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 동기들은 '전철 4호선 길음역 2번 출구 앞에 모여서 개운산 정상에 오르고 인근에 있는 개운사도 찾아 본다'는 백운영 회장의 문자 연락을 받고 모였다.
개운산은 성북구 안암동과 종암동에 걸쳐 있는 높이 134m 밖에 되지 않는 나지막한 산이다. 그러나 이 산 아래는 고려대학교가 청년 교육을 펼치는 전당으로 자리 잡고 있다.
가까이에는 개운사(대한불교 조계종)라는 사찰도 있다.
개운사는 1396년, 태조의 왕사인 무학대사가 동대문 5리 밖, 안암산 기슭(현 고대 이공대 부근)에 절을 짓고 영도사 (永導寺)라 하였다고 전해지는 고찰이다.
우리는 개운산 정상에 오르고 개운사라는 고찰도 탐방한다는 희망찬 마음으로 길음역 2번 출구로 모였다. 그러나 동기들은 고작 5명만 모였다. 바쁘신 분, 몸이 불편하신 분들이 많았나 보다. 회장은 좀 섭섭했겠지만 어떤 분은 오붓한 분위기로 알찬 산행을 하자고 했다.우리는 계단을 오르고 수풀 사이 돌길을 걸어서 개운산 정상에 올라왔다.
개운산 정상에 있는 '마로니에 마당' 표지석 앞에 나란히 앉아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오늘 행사에 참석하신 동기들은 큰이형, 백형, 박여사, 강여사, 권혁 등 5명이다.
낮은 산이지만 층계길이 꽤 길게 이어져 있었다.큰이형과 백형은 앞장 서서 산을 올랐다.
백형은 원래 날쌘돌이로 재빠르게 산을 오르지만, 큰이형도 연세에 비해서 너무 잘 걸으셨다. 팔순 노인의 체력이 저렇게 강하실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뒤 떨어져 천천히 걸으면서 같이 가자고 큰 소리로 말했지만 들리지 않아서인지 계속 신나게 오르셨다. 혈기왕성하신 대단한 분들이셨다.
강여사와 박여사도 잘 따라 오셨다. 나는 중간에서 숨이 차서 헐떡이며 걸었다. 사진을 찍으려다 넘어질뻔 하기도 했다. 그래도 알차게 걷자고 하면서 뚜벅뚜벅 산길을 걸었다.
데크 길을 오르니 다시 돌길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강여사와 박여사가 재빠르게 정상을 향해서 계단길을 올라갔다. 저 아래서 큰이형과 백형이 먼 곳을 바라보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잠시 쉬면서 '길 이야기'를 하시나 보다.
큰이형은 길 찾는 도사였다. 그분은 방방곡곡의 명승 관광지를 거의 다 자세하게 알고 계시는 듯 했다. 이 곳 사정도 훤 하게 아시는 모양이었다. 손으로 이곳 저곳을 가르키는 걸 보니 저 아래서 지명을 알려 주고 있나보다. 마지막으로 소나무 숲길도 헤처 나오니 정상 광장으로 가는 평탄한 길이 나왔다.
개운산 정상길로 들어 서니 길 따라 일렬로 시 비석들이 서 있었다.
맨 먼저 청록파 시인 박목월 시인의 대표 작품 '청노루'가
돌비석에 새겨져서 우뚝 서 있었다.
우리는 다 같이 박목월님의 '청노루'를 은은하게 읽어 보았다.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 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산마루길에서 갑자기 명시 낭독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강여사, 박여사, 백형이 모두 시를 낭송했다. 나는 속으로만 읽어 봤다.
언제 보아도, 언제 읽어도 반갑고 멋 있는 김소월의 시, '진달래'가 새겨져 있는 시비 앞에 왔다. 민족 시인 김소월님은 진달래, 초혼 등의 주옥 같은 시를 남겼다.
그가 오산학교 다닐 때 같은 동네 연상의 여인을 사랑했는데, 조부가 다른 여성과 강제 결혼을 시켰다.그 후에도 그는 '몾잊어, 그리움' 등의 시를 쓰면서 그 여인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았다. 그 여인이 남편 구박으로 빨리 세상을 뜨자, 소월도 음독 자살로 세상을 떠났다. 33세의 짧은 인생을 슬프게 마친 소월을 생각하며 그의 시 금잔디를 읊어 보았다.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 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임 무덤 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 산천에도 금잔디
드디어 개운산 최정상인 높이 134m의 '마로니에 마당' 표지석까지 왔다.
마로니에 광장은 아이들 놀이터가 됐다. 아이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게임을 하고 있었
다. 맞은 편에는 자연 학습장도 있었다. 자연학습장에는 생태 연못도 있었다
개운산 정상은 평평한 광장 형태로 돼 있고 마로니에 마당이라 불린다. 운동시설도 있고
정자도 있었다. 길 건너 쪽에는 자연학습장도 있었다. 자연학습장에는 생태연못도 있다.
북쪽으로 내려가면 길음역, 동쪽으로 가면 종암동이 있다. 그래서 여기는 조망대 역할도 한다. 삼각산, 북한산 줄기가 보이고 아차산, 불암산 줄기도 보인다고 한다. 잘 보면 미아리 고개를 비롯한 길음동,안암동,종암동의 곳곳이 보이고, 주변의 여러 곳을 자세히 살펴 볼 수 있다고 한다.
여기도 우분투(UBUNTU) 사상을 지닌 말들이 쓰여 있네.
우분투는 아프리카 반투족의 말로써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는 뜻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 없이, 사람이 될 수 없다.' 그것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영웅, 넬슨 만델라의 기본 사상인 '우분투' 이다.
인생이모작 센터에서 '독서 논술지도사 자격연수'를 주도하고 있는 우형의 제안으로 그 곳에서는 강의가 시작될 때 마다 '우분투'라는 말로 인사를 나눈다. 여기서 똑 같은 내용을 보니 백형이 '우분투'라고 외쳤다. 나는 큰 이형에게 '우분투'의 뜻을 설명해 드리고 자격연수 내용도 아는데로 좀 알려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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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니에 마당에 있는 화목정이라는 정자에 들어가서 의자에 둘러 앉았다.
우리는 간식을 하면서 쉬어 가기로 했다. 큰서형이 못 오시니 커피가 준비되지 않았다.
연락이 너무 늦어서 대신에 가져 올 수도 없었다고 한다. 우리는 각자 가져 온 것을 내 놓았다. 군달걀, 오이, 개량 땅콩, 초코파이, 제리 등이 나왔다.
간식을 먹으면서 여러가지 생활 상식 이야기를 했다. 친구들 이야기도 들려 줬다.
백형은 우리 동기 중에서 부인과 사별하고 손자도 없이 외롭게 보내는 어느 친구 이야기를 했다. 강여서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딱하다. 외롭겠다." "여기라도 나오라고 하지요?"라고 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다리가 아파서 걸음을 잘 못 걷는다. 당분간 산행은 다닐 수 없단다.
슬픈지고, 그대여! 하루 속히 보신하여 훨훨 뛰고 걸을 수 있게 되어 우리와 함께 산을 오를 지어다. 우리는 모두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마루에니 마당 옆으로 걸어 오니 '헬기착륙장'도 있었다.
헬기 착륙장이라고 하얀색으로 'H'자를 써 놓았다. 헬기 착륙장 시설을 미리 갖추어 둔 건 처음 봤다는 분들도 있었다.
큰이형은 헬리콥터가 물건을 싣고 올 때도 이곳에서 착륙할 수 있도록 돼 있다고 설명했다. 큰 이형은 지리, 관광에 강하고,백형은 지도에 강하며, 최형은 민속과 고전에 강하다.
개운산 정상 광장 길을 내려 오는데, 야생화 꽃 밭이 있었다. 이 꽃밭에는 금낭화, 종지나물, 참나리 등을 기르는데 꽃피는 시기와 꽃의 색을 알려 주는 팻말이 꽂혀 있었다.
금낭화는 4~6월에 황금색 꽃이 피고, 종지나물은 4,5월에 흰색 꽃이 핀다고 적혀 있었다.
개운산 운동장으로 가는 길이다. 길이 지압길로 되어서 신발을 벗고 걸어야 하지만 그냥 걸어도 효과가 조금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압길로 걸으면 신발이 많이 상할 것 같다.
걷기운동 길이 잘 조성돼 있다. 개운산 공원에는 운동장도 있고 산림욕 길도 조성 돼 있다.
백형은 강여사와 박여사에게 어제 발표했던 풍란 재배하는 방법, 채소 작물을 재배하는 방법 등을 이야기 해 주고 있다. 두 분은 궁금증을 계속 질문해 나갔다. 백형은 무슨 질문이나 척척 대답해 준다. 노란 개나리 꽃이 만개한 숲길에서 그분들은 청년 학생들 처럼 무얼 그리 진지하게 탐구(inquiry)하실까?
성북구청에서는 주민들에게 일상적인 생활체육 방법을 알려 주고 있었다.
목, 허리, 어깨, 허벅지, 골반 스트레칭하는 법을 익혀서 아래와 같이 걷기와 생활체육을 하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1530! - 일주일에 5번 30분 이상 걷기운동을 하자.
7330! - 일주일에 3번 30분 생활 체육을 하자.
주민들 건강을 아주 잘 챙겨 주는 구청인 것 같다.
고려대학교 캠퍼스 안에 있는 한국학관 입구 문이 우리들이 걷는 길 옆에 있었다.
지붕 처마에는 '한국학의 세계화'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니 연구실만 있고 전시물은 안 보여서 그냥 나왔다.
우리는 한국학의 세계화를 위해서 많은 분들이 애쓰시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고려대 캠프스를 나와서 안암역 쪽으로 가다가 개원사 정문, 일주문이 있는 걸 발견했다.
일주문을 들어서니 꽤 넓은 주차장이 있었다.
오른쪽에는 19개의 비석이 줄지어 나란히 서 있었다. 이 비석들은 역대 스님과 보살들의 사적비와 공덕비이다. 일제 강점기 때, 개운사에 토지를 기증했던 시주들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것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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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반에 조성된 석조관음보살 입상이 무척 인자하고 따뜻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감로주가 담긴 정병을 들고 있는 모습이 더욱 우아하고 신비했다.
백형이 소나무 아래 있는 명자 꽃 나무 속에 서 있었다.
무얼 하는가 보았더니 소나무에 달린 새집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야자 껍데기 말린 것을 새집으로 만든 게 신기하다면서 만져 보고 있었다.
내 눈에는 소나무와 새집, 명자꽃 밭 속에 서 있는 백형의 모습이 더 신기하게 보였다.
비탈길로 올라가니 대웅전이 있었다.
어느 절이나 사찰의 중심인 大雄殿은 중앙에 불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불상을 모시는데, 석가모니 불상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에 봉안한다. 격을 높인 대웅보전은 석가모니불 좌우로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모시며, 각 여래상 좌우에 협시보살을 봉안하게 되어 있다. 우리는 대웅전 안으로 들어 가지는 못했고 웅장하게 쓰여진 대웅전(大雄殿)글씨만 쳐다 보다가 맞은 편 건물들을 살펴 본 후 개운사의 유래를 정리해 보기로 했다.
개운산 남쪽에 자리한 개운사는 1396년에 무학 대사가 창건하여 처음 이름은 영도사라고 했다. 1779년 정조의 후궁 홍비의 무덤인 명인원을 조성할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겨 졌다. 고종 때, 이름이 개운사로 변경됐다는 설이 있고 1912년 사찰령으로 봉은사 계열사로 됐다고 한다.
점심 시간이 되니 대학가 거리는 혼잡했다. 우리는 점심 식사를 하려고 건물 1층 음식점으로 들어 갔더니 대학생들이 가득 차서 자리도 없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생선구이 음식점이 있었다. 우리는 음식을 주문했다. 남자 동기들은 삼치구이를 시켰고 여성 동기들은 조기구이와 조림을 시켰다. 막걸리도 시켰다. 김치, 채나물, 고추무침, 비지, 카베츠 무침 등의 반찬과 미역국도 들어 왔다. 우리는 술잔에 술을 따루고 건배를 했다.
"우리들의 행복과 건강을 위하어 건배!" 우리는 다 같이 크게 외쳤다.
'생선구이'와 졸임 요리도 들어 왔다. 생선은 잘 익었고 맛도 좋았다. 백형은 '칸트가 말한 '악덕' 중에서 '타인의 불행을 좋아하는 것'이 탁구 칠 때는 '타인의 실수'가 나의 '행운'이 되더라고 했다. 독일에도 이런 속담이 있다고 했다.
누군가는 "그래도 악덕은 악덕이라고... " 했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도 마셨다.
우리는 식사를 마친 후, 6호선 안암 전철역으로 가서 모두 함께 전철을 탔다.
강여사가 먼저 내리고 나는 동대문 역사문화관역에서 내리면서 서로 인사하고 헤어졌다.