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즈 인 대창 4탄
춤바람 난 대창학교와 이구지 선생
1980년 4월로 추정되는 어느 점심시간 운동장. 대창학교 어린이들은 숨쉬기 운동을 끝으로 국민체조를 마쳤다. 모두
가 벤또 까묵으러 들어가려는 순간, 통통한 여선생(3학년 선생이었을 거야) 하나가 카세트를 들고 단상으로 올라갔다. 양 옆에는 자기 반 수제자 두 명을 앞세우고. 악몽의 서막이었다.
이 여선생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은 리듬체조라는 거였다. 교정을 울려 퍼지는 팝송에 맞춰 궁디를 삐딱삐딱 흔들며 체조인지 댄스인지를 따라해야했다. 한가지 한가지 동작을 배워가다 마침내 노래 한곡에 맞춰 전체 동작을 완성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대부분의 애들 이 리듬체조 시간을 죽기만큼 싫어했는데, 제일 큰 이유는 ‘점심시간이 짧아진다’는 거였다. 국민체조에 뺏기는 시간도 아까운데, 리듬체조 이 지랄염병을 하고나면 점심시간은 반 토막으로 줄어들었고 그만큼 남자는 축구, 여자는 고무줄 뛰기 할 시간이 사라지는 거였다. 봄에 시작해서 운동회 준비로 바빠지는 가을까지 리듬체조는 계속됐고, 해를 넘겨 5학년 때도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오듯 뚱땡이 여선생이 단상에 올라갔었던 것 같다. 한마디로 대창학교의 춤바람이었던 거지.
자, 그럼 여기서 이 춤바람과 제목에서 언급한 이구지 선생은 무슨 관계일까? 아는 놈들은 다 알지만 그 이야기를 하겠다.
이구지 선생은 5학년1반 우리 담임선생이었다. 나는 내가 만났던 선생들 중에 단연코 최고의 선생이라고 평가한다. 아마 5학년 1반 출신 친구들은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요새 말로 참교육을 실천했던 선생이었다, 라고 하면 오버일지 모르겠지만 1981년 5학년 1반 1년은 뭔가 굉장히 신바람 났었다. 교과 수업 외에 신기하고 재밌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주셨고, 무엇보다 체육시간을 아낌없이 보장해주셨다. 본인 자신도 운동을 좋아하셨고.
어느 날 방과 후, 무슨 일에선지 나는 우리 반 교실로 들어갔다. 교실엔 이구지 선생과 3반 담임이던 윤 머시기(3반 아들아, 너그 선생 이름이 뭐였노?) 선생 둘이서 은밀하게 무슨 대화를 하고 있다 내가 들어가자 흠..흠...하며 말을 중단했다.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던 중이었는지 금방 알게 됐다.
“재학아, 우리 학교 여선생님들 중에 누가 젤 예쁘노?” (이구지 선생)
“그거야, 윤정애 샘이 젤 예쁘지예.” (잘생기고 착하고 똑똑하던 나)
“윤정애 선생은 안돼. 나랑 성이 같잖아. 다른 선생 대봐라” (3반 윤머시기 선생)
ㅋㅋ. 총각 선생 둘이 모여서 같은 학교 미혼 여선생들 미모를 평가하며 연애질할 작당을 하고 있었던 거다. 내가 연애 상대로 추천해준 윤정애 선생은 나의 4학년 2반 담임선생이셨고, 실제 참했었다. 성격은 와일드했지만.
그때는 교실을 나오며 “야, 선생들도 저런 얘기를 하는 구나” 하며 속으로 좀 웃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그때 두 총각 선생들, 기껏 해봤자 스물대여섯, 밤마다 벽을 긁거나 바늘로 허벅지를 찔러댈 피끓는 청춘들이었던 거다. 물론 우리는 남녀반을 삼팔선으로 갈라놓고는 저거들끼리만 연애할 생각을 한 건 좀 괘씸하지만. 이구지 선생은 딱 1년만 대창학교에 있다 이듬해 우리들의 눈물을 밟으며 전근을 가셨다.
시간이 쭉쭉 흘러...1984년 우리가 중학교 2학년 때 대창학교에서 59기 첫 동창회를 하게 됐다. 그때 이구지 선생을 비롯 몇 분 은사를 모셨는데, 이구지 선생이 근황을 얘기하며 쇼킹한 사실을 고백했다. 결혼을 하셨다는데 아내가 바로 다름 아닌, 우리의 원성을 한 몸에 사던 바로 그 리듬체조 뚱땡이 여선생이었던 거다. 그때 우리에겐 리듬체조를 시켜놓고, 자기는 흑심어린 시선으로 그 선생을 바라보고 있었다니... 그날 이구지 선생이 전한 또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중학교 선생으로 변신했었다는 거다. 남해의 물건중학교(이름 웃기지? 남해 가서 실제 이 학교 봤다. 동네 이름이 물건리.)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세월 참 빠르다. 그때 철없던 우리도 어느 새 그 나이를 넘긴 애들을 둔 학부모가 됐고, 몰래데이트를 즐겼던 이구지 선생은 근엄한 교장이 됐다. 지금은 진영중학교 있다는 얘기를 세성이한테 듣고 검색했더니 사진 몇 장 뜨더라. 약간 후덕해졌지만 여전히 턱선은 살아있더라. 멋지게 늙었다는 느낌. 시간되면 이구지선생 함 찾아 뵙고 소주 한 잔 나누고 싶다.
*사진은 1981년 5학년1반 봄소풍 단체촬영. 장소는 양지산이었을 거야.
첫댓글 이구지선생이다 이사진이 있다니 옛날생각나네 장소는 우리동네산이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