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민사당 당원, 관계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늘 민사당에서 장기표선생을 영입하고 이어 전당대회를 열어 당명도 한국사회민주당으로 고치고 당대표를 장기표선생으로 추대한다는 뉴스를 접하고 반갑고 고마운 마음을 주체할수가 없어서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무조건 민사당 사이트를 찾아서 이 글을 씁니다. 그러니 제 글이 두서없이 쓰여지는 것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1974년경부터 1991년경까지 전태일 열사의 정신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청계피복노동조합에서 일선 조합원부터 시작해서 대의원, 운영위원, 부서부장, 사무장, 위원장을 하면서 노조활동을 나름대로 열심히 해 왔던 사람입니다.
아시다시피 장기표선생은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동지가 이땅의 노동자의 권익쟁취와 인간다운 삶을 실현키 위해 분신으로 항거하여 마침내는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산화해 갔을때 가장 먼저 전태일동지의 영안실을 찾아간 대학생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장기표선생이 전태일 영안실에 찾아가서 전태일의 죽음을 학생운동등을 사회문제화 시키고 노동운동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그 이후 장기표선생이 어떻게 노동운동을 꾸준히 전개 해 왔는가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장기표선생이 지속적으로 노동운동을 전개온 것을 다 말씀드릴수는 없고 다만 저와 관련된것을 간단하게나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장기표선생을 맨 처음 만난 것은 1975년경입니다. 당시 장기표선생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중이었습니다. 장기표선생은 이미 민청학련으로 수배중임에도 불구하고 청계천 제품공장에 시다, 미싱사 보조로 취직해서 노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노동현장에 뛰어들어 노동자의 아품을 함께하고 노동현실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청계천 봉제공장 노동자 장기표선생은 서울대법대생이라는 지식인의 허울을 벗고 어떻게 하면 이땅의 노동자들이 보다 나은 조건에서 인간답게 해방된 삶을 살수있을까를 고민하고 스스로 전태일이 되었습니다. 이때 장기표선생이 얼마나 노동자를 사랑하고 노동문제를 고민했는가를 엿볼수있는 것은 그가 쓴 "인간시장"(월간대화 민종숙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됨)이라는 체험기를 보면 알수가 있습니다.
장기표선생은 이소선어머니(전태일동지의 어머니)를 비롯 청계노조 조합원을 통해서 청계피복노동조합의 근로조건개선투쟁, 노동자 교육, 노동조합 운영등을 지원하였습니다.
장기표선생이 노동자의 가장 구체적인 근로조건 개선투쟁에도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고심하고 지도지원했는가는 1976년경 청계피복노조에서 시다임금 직불제 투쟁이 있었는데 그 투쟁의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앞장선 것입니다. 당시 그가 쓴 "시다의 권리"(씨알의 소리에 발표됨)를 보면 짐작이 갑니다.
또한 장기표선생은 70년대 단위사업장 투쟁에 머무는 투쟁을 단위사업장을 뛰어넘는 연대투쟁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전투적인 노동조합간의 투쟁을 통한 연대를 강조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신독재하에서 노동운동이 단순한 경제투쟁에 머물지 않고 민주화를 위한 정치투쟁에 앞장서게 끊임없이 노력해왔습니다. 이소선 어머니께서 70, 80년대 군부독재하에서 가장 전투적인 재야 투사로 자리잡게된 것도 장기표선생과 무관한 일이 아닙니다.
이처럼 장기표선생은 70년대 노동운동이 기업별 경제투쟁에 멈추지 않고 노동자의 광범위한 연대를 통해 결국 노동자가 이 사회의 중심이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당시 노동자와 함께 투쟁해왔습니다.
장기표선생은 1976년 3월에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결국 체포되었습니다. 체포 당시에도 청계천, 성수동 등지의 노동자와 만나는 자리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긴급조치 9호위반은 물론 노동자의 임금인상을 배후조정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어 박정희 사망 이후에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장기표선생은 또다시 1980년 전두환 군부독재의 등장으로 수배 등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그는 1984년 청계피복노조가 전두환정권의 강제해산에 정면으로 맞서 투쟁하고 노조를 복구하는데 방향을 제시하고 투쟁을 이끄는데 기여해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재야운동의 연합체인 민통련을 조직하여 노동운동을 조직적으로 정치적으로 지도 지원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장기표선생은 학생운동, 재야운동을 통한 노동운동으로는 노동자, 서민복지사회를 이루는대는 한계가 있음을 알고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통해서만이 우리 사회가 서민복지사회로 갈수있다고 판단 민중당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러나 민중당은 민중의 역량부족으로 실패하였습니다.
민중당 실패 이후에도 장기표선생은 지금까지 변함없이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독자정당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실험해왔습니다.
장기표선생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장기표선생이 이당 저당을 왔다갔다 하는 철새라고 비난하지만 그것은 전혀 잘못된 비난입니다. 장기표선생이야말로 노동자 서민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독자정당을 지금껏 포기하지 않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실천해오고있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있었고, 당명도 여러차례 바뀌었지만 그가 주장하는 정책이나 방향은 한번도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장기표야말로 가장 지조있는 정치인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흔히들 장기표선생이 김윤환등과 민국당을 했던 것을 두고 마치 무슨 변절이라도 한것처럼 비난하지만 그것은 본질을 왜곡하는 비난에 불과합니다. 물론 김윤환과 같은 5공세력과 함께한 자체는 바난 받을수도 있지만 민국당의 정책이나 강령은 장기표선생의 뜻이 관철된 정당입니다.
장기표선생이 잠깐 다른 갈로 간것은 지난해 8.8재보선 선거때 민주당에 입당한것 뿐입니다. 그것도 민주당이 재편되면 자신의 정책을 관철시킬수있는 정당을 건설할수있다는 계산에서 잠시 민주당에 몸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장기표선생의 정치철학이나 정책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전태일을 비롯 이땅의 노동자의 올바른 삶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사랑의 정치가 그렇고, 신문명정책이 그렇고, 사회민주주의가 그렇습니다. 그는 교과서적인 이론에서 자신의 정치철학이나 정책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고 투쟁하고 함께했던 노동자들로부터 그의 사상이 정립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노동자와 서민대중의 복지를 확보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도 사회민주주의의 채택은 불가피하거니와, 특히 산업의 정보화로 대량실업과 빈부양극화가 일상화하기 쉬운 정보화시대를 맞아 사회보장제도의 확립은 절대적으로 요청된다는 점에서 한국사회민주당이 사회민주주의를 채택키로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특히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자들이 기업의 소유와 경영에 참여할 수 있게 하여 노동자의 자주성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노동문제를 노사정의 합의와 협조속에서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동자를 위한 이념인 동시에 국민모두를 위한 이념이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이땅에도 사회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정당이 나와야 하고 그 정당이 성공해야 합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장기표선생이 이끌고 나간다면 우리사회의 사회민주주의는 반드시 실현될 것입니다.
사회민주당의 대표가 장기표선생이라면 사회민주당의 역사성이나 정당성 그리고 정치력이 확보됩니다. 이렇게 현명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신 민사당 여러분의 선택에 존경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