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 이고장 은골에 가난한 선비 어씨와 그의 처 장씨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아내는 온갖 고생을 다하며 남편 어공을 도와 가정을 유지하던 어느날, 어공이 뜻밖에 어디서 무슨 책을 읽고,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아내보고 하는 말이, "나는 지금부터 산중에 들어가 신선의 도학을 연구하고 올테니 당신은 내가 다녀올 때까지 혼자 고생이 되어도 참고 사시오"라며 무심히 집을 나갔다.
금강산에 들어가 10년을 하루같이 공부하여 신선의 도가 통달하자, 공부를 다 마치고 같이 공부하던 학우들과 작별주 한 잔씩을 하고 학을 타고 고향에 돌아와 보니, 자기가 살던 곳에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어공이 자기 처의 행적을 물으니, 그때도 전설처럼 백여년 전에 어씨, 장씨 부부가 살다가 남편 어씨가 신선의 도학을 떠나 후, 부인 장씨는 남편의 도학성공을 위해 지금의 장선재에 올라가 동, 서, 남, 북을 향해 매일같이 기도하니, 그때는 망선재라고 불렀었는데 그 부인이 망가무당의 부정한 언동에 못이겨 망선재에서 자살하니, 그 몸이 굳어 바위로 변했기에 지금은 장선재라 한다는 것이다. 그때 방적 두목이 아름답게 가적으로 변하여 장부인을 유도하려 다니던 말발굽 자리가 지금도 남아 있고 부인이 자살후 가적은 벼락을 맞았기로 그곳을 일러 가적골 벼리수라 한다는 것이다.
저너머 동네 지금은 어은1구는 사람 살기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어신선이 이 말을 듣고 분기충천하여 지금의 삼개부락에 가서 세 번을 방적에게 경례하였으나 방적당이 듣지 아니하므로, 어공이 지금의 들말리 영거리에 영을 내려 작은 대작골에서 작전을 시작, 큰대작골에서 작전을 하고, 지금이 삼전리에 가 세 번째 대전으로 방적을 대파하니 천지가 파여서 물이 고이매, 어신선이 말하기를 지금은 방적당이 있어 방적골이지만, 방적이 죽었으니 방죽은골이라하고, 후세에 물이 잘 고여 농업에 유리하게 되면 방익골이 되리라 하였다. 어신선은 그래도 부인 장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지금의 어은곡동 서편 산마루에 올라가 북쪽 장선재를 향하여 부인의 명복을 빌다가, 그 자리에서 어공 역시 굳어져서 바위로 변하니, 이후부터 사람들이 이 바위를 일컬어 선바위라 하며, 지명도 어신선이 숨었다 하여, 고기 어자, 숨을 은자를 써서 어은이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이상한 것은 그때 어공이 타고온 학이 앉은 자리에서 현재까지 천연수로 샘물이 많이 나와 이고장 사람들은 물 걱정이 전혀 없고, 샘이름도 지금까지 학샘이라고 부르는데, 인근 동네에서 샘을 파고 물맛이 안좋을 때 학샘 물을 한 그릇 떠다 놓고 정성을 드리면 그 물맛도 좋아진다고 한다.
유성문화원-유성의 역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