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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m.wikipedia.org/wiki/U-234
U-234
U-234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유보트 10형 잠수함으로 전쟁 말기 일본으로 기술자 및 Me262, 우라늄을 수송하던 중 독일이 1945년 5월 9일 무조건 항복을 한 후 연합군에 항복한 잠수함이다. 원래 유보트10형은 기뢰 부설함으로 설계되었으나, U-234는 기뢰 적재 공간을 제거하고 수송용으로 개조했다. 처음이자 유일한 임무는 우라늄과 기타 독일의 진보된 무기 기술을 일본 제국에 수송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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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해군 구축함 USS Sutton에서 항복하는 U-234 를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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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추세츠 주 케이프 코드에서 어뢰로 격침되는 U-234
U-234는 1945년 3월, 240톤의 화물을 싣고 키일을 출발하여 일본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화물 외에도 2명의 일본군 장교와 일본으로 가는 9명의 독일인 등 모두 11명이 탑승했다.
일본인 승객[1]항공공학자인 겐죠 쇼지 대좌잠수함 설계 전문가인 히데오 도모나가 해군 대좌.독일인 승객[2]리하르트 불라 소령 - 해공 협동작전 전문가프리츠 산드라트(Fritz Sandrath) 공군 대령 - 전 브레멘 대공 방어 사령관에리히 멘첼(Erich Menzel) 공군 대령 - 통신 장교. 공군 무관의 기술 보좌관하인리히 헬렌도른(Heinrich Hellendorn) 해군 소령 - 해상 대공방어 전문가하인츠 슐리케(Heinz Schlike) - 레이더, 적외선 및 방향탐지 분야 과학자카이 니슐링 (Kai Nieschling) 공군 중령 - 나치 판사.아우구스트 브링게발트 (August Bringewald) - 메서슈미트 사 선임 연구원. Me262, Me163 코메트 및 로켓 추진 분야프란츠 루프 (Franz Ruf) - 메서슈미트사 전문가
카이 니슐링은 도쿄 주재 독일 대사관의 조르게 간첩 사건에 대해 대사관 직원들을 조사하고, 항해 중에는 다른 승객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2] 이들 중 2명의 일본군 장교들은 독일 항복 후 U-234도 연합군에 항복하자 수면제로 자살했고, 이들의 시체는 바다에 수장되었다.
1947년 11월, U-234는 케이프 코드에서 어뢰 표적함으로 격침되었다.
추천 도서편집
Scalia, Joseph Mark Germany's Last Mission to Japan: The Failed Voyage of U-234 Naval Institute Press (2000) ISBN 1-55750-811-9Hirschfeld, Wolfgang Feindfahrten: Das Logbuch eines U-Boot-Funkers" Neff Verlag (1982) ISBN 3-7014-0189-6Hirschfeld, Wolfgang; Brooks, Geoffrey The Story of a U-Boat Nco 1940-1946Naval Institute Press (1996) ISBN 1-55750-372-9 : 이 책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U보트 비밀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있다.
외부 추가 정보편집
http://www.ihffilm.com/840.htmlhttp://uboat.net/boats/u234.htmhttp://www.ussvance.com/Vance/nazisub.htmhttp://www.spiegel.de/sptv/special/0,1518,230670,00.html
각주편집
↑ 《U보트 비밀일기》, 350쪽↑ 가 나 《U보트 비밀일기》, 3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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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비밀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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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underwaffe, 기적의 무기
태양광선포
1. 개요2. 연합군의 비밀(?) 무기3. 관련항목
1. 개요[편집]
밀덕후들의 만년떡밥. 어쩌면 음모론의 일종.
요약하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나치 독일이 사실 대단한 비밀병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게 사용되기도 전에 전쟁이 끝났다는 식이다. 사실 당시 독일의 병기들은 분명 뭔가 초월적인 부분이 있었다. 예를 들면 먹어랏 구스타프 열차포나 V2 등... 좀 비약이 심하면 '사실 UFO도 나치의 비밀무기라 카더라' 하는 음모론도 있지만 물론 사실이 아니다.[1]
사실 전쟁으로 인한 기술의 발달이라는 케이스는 세계사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케이스고 해서 이게 딱히 놀라운 건 아니다. 덤으로 나치의 비밀무기 운운하는 것들은 알고보면 실전에서 사용되지 않은 무기, 실용화되지 못한 무기, 설계도만 남아있는 병기, 몇 대만 만들어진 프로토타입 정도로 요약 가능. 그리고 사실은 비밀무기가 아니라 전쟁 당시 이미 실용화 되어있던 무기인 케이스도 매우 흔하다. 그냥 존재 자체가 설레발인 셈이다. 나치의 남극기지에 사실 비밀무기 연구소가 있다는 말도 있고 물론 그런 게 있을 리도 없고 종전 이후 나치의 데이터는 모두 연합군에 넘겨졌기 때문에 비밀무기라고 할만한 것도 다 까발려진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견되는 것들 가지고 나치의 비밀병기 운운 하는 이유는 심플하게
당시로써는 생각하기 힘든 기술이었다. 몇몇은 지금봐도 생각하지 힘든것도 있다당시 치고는 디자인이 매우 희한했다.지금 봐도 희한하다
둘 중 하나인데, 그나마도 사람들이 독일 하면 갖는 일종의 기술적 환상에 기반한 것이지 사실과는 100만광년 이상의 차이가 있다. 기기묘묘한 형상의 무기 하면 누가 뭐래도 미국인들의 비행기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2]. 디자인도 희한한 데다가 덤으로 2차 세계대전의 독일군이 보여준 경이적인 전투력이 결합해서[3] "저놈들이라면 저런 거로 진짜 그런 일을 해냈을지도 몰라"라고 망상한 결과물에 불과하다. 라스트 바탈리온(최후의 부대) 떡밥은 덤이고.
실제 당시 독일의 비밀무기 개발은 이런 테크트리를 통해 이뤄진 것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주요 군수산업이 작살났다. 그래서 기술자들의 실직이 심했고, 이들 중 대부분은 그냥 해외에 취업해서 국내의 숙련 기술진이 몽땅 날아가 버렸다. 게다가 그나마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자유성으로 모여든 과학자들마저 나치가 집권하니 죄다 미국으로 망명크리. [4]그렇게 빈틈이 생긴 것을 근근이 유지하던 중, 1933년히틀러 집권 이후 갑자기 군수산업 재건 분위기가 들어오면서 부족한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마구잡이로 연구진을 확충했다. 이 과정에서 무자격자라고 해도 뭔가 튀는 아이디어를 가진 자가 있다면 일단 채용하는 경향이 생겼다.여기에 착실한 이론을 받쳐줄 학자들이 줄줄이 외국으로 쫓겨나면서 이론적 기반을 다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결국 실제 실험으로 테스트해 볼 수밖에 없게 됐다.[5]덤으로 독재국가인 독일에서는 히틀러 및 당의 고위 인사가 기술적 가치도 모르면서 그저 자기가 보기에 뭔가 멋있어 보인다거나 아니면 입심 좋은 기술자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전폭적으로 지원을 퍼붓는 일이 반복됐다. 특히 미술학도를 꿈꿨던 히틀러의 경우 그저 병기의 독특한 외관(...)이나 몇몇 특성에만 급 감동하는 일이 잦았던 것이 엄청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6]
한 줄 요약을 한다면 "무식하면 용감하다" 쯤 된다. (...)
소위 "나치의 비밀병기"라고 언급되는 것들 중 많은 것들이 대전 후반기 독일이 수세에 몰려 연합군 폭격기들에게 폭탄을 두들겨 맞을 때 개발된 것들이었다. 그렇게 개발된 V시리즈나 불완전한 제트기, 요상한 페이퍼 플랜들을 보면 " 전쟁에서 통상적인 방법으로 이기지 못하니 비대칭무기나 뭔가 특이한 꼼수로서 난황을 타파하겠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묻어 있다. 다시 말해서, "제공권을 상실했고 폭격기도 부족해 영국으로 폭격기를 내보낼 수 없다 -> V 시리즈를 만들었다. 기존의 전투기론 연합군의 폭격기를 상대하기가 어렵다 -> 제트전투기를 만든다"라는 식이다. 강력한 영국 해군에 맞서 독일 해군이 비대칭 무기인 잠수함으로 맞서려고 했던것도 같은 맥락이다.
비슷한 예로 전함간의 대전에서 절대 이길수 없다고 생각한 일본은 전쟁 전에는 특형구축함이나 산소 어뢰, 항공모함을 이용한 전술등 당시에는 실험적인 방식에 몰두했다. 전쟁 후기에는 자살공격같은 삽질으로 대응하려했지만...
이는 김정일의 북한이 안고 있는 딜레마와 비슷한 것으로, 대칭전력으론 남한의 상대가 되지 못하니 핵이니 잠수함이니 생화학무기 등에 매달리는 것과 같은 현상이며 대전 당시 연합군으로서는 "이기고 있는데" 굳이 쓸데없이 이상한 물건들을 내뱉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위에 언급된 것처럼 연합군도 뒤져보면 정신나간 계획이나 페이퍼플랜이 없지는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미국 정도의 경제력은 있어야 당시 기술로 오버테크놀러지일 무기를 소수 엘리트 병기로 썩히지 않고 제식화해서 대량으로 보급할 여력이 있을 것이다. 다만 전황이 유리하니 굳이 기존병기 놔두고 검증안된 물건을 쓸 필요도 없다는 생각으로 시제품만 만들던지 전후의 국제정세를 고려해서 숨긴다던지 했을 뿐이다.
희대의 병크, 우익, 쓰레기애니 감벽의 함대에서는 이러한 비밀무기들이 모두 실전 배치된다(...) 결국 영미 연합군은 나치에 개발살나고 천하무적 일본제국군이 오버테크놀러지 기술로 나치와 대결을 펼친다는 이야기(...)[7]
2. 연합군의 비밀(?) 무기[편집]
그리고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연합군 역시 온갖 해괴망측(...)한 무기들을 계획했고 실험하기도 했다. 이 과정 역시 사실 독일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이 시기에 미국인들이나 영국인들이 상상하고 실제 시제품까지 만들었던 물건을 보면 정말 그들의 뇌를 한 번 열어보고 싶어진다.
예를 들면
?빙하 항공모함 하박국# 장정 1만 광년이라도 할 셈인가?고릴라 특수부대대잠용 물개 부대 SEAL팀 말고 진짜 물개초음파를 통해서 적을 공격하는 음파병기 이건 독일이..지뢰밭 돌파용 제트팩 응?바람을 쏘아서[8] 적의 비행기를 공격하는 포비둘기 카미카제진진돌이 에볼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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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개폭탄. 이것은 실제 실행되었으나 이런 저런 문제[9]로 인해 중단됐다.
등등……
게다가 그나마 독일은 전쟁에 져서 1945년 이후로 그런 짓을 더 못 하게 되기나 했지, 미국인들은 전쟁에 이긴 덕분에 1960년대까지도 계속 그러고 있었다. 이 녀석들 안 되겠어.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꿈의 70년대 미군의 정체가 바로 그것이다. (...)
3. 관련항목[편집]
구스타프 열차포Ar 234레르헤질버포겔트리프플뤼겔하우네부Ho229SCP-044라스트 바탈리온진진돌이 에볼루션나치 좀비
[1] 거의 같은 형태의 비밀기체 개발계획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음모론들과는 달리 시제품은 커녕 도면 한 장도 제대로 안 나왔다. 사실 나치의 비밀무기 계획 중 태반이 그렇다.[2] 독일의 비밀무기로 유명한 Ho-229 전익기만 해도 개발 개시 10년여 전에 개발 담당자였던 호르텐 형제가 미국 노스롭 사에 초빙돼 갔다가 거기 사람들이 만든 전익기 글라이더 보고 감동 먹은 결과물이었다.[3] 사실은 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단기간에 거대한 해군을 구축한 사실에 놀란 영국인들의 설레발이 그 기원이었다. 이 때문에 1928년에 등장한 독일의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역시 실제 성능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과대평가되었다. 이게 1935년 이후의 급격한 독일군 재무장(실은 겉치레만이었지만), 2차 세계대전에서 보인 독일군의 활약 때문에 한 번 더 증폭된 것이다.[4] 독일 수학자들의 큰형님 힐베르트가 남긴 그런 말이 있다. "(유대인이 사라진 이상,) 독일의 과학이요? 그런건 이제 없습니다."[5] 사실 당시만 해도 수많은 기술이 실제 이론적 뒷받침이 없이 그저 산업 현장의 경험에 의거해서 주먹구구로 이뤄지고 있었으며, 이는 독일만 그런 게 아니었다. 다만 독일은 이런 경향이 유난히 클 수밖에 없었다.[6] 이런 일의 대표격 중 하나가 1945년 2월부터 일부 나치당 고위 간부들이 미친듯이 열광했던 살인광선(...) 발생기로, 이 살인광선 발생기의 주요 부품은 1890년도 이후 생산도 되지 않던 고물이었다... -_-[7] 실제로 미국을 발라버리는 초반부보다 재미나 황당성의 측면에서는 나치와 싸우는 후반부가 더 낫다고 한다.거의 코미디 수준이지만[8] 압축공기를 이용해서 포탄을 날리는 형태는 BB탄포?TNT 개발 초기에 여러나라가 시도를 했다. 하지만, 바람 자체를 쏘는 것은 나치 독일이 유일하다.[9] 청각 반응 훈련때 소련 전차를 써서 실전에서도 소련 전차 밑으로 기어 들어가는 문제가 있었다. 오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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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5-07-03 19:10:18
알베르트 슈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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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모습
Albert Speer
1905.3.19~1981.9.1
나치 독일의 군수부 장관. 건축가. 히틀러가 친구로 여긴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1. 소개2. 건축가로서의 슈페어3. 대중 매체
1. 소개[편집]
" 히틀러에게 친구라는 것이 존재했다면 거기엔 내가 속하였을 것" - 회고록 <기억 -제3제국의 중심에서->
건축가로 아돌프 히틀러가 생각해낸 다양한 건축물들을 실현하는 실무를 맡았다.
만하임의 부유한 중산층 정도 되는 건축가 집안[1]에서 태어나 1920년대에 여러 대학을 다니면서 건축학을 전공하였다.
베를린 기술대학의 유명한 건축가인 하인리히 테세토브의 문하에서 최종적으로 학위를 따고 22살의 나이로 그의 조수로 일했다. 원래는 역시 유명 건축가였던 한스 푈치히의 조수를 지망했었지만, 떨어졌다. 재미있는 것은 푈치히의 경우 모더니즘을 지향하는 진보적인 건축가였지만, 테세토브는 그와 정 반대되는 고전주의 건축가였다. 자신의 건축 세계를 순식간에 정 반대로 바꿔버린 것. 그래도 테세토브 밑에서 슈페어는 진심으로 열심히 일했고, 테세토브 대신 강의를 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1930년에는 학생들의 권고를 받아 나치당 집회에 참석한 후 히틀러의 카리스마에 감동을 받아 1931년에 나치당에 가입하였다. 이 것이 그의 화려한 경력의 시작이었다. 나치당 베를린 지부의 간부인 카를 한케[2]를 알게 되어 그의 집을 무상으로 수리해주었는데, 한케는 이를 고마워하며 슈페어가 고향에서 직업을 얻지 못하고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괴벨스에게 베를린 지부당의 리모델링 공사를 슈페어에게 맡길 것을 청원하였다. 여기서 슈페어는 괴벨스에게 호평을 받아서 1933년 나치당이 정권을 잡은 후 신설된 선전성 청사의 리모델링을 위임받았으며, 각종 행사의 미술을 멋지게 기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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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건축과 예술에 관심이 많은 딜레탕트였던 히틀러의 호감을 사서[3] 나치당 주임 건축가, 건축부 수장, 제국수도 총건축 감독관 겸 제국 의회 의원의 직위를 차지했다. 나치 전당대회장 건설을 설계하고 감독했으며,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독일 파빌리온으로 금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1936 베를린 올림픽이 열린 경기장[4]과 뉘른베르크에서 체펠린 비행장(Zeppelinfied) 등을 건설하였다.[5][6]제3제국이 세계를 지배할 경우 그에 어울리는 수도인 게르마니아의 도시계획을 히틀러와 함께 마련했으며, 국제적으로 높아진 명성으로 인해 심지어는 스탈린의 초청으로 모스크바를 재건설하는 작업을 위탁받기도 하였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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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총통관저[8]
그의 경력에 쐐기를 박은 작품이라면 1939년에 리모델링된 히틀러의 신 총통관저(Neue Reichskanzlei) 공사를 들 수 있다. 3월 15일에 히틀러는 이 건물을 통해 총 한방 쏘지 않고 체코슬로바키아를 집어 삼켰다. 히틀러의 아이디어에 따라 얉고 폭만 넓은 건물을 옆에서 진입하게 만들어 400미터가 넘는 아주 긴 복도를 만들고, 아주 위압적인 무대와 같은 공간을 만들었던 것. 실제 건물로써는 별 쓸모가 없던 건물이지만, 적어도 겉모습으로는 사람을 주눅들게 만드는, 나치의 정체성에 아주 잘 부합하는 건물이었다. 당시 독일의 군사적인 힘에 대해 부담을 느끼던 체코 대통령은 히틀러와 담판을 짓기 위해 독일로 찾아왔는데, 그렇지 않아도 심장이 약했던 그는 마치 '무기'와도 같은 이 건축물의 위압적인 400m가 넘는 복도를 지나고 나서심장마비를 일으켰다! 그리고 굴욕적인 항복 문서에 서명을 한다. #
전쟁 중반기인 1942년 2월 8일 군수부 장관인 프리츠 토트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히틀러의 강권으로 군수부 장관을 맡았다. 당시 독일의 전시경제는 관련기관과 권력이 분산된 채로 통합적으로 관리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 능률성은 나치당료의 과도한 개입과 겹쳐서 상당히 저하된 상태였다. 슈페어는 군수부 장관이 된 후 히틀러의 지속적인 신임을 가진 인물[9]이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독일 군수체계에 남아 있던 여러 가지 비효율적인 관행을 뿌리뽑아서 생산성을 높이 끌어올렸다. 다만 이런 관리의 천재에게도 현실의 어려움은 타개하기 어려웠는지
"누군가가 당신에게 명령하길 베토벤 9번 합창 교향곡을 '하모니카로만 연주해야만 한다'라고 했다 생각해보시오"
라고 슈페어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푸르트 뱅글러에게 자신의 격무에 대해 어려움을 토로한적도 있다고
그러나 슈페어의 전시생산 관리능력에 대한 반론도 있다.채승병의 블로그에서는 나치독일의 전시경제 생산성 향상은 1930년대부터 투자되었던 대규모 생산시설들이 슈페어의 취임시기와 맞물리면서 완공되면서 일어난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독일경제의 군수품 생산능력을 향상시키는 계획안은 이미 전임자인 토트가 완성시키고 있었고, 슈페어는 단지 그걸 실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도 널리 알려져 있다.[10] 그러나 군수부 장관을 맡기 전에 건설부 장관으로 있을때도 슈페어는 그 능력으로 호평을 받고 있었고, 변덕스러운 독재자인 히틀러의 지속적인 호감과 신임을 얻고 있던 슈페어는 자신에게 주어진 히틀러의 신임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난맥상인 독일 전시경제체제를 어느 정도 효율화시킬 수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독일의 무기 생산량은 연합국의 전략폭격이 심화된 1944년 후반기에 되어서야 감소세로 돌아선다.
다만 슈페어의 회고록에서는 연합국의 전략폭격이 1943년까진 부정확하고 체계없이 이뤄져서 별다른 타격을 못 입혔는데 1944년에 가서야 정확한 정보에 입각한 폭격이 이뤄지긴 했지만 효율적인 타격은 아니었다고 밝힌다. 예로 독일 전시생산의 병목 공정은 볼베어링 공장이었는데[11] 몇 번 폭격하고 완전히 파괴시키기 전에 중단하고[12]새로운 표적으로 가거나 루르 지방의 댐을 공격하다가 거의 파괴하기 직전에 멈추고[13] 라인강 철교를 폭파시켰으면 프랑스 지역에 있는 독일군 병참선이 붕괴했을거라는등 자신으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연합국의 전략폭격 사령부의 삽질이 독일의 패망을 몇달 미뤘다고 서술한다. 사실 독일의 군수공업의 아킬레스건은 무기의 재료로 쓰는 합금강 생산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희귀금속이었는데 1944년말 여러 희귀 금속중에 특히 터키서 수입하는 크롬이 6개월치 이하로 바닥나면서 발칸이 소련에 넘어가고 나선 무슨 수를 써도 1945년이면 공업생산이 파국을 면하기 어려웠다고 밝혔다.[14]
어쨌든 1943년에 이르러 독일경제가 생산하는 군수품이 획기적으로 늘어나게 되면서 슈페어는 자연스럽게 히틀러의 후계자 후보군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는 나치 권력의 상층부에 있던 괴링, 마르틴 보르만, 힘러와 대립하게 되어 1944년 초에 와병하게 되자 슈페어가 가진 행정권을 탈취하려고 시도하였고, 그들의 음모에 질린 슈페어는 히틀러에게 군수장관과 건축책임자의 자리를 사임하겠다고 청원하였다. 공군원수 밀히를 필두로 하는 군수관련 인사들의 청원 덕분에 슈페어는 히틀러의 신임을 다시 얻어서 관련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15] 1944년에 발생한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의 주동자들 및 반나치인사들에게조차 슈페어의"대단한 군수품 생산관리 능력"은 높이 평가되어 그들이 작성한 내각의 명단에 포함될 정도였으나 "아직 포섭이 필요"하다는 말이 붙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1945년 3월, 독일의 패배가 거의 확정적인 상황이 되자 자포자기한 아돌프 히틀러는 광기에 들려 독일 내의 공업지대나 사회간접자본을 모조리 파괴하라는 미친 지시를 내렸다. 슈페어는 히틀러에게 관련 행정권을 받은 후 해당 권력을 사용하여 은밀히 경제계 인사나 정부관리들에게 독일의 인프라를 파괴하는 대신 보존하도록 설득하였고 대체로 성공한 편이었다.[16]
히틀러가 자살한 후 슈페어는 카를 되니츠의 행정부에 참가하였고,[17] 이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유죄혐의가 인정[18]되어 20년형을 받았다. 이 판결은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는 판결이다. 슈페어와 비슷한 죄목의 프리츠 자우켈의 경우 사형을 판결받았으며,[19] 슈페어와 마찬가지로 회개한데다가 자신의 전쟁 기록까지 모두 연합군에게 넘긴 한스 프랑크 역시 사형을 당했다. 게다가 판결 이후 슈페어가 자신이 몰랐다고 침묵으로 일관한 유대인 학대에 가담[20][21]한 사실이 더욱 자세하게 드러난 문건이 공개되기도 하였다. 결국 그의 형량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연합군 검사단에게 유리한 진술을 적극적으로 행함으로써 얻어낸 일종의 사법거래였다.[22] 중요한 대목이나 구체적인 증거에 대해서 '기억이 안난다', '다 히틀러의 지시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는 다른 전범들에게 엄청난 월급을 받는 편지배달부들! 이라고 일갈해서 개념인 코스프레를 했다.유체이탈 화법
음모론을 비롯해 많은이들이 궁금해 하던 나치의 핵개발에 대해선 회고록에서 밝히길 모든 조건이 충족되고 최대한의 자원이 투입된다 하더라도 어렵다는 실무자의 보고와 자신의 판단으로 나치의 전황과 기술력으로 절대 실현가능성이 낮다는 판단하에 우라늄비축량 700톤을 해군 잠수함 배터리 개발계획에 사용하라고 남김없이 방출했다고 밝혔고 V1, V2에 개발과 생산에 대해서나 연합국의 전략폭격은 수지가 남지 않는 밑지는 장사였다고 평가절하 했다.
복역기간 중 슈페어는 회고록을 집필하였고, 이는 1966년에 출옥[23] 한 후 간행되어 나치시대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이 일차사료로 사용하게 되었다. 국내에도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완역되어서 출간돼있다. 다만 이러한 회고록들이 으레 그렇듯이 상당히 자기 변호적인 내용들이 많으며, 마르틴 보어만과 같은 정적에 대한 공격과 슈페어 자신이 개인적 호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변호하는 내용이 상당하다.[24] 군수장관 등용전엔 가뜩이나 자원이 모자른데 히틀러의 과대망상적인 건축물 지어대는데 일조 함으로서 독일 산업능력을 깎아먹는데도 일조 했고 히틀러의 친구로 히틀러와 다른 경쟁자들 사이에서 권력에 초연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다가 막상 등용되고 나선 중첩되고 비효율적인 행정체계를 일신하고 효율화한다는 목적하에 히틀러에게 전권을 요구하는점 권력투쟁의 희생될뻔 한다고 회고록에서 썼지만 정작 마르틴 보어만에 대항해서 괴벨스 괴링과 3인동맹을 도모하는 점으로 보아 권력지향적인 면을 숨기기 어렵고 다른 인사들의 증언도 이와 대체로 일치한다.
여담으로 슈페어의 말로는 그가 독가스를 이용해 히틀러 암살을 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SS 보초병들이 독가스를 주입할 만한 곳을 지키고 있었고, 원래는 낮던 굴뚝도 상당히 높게 개조되었기에 사실상 슈페어의 허풍으로 평가된다. 만약 이게 사실이었다면, 이런 어설픈 알베르트 슈페어의 히틀러 암살계획은 모든 암살계획 중 마지막 암살계획이었다. 슈페어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변호사의 권유와 검사단의 진술 요구에 응해 이 사실을 털어놓았고, 이걸로 인해 옥살이한 20년 내내 전 나치 동료들에게 왕따를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소문에 불과하며, 징역형을 받은 사람들 중 루돌프 헤스를 제외한 나머지들은 원래부터 슈페어와 비교적 친한 편이었고 또한 그중 가장 친했던 발두어 폰 쉬라흐[25]를 제외한 전원이 1954~1957년 사이에 출감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왕따를 당할 일이 없었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당시 왕따 당한건 사실인데 군인출신 다른 전범들과 달리 나치정권을 비판하는 개념인 코스프레와 영미 군사당국과 이심전심으로 통해서 전략폭격과 나치시대 군수생산정책을 매우 협조적으로 진술하는 바람에 혼자살고 싶어서 안달난 배신자급으로 매도된 것이지 암살과는 전혀 관련없다. 또한 슈페어 스스로는 이때의 암살계획에 대해 당시쯤 되면 이미 다들 갈데까지 가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는 그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위협을 느끼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진술함으로서 암살계획을 스스로 평가절하했다. 물론 이는 그저 겸손해 보이려는 연기에 불과했을 수 있다.
이런 일들 덕분에 슈페어에 대한 평가도 둘로 갈린다.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친 개념인 나치 또는 비열한 기회주의자. 진실은 본인만 알겠지만 당시의 독일 관료 및 군 지휘관 다수를 떠올려보면 완벽히 어느 한쪽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2. 건축가로서의 슈페어[편집]
관리자로써의 슈페어는 (부풀려졌다고 할지라도) 꽤 쓸만한 인물이었지만, 정작 본업인 건축가로써의 평가는 그다지 대단하지는 않다. 구시대적인 고전주의 건축에서 못 벗어난, "시대를 읽지 못한 건축가"였으며(사실 그 점이 히틀러의 취향에 맞았던 것) 그 감각 역시 시대에 남을 정도로 대단한 수준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더욱 안좋은 점은 건축가로써 줏대가 없었던 점. 사실 슈페어의 학생 시절 일화를 들으면 그도 현대적인 건축물에 대해서 어느정도 의식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유명한 르 코르뷔지에나 미스 반 데어 로에조차 히틀러에게 공사를 받기 위해 노력했었지만, 슈페어 정도로 자기의 건축을 버리면서까지 타협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의 건축물은 철저하게 히틀러의 취향과 아이디어를 구체화시켰을 뿐이다. 또한 그와 히틀러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제3제국의 수도와 그 중심의 거대한 돔은 전쟁이 아니더라도 사실상 실현되기 어려운 황당무계한 것이었다.[26] 슈페어의 회고록에 따라 히틀러의 건축취향을 설명하자면 건축물은 실용성보다 그 존재만으로 "사람을 압도시키는 기능"을 중요시했다. 기교를 별로 부리지 않는 고전적인 순수함을 추구했고 찬탄해 마지않던건은 그리스의 도리아 양식인데 그리스 식민지 출신이 본국에 대한 '열등감'으로 이오니아 양식으로 '타락'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건축물에 대한 철학은 일종의 '폐허이론'으로 그 시대의 사람들이 역사에서도 퇴장한 후에라도 당시 시대에 남은 건축물로 '존재'를 알려야 된다는것이다. 마치 그리스 신전과 로마시대 콜로세움 처럼. 그 결과로 현대기술로 구현이 가능한 경계치의 크고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선호할 수 밖에...
?국민 회관(Volkshalle, 폴크스할레)대한민국 국회의사당이 생각난다
18만명의 군중을 수용할 수 있는 290m짜리 돔 구조물 '국민 회관'과 120m의 개선문 같은 것. 개선문은 평양 개선문(60m, 세계 최대의 개선문)의 2배이며, 판테온을 모델로 한 국민 회관의 돔은 현재 세계 최대의 돔인 카우보이 스타디움(275m)보다도 더 크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보다 17배나 큰 규모였으며 돔 상부에 있는 채광탑의 지름(46m)은 석재 돔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인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 지름보다 약간 더 컸다.[27] 건축공학 전문가들은 수도의 예정지와 거대한 돔 밑의 지반이 너무 약해서 엄청난 기초공사가 필요할 것으로 평가하였다. 설사 돔이 건축된다고 하더라도 기울어지거나 무너질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게다가 위같이 거대한 돔이 성공적으로 건축되었다 한들, 계획상으로 그 거리에는 거의 관공서만 배치되어 길게 늘어져 있는 등, 물리적인 문제 이외에도 수도 계획 자체에 한참 문제가 많았다. 슈페어조차도 자서전을 빌어서 자신이 나중에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후에 '다시 보아도 전혀 정상적인 계획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고 했고, 그의 아버지는 슈페어를 보고 네가 미친 것 같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쓸데없이 넓은 중앙 대로와 겉만 중시한 도시계획 역시 비현실적이며, 게르마니아가 실제 도시로 기능하는데는 어려움을 주었을 것이다. 히틀러와 슈페어는 평소에 자주 제 3제국이 멸망하더라도 고대 로마의 유적처럼 영원한 존재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는데(앞서말한 소위 '폐허이론'), 확실히 그런 을씨년스러운 감상에 어울리는 건축물이긴 했다. (참고로 재미있는 것은 동시대의 독재자 스탈린의 건축가들은 스탈린의 건축물이 천년만년 새것 같은 건축물이 될 것이라고 아첨을 떨었다.)
슈페어는 후에 자신의 건축물들과 게르마니아 계획에 대해서 "보는 눈이 없었다"면서 자기 비판을 했지만, 나치의 건축물들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에서는 신나게 자신의 건축물을 설명했다.(...)
참고로 그 아들의 이름도 알베르트 슈페어인데, 2008 베이징 올림픽의 올림픽 단지 디자인을 총괄했다.
3. 대중 매체[편집]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서는 전통적으로(?) '관리의 천재'로 나와 공업 능력(IC)을 10% 향상시켰다. DHR에서는 '천재적인 조직자'인데, 사기적인 능력 때문에 지속적인 하향을 당하고 있다(...). 1.04 RC1 기준 'IC +8%, 외국 IC +8%, 외국 인력 사용 +8%, 소비재 수요량 -10%, 전력/금속/희소 물자 생산 +10%, 불만도 증가 비율 +10%, 비축량 +10%'라는 우수한 능력을 갖고 있다. 참고로 1.03 정식 버전 이전에는 IC +20%, 외국 IC +30%의 괴물이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지는 미국보다 높은 독일의 IC로 정리된다(…).
SCP 재단에서는 핵분열 포대인 SCP-044를 제작한 걸로 나온다.
월드 오브 탱크에서는 독일 경전차 유저들에게 영원히 고통을 안겨주는 사람인데, 20톤급 정찰경전차 계획을 보고 차체의 특징이 판터 차체와 비슷하니 아예 판터 차체를 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사실이 제작사인 워게이밍의 눈에 띄어서 정말로 판터 차체를 쓰는 경전차가 나와버렸다. 물론 중량은 40톤으로 원본 판터와는 5톤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20톤급이라매? 사실 워게이밍 입장에서는 제대로 된 경전차보다는 고티어로 가는 것을 막는 장애물이 필요했던 것이기 때문에 이 괴악한 설계가 눈에 띄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슈페어의 이름이 게임 내에서 직접 언급되지는 않아서 욕을 먹지는 않는다.
[1] 할아버지부터 장남(본 항목의 본인 기준)까지 계속 건축가로 활동해오고 있다. 더불어 아버지 때부터 이름을 물려주었기 때문에 3대가 같은 알베르트 슈페어. 장남의 경우 베이징 올림픽의 주경기장 설계에 참여하기도 했다.인터뷰[2] 마지막 친위대 제국지도자(Reichsf?rher-SS)이다.[3] 심지어는 매일 히틀러의 저녁식사에 초대받았다고 한다.[4] 경기장은 처음엔 그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유리로 제작하려 했지만 히틀러의 요청으로 무산되었다고 한다.[5]??현재 경기장은 리모델링만 되어 베를린에 남은 나치시대 유적중 가장 보존상태가 좋다.???또한 체펠린 비행장도 나치 조형들이 파괴된 후 일부 부분이 철거된 채 계속 남아 현재 독일 국민들의 휴양처로 이용되고 있다.[6] 재미있는 것은 슈페어는 건물이 낡아도 더욱 웅장하게 보이게 하였으며 설계 자체가 몇 천년(!!)은 버티도록 했다고 한다(!!!) 이 괴물...[7] 이는 모스크바가 베를린을 능가하는 위엄을 가진 도시가 될 것을 우려한 히틀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8] 400m가 넘는 복도로 가기 전에 위치한 첫 대리석 홀의 모습[9] 관료들을 싫어하는 예술가적 기질을 가지고 있는 히틀러에게 자신과 건축관이 유사한데다 프로젝트 관리능력까지 출중한 "예술가"인 슈페어는 히틀러의 몇 안되는 믿을 수 있는 친구였다.[10] 하지만 히틀러의 개인적 친분없이는 히틀러 성향상 1인에게 권력을 몰아주는것이 불가능하단점을 고려하면 신뢰하기 어렵다[11] 전차 전투기 차량등을 생산하는데 필수적이다.[12] 작전이 여러가지로 꼬여서 폭격기 손실이 너무 커졌기 때문이었다. 슈페어는 이 폭격으로 생산량이 38% 떨어진 정도에서 그친 것이 너무나도 다행이었다고 회고한다. 물론 연합군 사령부와 마찬가지로 히틀러 역시 이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를 깨닫지 못했다.(...)[13] 파괴되면 수력발전을 이용한 전력 생산이 끊어지고 공업용수가 바닥난다.[14] 니켈, 몰리브덴, 망간 등의 비축량도 바닥나기 시작했다. 크롬과 몰리브덴이 없으면 균질압연장갑, 더 나아가 티거나 판터 등 전차의 생산은 완전히 끝장난다. 당장 티거 2가 이런 희귀 금속이 부족한 상태에서 만들어져 카탈로그 스펙보다 방어력이 크게 저하되는 추태를 보였다. 이 보고를 들은 히틀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른 각료들과 신형 전차의 개발을 논의하러 갔다. 뭔 다른 세계에 사냐[15] 다만 이 시기 나타난 나치 고위층들의 추악한 욕망은 슈페어가 전후에 나치들을 비판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16] 전범 재판부도 판결문에서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언급했다. 사형을 피해간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17] 아이러니하게도 전쟁기간 동안 슈페어와 되니츠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되니츠가 유보트 생산에 자원을 우선 분배해달라 요청한 것을 슈페어가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며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18] 대체로 전시중 외국인 강제동원과 관련된 것들이다. 사실 슈페어는 군수부 차관인 자우어가 그랬던 것처럼 독일기업들에게 배치된 외국인 노동자들의 동원실상에 대해서 증언해주고 기소를 면제받거나 형량축소의 타협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이를 거절하고 있었다. 덕분에 독일의 대기업들은 경제부흥시기에 외국으로 수입이 유출되는 것을 성공적으로 차단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독일 대기업들이 외국인 강제노동에 혈안이었다고 솔직히 말하고 기소중지된 자우어가 전후 극심한 생활고를 겪은 반면에 슈페어 일가가 평온한 시간을 보낸 것은 슈페어가 독일기업들의 전쟁범죄 혐의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뒤집어 쓴 사연 덕분이었다.[19] 이때문에 자우켈은 집행 직전 최후 진술에서 자신의 형량이 불공평하다고 말했다.[20] 학살에 대해서는 친밀한 고위 당직자들의 암시를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사실 조금만 주의깊게 나치 체제를 관찰했다면 바로 알 수 있는 문제였음을 자서전을 빌어 자인했으며, 학대 자체는 불쾌하게 여기면서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고 적었다. 이런 식의 내용은 적어도 후자에 한해서는 이 문제를 기재한 구 제3제국 관련 인사 모두의 자서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며, 전자는 보통 안 적었다. 재판에서도 유대인 학살 문제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참회한다고 언급하고, 학대 문제는 다른 모든 외국인 강제노동 동원에 묻어가는 식으로 돌려서 진술했다. 훗날 이 문제는 A급 전범에 대한 1차 재판이 끝난 후 개최된 종범 재판들에서 추가 공개된 증거들에 의해 슈페어 역시 알면서도 묵인했거나 참여(적극적이었는지 소극적이었는지는 당사자만 알 일이다)하기도 했음이 입증되었다.[21] 슈페어가 출소 후 슈페어의 친형이 유대인 수용소에서 대해 슈페어가 "유대인? 그들은 애굽에서도 200년간 벽돌을 굽지 않았는가?"(구약성서에서 따르면 이집트에서 200년간 노예생활을 했음)라고 말한 걸 기억한다고 알베르트 슈페어에게 편지로 비판했다. 귀도크놉 著, 《히틀러의 뜻대로 -조력자들-》 참조.[22] 슈페어의 형량에 있어서 미, 영, 프랑스 판사들은 10년형 정도를 검토했으나 소련 판사의 강력한 반대로 20년 형을 받았다.[23] 몇몇 유명 인사들이 슈페어의 재능을 높게 사서 슈페어 사면 청원 운동을 벌였다. 여기엔 샤를 드 골 대통령, 심지어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검사팀 중 한 명이었던 하틀리 셔크로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형량 감경을 위해서는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모두의 동의가 필요했으나, 소련이 강력히 반대했기에 20년 형을 다 살아야 했다.[24] 일례로 괴벨스의 부인 막다 괴벨스가 있다. 슈페어의 자서전에는 그녀가 남편의 강요로 인하여 아이들과 자살한 것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 그녀의 행보와(그녀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광적인 히틀러 추종자였다) 유일하게 밖에 있던 아들에게 보낸 편지(제3제국이 없는 세계는 의미가 없으니 아이들에게 그런 세계에서 살지않게 하겠다는 내용) 그리고 괴벨스가 막다 괴벨스에게 아이들과 베를린에서 비행기로 탈출하라고 설득했다는 괴벨스 부관의 증언으로 인하여 부정되었다.[25] 그도 슈페어처럼 재판에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한 인물이었으며, 슈페어 스스로도 의사와의 면담에서 그가 가장 적극적으로 참회하고 있다고 진술한 바 있다.[26] 회고록에서는 그당시 기술로도 충분히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다만 건물 크기나 높이가 건물의 가치나 사람에 끼치는 위엄에 대해선 별 상관이 없었는데 뒤늦게 깨달았다고는 인정함[27] 히틀러가 승리한 세계를 그리고 있는 걸작 대체역사소설 당신들의 조국에서는 이 건물에 18만명이 꽉 차면 사람들의 입김이 돔 지붕 밑에서 구름으로 응결되어 비를 내릴 정도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외에도 나치가 승리한 대체역사에서 그 특유의 쓸데없는(...)웅장함과 거대함 때문에 꼭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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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알베르트 슈페어는 히틀러의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
전쟁 말기에 군수장관으로 모든 전쟁무기의 생산을 관리합니다
이런 최고 악질 나치 간부이며 괴링 힘러 보어만과 권력투쟁을 하며 히틀러 사후의 대통령 자리를 노립니다
그런데 슈페어는 뉘른베르그 전범 재판에서 연합국에 협조해서 20년 징역으로 살아 남습니다
결국 연합국에 뭔가 유용한 극비 정보를 넘겨주고 협상한 결과로 보입니다
700kg의 우라늄 비축분을 나치 잠수함 배터리 연구에 모두 방출했다는 슈페어의 증언을 보면서
아마 유보트 추진기관을 핵원자로 추진으로 성공한 걸로 보입니다
나치는 핵잠수함에 핵탄두를 탑재한 V2를 케이스에 견인해서 미국 앞바다에서
워싱턴 뉴욕 대도시를 공격하고자 했습니다
물론 A-9이라는 2단 초대형 로켓으로 미국을 독일에서 직접 공격하려고도 준비 중이었습니다
문제는 핵탄두가 가벼워야 하는데
독일은 간신이 3발의 원시적인 대형 핵폭탄만 완성할 기술 뿐이였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완성품은 나치의 작품이라는 음모론이 존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진실로 판단됩니다
그래서 슈페어는 나치 전체의 무기 생산을 감독했으니
UFO하우네부도 잘알고 있었으며
나치 핵폭탄과 핵잠수함도 파악했을 겁니다
나치는 일본에 잠수함으로 핵기술과 설계도 우라늄을 일본으로 제공합니다
일본은 원산에서 북한 우라늄을 채굴해서 수풍 수력발전소의 전기를
이용하여 원심분리를 진행합니다
나치의 기술 지도로 원산에서 1945년 8월에 일본 원자탄이 실험에 성공하고
OSS의 스파이로 침투한 광복군이 미국에
일본 원자탄을 보고합니다
이미 나치의 항복과 슈페어의 정보로
나치 완성 핵폭탄 2발을 압수한 미국은 맨해튼 프로젝트가 뒤쳐져서
일단 나치 완성품 2발로 급하게 일본을 공격합니다
소련은 만주와 북한을 신속히 점령하여
원산 핵기지에서 일본 핵 과학자와 나치 설계도 북한 산 우라늄을 확보하고
신속한 핵개발에 엄청난 도움이 됩니다
압수한 나치 핵잠수함 프로토타입을 바탕으로 1954년에 미국 최초 핵잠수함인 노틸러스가 발표됩니다
소련도 신속하게 핵잠수함을 개발합니다
결국 나치의 극비 비밀무기는
핵잠수함과 핵탄두 탄도 미사일이었습니다
슈페어가 존재 여부와 생산시설 개발과학자에 모든 정보를 넘긴걸로 보입니다
그래서 슈페어만 살아 남은 겁니다
나치가 반중력 원반 비행체를 완성했다면 슈페어가 고자질했을 겁니다
당시 원시적인 반중력 비행체가 존재했어도
전략무기로 발전하는데는
핵탄두 소형화가 걸림돌이라서
20년의 추가 시간이 힐요합니다
그 사이에 먼저 가능한 핵잠수함과 핵 탄도미사일을 먼저 배치합니다
원반비행체는 탈출과 추락에 의한 기술 유출 가능성이 높아서
대량 양산 배치에는 제약이 따릅니다
3대 정도 제작해서 연구만 하는 규모가 예측됩니다
조종사를 거액의 현금으로 매수하거나
추락한 기체를 분석해서 반중력 기술을 역공학으로 모방할 우려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U2기 같은 고물 정찰기를 여러번 추락시키면서도 고집스럽게 21세기까지 사용합니다
이미 소령과 중공이 추락한 기체를 분석해도
모방해본들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만 조종사를 대신 태워서도 운용합니다
U2를 가지고 중국에 귀순해도 얻을 기술은 거의 없습니다
카메라만 자폭 시키면 극비 정보는 없습니다
미국 페이퍼 클립 작전의 목표는 V-2로켓이 아니라
나치의 핵폭탄과 핵잠수함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히틀러의 죽음 이후, 슈페어는 히틀러의 유언에 따라?칼 되니츠가 대통령이 된 소위?플렌스부르크 정부에 참여하였다. 5월 15일 미군은 슈페어에게 항공전에 관련된 정보를 제공할 것을 요구했고, 슈페어는 수락하여 많은 사안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공군장관 밀히가 슈페어를 구명해준 걸 보면
공군 프로젝트를 특별히 우선시 하여 준 걸로 보입니다
공군은 제트기 로켓전투기 대공미사일로 전략폭격에 대항했는데 이미 너무 늦어서 전쟁의 향방을 바꾸지 못합니다
탱크 같은 지상 무기의 부족으로
진격하는 연합국 지상부대를 저지할 방법이 없어서
아까운 제트기들을 지상에서 자폭시키고 달아나는 안습한 최후를 경험합니다
제트기의 연료가 부족해서
기름을 아끼려고 우마차로 기체를 견인합니다
활주로가 폭격으로 파괴되자
오토반 고속도로에서 임시로 비상발진을 시도합니다
나치 원반 비행체가 존재하여도 수천대의 폭격기와
수만대의 전투기를 상대할 방법은 핵무기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완성된 핵폭탄을 1발 실험해서 확인하고
6발 대형 아메리카 공격 융커스 폭격기 2대로 워싱턴과 뉴욕에 핵폭격을 하려고 사전에 뉴욕까지 왕복 비행을 시행합니다
귀환 중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린랜드나 아이슬랜드에 착륙해서 유보트로 탈출하려고 비밀 기지도 준비해 둡니다
그러나 미국에 핵2발로 100만명의 희생자를 발생시키면
미국과 영국이 소이탄 폭격으로 독일
전 도시를 초토화시키고 1천만 주민을 몰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치는 핵공격을 포기하고 미국에 원자탄 완성품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소련의 보복을 막아달라는 구걸 협상을 시도합니다
나치는 소련에서 수천만의 무고한 주민을 학살했기 때문에
당시 소련군은 독일 민간인을 무차별 강간하는 식으로 복수합니다
영국도 V-1 V-2로켓 공격으로 5천명의 민간인 희생되어서
무차별 도시폭격으로. 수십만의 민간인이 화재로 사망합니다
드레스덴 1개 도시를 본보기로 태워버려서
나치는 멸망에 대한 극도의 공포를 느끼게 되어 살아 남고자
모든 극비 정보를 가지고 구걸협상을 여러 방향에서 시도합니다
미리 미리 준비한 영리한 나치들은 유태인 미술품을 바티칸에 제공하고 위조한 달러를 이용해서 캐톨릭 신부로 위장해서 아르헨티나 칠레로 탈출합니다
심지어 시리아로 도망간 나치도 있습니다
살아남은 나치의 숙련된 군인들은 전후에 용병으로
프랑스 외인부대에 팔려가서 베트남에서 전쟁을 대신 합니다
스콜체니 같은 나치 코만도 지휘관도 이집트에서 나치 로켓 과학자를 데리고 무기 장사를 합니다
이스라엘 모사드가 돈을 주자 기밀도 팔아먹는 장사꾼이 됩니다
결국 나치 UFO 하우네부는
성공했어도 속도만 마하 2~5일 뿐이라서
전략무기로의 유용성은 떨어집니다
이런 무기로 지상의 도시와 무기 시스템을 먼저 파괴할 경우를 대비해서
핵잠수함은 북극의 얼음 밑에서 대기 중입니다
그리고 핵탄두 미사일로 보복하면 지구 절반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속도가 빠른 건 정찰기 용도로만 사용 중입니다
MD미사일 방어망은 미리 수십메가톤의 수소 폭탄을 성층권에서 폭발시켜서 EMP공격을 시도하면 거의가 오작동합니다
뒤어서 도착하는 수천발의 미사일에서
수만발의 핵탄두가 도달하면
지구는 2만년 이상 방사능 오염으로 생명체가 사멸합니다
UFO로 최소 4광년은 날라가야
지구형 행성에
도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UFO는 정찰용으로만 사용가능합니다
아마 대부분 3대미만으로 제작해서 한대는 스페어로 비축하고 1대는 실전 정찰용 1대는 연습 훈련용입니다
전부 무인 조종이며 위성 통제로 대부분 자동조종으로 작동합니다
인간이 원격조종하게 나두면 팔아먹을 위험성이 큽니다
그리고 마하 6이상이면 1시간 내에 지구 어디도 도착하므로
속도가 너무커서 컴퓨터 통제식 자동 조종만이 안전합니다
어차피 지상의 사진 정찰은 이미 정찰 위성이 더 정확합니다
굳이 UFO로 근처에 접근할 이유도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대량생산이 불필요합니다
F-22도 너무 성능이 좋아서
제작단가와 유지비가 비싸서 대량생산이
거부되었습니다
미군 조종사가 F-22를 몰고 중국이나 러시아로 망명하면
미국은 스텔스 기술의 유출로 타격이 커집니다
중국 러시아는 보스니아에서 F-117을 격추한 기체를 확보해서
많은 정보를 입수한 상태입니다
이런 실수를 바탕으로 UFO수준의 첨단 정찰기는
특수한 목적에만 동원하려고 숨겨두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존재해도 아무때나 꺼내서 가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숨겨두고 연구만 할 뿐입니다
님글은 다좋은데.....읽기가 너무~~~~~~~~~~길어요~ㅎㅎ 좀 간략하게 그리고 적절한 사진이 추가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