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리고 일지암 본당은 윗 연못에 평석을 쌓아올린 4개의 돌기둥이 누마루를 받치게 하여 독특한 운치를 자아내게 한다. 연못에 잉어가 한가로이 노니고 누마루에서 구름 낀 산경을 멀리 내려다보는 다회(茶會)와 선유(仙遊)는 자연과 우주의 섭리를 음미하게 할만하다. 그래서 초의의 시(詩)·선(禪)·다(茶)의 경지가 한데 어우러진 차 문화의 산실이 됐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초정과 연못 사이에 축조된 석축에는 ‘다감(茶龕)’이라 새겨진 평평한 면석이 끼여 있고 그 앞에는 이보다 넓은 판석이 하나 놓여 있다. 이 돌 평상은 차를 마시며 선을 하던 좌선석으로 보기도 한다. 초의선사는 대흥사의 13대종사로 일찍이 이곳에 기거하며 다도를 중흥시킨다. 그는「동다송」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서를 저술하고 차를 재배하여 널리 펴는 등 다도의 이론적인 면이나 실제적인 면을 크게 정리하고 닦음으로서 다도의 중흥조로 추앙 받고 있다. 당시 대흥사 가까이에는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 유명한 다인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초의와 차를 통하여 더욱 두텁게 교유하였다. 다산은 이곳과 가까운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대흥사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추사 또한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된 까닭에 대흥사와의 관계를 맺게되고 초의와도 남다른 친교를 가졌다. 이런 까닭으로 19세기초 대흥사를 중심으로 한 다도는 다시 한번 중흥을 이루게 된다. 또한 소치 허련(허유)이 이곳에서 초의선사의 그림공부 지도를 받았고 초의선사를 통해 추사 김정희라는 스승을 만나게 된 곳으로 당시 조선후기 일지암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학문과 예술의 활동은 이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곳은 조선말의 대 석학들이라 할 수 있는 추사 김정희와 다산 정약용 그리고 초의선사가 교류한 곳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 때문에 대흥사 일지암은 우리나라 다도의 요람으로 불리우고 있으며, 매년 음력 8월1일 초의의 열반일을 기해 추모행사인 초의제를 거행하고 있다. | |||
| |||
| |||
초의선사는 차 한잔을 마시는 데서도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고 하였으며 차는 그 성품에 삿됨이 없어서 어떠한 욕심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것이며 때묻지 않은 본래의 원천과 같은 것이라 하여 ‘무착바라밀(無着波羅蜜)’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가 지은 ‘동다송’은 동다(東茶) 즉 우리나라 차에 대한 예찬을 담고 있는 것으로 차의 효능과 산지에 따른 품질, 만들고 마시는 법 등을 적은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차에 관한 책이다. 차는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주로 불가의 학승들을 중심으로 발달했고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호남과 영남지방은 차나무가 자라는데 풍토가 알맞았으므로 우리나라 차의 본고장이 되어 왔다. 그러나 조선시대 들어와 불교가 밀려나면서 다도도 쇠퇴하여 겨우 명맥만 이어지고 있었다. 초의선사는 차와 선이 한가지라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을 바탕으로 다도의 이론을 정리하고 차를 만들어 널리 폄으로써 전래의 차 문화를 중흥시켰다. 24세 연상이어서 스승으로 모셨던 정약용과 동갑으로 승속과 유불의 경계를 넘어 누구보다도 친밀한 정을 나누었던 김정희와의 사귐에서도 학문과 예술, 차의 향기가 함께 했음은 물론이다. 초의선사는 귀양살이하는 김정희를 만나러 제주도를 다녀오기도 했을 만큼 서로 터놓고 도탑게 지냈다. 김정희가 말년에 초의선사가 보낸 차를 받고 써 보낸 걸작 ‘명선(茗禪)’이 대흥사에 전해온다. 초의선사는 중년이후 큰절의 번거로움을 피해 일지암을 짓고 40여년간 은거하며 차와 더불어 지관(止觀)에 전념하다가 81세로 입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