관아씩을 맡아 바치는 것을 살폈는데, 이것을 이름하여 대고(臺庫)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헌부는 심히 맑아서 물력(物力)이 없는 까닭에 감찰이 제관(祭官)으로 임명되었을 때의 의롱(衣籠)과 말, 또는 거동할 때 쓰는 의막기구(依幕器具)를 맡은 관아의 공인(貢人)에게 책임지워 받았으니, 이것은 옛날부터 내려오던 전례입니다.대동법이 설립된 뒤에는 지방에서 직접 바치는 일이 거의 다 없어지고, 어쩌다가 있어도 별달리 살필 일이 없어 각 관아의 월령(月令)이 그 대고(臺庫)를 파한 때문에 없어진 것도 있고, 그 공인(貢人)의 피폐로 인해서 없어진 것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찰(監察)이 어느 공회(公會)든지 모양을 이루지 못했는데 비국(備局)으로부터 변통하여 물력(物力)이 있는 일곱 관아로 하여금 그 열두 감찰의 월령의 일을 담당하게 한 것입니다. 이미 법을 정한 뒤에 계속 변경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좇았다. 《비국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