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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태흥리 바닷가...
太興里
마을약사
태흥마을은 지형이 비교적 광활하고 기온이 온화하며 해안지대를 넓게 끼고 있어서 옛날부터 '폴개'라 불렸습니다.
'묵은 가름'이란 곳에 인가가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고 보면 이곳 태흥리에는 고려말경에서부터 부락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해변에서 멀리 떨어진 '묵은 가름'보다 해안을 가까이 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사람들은 포구가 많고 소금밭이 가까우며 해산물이 풍부한 해변으로 이주하여 소섯개, 봉안이개, 산 것개, 앞빌레 해안을 중심으로 자연부락이 생겨났으며 펄이 있는 포구 주변에 산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폴개'라 칭했습니다.
姓氏로는 경주김씨, 청주한씨, 진주강씨, 동래정씨, 제주양씨 등이 오래 전부터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1414년 이조 태종 2년 탐라가 제주로 불려지고 정의군 서중면이라 하여 면소재지를 의귀리에 두었습니다. 그 후 리명을 벌포리(伐浦里)라고 했고, 그후 보한리로도 개칭하였습니다.
1902년 임인년에는 이기원, 김계형이 태흥리로 개명하였고 1925년 태흥 1,2,3구로 분리시켰다가 1952년 태흥리로 합리(合里)시켜 생활하였으나 마을이 커지고 생활권이 달라짐에 따라 행정구역도 1955년 태흥 1,2,3리로 분리되었습니다. 1960년 8월 1일 또다시 태흥 1,2,3리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제주올레 4코스가 이 마을을 지나갑니다.
지명유래
개맛물(개맡물)
- 위 치 : 남원읍 태흥 3리 62-16번지선(태흥3리 포구)
- 유래 및 현황 : 포구에서 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칭함. 당시 덕돌포(포구 주변) 주민들이 음료수로 사용 현재 보존되어 있다. <개맡 >은 포구, 혹은 포구의 어귀를 일컫는
제주어임.
도네기통물
- 위 치 : 남원읍 태흥 3리(태흥 3리와 신흥 1리 경계 지점인 세천교 - 입석천)
- 유래 및 현황 : 밀물이 일 때 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불리워 졌음. 당시 삼석동 주민들의 음료수로 사용. 이곳을 지나가는 선비도 이 물을 마시고 과거를 보러갈 때 한층 더 명석해졌다고 함.
장 밭
- 위 치 : 태흥 3리 165의 2번지
- 유래와 현황 : 본디 「의귀리」에 살던 정의군 참사 김희은이 서기 1915년에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그의 택호를 「장밭」이라 하니 이에 연유한 이름. 김희은은 당시 중국에 유학했으며 돌아올 때 계수나무 한그루를 품고와 그의 집뜰에 심어 열매를 내어 전국에 유포하였다고 전해진다. 그가 심었다고 하는 계수나무는 20여년 전에 고사하였다
연대(燃臺) / 연듸
- 위 치 : 태흥 3리 245 - 248번지 일대
- 유래와 현황 : 「벌포연대」자리. 조선조 때 왜적의 침입을 막을 목적으로 낮에는 연기를 피워 신호하여 연락을 도모하던 방어시설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 이 연대는 동으로 「소마로연대」「금로포연대」와 서로 응소하였으며 별장 6명과 직군 12명이 배치되어 근무했다. 이 연대는 1960년대에 없어졌다고 하는데 당시 일주도로를 포장하면서 돌을 사용해버린 때문이라고 했다. 「연듸」는 연대의 변형이다. 문헌에 기록된 한자어는 <벌포(伐浦)연대 >가 맞다는 것이 현지 주민의 주장이다.
웃거문물 / 웃검은물
- 위 치 : 태흥 2리 1351번지 일대
- 유래와 현황 : 「알거문물」에 견주어 위쪽에 있는 큰 봉천수로 수심이 깊어 오래 고이는데 물의 색깔이 검게 보일 정도로 짙푸르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목욕 등 생활용수와 마소의 급수용으로 이용하였다.
진새미골
- 위 치 : 태흥 2리 296의 4번지
- 유래와 현황 : 이 지역은 긴 골짜기이며 또한 맑은 샘이 솟아나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솟아나는 샘물을 저장하여 식수로 사용하려고 우물을 파기도 했다.
폴개
- 위 치 : 현 태흥 1리 부락의 옛이름.
- 유래 및 현황 : 폴개는 현 태흥 1리의 옛 지명으로 약 300년전 폴개 또는 벌포리로 불리다가 약 150년 전 동보리, 서보리로 불리우고 다시 서기 1914년도 태흥리로 개칭됨. 폴개는 현 소금악(속칭)에 펄이 있는 포구주변에 모여 산다고 하여 폴개라 불림. 벌포(筏浦)리의 한자표기로 보면 떼배가 많이 모여있는 포구로 보는 해설도 있음.
벽두소서/소서물
태흥 1리 서중천 중류에 위치해 있으며 길이 300m, 폭 40m, 수심 7m의 큰 하천 호수로서 장어와 민물고기가 서식하고 있다. 10년이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고 하나 나라에 큰 재난이 있을 때는 물이 마른다고 하여 옛날 이 물을 중심으로 촌락을 이루었으며 주위에 울창한 숲과 암벽이 장관을 이룬다. 현 태흥 1리사무소에서 북쪽으로 150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망대동산 - 모르테기
양쪽으로 긴 마루로 되있어 우마차는 물론 길손들이 쉬어 가던 곳. 동산의 높은 망대에 오르면 태흥리 해안은 물론 서쪽으로는 섭섬, 문섬, 범섬까지 보이며 동쪽으로는 토산 앞바다까지 한눈에 볼수 있어 해안을 감시하는 곳으로서 이용되었으며 주위에 울창한 숲이 있어 조상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서 현 태흥 1리사무소에서 동쪽으로 300m 지점의 일주도로변에 위치해 있다.
암천묘소 - 고냉이소
태흥 1리 서중천 하류에 위치해 담수와 해수가 만나는 지점으로서 실뱀장어의 서식처이다. 평평한 잔디밭과 호수의 양쪽 벽의 깊은 절벽으로 되어있으며 가정이나 마을에 흉사가 있을 때에 액땜을 한다고 하여 늙은 고양이를 던진다. 현 태흥 1리사무소에서 동남쪽으로 100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장수무덤 이야기
옛날 소수 옆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장수는 태어날 때부터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뼈대가 크고 이가 이미 나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애기구덕에 아기를 눕혀 놓고 물을 길러 갔다가 보니 애기구덕에 아기가 없었다. 이때 어머니는 겁이 나서 방안을 살펴보니 기어 다니지도 못하던 애기가 벽장 위에 올라서 놀고 있지 아니한가! 그 어머니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애기 아버지나, 다른 사람이 올려 놓은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얼마 후에는 또 애기구덕에 애기를 눕혀놓고 뜰에 김을 메고 애기구덕을 보았더니 애기가 없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눈에 불을 켜고 문을 급히열고 나오려 하는데 얼핏 보니 천장 옆에 붙어 있었다. 그 어머니가 살짝 애기를 안고 와서 자세하게 살펴보니 겨드랑이에 날개가 붙어 있지 않은가! 옛날에는 장수가 태어나면 죽여버릴 때였다. 그 어머니는 소문이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하여 헝겁으로 겨드랑이를 싸매고 키웠다고 한다. 장수가 6-7살 되었을 때에는 키가 8척 이상 되었고 힘이 장사라 소서물을 한 쪽발로 뛰어 넘고, 아무리 큰 나무라도 한 손으로 쑥, 뽑아 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큰 장수를 관가에서는 군사를 동원하여 잡으려하자 그 장수는 먼저 알아채고 도망가는데 모세물에서 옥기기름까지 뛰어 옥기오름 가운데 주저 앉으니 오름이 팍 파지면서 넋이 나가고 다시 연대동산으로 한 번에 탁 뛰니 연대동산이 무너졌으며 그 후 진수에 가서 숨었다고 한다. 그렇게 장수가 난동을 부리니 관가에서는 잡을 도리가 없어서 그 어머니와 아버지한테 가서 아들(장수)을 안 잡아주면 삼족을 멸하겠다고 하니 그 아버지는 독한 술을 아들(장수)에게 먹여 잠들게 한 뒤, 군사들에게 고하자 군사들은 먼저 겨드랑이에 난 날개를 자르고 죽였다고 하는데 관가에서는 죽여도 마음을 놓지 못하여 관을 돌로 다듬어 만들고 봉분은 큰 물과 자갈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오름이 넋이 나갔다고 하여 넋이오름이라 하였고 연대동산이 무너졌다하여 '물러진 연디'라 하였으며 장수가 마지막으로 숨었다하여 진은수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편안한 휴식 주는 태흥2리..벌포리해안
[지켜야할 제주환경 100선]
올레4코스에 포함된 아름다운 해안
갯벌 없애고 공유수면 매립 계획,개발 따른 홍역 치를 듯
2009년 09월 01일 <환경일보 고현준 기자 >
개발이냐 보전이냐를 두고 고민하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남원읍 태흥2리 벌포리 해안은 올레4코스에 포함돼 있는 태흥2리에 있다.
옛날에는 갯벌이 있어 염전으로 이용되던 지역이지만 지금은 일주도로가 만들어지면서 염전의 허리가 잘렸고 남원하수종말처리장이 들어서면서 두동강이 나버린 갯벌이 3개로 나뉘어져 소재하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드물게 만나는 갯벌에는 불로초라 불리우는 함초가 다소곳이 자라고 있다. 이제 이곳으로 해안도로가 연결될 차비를 하고 있다.
오문식 태흥2리장은 “행정에서 마을살리기 프로그램을 추진하면서 땅이 있어야 지원이 된다고 해 두동강 난 갯벌을 메워 새로운 땅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환경보호도 좋지만 마을도 살아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이다. “행정에서도 해안마을의 경우 마을 주민들이 관련 사업을 추진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데 땅이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공유수면 매립을 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땅을 만들 수 있느냐며 행정의 무관심”을 지적하기도 했다.
앞으로 태흥2리 벌포리해안은 소중한 제주도의 천연자원인 갯벌을 메꾸고 새로운 땅을 만드는 대역사(?)가 추진될 가능성이 많아지고 있다. 올레꾼들이 지나다 잠시 쉬어가도 좋을 곳이다. 바닷가에 앉으면 저 멀리 서귀포 앞바다 섭섬과 문섬이 보여서 더욱 친근해 지는 곳이다.
목적지를 향해 떠나는 나그네에게는 평안을 주는 쉼터임에 틀립없다. 벌포리해안에는 특별히 용천수가 바닷속에 숨어 있는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식수로 사용하지는 않지만 썰물이 되면 바닷속으로 솟아나는 용천수가 흘러나오는 곳이 있어 동네 사람들의 여름철 좋은 휴식처가 되고 있다고 한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 태흥2리는 맛좋기로 유명한 감귤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최근에는 감귤 값이 좋아져 부자동네로 변한 이곳은 제주도 특산물인 옥돔의 주산지이기도 하다. 이곳 옥돔은 타 지역에 비해 가장 높은 가격을 받는 제품으로 알려져 있다. 질이 좋기 때문이다.
오 이장은 “여러가지 마을을 위한 계획은 많지만 마을을 널리 알리고 주민 소득을 올리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옥돔 축제’도 기획중”이라고 소개했다.
태흥2리 벌포리해안은 앙증맞은 예쁜 자태를 자랑한다. 부담없이 보면서 즐기면 되는 곳이다. 올레 3코스와 5코스가 유명한 해안과 절경이 있고 볼 게 많은 코스로 유명하지만 이곳 4코스를 지나는 벌포리해안은 있는 듯 없는 듯 우리에게 평화로움을 선사한다.
완만한 용암들과 곳곳에서 피어난 작은 꽃들과 작은 열매들이 있다. 제주 해안의 여러 가지 다양한 아름다움을 편안하게 보여주는 곳이다. 갯벌이 파괴되지 않고도, 해안경관이 무너지지 않아도 지켜지면 우리에게 편안한 휴식을 줄 수 있는 숨어있는 해안이다. 유명하지는 않아도 거대한 볼거리는 아니라 하더라도 벌포리해안은 아름답게 존재한다.
소품이 주는 아름다움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제주도가 지켜야 할 제주환경 100선’에서 5번째로 뽑은 아름다운 해안이다.
태흥2리 마을 홈페이지에 소개된 마을 유래는 다음과 같다. 마을약사에 따르면 태흥마을은 지형이 비교적 광활하고 기온이 온화하며 해안지대를 넓게 끼고있어서 옛부터 ‘폴개’라 불렀다. ‘묵은 가름’이란 곳에 인가가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고 보면 이곳 태흥리에는 고려말경에서부터 부락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해안변에서 멀리 떨어진 ‘묵은 가름’보다 해안을 가까이 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사람들은 포구가 많고 소금밭이 가까우며 해산물이 풍부한 해안변으로 이주하여 소섯개, 봉안이개, 산 것개,앞빌레 해안을 중심으로 자연부락이 생겨났으며 펄이 있는 포구 주변에 산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폴개’라 칭했다.
1414년 조선 태종 2년 탐라가 제주로 불리워지고 정의군 서중면이라 하여 면소재지를 의귀리에 두고 본리를 벌포리(伐浦里)라고 했고 그후 보한리로도 개칭했다. 1902년 임인년에는 이기원, 김계형이 태흥리로 개명하였고 1925년 태흥 1,2,3구로 분리시켰다가 1952년 태흥리로 합리(合里)시켜 생활하였으나 마을이 커지고 생활권이 달라짐에 따라 행정구역도 1955년 태흥 1,2,3리로 분리되었으나 1960년 8월 1일 또다시 태흥 1,2,3리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태흥2리는 1987년 이전에는 벌포리(伐浦里)로,1897년 경에는 보한리로 불리다가 1902년부터 태흥리로 됐다. 폴개, 벌포리, 태흥리로 유래와 현황은 태흥 2리의 이름으로 이 마을은 고려말 경에 이미 형성되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 년 전부터 ‘폴개’또는 ‘벌포리’등으로 부르다가 한때는 ‘보한리(保閑里)’라고 한적도 있으며 약 150여년 전에 ‘동보리’와 ‘서보리’로 나눴다가 서기 1902년에 ‘태흥리’라고 마을이름을 완전히 바꾸고 일제 강점기 시절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태흥리’를 ‘태흥 1구, 2구, 3구’로 분리했다.
1952년에 다시 통합, 마을이 너무 확장되어 한 마을로서는 벅차니 1955년 행정리 ‘태흥 1리’와 ‘태흥 2리’ ‘태흥 3리’로 분리했다. 1960년에는 다시 합리(合里)했다가 6개월만에 분리하여 오늘에 이른다.
구전에 의하면 ‘폴개’는 포구가 있는 바닷가라고 해 ‘포개’의 의미와 함께 ‘소금밭’에 갯펄이 질퍽하니 깔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벌포리’는 ‘테우’, 즉 떼배가 많은 포구가 있는 마을이란 의미에서 연유한 이름이라 한다.
첫댓글 순둥이님, 우리 마을의 유래를 소상이 알려주어 고맙습니다. 사진 위에서 둘째 세째는 바로 우리 집 앞 바닷가 풍경같아요.내용이 풍부하여 이 마을에서 낳고 자란 저도 잘 모르는 부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우리동네 태흥1리 모르태기는 '마루 턱'에서 유래된 말 같은데, 이곳을 넘어 남원중학교로 통학하던 타 동네 학생들이 동네 깡패들에게 시달림을 많이 받아 눈물의 고개이기도..다만 태흥리의 한자 표기는 太흥리가 아니라 泰흥리(모두 클 '태'로서 뜻은 동일 함)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태자는 정정했습니다~!ㅎㅎ 감사합니다.
넘의 동네 올리잰허난 혹 실수나 할까봐 조심스럽습니다만... 공부도 할 겸해서 하고 있습니다.
댓글에 여러 내용을 올려주시믄 보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